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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테오스
거대한 유리 기둥 앞에 선 제론은 손바닥으로 기둥을 쓰다듬었다. 그 안에 있는 기간트에 어서 타 보고 싶었다.
"선물이 기간트라니."
제론은 미칠 듯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애썼다. 설마 정말로 기간트를 받게 될 줄이야.
새까만 광택이 흐르는 균형 잡힌 몸체에, 곳곳에 희미하게 빛나는 특별한 문양이 눈에 띄었다. 온몸이 마법진으로 도배가 된 듯했다.
초고대 문명의 기간트이다. 대체 그 안에 얼마나 엄청난 것들로 채워져 있을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잠시 후, 유리 기둥이 빛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촤르륵!
무수한 빛 가루가 회오리치듯 휘돌더니 제론의 몸에 그대로 스며들었다.
"아!"
제론은 순간적으로 뇌리에 새겨지는 수많은 정보에 탄성을 흘렸다.
유리 기둥 자체가 그동안 제론에게 지식을 전해 주던 카드의 역할을 한 것이다.
제론의 뇌리에 기간트에 관한 모든 것이 새겨졌다.
"테오스……."
기간트의 이름이었다. 제론은 이제야 10층 수련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또한 허리에 매달린 벨트의 역할도 알아냈다.
"역시 대단해."
제론은 자신도 모르게 허리띠의 버클 부분을 쓰다듬었다. 그곳이 바로 기간트를 보관하는 아공간이었다.
고작 어린애 손바닥만 한 버클에 15미터나 되는 기간트가 들어갈 아공간이 있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그뿐 아니었다. 그 버클에는 아공간 외에도 수많은 마법적 기능이 내장되어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분실 방지 기능이었다.
만일 누군가 벨트를 훔쳐 간다 하더라도 이미 주인으로 등록이 된 제론이 원할 때면 언제든 텔레포트하여 허리로 되돌아온다.
또한 버클이 아닌 띠에도 마법이 촘촘히 새겨져 있었다. 띠가 가진 가장 중요하며 강력한 기능은 바로 에너지 공급이었다.
지속적으로 외부의 에너지를 모아 버클의 아공간 내부로 에너지를 공급한다. 그러면 아공간에 머무는 테오스가 그 에너지를 받아 저장하거나 쓰는 것이다.
테오스의 경우 자가 복구 기능이 있기에 에너지만 충분히 공급되면 망가진 부분을 고치거나 부서져 사라진 부분을 수복하는 것도 가능했다.
버클에 새겨진 아공간 마법은 다른 아공간 마법과 많이 달랐다. 테오스의 자가 복구 기능과 연계되어 있기에 아공간 자체에 테오스의 설계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버클이야말로 초고대 문명 마법의 총화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외에도 다양한 기능이 있었다. 의지만으로 발현이 가능한 마법적, 물리적 실드 같은 것들 말이다. 물론 그 마법에 들어가는 마나는 허리띠에서 지속적으로 흡수해 쌓아 둔 걸 이용한다.
그 모든 기능을 이제부터 제대로 쓸 수 있게 되었다. 그 역시 10층을 클리어한 보상이었다.
제론은 테오스의 늠름한 모습을 다시 한 번 쭉 훑었다. 입가에 절로 미소가 감돌았다. 당장 타 보고 싶었다.
"일단 참자."
시간이 너무 늦었다. 그리고 테오스는 특별한 기간트였다. 당분간은 아공간에 보관해서 에너지를 채워야만 했다.
제론의 의념이 버클에 스며들었다. 그와 동시에 테오스가 그대로 사라졌다. 버클의 아공간에 들어간 것이다.
다른 기간트가 아공간에서 나오고 들어가는 것과는 많이 달랐다. 아공간이 어떻게 열리는지도 확인이 불가능했다. 그냥 사라져 버린 것이다. 또한 나타날 때도 그렇게 나타날 것이다.
제론은 다시 한 번 버클을 쓰다듬으며 유적에서 나갔다.
기지로 돌아온 제론은 아침이 되기 전에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다. 고작 한두 시간밖에 못 자겠지만, 마나 호흡을 통해 피로를 깨끗이 풀 수 있으니 전혀 상관없었다.
제론은 이제 자면서도 자연스럽게 마나 호흡을 이어 갈 수 있는 경지였다.
정확히 2시간을 자고 일어난 제론은 라이더의 기본적인 일과에 따라 하루를 보냈다.
그러면서 전투가 더욱 가까웠다는 걸 느꼈다. 당장 느껴지는 투기의 흐름이 정말로 심상치 않았지만 걱정되지 않았다. 그저 평소보다 더 크고 격렬한 전투를 할 뿐이라 생각했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이번 전투에서 제론은 또 한 번 공을 세울 것이다. 그리고 끝까지 살아남을 것이다. 그것 하나만큼은 정말로 자신 있었다.
제론은 일단 어디 조용한 곳으로 가서 테오스에 타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근처는 곤란했다. 정말로 눈에 띄지 않을 만한 장소가 필요했다.
사실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장소는 중앙 유적 근방이었다. 그 근처는 모두 제론의 땅인 데다가 유적이 완전히 초토화되어 찾는 사람도 없었다.
그곳을 주시할 만한 건 슈린 공작가뿐이었는데, 그나마도 제론이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군부에 들어간 이후 관심을 끊어 버렸다.
제론은 오늘 그곳으로 가서 테오스를 몰아 볼까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접었다.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았다. 사방에 들끓는 투기를 보고 있자니, 지금 당장 전투가 벌어져도 이상할 것 같지 않았다.
사실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유적 11층 공략을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10층 선물이 기간트였으므로 11층 수련은 분명히 기간트를 이용한 것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제론은 당분간 기지를 떠나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일단 주변 정보를 다시 확인할 필요를 느꼈다.
정보를 확인하려면 아무도 없는 장소가 필요했다. 가장 자주 쓰는 곳은 숙소였고, 가끔 유적 안에서 확인하기도 했다.
어디로 갈까 잠깐 고민하던 제론은 유적으로 방향을 정했다. 그렇게 체른산을 향해 걸어가던 제론의 눈에 수많은 귀족과 호위 무사가 보였다.
이제 저들이 남아 있을 시간도 그리 오래 남지 않았다. 아마 3일이나 4일 후에는 돌아가야 할 것이다. 남은 시간이 길지 않았지만 누구도 붉은 학살자를 찾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만큼 붉은 학살자라는 건 탐스러운 먹이였다. 군부에서 오래 생활한 사람일수록 세상 물정에 어두운 면이 많았다. 잘만 요리하면 아주 싼값에 오랫동안 부려 먹을 수 있었다.
더구나 군부 출신은 의리에 목숨을 거는 경우가 많았다. 즉, 한 번 주군을 정하면 끝까지 충성한다는 뜻이다. 그런 귀중한 인재가 눈앞에 있는데 항상 인재에 목말라 있는 귀족이 포기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저들도 전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겠군.'
제론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최근 살펴본 적 전력은 그리 높지 않았다. 분명 평소보다 병력이 늘어나긴 했지만 귀족이 데려온 고급 기사가 무려 100명이 넘었다. 그들까지 모두 상대하려면 병력이 턱없이 모자랐다.
하지만 벨룸 왕국이 그걸 모를 리 없다. 그들도 상당한 첩보 활동을 벌인다. 레늄이나 벨룸이나 정보력이 엇비슷한 상황에서 이렇게 대대적인 움직임을 파악하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그런데도 고작 그 병력으로 전투를 벌이려 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분명히 숨겨진 뭔가가 있어!'
제론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일단 유적에 틀어박혀서 적 정보를 상세히 파악해야만 했다.
정보 수집 아티팩트의 수가 너무 모자랐다. 아니, 그걸 운용할 전문 인력이 필요했다. 제론 혼자서 모든 걸 다 하려니 제대로 된 정보를 모으기가 어려웠다.
"이봐! 거기 라이더!"
제론이 막 걸음을 빨리하려는 순간, 누군가가 큰 소리로 불렀다. 제론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했지만 제론은 반응하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을 정확히 부르지 않는 이상, 굳이 대꾸할 필요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부르는 귀족이나 호위 기사가 하는 말은 거의 비슷했다. 붉은 학살자에 대한 정보를 원하는 것이다. 그들은 라이더만 보면 무조건 불러 세워서 말을 걸었다.
절반 정도는 그들의 질문에 제법 성실하게 대답해 준다. 물론 함구령이 내려진 부분에 대해서는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붉은 학살자에 관한 정보를 유출하면 반역에 준하는 처벌을 받기 때문에 다들 조심했다.
군부 최고의 권력자는 당연히 총사령관이었다. 총사령관의 명령으로 이루어진 사안이었기에 누구도 거기에 반발하지 않았다.
수많은 귀족이 달콤한 대가를 내밀며 정보를 캐내려 애썼지만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들은 강압적인 방법도 서슴지 않고 동원했다. 군부와 관계가 깊은 가문이 많았기에 압력을 행사할 방법은 많았다.
하지만 붉은 학살자에 관한 정보는 그런 압력을 통해 해결할 수 없었다.
총사령관의 태도가 워낙 완고했기 때문이었다. 최근 레늄 왕국 측에서 전쟁에 쓰는 작전의 대부분은 붉은 학살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당연히 정보가 넘어가면 향후 전쟁이 상당히 힘겨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보호하는 게 당연했다.
붉은 학살자가 아니었다면, 이번 전쟁은 패색이 짙었을 거라는 게 총사령관의 판단이었다.
"거기 라이더! 내 말이 안 들리나!"
귀족으로 보이는 자의 거만한 외침이 울렸다. 그러자 그의 호위 기사 세 명이 우르르 달려가 제론의 앞을 막아섰다.
제론은 그들을 살짝 피해 빠져나갔다. 자리를 미처 잡기 직전에 틈새로 빠져나갔기에 셋 모두 전혀 반응하지 못했다.
사실 아무나 할 수 있는 움직임이 아니었다. 하지만 움직임 자체는 지극히 평범했고, 속도 역시 빠르지 않았기에 다들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만 앞을 막아섰던 세 호위 기사만 심각한 위화감을 느꼈을 뿐이었다.
"뭣들 하느냐! 어서 잡지 않고!"
귀족의 호통이 이어졌고, 세 호위 기사가 다시 몸을 날려 제론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제론은 이번에도 가볍게 그들 사이를 쑥 빠져나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호위 기사 중 두 명이 뒤돌아 손을 뻗어 제론의 손목을 잡았다.
제론은 왼팔을 슬쩍 위로 들어 한 명의 손은 피했고, 나머지 한 명의 손은 허용했다. 하지만 오른손을 살짝 비틀어 뽑아 아주 손쉽게 기사의 손을 빠져나갔다.
"이게 무슨 짓이오!"
제론은 결국 더 이상 가지 못하고 멈춰서 호위 기사를 노려봤다.
세 호위 기사는 제론의 눈길에 움찔 놀랐다. 순간적으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서릿발 같은 기세가 그들의 심령을 한 번 짓누른 것이다.
"슬라인 백작님께서 좀 뵙자고 하십니다."
호위 기사 중 하나가 나서서 말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본능적으로 제론을 위로 인정한 것이다.
당연했다. 제론은 지금 익스퍼트, 즉 현재의 소드 마스터와 같은 수준이었다. 그보다 훨씬 아래에 있는 기사가 제론의 기세를 받아넘길 수 있을 리 없었다.
"붉은 학살자에 관한 거라면 할 말이 없다고 전하시오."
제론은 그 말을 남기고 다시 돌아서려 했다. 하지만 어느새 다른 귀족의 호위 기사가 우르르 몰려와 제론을 둘러쌌다.
가장 앞에 나선 사람은 슬라인 백작이었다. 그는 군부에 강력한 끈이 있기에 항상 당당했다. 웬만한 군부의 장교도 슬라인 백작 앞에서는 설설 기었다.
그런 사람이 일개 라이더에게 눈 하나 깜짝할 리 없었다. 물론 군부에 아카데미 출신 라이더가 상당하지만, 귀한 집안의 자제는 이런 격전지로 올 확률이 현저히 낮았다.
또한 아무리 귀한 집 자제라 하더라도 슬라인 백작에게 잘못 보여 좋을 게 없기에 다들 대충 넘어갔다. 군 생활 내내 피곤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슬라인 백작은 최근 짜증이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군부와 관계된 일에 자신이 나서서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한 일이 단 하나도 없었다.
한데 이번 일은 그렇지 않았다. 계속 이렇게 시간만 흐르고 얻는 건 없으니 짜증이 날 대로 났다.
"고작 일개 라이더가 감히 백작의 말을 무시해? 그러고도 제대로 군부에서 버틸 수 있을 거라 여기느냐?"
슬라인 백작의 말에 제론이 피식 웃었다.
"못 버티면? 그럼 어떻게 될 것 같소?"
제론의 말투에 슬라인 백작의 눈썹이 크게 요동쳤다.
"말이 짧구나?"
"말은 당신이 더 짧은 것 같은데. 안 그렇소?"
제론이 너무나 당당하게 나오자 슬라인 백작은 당황했다. 하지만 그는 믿는 구석이 너무나 컸다.
"감히!"
슬라인 백작이 호위 기사에게 제론을 제압하라 명령을 내리려는 찰나, 제론이 입을 열었다.
"나도 백작이오. 게다가 의무 복무 기간은 이미 다 채웠소. 신청만 하면 내일 당장이라도 제대가 가능하다는 뜻이오."
제론의 말에 슬라인 백작이 입을 꾹 다물었다. 이런 특이한 케이스는 처음이었기에 일순 뭘 어떻게 할지 판단하지 못했다.
물론 아직 제대를 하지 않았으니 엄밀히 따지면 백작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작위를 받을 수 있으니 제론의 말이 아예 틀린 건 아니었다.
"그 말을 어떻게 믿는단 말이냐. 백작이 복무를 연장해?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느냐?"
"그렇게 못 믿겠으면 직접 알아보시든가."
제론은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슬라인 백작의 눈에 노기가 어렸다. 하지만 그는 섣불리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또한 주변에 포진한 호위 기사 역시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상대가 백작이라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귀족은 레늄 왕국의 법령에 의해 보호받는다. 게다가 백작 이상의 상위 귀족의 경우는 보호의 범위가 더욱 넓었다.
"이익!"
슬라인 백작이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몸을 돌렸다.
"가자!"
그의 표정은 모욕을 당한 굴욕감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사실 일의 발단은 슬라인 백작이 제공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그리 중요치 않았다.
슬라인 백작은 곧장 사령관이 머무는 곳으로 향했다. 당장 그를 만나서 확인할 참이었다. 정말로 백작이면서 복무를 연장한 말도 안 되는 경우가 있는지 말이다.
그가 보기에 제론은 너무 어렸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백작이라면 부모가 일찍 죽어 작위를 물려받았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의무 복무 기간을 얘기하는 걸 보면 군부의 인물도 아니다. 아카데미 출신이라는 뜻이었다.
만일 그렇다면 군대에 오래 머문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군에 오래 머물면 머물수록 영지가 피폐해진다. 영주가 자리에 있고 없고는 영지 운영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낸다.
'그렇다면 영지가 없는 경우인가?'
슬라인 백작은 그렇게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영지가 없는 귀족의 경우 작위를 온전히 물려받기가 쉽지 않았다.
작위 세습은 영주에 한한다. 즉, 영지가 없다면 작위 세습이 불가능했다.
이래저래 의문투성이였다. 슬라인 백작은 걸음을 서둘렀다. 이 의문을 어서 털어 버리고 싶었다. 만일 자신이 고작 말에 농락당한 거라면, 결코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붉은 학살자를 찾지 못한 초조함과 짜증이 다른 방향으로 표출되어 버렸다.
제론은 슬슬 군대를 떠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사실 1년쯤 더 있을까도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바이스와 세나 역시 그것을 바라고 있었다.
세나는 군부에서 나가면 분명히 가문의 힘이 자신을 옭아맬 것이 분명했기에 최대한 이 안에서 기반을 다지고자 했다.
그중 일부는 성공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또한 바이스는 좀 더 이 안에서 숨어 있을 필요가 있었다. 포로스는 말레피 가문을 단숨에 도약하게 만들었다. 그 포로스를 혼자 쥐고 있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가문에서 호시탐탐 그것을 노리고 있었다.
바이스에게는 아직도 자신을 보호할 울타리가 필요했다.
이렇게 두 사람의 필요가 맞아떨어지는 상황이었기에 군대에 1년 정도 더 머물면서 전쟁을 통해 경험도 쌓고 기반도 다지고자 했다.
한데 상황을 보아하니 오래 있기가 힘들 듯했다.
수많은 귀족이, 아무리 군부에 선을 댄 가문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막무가내로 기지를 휘젓고 다니는 것이 정상일 리 없었다.
이는 그동안 충실한 울타리 역할을 하던 군부의 힘이 약화되었다는 반증이었다.
즉, 앞으로는 더 이상 바이스나 세나가 원하는 것처럼 군부 뒤에 숨어 있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또한 제론도 더 이상 슈린 공작가의 마수를 이 안에서 피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제론이 군에 들어온 지 고작 4년이었다. 4년 전만 해도 군부는 귀족의 영향력이 거의 침범하지 못할 정도로 단단했다.
아무리 군부에 선을 댄 귀족이라 하더라도 지금처럼 기지 내에 직접 들어와 뭔가를 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저 인맥을 이용해 약간의 정보를 얻어 내는 정도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한데 지금은 귀족의 힘이 군부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다.
붉은 학살자는 그런 군부가 내세우는 마지막 보루 같은 것이었다. 즉, 상징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이다지도 그에 대한 정보를 얻기가 힘든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아마 길어야 1년 안에 붉은 학살자에 관한 정보가 왕국 전체에 퍼질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 정체를 국왕조차 모르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그 역시 국왕이 용인한 상태였기에 별문제는 없었다.
국왕조차 자신에게 보고되는 모든 사안이 철저히 보안된다고는 믿지 않았다.
군부는 엄밀히 따지면 국왕의 힘이었다. 그러니 군부에 이 정도 배려를 해 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제론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서둘러 유적으로 들어갔다. 물론 비밀 통로를 통해 들어갔다. 누구도 발견할 수 없는 통로였다.
기본적으로 공간 이동을 이용하며, 마나 유동이 거의 없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곳에 비밀 통로가 있는지 몰랐다.
사실 중앙 유적으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 유적 간 텔레포트를 통해 이쪽으로 오면 훨씬 빠르고 간단하다. 하지만 제론은 습관적으로 이렇게 걸어서 이동했다.
8, 9, 10층 수련을 하는 동안 유적의 힘을 이용하지 않은 텔레포트를 하면 몸에 상당한 무리가 왔기 때문에 유적을 통해서만 이동했다.
그 습관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유적 안으로 들어간 제론은 일단 통제실로 가서 주변 상황을 살폈다.
수많은 아티팩트가 유적 주변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들어오는 모든 정보가 통제실 공간의 화면을 가득 채웠다.
제론은 의념을 통해 아티팩트, 마티를 조절했다. 통제실의 화면이 일제히 벨룸 왕국 측을 비췄다.
"역시."
엄청난 수의 기간트 라이더가 보였다. 기간트 라이더는 척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착용한 장비를 보면 다른 기사와 확연히 차이가 났다.
또한 제론은 다른 방법으로도 그들이 기간트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름 아닌 아공간 마법이었다.
기간트를 담은 아공간을 항상 지니고 다니기에 그것을 체크하면 그가 기간트 라이더인지 아닌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 기술은 사실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각국의 중요한 장소에는 아공간 식별 마법이 설치되어 있었다.
기간트를 함부로 주요 시설 내부로 들이면 어떤 곤란한 일을 겪을지 알 수 없었다. 심지어 왕궁에 몰래 들어가 기간트를 소환하기라도 하면 심각한 타격을 주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그건 시설에 설치한 거대한 마법진을 통해 이뤄지는 일이었다. 이렇게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아티팩트에 그 모든 걸 식별할 수 있는 기능을 담는 건 현재의 기술로는 불가능했다.
아니, 사실 고대에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직 초고대 문명에서만 제작이 가능한 아티팩트였다.
라이더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수많은 라이더가 한자리로 모이고 있었다.
"가만, 라이더의 수가 생각보다 많은 것 같은데?"
최근 지속적으로 적진을 관찰했음에도 놓친 부분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예상보다 기간트 라이더의 수가 100여 명 더 많았다.
한데 그들을 보고 있으니 뭔가 싸한 느낌이 들었다. 제론은 마티를 조종해 그들을 더욱 가까이서 살폈다.
정보 수집 아티팩트인 마티는 기본적으로 투명하지만, 마나를 흡수해 작동하기 때문에 예민한 사람 근처에 가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
물론 그것이 정보 수집 아티팩트라는 사실은 모르겠지만, 이상한 점을 느끼고 근방을 공격하면 자칫 마티가 부서질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제론은 그 위험을 감수하고 마티를 라이더 근처로 보냈다. 그리고 적진 구석구석에 보냈다.
마티를 조종해 정보를 수집하는 것 역시 상당한 센스가 필요한 일이었다. 물론 그런 것 없어도 조종은 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세부적인 조종을 하려면 상당한 센스가 필요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제론에게는 그 센스가 살짝 모자랐다. 그래도 완전히 젬병은 아니라서 어느 정도는 조절이 가능했다.
제론은 불길한 예감에 정말로 적진지를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결국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새로 지어진 막사가 너무 많았다. 막사 안을 조사하니 모두 텅텅 비어 있었다.
"대체 저게 뭐지? 저걸 왜 만든 걸까?"
막사 내부를 구석구석 뒤지는 건 상당히 어려웠다. 제론은 진땀을 흘리며 마티를 조종해 막사 하나를 잡고 훑었다. 하지만 별다른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막사 여러 개를 동시에 조사하면 좋겠지만 제론의 능력으로 그건 불가능했다. 제론은 다음 막사로 마티를 들여보내며 식은땀을 흘렸다.
다행히 두 번째 막사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막사 바닥에 미세한 틈새가 있었다. 그곳에 문이 만들어져 있는 게 분명했다.
그걸 보자마자 제론은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미약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그곳에는 거대한 아공간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걸 왜 막사 밖에서는 알아차리지 못한 거지?"
제론은 문 주변을 조사하며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공간 마법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교란 마법진이 복잡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일단 미세한 틈으로 마티를 내려 보냈다. 그곳에는 거대한 공간이 있었고, 바닥에 아공간 마법진이 어마어마한 크기로 설치되어 있었다.
"저 정도면 기간트 열 기는 보관할 수 있겠군."
제론은 그동안 느꼈던 불안감의 정체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새롭게 지어진 막사는 모두 저 아공간 마법진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
제론은 그 뒤로 모든 막사를 돌아다니며 아공간 마법진의 존재를 확인했다. 한 번 발견한 것이고, 다들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 뒤로는 아주 간단히 찾아낼 수 있었다.
"스무 군데면 모두 몇 기야? 200기?"
제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현재 벨룸 왕국군 진영에는 총 650기의 기간트가 있었다. 한데 거기에 200기의 기간트가 추가된다면 모두 850기나 된다. 실로 엄청난 숫자였다.
그들이 일제히 밀고 내려온다고 생각하니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현재 레늄 왕국 체른산 방어군은 500기의 기간트를 보유 중이었다. 거기에 귀족의 호위 기사가 가져온 기간트까지 합하면 600기에 달한다.
600기와 850기의 기간트가 싸우면 결과는 고민할 필요도 없다.
제론은 벌떡 일어나 서둘러 유적에서 나갔다.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봐야 했다.
제론의 발걸음이 점점 다급해졌다.
☆ ☆ ☆
슬라인 백작은 다른 귀족 몇 명을 대동하고 사령관을 찾아갔다. 그가 사령관실에 들어가자, 사령관이 비교적 반갑게 맞아 주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사령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를 하고는 물었다. 슬라인 백작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사령관, 혹시 이 부대에 백작 위를 가졌으면서 복무를 연장한 사람이 있소?"
슬라인 백작의 물음에 사령관이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료를 들출 필요도 없었다. 최근 복무를 연장한 사람은 딱 한 명이었는데, 그가 바로 백작이었으니까.
"있긴 있습니다만…… 그건 왜 물으십니까?"
슬라인 백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놈의 말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냥 물러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았다. 대체 백작씩이나 되는 놈이 뭐가 아쉬워 여기 남는단 말인가.
"혹시 그자가 누군지 알 수 있겠소?"
"어렵지 않습니다. 제론 폰 에어스트입니다."
"에어스트?"
슬라인 백작은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환해지는 걸 느꼈다. 이제야 모든 게 이해됐다. 왜 백작씩이나 되는 사람이 굳이 복무를 연장했는지 말이다.
"에어스트 가문이었군."
그 하나로 모든 게 설명된다. 에어스트 가문은 영지가 있건 없건 무조건 백작 위가 세습된다. 개국공신 가문이었다. 그것도 개국 시 가장 큰 공을 세운 가문이라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망한 가문이었다. 슈린 공작가에 의해 몰락해 이제는 영지조차 남지 않은 가문이었다.
게다가 슈린 공작가는 집요하다. 아마 에어스트 가문의 생존자를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그러니 이렇게 군부에 기대 숨은 것이고 말이다.
"그러니까 당분간 군에서 나갈 일이 없는 사람이로군? 안 그렇소?"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군요. 아시다시피 전 군부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입니다."
사령관의 대답에 슬라인 백작이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아아, 굳이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게 아니오. 그 정도면 됐소. 아주 충분하오."
슬라인 백작은 그 말을 남기고 사령관실을 나갔다. 그와 함께 왔던 몇 명의 귀족 역시 함께 나갔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말이다.
그런 그들을 보는 사령관의 눈빛에 염려가 담겼다.
"설마 일을 크게 만드는 건 아니겠지?"
사령관은 제론에 관해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지금까지 그 비밀을 철저히 지키고 있었다.
제론의 성향을 보면 누군가 시비를 걸어도 부딪치지 않고 되도록 피하는 경향이 짙었다. 아마 이번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다만 슬라인 백작이 지나칠 정도로 집요하게 괴롭히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뭐, 제론이 알아서 잘하겠지. 언제나처럼."
사령관은 제론을 믿었다. 제론은 인내심이 깊고 똑똑한 사람이었다. 슬라인 백작이 부대를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 사이에 별다른 일이 생기긴 어려울 것이다.
사령관은 그렇게 판단하고 이번 일을 대충 넘겼다. 물론 제론에게 미리 연락을 해서 조심하라는 언질은 줄 생각이었다. 그래야 미리 마음의 준비도 하고 대비를 할 테니까 말이다.
사령관은 즉시 부관을 불러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밀린 업무를 재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