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 폭풍전야
"다녀왔어."
제론의 말에 세나와 바이스가 긴장한 눈으로 바라봤다.
"어때요? 뭔가 알아낸 것 같나요?"
클레의 초대를 받고 식사를 하러 가기 전에 이곳에 들러서 자초지종을 얘기했기에 세나와 바이스는 상당히 걱정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제론의 정체를 알아차렸다면 참으로 곤란한 일에 직면할 수도 있었다. 제론이 붉은 학살자라는 정보를 제대로 차단하지 않으면 꽤 위험한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었다.
벨룸 왕국은 아직도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붉은 학살자 때문에 그들이 얻은 손해는 엄청났다. 만일 제론이 아니었다면 이번 전쟁의 흐름은 진작 벨룸 왕국 쪽으로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자, 일단 이거 받아."
제론이 금괴 하나를 휙 던져 주었다. 바이스는 얼결에 그것을 받았다.
"이걸 또 받아 오신 겁니까?"
"내 시간은 비싸다고 엄포를 놓고 왔지."
바이스와 세나는 혀를 내둘렀다. 아무리 디아만트 후작가에 돈이 많다고 하지만 이렇게 잠깐 대화를 하는 것만으로 수천 골드를 뽑아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까도 이런 금괴를 하나씩 나눠 주셨잖습니까."
"그거야 내 목에 상처를 낸 대가고."
제론이 뻔뻔하게 씨익 웃었다. 목에 난 상처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익스퍼트가 된 다음부터 웬만한 상처는 빠르게 회복되었다.
아까 안슈트가 목에 낸 상처는 아주 얕았다. 그 정도 상처는 몇 시간이면 아물었다. 물론 몸속에 흐르는 마나를 활발히 움직였을 때의 얘기다.
제론은 의도적으로 마나의 흐름을 조절해 상처가 빨리 낫지 않게 했다. 그래야 안슈트나 클레가 의심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반응이 어떻던가요?"
제론이 피식 웃었다.
"그냥 사기꾼으로 알던데?"
"잘하셨습니다."
"잘하긴. 난 있는 그대로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믿지를 않더라고."
바이스가 빙긋 웃었다.
"그걸 누가 그대로 받아들이겠습니까? 더구나 실바로 그랬다고 하면 아무도 안 믿죠."
"어쨌든 조만간 전투가 시작될 것 같으니까 미리 준비해 놓는 게 좋을 거야."
제론의 예감은 상당히 정확했다. 특히 이런 전투에 관한 예측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이미 정비는 끝냈습니다. 새로 갈아 끼운 부품의 마법진도 다 손봤고, 균형도 제대로 맞췄습니다. 당장 타고 나가셔도 됩니다."
"좋아. 역시 믿을 만하군. 그럼 난 오늘도 가볍게 산책이나 하고 올 테니까 나머지도 부탁해."
제론은 두 사람에게 손을 휘휘 흔들어 주고는 밖으로 훌쩍 나가 버렸다.
세나가 그런 제론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정말 2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날 제대로 안 봐주시네."
"내가 보기엔 그래도 진전이 좀 있는 것 같은데? 그러니 너무 실망하지 마."
"정말? 어떤 점이?"
"남자의 직감이야."
"장난해?"
"하하. 장난이 아니라 정말로 감이 그래. 왠지 느낌이 온다니까?"
세나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그리고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세나에게 접근하는 남자는 정말로 많았다. 아카데미나 군대나 별 차이가 없었다. 아니, 군대의 특성상 아카데미보다 훨씬 많은 남자들이 세나의 마음을 얻으려 애썼다.
하지만 세나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다. 세나의 마음은 오로지 제론에게 향한 채,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제론은 세나와 2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하면서 단 한 번도 선을 넘지 않았다. 분명히 친밀했다. 하지만 세나가 느끼기에 그 친밀함은 동료로서의 그것이었다.
'분명히 아직 연인은 아니야.'
세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분했다. 어떻게 그 오랜 시간을 함께하면서 키스 한 번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단 말인가. 자신을 여자로 생각하긴 하는지 의심스러웠다.
"걱정 말라니까? 아마 제대한 다음에는 관계가 급속도로 좋아질 테니까."
"과연 그럴까? 제대 후부터 훨씬 바빠지실 텐데?"
지금은 군부의 힘이 울타리가 되어 주고 있지만, 제대 후에는 직접 슈린 공작가를 상대해야 한다. 아마 슈린 공작가도 제론을 그냥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것이다.
제론은 언젠가 슈린 공작가의 걸림돌이 될 것이다. 슈린 공작가에서는 그렇게 크기 전에 싹을 잘라 버리는 편이 훨씬 낫다고 판단할 것이다.
"그때 제대로 도와 드리면 되지. 어차피 제대는 함께하잖아?"
"하긴. 그야 그렇지만."
"나도 옆에서 도울 테니까 힘내."
세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론은 제대를 1년 연기했다. 세나와 바이스 때문에 군부에 더 남기로 한 것이다.
사실 그 이면에는 아직 중앙 유적의 수련이 마무리되지 않은 이유가 있었지만, 두 사람은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자, 그러니 힘내라고. 나도 그동안 포로스를 이용해서 엄청난 돈을 모았어. 가문에 입지도 잘 닦아 놨고. 어차피 너도 슈린 공작가와 싸워야 하는 입장 아니야?"
바이스는 말레피 후작가에 남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이미 제론과 함께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제론의 가신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누가 들으면 미친 짓이라고 하겠지만 바이스는 자신의 안목과 감각을 믿었다. 그가 보기에 제론은 향후 그 누구보다 높은 곳에 오를 것이 분명했다.
'이런 게 진짜 투자지.'
본래 투자는 위험할수록 성공했을 때 얻는 것도 많다. 바이스는 제론 아래에서 결국 말레피 후작가보다 훨씬 높은 곳에 오를 거라고 자신했다.
'그러려면 미래의 주모에게 잘 보여 두는 게 좋지.'
바이스는 세나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확실히 아름다웠다. 또 생명력이 넘치기에 더욱 매력적이었다. 저 정도면 제론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여자다.
'벨루스 백작가에서 과연 어떻게 나오느냐가 문제이긴 한데…….'
벨루스 백작이 세나를 강제로 슈린 공작가와 엮으려 하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세나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다.
'아마 또 집을 나가겠지. 이런 격전지로 온 것처럼.'
벨루스 백작은 세나가 조기 졸업을 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전공을 엔지니어로 바꾼 건 더더욱 몰랐다.
여자가 엔지니어를 한다니, 펄쩍 뛸 일 아닌가.
벨루스 백작이 모든 사실을 안 것은 세나가 입대한 후였다. 그렇기에 전혀 손을 쓸 수가 없었다.
'포로스 덕분에 얻는 게 많군.'
포로스를 가문에 공급하면서 돈뿐 아니라, 정보까지 얻고 있었다. 말레피 후작가의 힘을 최대한 이용하고 있었다. 그것이 향후 어떤 식으로든 자신과 제론에게 도움이 될 거라 믿었다.
"자, 그럼 연구를 시작해 볼까?"
바이스는 남는 시간에 제론이 지시한 연구를 계속했다. 당연히 마법진에 관한 연구였다.
실상을 들여다보면 바이스의 실력을 키우기 위해 제론이 신경을 써 주는 것이지만, 바이스는 자신이 제론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물론 도움이 되긴 한다. 바이스와 세나 덕분에 제론에게 상당히 많은 시간이 생겼으니까.
"이번에도 답이 보이지 않는구나."
제론은 중앙 유적 로비에서 잠시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현재 제론이 도전하고 있는 것은 유적 10층이었다.
8층과 9층도 쉽지 않았다. 각각 8층은 육체적, 그리고 9층은 정신적 한계를 경험하게 해 주었다.
하지만 그래도 돌파하는 데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각각 네 달이 조금 넘는 시간에 클리어할 수 있었다.
그동안 치열한 전투를 끊임없이 했다는 걸 감안하면 정말로 빠른 시간이었다.
현재 제론은 초고대 문명 기준으로 상당히 경험 많은 익스퍼트였다. 또한 심장에는 7개의 마나링이 맴돌고 있었다.
마나링이 늘어난다고 무조건 강력한 마법을 쓸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훨씬 세밀한 마나의 조절 능력을 갖게 되었다.
7개의 손으로 동시에 마법진을 그려 낼 수 있으니 훨씬 빠르게 마법을 펼칠 수 있었고, 또 훨씬 복잡한 마법을 쓰는 게 가능해졌다.
하지만 마스터의 경지는 아직도 요원했다. 마스터는 아무리 유적의 힘을 이용한다 하더라도 넘기 어려운 벽이었다.
또한 여덟 번째 마나링도 좀처럼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 역시 마스터에 준할 정도로 높은 벽이었다.
하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다. 지금 문제는 10층의 클리어였다.
10층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수련장이었다.
8층과 9층에서는 팔찌와 발찌를 달고 평소에도 어렵게 움직이며 고통받았다. 그러면서도 클리어 보상은 그리 크지 않았다.
8층을 클리어한 보상으로 9층에서 쓸 정신을 금제하는 목걸이를 받았고, 9층을 클리어한 보상으로 10층 수련을 위한 벨트를 받았다.
이 벨트가 참으로 요상한 것이 오로지 10층에서만 작동을 했다. 몸의 감각을 이상하게 만드는 벨트였다.
"후욱. 좋아. 가 볼까?"
제론은 마나 호흡을 통해 만반의 태세를 갖춘 뒤, 곧장 10층으로 내려갔다.
"크윽. 대체 이 수련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모르겠군."
제론은 불평하면서도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벨트가 작동하며 몸의 움직임이 극도로 제한되었다. 이 제한을 풀기 위해선 움직일 몸의 부위를 통해 마나를 뿜어내야만 했다.
만일 마나의 형질이 조금 달라진 상태로 뽑아내면 상당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검을 통해 예기를 부여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지금 수련은 그런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전투와 상관없이 그저 마나를 그저 뿜어내기만 했다. 마나는 아무런 효과 없이 그저 허공에서 흩어졌다.
대체 이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제론은 그렇게 속으로 투덜대면서도 끊임없이 움직였다. 이곳에서 수련하는 것은 일종의 체술이었다.
사실 위력은 크게 대단할 게 없었다. 하지만 온몸을 움직여야 하기에 수련 자체가 너무나 까다로웠다.
어쨌든 그 체술을 수련하면서 움직일 때마다 마나를 뿜어내야 하기에 10층의 수련은 정말로 어려웠다.
체술의 시작에서 끝까지 끊임없이 마나를 뿜어내야 하는데, 아직 채 절반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
한바탕 체술을 펼친 제론은 녹초가 되어 바닥에 주저앉았다.
"허억. 허억. 이거 마나 소모가 너무 극심한데?"
마나 소모가 지나칠 정도로 심했기에 수련이 더 어려웠다. 만일 체술에 맞춰 마나를 제대로 뿜어낼 수 있어도 수련을 마무리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에는 마나량이 너무 모자랐다.
두 가지를 동시에 해결해야만 한다.
제론이 이 수련을 시작한 지 벌써 1년이 훨씬 넘었다. 그런데도 고작 이 정도에 불과하다는 건 분명히 뭔가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다.
더구나 요즘에는 시간도 제법 많이 난다. 전투가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귀족 가문을 여럿 받아들여 기지 내부를 공개한 것도 그렇기에 추진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그런데도 10층 수련은 여전히 지지부진했다. 제론은 조금 방법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제론은 차근차근 문제점을 살폈다. 사실 매일 수련을 마무리할 즈음 하는 일이었다.
마나량이 모자란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았다. 만일 그랬다면 10층 수련 과정을 이런 식으로 하지 않았을 테니까.
마나는 7층 수련을 통해 잔뜩 늘릴 수 있었다. 그렇게 많은 마나를 받아들였는데도 고작 체술 한 번 수련하는 것도 버겁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결론은 제론이 마나를 효율적으로 다루지 못한다는 뜻이 된다.
한 번에 뿜어내는 마나량이 너무 많기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제론은 뿜어내는 마나량을 조절하는 것이 먼저라고 판단했다.
거기까지 정리한 제론이 자신의 허리에 묶인 벨트를 쳐다봤다.
"그럼 이 벨트는 뭐지?"
벨트를 차고 있으면 움직임이 극도로 제한된다. 그 상태에서 체술을 펼치려니 더 힘들고 막대한 마나가 소모되는 것이다.
이 벨트는 반드시 유적 10층에서만 작동한다. 그렇기에 밖에서의 수련이 무의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하지만 세밀한 마나의 조절은 굳이 밖이건 안이건 상관없지 않겠는가.
"오늘은 여기까지. 일단 마나 수련부터 다시 해야겠어."
제론은 결정이 나자마자 로비로 향했다. 그리고 유적에서 나갔다.
깜깜한 밤이었지만 제론은 아무런 문제없이 산에서 내려가 숙소로 돌아갔다.
익스퍼트가 된 이후로 눈이 훨씬 밝아졌다. 또한 몸도 월등히 좋아졌다. 여러모로 말이다.
숙소에 돌아온 제론은 태블릿을 꺼내 주변 정보를 확인했다. 유적을 중심으로 반경 100킬로미터 내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 안에 체른산 방어군은 물론이고 적의 기지도 대부분 포함되어 있었다.
제론은 수시로 정보를 확인했다. 언제 어떤 전투가 벌어질지 알아놓는 것만으로 상당한 공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예전 포위된 아군을 구하는 작전을 들 수 있다. 만일 제론이 적의 움직임을 미리 알아내지 못했다면 그 안에 갇혔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제론은 미리 알고 있기에 적당한 일을 만들어 거기서 빠졌다. 그리고 그들의 약점을 미리 공략해 아군을 구해 낼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상당한 기간트를 잃었지만 제론의 공로는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전쟁의 흐름이 완전히 넘어갈 뻔한 것을 되돌렸으니 말이다.
"아직은 움직일 기미가 안 보이는군. 하지만 기간트의 수가 너무 많아. 이놈들 뭔가를 알고 있는 게 분명해."
지금은 체른산 방어군에도 기간트의 수가 상당히 많았다. 각 귀족 가문에서 데려온 호위 기사가 가진 기간트를 모두 합하면 100기가 넘을 것이다.
그러니 적이 언제 공격하더라도 무서울 게 없었다. 어쩌면 사령부에서는 지금 적이 몰려오길 기대하는지도 모른다. 그럼 아주 자연스럽게 적 전력을 깎아 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만일 적군이 그 정도 기간트를 확보한다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또한 이곳에 어느 정도의 기간트가 있는지 확실히 파악하고 달려든다면 정말로 어려운 싸움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벨룸 왕국에는 그 정도 기간트를 동원하기가 쉽지 않지.'
벨룸 왕국에도 귀족이 있고, 그들의 기사에게 지급한 기간트가 있었다. 그들도 귀족이 움직여서 기사단과 병력을 전쟁에 투입하면 전쟁의 향방이 많이 달라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레늄 왕국의 귀족과 마찬가지로 전쟁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그저 전쟁 지원금을 내는 것으로 의무를 다했다고 여겼다.
물론 전쟁이 급박해지면 그냥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겠지만 아직까지 그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벨룸 왕국이 체스터 공국을 끌어들이는 바람에 장기전으로 돌입했다. 만일 전쟁이 끝난다 하더라도 두 왕국이 입은 피해는 결코 씻어 내기 어려울 것이다.
제론은 그런 식으로 주변 정세를 파악한 뒤, 이번에는 아군 기지를 살폈다.
적의 정보만 아니라 아군의 정보도 중요하다. 제대로 정보와 작전을 파악하고 있지 않으면 무슨 꼴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특히 요즘에는 붉은 학살자, 즉, 제론을 영입하러 온 귀족의 동향까지 살펴야 하기에 더 열심히 정보를 확인해야만 했다.
모든 정보를 확인한 제론은 일단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그냥 자도 되지만 그럴 수 없었다. 10층을 최대한 빨리 클리어하려면 자는 시간도 아껴야 한다. 제론은 아랫배에 잠든 마나 덩어리를 건드려 깨웠다.
마나가 실처럼 뽑혀 나왔다. 그렇게 나온 마나가 온몸 구석구석 퍼졌다. 순식간이었다.
10층 수련은 일단 이 상태가 되어야 시작할 수 있기에 이렇게 온몸으로 마나를 퍼트리는 속도는 엄청나게 빨라졌다. 이제는 생각만 해도 온몸에 마나를 균일한 농도로 퍼트릴 수 있었다.
그렇게 퍼트린 마나를 온몸을 통해 일제히 밖으로 내뿜었다. 균일한 농도로 마나가 빠져나갔다. 이 역시 엄청난 노력 끝에 얻어 낸 성과였다.
하지만 진짜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제론은 밖으로 뿜어내는 마나의 양을 줄였다.
쉬익!
바람 빠져나가는 소리와 함께 마나가 빠져나갔다. 성공이었다. 원하는 만큼 줄이는 건 쉬웠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이 마나의 질을 높여야 한다.
제론이 마나를 많이 뿜어낸 이유가 있었다. 그 정도가 아니면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나를 뿜어내지 않았다고 체크된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마나의 질을 올리는 것이었다. 문제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는 건데, 그건 차츰 해결해 나가기로 했다.
'무조건 성공해야 돼.'
이게 되지 않으면 소드 마스터가 되기 전에는 이 수련이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소드 마스터가 되어도 계속 여기에 매달려야 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이번 수련은 어려웠다. 소드 마스터가 되면 얼마나 많은 마나를 품게 될지 모르지만, 그것으로도 체술을 완벽하게 펼치기에는 모자랄 것만 같았다.
제론은 눈을 감은 채 밤이 새도록 마나 수련에 매달렸다. 마나를 뿜어내다가 고갈되면 마나 호흡을 통해 다시 채우고, 또 뿜다가 고갈되면 채우는 걸 반복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제론은 쫙 깔려 오는 투기를 느끼며 천천히 걸어갔다. 기지 곳곳을 걸으며 어떤 식으로 투기가 흐르는지 확인했다.
적의 동태는 태블릿과 유적의 정보 수집 아티팩트, 마티를 통해 꾸준히 확인하기에 그들의 작전도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전투가 벌어지면 실제 작전을 통한 예상과는 많이 달라진다. 제론은 그것이 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투기가 짙으면 더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그때그때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투기로 변해서 느껴지는 거니 거의 맞을 것이다.
지금까지 투기의 흐름을 미리 파악했기에 실제 싸움에서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투기가 가장 적은 쪽에 자리를 잡는 게 안전하다. 또한 투기가 짙은 곳은 잘 주시해야 한다. 그쪽에서 전투 흐름의 변화를 캐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투기의 흐름을 파악하며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제론은 멀리서 누군가 티격태격하는 걸 볼 수 있었다.
"뭐지?"
거리가 제법 됐지만 누군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클레와 안슈트였다. 그들이 몇 명의 라이더를 앞에 두고 뭔가를 얘기하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그리 좋지 않았다.
굳이 가 볼 필요는 없었다. 한데 제론은 왠지 가 봐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결정하기 전에는 충분히 생각하지만, 일단 결정을 내리면 망설이지 않는 것이 제론의 스타일이었다.
제론은 곧장 그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걸음을 빨리했기에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몇 번을 말해야 알겠소? 우리가 아는 건 그게 전부라니까!"
"그럼 상식적으로 여러분이 한 말이 맞다고 생각하시나요? 실바라고요? 실바로 어떻게 그런 성과를 내죠?"
다섯 라이더는 아무런 대꾸도 못했다. 그들도 그냥 붉은 학살자가 실바라는 것만 알지, 더 자세한 건 알지 못했다. 한데 생각해 보면 실바가 그런 성과를 낸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소문에는 붉은 학살자가 기간트를 타고 점프까지 했다더군요. 과연 실바로 그게 가능할까요?"
만일 다섯 라이더가 제론보다 일찍 입대했다면 바로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제론이 붉은 실바를 타고 점프를 통해 적을 박살 내는 광경을 똑똑히 확인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들은 제론보다 늦게 합류했다. 체른산 방어군에 병력이 확충되면서 끼어든 라이더였다.
"그런데도 여전히 실바라고 주장하고 싶으신가요?"
클레의 물음에 다섯 라이더는 우물거리며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도 동료에게 들은 얘기였다. 그걸 얘기해 준 동료도 아마 학살자의 정체는 모를 것이다.
"우리도 그렇게 들었을 뿐이오."
"그럼 그 얘기를 해 준 분을 알려 주세요. 제가 직접 가서 물어볼 테니까요."
"그건……."
다섯 라이더가 곤혹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얘기가 더 퍼지면 곤란했다. 붉은 학살자의 정체는 철저한 비밀이었다.
만일 자신들로 인해 그 비밀이 유출되고 있다는 사실이 사령관의 귀에 들어가면 정말로 큰일 난다. 그냥 벌을 받고 끝날 사안이 아니었다. 심할 경우 죽을 수도 있었다.
"왜요? 안 되나요?"
다섯 라이더는 당장이라도 그냥 돈을 돌려주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벌써 상당히 많은 돈을 써 버렸다. 또한 절반 이상 되는 돈을 집으로 보냈다.
클레는 결코 돈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이미 이들이 돈을 돌려줄 능력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여기서 돈 얘기를 꺼내선 안 된다.
어차피 돌려받을 생각이 없는 돈이었다. 굳이 돈 얘기를 해서 반감을 살 필요가 없었다. 돈에 대한 생각은 스스로 알아서 하게 두고, 자신은 딱 필요한 정보만 얻어 가면 된다.
클레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이들은 자신에게 새로운 정보를 말해 줄 것이다. 불과 얼마 안 되는 짧은 시간이다. 그 정도는 충분히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었다.
"그래서 정보를 넘기겠다고?"
갑자기 들려온 말에 클레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다섯 라이더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
"그, 그렇지 않소!"
다섯 라이더는 제론이 누군지 잘 몰랐다. 하지만 낯이 익은 걸로 봐서 같은 라이더일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다.
현재 체른산 방어군에는 기간트 라이더가 1,000명이 넘었다. 500기의 기간트가 있는데, 메인 라이더 한 명에 서브 라이더가 한두 명씩 있었다.
그렇게 수가 많다 보니 서로에 대해 잘 알 수는 없었다. 더구나 최근에도 새로운 병력이 유입되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저렇게 낯익은 얼굴이라면 라이더가 분명할 것이다. 체른산 라이더에게는 철칙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붉은 학살자에 대한 정보는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 기간트의 수가 많은데다가 같은 기종의 경우 누가 어디에 타고 있는지도 구분이 안 된다.
그렇기에 설사 활약을 지켜봤다 하더라도 그 기간트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내기가 어려웠다. 또한 실제로 붉은 학살자의 활약을 못 본 라이더도 있었다.
이곳에 있는 다섯 라이더가 대표적이었다. 그들은 작전에 나갈 때마다 붉은 학살자와 다른 조에 속했기에 한 번도 그 활약을 볼 기회가 없었다.
어쨌든 지금은 무조건 잡아뗄 때였다. 이건 클레가 어떤 협박을 한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붉은 학살자의 정보를 유출하는 경우 반역에 준하는 처벌을 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즉, 가족까지 몽땅 처형된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벌벌 떨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분명히 그렇게 들은 것 같은데? 아니, 이미 유출을 한 것 같은데?"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클레를 날카롭게 노려봤다. 클레는 깜짝 놀라 뒤로 주춤 한 걸음 물러났다. 그저 허풍선이로 봤는데 이런 면모를 보니 당황스러웠다.
"그렇지 않소!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 그렇지 않소?"
다섯 라이더가 간절한 눈으로 클레를 바라보며 도움을 구했다.
클레는 순간적으로 울컥했지만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여기서 저들을 나락에 빠트릴 필요는 없었다. 그저 빚을 지워 둔다는 느낌으로 넘어가는 편이 나았다. 나중을 위해서는 말이다.
'혹시 알아? 저들이 나중에 은밀히 내게 알려 줄지?'
거기까지 계산한 클레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잘못 짚으셨네요. 제가 붉은 학살자의 정보를 원하는 건 맞지만 저분들은 한사코 말씀해 주지 않으셨어요. 막대한 보상을 내걸었는데도 말이에요."
클레는 그렇게 말하고는 제론을 향해 더욱 화사하고 짙은 미소를 날려 주었다.
"혹시 생각 있으신가요? 정말로 비싸게 살 용의가 있는데."
"돈이 많은 모양이군요. 돈을 준다면 내가 정보를 팔 의향이 있긴 한데……."
제론의 은근한 말에 지켜보던 다섯 라이더가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들이 정말로 엄청난 광경을 보고 있다는 생각에 지나칠 정도로 긴장했다.
"정말인가요?"
"물론. 가격만 맞는다면 아주 괜찮은 정보를 주죠."
"어떤 정보인데요? 그걸 말씀해 주셔야 가격을 매기지요."
클레는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저 이 허풍선이가 대체 뭘 내거는지 얘기나 들어볼 생각이었다.
"붉은 학살자가 누군지 말해 주죠."
클레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정말인가요? 그걸 알고 있긴 해요?"
제론이 씁쓸하게 웃었다.
"내 신용이 고작 이 정도라니, 이거 충격인데? 아무튼 살 건지, 말 건지만 결정하시죠?"
"만일 정말로 그 정보를 주신다면 10,000골드에 정보를 사겠어요."
제론이 피식 웃었다.
"고작 10,000골드? 지금까지 뿌린 돈도 그보다는 많을 것 같은데요?"
클레가 손 하나를 쫙 펼쳤다.
"5만 골드!"
그 말에 제론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 정도면 괜찮군요. 그럼 돈부터 주셔야죠?"
클레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정보부터 듣겠어요. 우리 디아만트 후작가의 신용은 확실하니 먼저 말씀해 주세요.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아서 그래요."
클레가 그렇게 말하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녀는 제론이 뭐라고 말할지 벌써 짐작했다.
"쩝, 이거 안 통하는군. 붉은 학살자가 나라고 하면 당연히 안 믿을 거요?"
"잘 아시는군요. 설마 정말로 본인이라고 말할 생각이었나요?"
제론이 씨익 웃었다.
"없던 거래로 합시다. 하하하하."
제론은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그리고 다섯 라이더를 보며 말했다.
"부대 안에 눈과 귀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만 알아둬. 아마 위에선 다 알고 있을걸?"
그들의 표정이 더욱 창백해졌다. 제론은 그중 한 명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고는 그곳을 떠났다.
그들은 화들짝 놀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클레는 그렇게 멀어져 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분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또 당했네요. 저 사람한테."
안슈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음에는 꼭 한 방 먹여 줄 거예요."
그동안 실수도 많이 하고 분한 일도 많이 겪었지만, 지금처럼 짜증이 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클레는 분한 눈으로 멀어져 가는 제론의 뒷모습을 끝까지 노려봤다.
제론은 기지 곳곳을 돌아다니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촤악 깔려서 다가오는 투기가 수련에 도움이 되고 있었다.
문득 영감이 떠올라 마나를 내뿜어 투기를 밀어내 봤다. 한데 그냥 마나로는 그게 불가능했다. 투기와 최대한 비슷한 마나가 필요했다.
처음에는 잘 안 됐지만 차츰 익숙해지더니 결국은 성공했다. 몸에 직접 부딪히는 기운이 있으니 거기에 맞춰 마나의 형질을 만들어 내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온몸으로 마나를 뿜어내 투기를 끊임없이 밀어내던 제론은 곧장 유적으로 향했다. 왠지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체른산 유적은 여전히 2왕자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다. 체른산을 적에게 빼앗기면 모를까, 다시 되찾기만 하면 어김없이 체른산 유적에 따로 직접 병력을 보내 지키도록 했다.
물론 제론은 항상 비밀 통로를 이용했기에 전혀 상관없었다. 체른산에 채 오르기도 전에 비밀 통로로 들어간 제론은 곧장 유적의 통제실에 도착했다.
통제실에서 바로 나가기만 하면 아래에 있는 초고대 문명의 유적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제론은 최대한 서둘렀다. 곧장 밖으로 나가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지하 유적 로비에서 바로 텔레포트해 중앙 유적으로 갔다.
중앙 유적 로비에 도착한 제론은 지체하지 않고 10층으로 내려갔다.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 느낌을 잊기 전에 하고 싶었다.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마나 호흡을 통해 마나를 다시 모으지도 않았다. 하지만 제론은 그것이 떠올랐음에도 하지 않았다.
마나가 모자랄 수도 있지만 지금은 그냥 하고 싶었다. 이 정도 마나면 충분히 될 것 같았다.
10층에 도착하니 벨트가 작동했다. 사방에서 뭔가가 조여드는 것 같았다. 움직임이 제한되고, 체술의 투로만이 뚜렷하게 떠올랐다.
"후욱!"
제론은 숨을 한 번 내쉰 뒤, 천천히 체술을 시작했다.
쉭! 쉭! 쉭! 쉭!
움직일 때마가 경쾌하게 마나가 뿜어져 나왔다. 움직임에 따라 팔꿈치, 무릎, 팔뚝, 손가락, 이마 등등 온몸 구석구석에서 마나가 뿜어져 나왔다.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마치 뜨겁고 차가운 바람이 훅 부는 것처럼 마나가 쏟아졌다. 하지만 그 양은 지극히 미약했다.
제론은 처음으로 체술을 끝까지 펼칠 수 있었다. 더없이 완벽하게 말이다.
쉬이익!
마지막으로 온몸을 통해 마나를 뿜어낸 제론은 지그시 눈을 감고 희열에 몸을 떨었다.
드디어 성공했다. 1년이 훨씬 넘는 시간 동안 애쓰던 걸 고작 하루 만에 해낸 것이다.
물론 그 오랜 시간의 노력이 없었다면 오늘도 없었을 것이다. 그동안 노력해서 체술을 몸에 새겨 놓았기 때문에 오늘처럼 결정적인 순간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체술을 펼칠 수 있었다.
아마 다시 하라면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분명히 해냈다.
제론은 감았던 눈을 떴다. 10층을 완벽히 클리어했다면 보상이 나타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바닥에서 천천히 기둥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한데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아니, 많이 달랐다.
제론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평소보다 훨씬 큰 기둥이 솟아나오고 있었다. 다른 때와 달리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진 기둥이었다.
그리고 그 기둥 안에 10층 클리어 선물이 들어 있었다.
"기간트……."
거대한 유리 기둥 안에 강철로 만들어진 거인이 서 있었다.
10층 클리어의 보상은 바로 기간트였다.
제론은 그제야 10층의 수련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아차렸다.
제론은 유리 기둥을 향해 홀린 듯이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