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3/217)

Chapter 11 붉은 학살자

화려한 마차 한 대가 울퉁불퉁한 길을 달려가고 있었다. 바닥이 고르지 않아 쉴 새 없이 덜컹거렸지만, 특별한 처리가 된 마차였기에 안에 탄 사람은 그 흔들림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4마리의 백마가 끄는 마차는, 모양도 그렇고 마차에 새겨진 문양이나 장식이 예사롭지 않았다. 게다가 마차 주위를 8명의 기사가 각각 말을 타고 호위하듯 진형을 이뤄 함께 이동하는 중이었다.

"안슈트 경, 아직 멀었나요?"

마차 안에서 들려온 소리에 그 바로 옆에서 나란히 말을 몰고 가던 안슈트는 즉시 대답했다.

"30분 정도만 더 가시면 됩니다."

"다 왔군요. 가슴이 두근거려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저희가 아가씨를 지켜 드리겠습니다."

"후훗. 무슨 일이야 있겠어요? 체른산 방어군은 우리 왕국 최고의 부대잖아요?"

안슈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체른산 방어군이 군부가 자랑하는 부대이고, 가장 강한 것도 맞지만, 체른산이 이번 전쟁 최고의 격전지라는 사실도 잊어선 안 된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곳이 바로 체른산이었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대체 체른산에 뭐가 있는 건가요? 왜 벨룸 왕국도 그렇고 우리 왕국도 그렇고 체른산에 집착을 하는 거죠?"

마차에 탄 여인, 클레 폰 디아만트는 체른산에 대해 나름대로 상당한 조사를 했다. 하지만 그녀가 알 수 있었던 건 체른산에 유적이 있다는 것뿐이었다.

게다가 그 유적은 이미 발굴이 싹 끝났다. 즉, 텅텅 빈 유적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두 나라가 그 유적을 차지하기 위해 체른산을 두고 싸운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유적에 뭔가 다른 비밀이라도 있지 않고서는 말이다.

"자존심 싸움입니다."

"자존심?"

클레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존심이라니. 명예가 비록 중요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금까지 체른산에서 희생된 기간트의 수가 몇인가.

고작 자존심 때문에 수백 기의 기간트를 날려 버리다니, 그걸 어떻게 이해한단 말인가.

클레의 가문인 디아만트 후작가는 돈으로는 대륙에 손꼽힐 정도로 부자였다. 영지가 비옥한 건 아니었지만 사업적 수완이 뛰어났다. 그렇기에 생각 자체가 돈에 많이 얽매여 있었다.

수백 기의 기간트를 돈으로 환산하면 계산이 어려울 정도로 엄청나다. 그런 엄청난 돈을 고작 자존심 때문에 퍼붓는 것을 클레가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그 중심에 붉은 학살자가 있습니다."

"우리가 만나러 가는 그 사람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붉은 학살자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정보가 차단되어 있었다. 그저 소문만 무성했다.

하지만 디아만트 가문에서는 그 소문 속에서 정보를 뽑아냈다. 또한 군부에 상당한 돈을 써서 정보를 빼내려 애썼다.

그 결과 붉은 학살자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었다.

"한데 안슈트 경, 정말로 그 붉은 학살자가 우리가 모은 정보대로일까요?"

"상당히 근접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상식적으로 이해가 어려워요. 혼자서 그렇게 많은 전공을 세운다는 게 가능한가요?"

붉은 학살자의 전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가 부순 적의 기간트만 해도 100기가 훨씬 넘을 정도이니, 학살자라는 별명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존재였다.

붉은 학살자의 가장 대표적인 활약은 아군 기간트 부대 구출 작전이었다.

적 기간트 수백 기에 포위된 아군 기간트 부대를 절묘한 작전과 뛰어난 실력으로 구해냈다. 전멸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아군을 절반이나 구해낸 것이다.

그 일로 인해 다시 벨룸 왕국 쪽으로 뒤바뀔 뻔하던 전쟁의 흐름을 지켜 냈다. 여전히 전쟁의 승기는 레늄 왕국이 쥐고 있었다.

"이름도 알아내지 못했는데, 그를 포섭하라니 정말로 쉽지 않은 임무네요."

클레는 살짝 한탄을 섞어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별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눈빛에는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붉은 학살자는 이름답게 붉은색 기간트를 몬다고 했다. 일단 붉은 기간트를 찾으면 후보자를 선정할 수 있었다. 그 수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생각보다 일이 더 쉬워질 수도 있었다. 디아만트 가문이 이렇게 나서는 이유는 그가 곧 제대할 거라는 정보 때문이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그 정도 실력을 가진 기간트 라이더를 영입할 수 있다면 가문의 힘이 한 층 더 커질 것이다. 상대는 혼자서 전투의 흐름을 바꿔 버릴 수 있는 존재였다.

"기지가 보입니다."

안슈트의 말에 클레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앞을 바라봤다. 거대한 기지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에는 저런 규모가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전쟁이 계속되며 점점 기지가 커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전투가 주로 이쪽으로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전선에서도 활발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 체른산이 가장 중요하다는 건 아직까지 변함이 없었다.

또한 가장 많은 기간트가 대치하고 있다는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현재 체른산 방어군이 보유한 기간트의 수는 무려 500기에 달한다. 벨룸 왕국 역시 그와 비슷한 수준의 기간트를 배치했다.

"이러다가 이번 전쟁이 끝나면 두 왕국이 그냥 파산해 버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클레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를 태운 마차가 체른산 방어군 안으로 들어갔다.

클레는 황당한 눈으로 기지 입구 근처에 세워진 마차들을 바라봤다. 수십 대의 마차가 나란히 서 있었다. 마차가 워낙 많았기에 더 들어가지 못하고 클레 역시 근방에 마차를 댈 수밖에 없었다.

말도 가지고 들어갈 수 없었다. 기사들은 말에서 내려 근처에 있던 병사에게 맡겼다. 병사는 이런 일이 익숙한지 능숙하게 신분을 확인하고 말 보관증을 끊어 주었다.

"역시 다들 모였군요."

"그를 얻으면 가문의 부흥이 보장된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붉은 학살자의 위명은 이제 레늄 왕국은 물론이고 벨룸 왕국까지 뒤흔들 정도였다. 그렇기에 그 정보가 철저한 보안 속에서 통제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유명세까지 차단할 수는 없었다.

붉은 학살자는 곧 군부를 떠난다. 그리고 그때 그가 가져가게 될 것들이 정말로 어마어마했다.

지금까지 그는 포상을 받지 않고 모아 두기만 했다. 그가 군부를 떠나는 순간 받기로 예정된 포상금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또한 그가 쓰던 기간트를 군부의 상징으로 남겨 두는 대가로 엄청난 보상을 약속받았다.

그 돈만 해도 영지 하나를 들었다 놨다 할 수 있을 정도의 거금이었다.

하지만 붉은 학살자가 가져갈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가 가진 라이더로서의 실력은 어디 가지 않는다. 붉은 학살자 한 명을 영입함으로써 각 가문이 기대할 수 있는 이득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렇기에 다들 눈에 불을 켜고 붉은 학살자를 영입하려 애쓰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아직도 누가 붉은 학살자인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클레는 일단 호위 기사를 이끌고 기지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기지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일정 절차가 필요했다.

호위 기사 중 하나가 나서서 대부분의 절차를 처리했다. 이제 남은 건 붉은 학살자를 찾아내는 것뿐이었다.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 위험한 곳입니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병사는 그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그들에게 허락된 공간은 기지 입구에서부터 기간트를 보관하는 격납고 입구까지였다.

또한 기지에 머물 수 있는 기간도 정해져 있었다. 고작 열흘이었다. 하지만 클레는 그 시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자신감은 격납고에서 훈련을 위해 나오고 있는 기간트 무리를 보고서 깨끗이 사라졌다.

500기의 기간트 중 절반이 붉었다. 기종도 갖가지였다. 크라테르나 카타락타는 당연했고, 심지어는 적국의 기간트로 유명한 몰레스에 실바까지 끼어 있었다.

"문제가 좀 심각하군요."

"걱정할 거 없어요. 저들을 일일이 만나서 확인해 보면 될 테니까요."

훈련을 지켜보면 가장 실력이 출중한 기간트가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그가 붉은 학살자일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훈련을 지켜볼 수 없으니 확인이 불가능하다. 또한 격납고에 들어가 기간트에서 내리는 모습을 확인해야 하는데 그조차 할 수 없다.

이래저래 난감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클레는 자신의 안목을 믿었다. 분명히 하나하나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 보면 후보를 좁힐 수 있을 것이다.

클레는 멀어져 가는 붉은 물결을 보며 눈을 빛냈다. 그리고 그런 클레를 호위 기사가 걱정스런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기지 안이 바글바글하네요."

"이렇게 여자가 많았던 적이 처음이지?"

"저 중에 하나만 잡아도 평생 걱정 없을 텐데."

라이더들이 낄낄거리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만큼 지금의 상황은 그들에게도 생소했다. 갑자기 군부에서 기지에 사람들을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 물론 일시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하여간 대단해. 다 그놈 하나를 보러 온 거잖아?"

"그렇지."

"대체 정체가 뭘까?"

"알게 뭐야. 우리야 그냥 그놈인 척만 하면 되잖아."

"그야 그렇지."

붉은 학살자의 정보가 빠져나갈 가장 큰 구멍은 바로 같은 라이더였다. 하지만 그들로부터 정보를 빼내는 것도 쉽지만은 않았다.

체른산 방어군에서 기간트를 타는 사람들은 최소 한 번 이상 그에게 목숨을 빚졌다. 그 목숨 빚을 정보 차단이라는 걸로 갚고 있었다.

물론 라이더라고 해서 모두 그의 정체를 아는 것도 아니었다. 아는 사람은 고작 절반 정도였다. 그나마도 확신을 가지는 사람은 훨씬 적었다.

그렇게 라이더가 모여서 식사를 하며 간단히 맥주 한 잔을 마시고 있을 때,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불쑥 나타났다.

"그래서 그가 대체 누구죠?"

다들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생글생글 웃는 미녀 한 명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그 사람인 척한다고 들은 것 같은데, 제가 잘못 들었나요?"

클레였다. 그녀는 미소를 지우지 않고 쭉 둘러앉아 식사를 하던 라이더의 대답을 기다렸다.

"우리는 할 말이 없소."

다들 식사도 술도 팽개치고 분분히 일어났다. 그때 테이블 위로 주머니 하나가 떨어졌다.

쩔렁! 촤르륵!

주머니가 떨어진 순간 묵직한 쇳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열린 입구를 통해 내용물 중 일부가 쏟아져 나왔다. 번쩍번쩍하는 금화였다.

"100골드에요."

다들 나가다 말고 멈춰서 침을 꿀꺽 삼켰다. 100골드면 상당한 거금이다. 1골드면 제법 부유한 평민 가족의 한 달 생활비였다. 지금 있는 라이더끼리 적당히 나눠도 최소 20골드 이상씩 돌아간다.

모두의 눈에 갈등이 어렸다. 하지만 이내 그들은 냉정히 돌아섰다.

그 모습에 클레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이들이 이 돈을 마다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물론 이럴 경우 역시 그녀의 계획에 들어 있었다.

쩔렁! 촤르륵!

이번에는 더 큰 주머니였다. 역시 라이더의 발걸음을 잡았다.

"500골드에요."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와중에 클레가 또 주머니를 던졌다.

쩔그렁!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더 큰 주머니였다. 얼마인지 말하지 않았지만 보기만 해도 대충 알 수 있었다. 500골드짜리 주머니보다 2배는 더 컸으니까.

"기회는 자주 오지 않아요. 이 기지에 라이더가 모두 몇 명이나 있을까요? 전 그들 모두를 만나볼 생각이랍니다."

클레의 말에 다섯 라이더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이렇게 엄청난 돈이 코앞에 떨어지니 탐욕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우리가 아는 건 그리 많지 않소."

라이더 중 하나가 결국 입을 열었다. 클레의 눈이 반짝 빛났다.

"상관없어요. 어떤 정보든 좋아요. 말씀만 해 주신다면 그 돈은 여러분 거랍니다."

다섯 라이더는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고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이다. 그들 중 하나가 클레를 바라보며 대표로 말했다.

"실바요."

"실바?"

"학살자의 기간트는 붉은 실바요. 우리가 아는 건 거기까지요."

다섯 라이더는 그 말을 마치고 순식간에 달려들어 테이블 위의 돈을 챙겼다. 무려 1,600골드나 되는 거금이었다. 이 돈이면 다섯이서 나눠도 각각 상당한 규모의 가게 하나는 낼 수 있었다.

모든 라이더가 사라지자, 클레가 고개를 돌려 함께 온 호위 기사 안슈트를 바라봤다.

"어때요? 생각보다 쉽죠?"

안슈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우려가 어려 있었다. 클레는 모든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 방식이 언제나 비슷하다. 돈을 던지는 것이다.

디아만트 후작가가 비록 대륙에서 손꼽히는 거부라고 하지만 그래도 돈으로 모든 일을 해결할 수는 없는 법이다.

막말로 레늄 왕국이 작정하고 후작가를 도려내려 마음먹으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것을 막기가 쉽지 않다.

"자, 그럼 이제 실바의 라이더를 만나러 가 볼까요?"

클레는 자신만만한 걸음으로 식당에서 나갔다. 시간이 아직 이른지라 식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안슈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식당 안을 한 번 훑어본 뒤 천천히 클레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서 뭔가 작은 물방울 같은 것이 반짝이다가 사라졌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클레는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그녀는 지금 당황하고 있었다.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어떻게 실바를 50기나 배치할 수가 있죠?"

실바는 성능이 너무 모자라기에 많으면 많을수록 전력손실이 컸다. 물론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하지만 이런 격전지에서 실바의 수를 늘린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사실이 그런 걸 어쩌겠습니까."

안슈트는 그렇게 말하며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학살자는 레늄 왕국뿐 아니라 벨룸 왕국에서도 유명하다. 그들에게는 아마 악몽 같으리라.

그러니 이쪽에서는 당연히 연막작전을 써야 한다. 그게 얼마나 큰 효과를 발휘하겠는가.

물론 작전을 잘 세우지 않으면 오히려 역공을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잘 쓰기만 하면 엄청난 효과를 얻는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50기는 너무 심한데?'

10기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 그 정도면 연막을 치고도 남는다. 한데 50기나 동원했다는 건 뭔가 다른 의도가 있음이 분명했다.

"어쩌시겠습니까?"

"어쩌긴요. 50명 다 만나 봐야지요."

생각보다 많긴 하지만 그래도 불가능한 숫자는 아니었다. 어쨌든 실바라는 걸 알아낸 것만 해도 상당한 성과 아니겠는가.

"다른 가문에서는 어쩌고 있죠?"

"기지를 온통 들쑤시고 다니는 중입니다. 이러다가 적이 습격이라도 하면 큰일 날 것 같습니다."

"설마 그렇게 하겠어요? 여기 얼마나 대단한 전력이 모여 있는데요."

각 가문에서 데려온 호위 기사는 대부분 기간트 라이더였다. 당연히 기간트도 함께 가져왔다.

수십 가문이 기지를 들쑤시고 있으니, 그들이 가져온 기간트의 숫자만 해도 100기에 가깝다. 아니, 어쩌면 100기가 넘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전력이 20퍼센트나 상승했는데, 그것도 고급 전력이 그 정도 늘어났는데, 굳이 벨룸 왕국에서 습격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도 전력을 보존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안슈트는 뭔가 불안했다. 이런 안 좋은 예감이 들 때는 어김없이 나쁜 일이 벌어졌다. 이럴 때일수록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만 한다.

"혹시 이번에 어떤 가문이 여기에 왔는지 아십니까?"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안슈트는 표정을 굳히며 속으로 결심했다. 자신이 나서서 알아봐야겠다고 말이다. 상당히 더러운 느낌이 들었다. 지저분한 음모가 개입된 것 같은 예감 말이다.

☆ ☆ ☆

다음 날부터 클레는 실바의 라이더를 은밀히 만나고 다녔다. 하지만 좀처럼 진짜 붉은 학살자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결국 실력을 보고 확인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무리 아닌 척하고, 또 진짜인 척해도 실력을 따라 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이렇게 일이 안 풀릴 줄은 정말 몰랐어요."

"전 군부에서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서 정보를 차단했다는 것이 더 놀랍습니다."

안슈트는 그렇게 말하면서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최근 이곳에 모인 가문을 모두 확인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슈린 공작가와 좋지 않은 관계에 놓인 가문들만 절묘하게도 모았어.'

이쯤 되면 정말로 음모가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군부는 슈린 공작가와 사이가 좋지 않다. 그렇기에 군부가 슈린 공작가의 음모를 도와줄 리 없었다.

'내가 괜한 걱정을 하는 것인가? 내 예감이 잘못되었나?'

안슈트는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직감을 끝까지 믿기로 했다. 그는 잠시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어? 저 사람 실바의 라이더네요."

클레의 말에 안슈트가 고개를 돌려 그녀가 가리키는 사람을 확인했다.

'음?'

안슈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느낌이 이상한 사람이었다. 클레가 실바의 라이더를 만날 때 안슈트도 함께 있었다. 하지만 저런 느낌을 주는 사람은 만난 적이 없었다.

강렬한 예감 한 줄기가 척추를 타고 흘렀다.

"저 사람은 어땠는지 기억나십니까?"

"당연하죠. 저 사람은 허풍 쪽 사람이에요."

클레는 실바의 라이더를 몇 가지로 분류했다.

완전히 부정하는 사람, 자신이라고 그냥 인정하는 사람, 그리고 인정하는 걸로도 모자라서 되도 않는 허풍을 치는 사람, 그리고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애매한 태도를 유지하는 사람이 있었다.

"허풍이라고요?"

안슈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봐도 허풍이나 떨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지. 일부러 그렇게 포장했을 수도 있지.'

안슈트는 의심을 접지 않고 그를 다시 한 번 유심히 살폈다.

"왜 그러세요? 혹시 뭔가 알아내신 거라도 있으신가요?"

"아닙니다.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요? 그럼 가서 말이라도 다시 걸어 볼까요?"

클레는 그렇게 말하고는 저만치 앞서 걸어가는 사내를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이봐요!"

클레의 부름에도 사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마치 자신을 부르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클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봐요! 제론이라고 했죠? 거기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론은 눈에 이채를 띠며 걸음을 멈췄다.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상당히 영특한 여자로군.'

제론이 돌아서서 클레를 보고는 살짝 느끼한 미소를 지었다. 몇 번이나 연습해서 만들어 낸 완벽한 미소였다.

"오오. 어제 만났던 레이디로군요. 제게 무슨 볼일이라도?"

클레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제가 아니라 이분께서 좀 뵙고 싶어 하셔서요."

그렇게 말한 클레가 안슈트를 돌아봤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안슈트가 갑자기 검을 뽑았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빨랐다. 그저 검을 뽑았다는 것만 봤고, 그 뒤는 아예 볼 수조차 없었다.

안슈트의 검이 그대로 뻗어 제론의 목을 꿰뚫을 듯 쏘아져 나갔다.

검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정말로 죽일 작정으로 찌른 검이었다.

제론의 눈이 커다래졌다. 하지만 몸이 굳기라도 한 듯 움직이지도 못했다.

피슉!

우드득!

안슈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뻗어 가던 검을 너무 무리해서 멈추는 바람에 팔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뼈가 살짝 비틀렸다.

그렇게 했음에도 검을 완전히 멈추지 못했다. 검 끝이 제론의 목에 살짝 닿았다. 피가 주륵 흘렀다.

"꺄악! 아, 안슈트 경!"

클레가 너무 놀라 비명을 질렀다. 군부에 와서 검을 휘두르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행동인가. 게다가 군부 소속 라이더의 목에서 피까지 났다.

"괘, 괜찮으세요?"

클레가 당황하며 제론에게 다가갔다. 제론이 깜짝 놀라 뒤로 주춤 물러나며 손을 내밀어 흔들었다. 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제론은 나머지 손으로 목을 한 번 훑었다. 손바닥 가득 피가 묻어 나왔다.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제론의 외침에 안슈트가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나 감이 확실해서 시험한 것이다. 솔직히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의 강자라고 믿었건만.'

일부러 피하지 않은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안슈트는 진짜 살기를 담았다. 조금이라도 느슨했다면 이렇게 제론의 목에 상처를 낼 일도 없었을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이게 죄송하다고 사과로 끝날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론의 호통에 클레가 다급히 나섰다.

"제가 최대한 보상해 드리겠어요. 그러니 일단 치료부터 하세요."

클레가 나서서 몇 번이고 사과를 하자, 제론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를 봐서 한 번 넘어가 드리죠."

그렇게 말한 제론이 손을 내밀었다. 클레는 제론의 손을 의아한 표정으로 보다가 이내 알았다는 듯 '아!'하고 탄성을 흘리며 금괴 몇 개를 품에서 꺼내 제론에게 건넸다.

금괴의 크기를 보니 100골드짜리가 아니라 1,000골드짜리였다. 그런 금괴가 무려 3개나 된다. 3,000골드를 통 크게 내놓은 것이다.

하지만 안슈트가 한 짓을 무마하려면 그 정도 대가는 필요했다.

제론은 3개의 금괴를 받으며 씨익 웃었다.

"오오. 3,000골드나 주시다니, 통 크신 레이디로군요."

제론은 능숙하게 금괴를 챙겼다. 그리고 언제 다쳤냐는 듯 빙글빙글 웃으며 클레를 쳐다봤다.

"이제 볼일은 다 끝난 겁니까?"

클레는 반사적으로 안슈트를 바라봤다. 안슈트는 자신의 감이 틀린 것 때문에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지나치게 감에 의존했나?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확실하게 감이 왔다. 이 정도로 강력한 느낌은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틀렸다. 안슈트는 감이 흔들린다는 생각에 입을 꾹 다물었다.

안슈트가 그런 상태니 클레가 더 뭘 어쩔 수 있겠는가. 하지만 클레도 안슈트가 이런 행동까지 한 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3,000골드가 아깝기도 하고.'

거기까지 생각한 클레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잠시만 시간을 내주시겠어요? 제가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제론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죠. 다만 제 시간은 상당히 비쌉니다."

클레가 어색하게 웃었다.

"충분히 보상해 드리죠."

순간적으로 이 사람과 함께 식사를 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이미 내친걸음이었다.

돈이 많은 가문답게 식사도 범상치 않았다. 전장에서 쉽게 구하기 어려운 요리들로만 쫙 깔려 있었다. 일단 대접을 해야 하는 상황이기에 클레는 돈을 아끼지 않고 식사를 준비했다.

"오, 이건 뭡니까? 맛이 특이한데요?"

제론은 특별한 향신료로 구워 향을 낸 소시지를 한입 가득 씹으며 말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천박해 보였는지 클레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냥 소시지에요."

클레의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다는 건 제론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함께 있는 호위 기사 전원이 제론에게 눈총을 보내고 있었으니까.

그 눈총에 담긴 살기와 투기가 따끔따끔하게 피부를 긁을 정도였다.

제론은 몸을 한 번 부르르 떨고는 소시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억지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이렇게 멋진 식사를 대접해 주셨으니 보답을 해 드려야겠지요. 제가 재미난 얘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제론의 말에 사방에서 조여들던 살기와 투기, 눈총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클레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재미난 얘기요? 혹시 붉은 학살자에 관한 건가요?"

제론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에 흥미를 가질 만한 게 없잖습니까?"

다들 호기심이 차올랐다. 그걸 느낀 제론이 웃음기를 지우지 않고 말을 이었다.

"먼저 포위된 아군을 구한 얘기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군요. 그게 제일 멋지지요."

제론은 잠깐 뜸을 들이며 포도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후, 좌중을 슥 둘러봤다.

"그러니까 우리 기간트 부대가 정보전에서 속는 바람에 적군의 포위망에 갇혀 버렸을 때의 일입니다."

"속아요?"

"이곳은 정보전이 정말 심합니다. 거기에 실패하면 그렇게 함정에 빠지는 거죠. 아무튼 전 그 소식을 듣고 달려갔습니다. 아시죠? 붉은 학살자는 아공간이 없다는 거. 그냥 달려서 가야만 하죠."

클레는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봐도 이 사람은 붉은 학살자가 아니었다. 한데 또 이런 허풍을 치고 있으니 이젠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도착해서 딱 보니까 정말로 포위망이 촘촘하더군요. 그래서 생각했죠. 저기까지 뚫고 지나가면 다시 나올 길이 생기겠구나! 하고요."

"아, 그러셨어요?"

클레의 말투에 상당한 비꼼이 섞였지만 제론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무작정 달렸죠. 함께 간 동료들에게 뒤를 맡기고요."

클레가 살짝 지루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물론 제론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가 달려가니 적 포위망 일부가 뒤로 돌아서 막을 준비를 하더군요. 그냥 부딪치면 당연히 우리가 밀리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뛰었죠."

"뛰어요?"

"점프요. 붕 뛰어서 막아선 기간트를 뛰어넘어 버렸죠."

클레가 황당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아무리 허풍이 심하다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점프를 했다고요? 기간트를 타고요? 그것도 실바를 타고? 그게 가능한가요? 기간트가 점프해서 상대 기간트를 넘었다고요? 기간트가 몇 미터인지는 알고 계시나요?"

"아, 제가 뛰어넘었다고 말했나요? 뛰어넘은 게 아니라 뛰어서 가슴을 콱 밟아 줬죠."

"가슴을 밟아요?"

"그렇다니까요. 가슴을 콱 밟으니까 뒤로 벌렁 넘어지더군요. 그 힘을 이용해 또 뛰어서 옆에 선 다른 기간트를 밟고, 또 뛰고. 그렇게 쾅쾅쾅쾅 뛰어서 포위망을 돌파했죠."

클레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차라리 조금 전 기간트를 뛰어넘었다는 게 더 신빙성 있었다. 이건 더 말이 안 되지 않은가.

"따라오던 동료들이 나머지 정리를 했죠. 쓰러진 놈들에게 달라붙어서 검으로 쿡쿡쿡쿡. 그냥 찌르기만 하면 끝나잖아요?"

클레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 역시 말이 안 된다. 쓰러졌다고 바로 검으로 찔러 기간트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라이더가 몇이나 되겠는가.

한데 그런 식으로 돌파했으면 수많은 기간트가 쓰러졌을 것이다. 그 모두를 순식간에 달려들어 무력화시켰다고? 그걸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일단 돌파하면 끝인 거죠. 갇혔던 동료를 이끌고 다시 뛰어나왔죠."

"또 점프를 하면서요?"

"에이, 그렇게 하려면 도움닫기가 제법 필요해서 그건 안 되고요. 달려드는 적들을 이리저리 내던지면서 돌아왔죠."

"내던져요?"

"모르시나 보구나. 이렇게 손을 뻗을 때, 요렇게 잡아서 확 당겨 버리면 자기 힘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져 버리거든요. 그렇게 몇 기만 엉켜 놓으면 쉽게 포위망을 닫지 못하니 금방 빠져나왔죠."

클레가 멍하니 제론을 바라봤다. 이렇게 뻔뻔하게 허풍을 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그녀는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식사나 마저 하시죠. 허풍은 이제 그만 치시고요."

클레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말해 버렸다. 웬만해야 들어주지, 이건 심해도 너무 심하지 않은가.

"어? 허풍 아닌데? 정말로 그렇게 했다니까요? 우와, 이거 진짜 답답하네."

제론은 억울하다는 듯이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테이블에 차려진 요리를 끊임없이 먹어 치웠다.

"알았으니 일단 식사나 하자고요. 시간이 비싸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저도 돈이 아까워지려고 하니, 우리 시간을 좀 절약하죠."

그 말에 제론이 입을 꾹 다물고 빙긋 웃었다. 그리고 서둘러 음식을 먹었다.

클레는 한숨을 폭 내쉬고는 천천히, 그리고 우아하게 식사를 마무리했다.

☆ ☆ ☆

클레는 제론에게 금괴 하나를 더 주고 돌려보냈다. 약속은 약속이니 돈을 줄 수밖에 없었다. 이건 기본적인 신용에 관한 문제였다.

"설마 뻔뻔하게 금괴 하나를 요구할 줄은 몰랐네요."

"죄송합니다, 아가씨. 괜히 저 때문에……."

"아뇨. 안슈트 경의 잘못이 아니에요. 제가 호기심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죠."

클레는 그렇게 안슈트를 달래 준 후,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나저나 점점 깊은 미궁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네요. 생각해 보면 우리가 식당의 라이더에게 당했을 수도 있어요. 그렇게 엄청난 공을 세운 붉은 학살자가 실바라는 말을 덜컥 믿었으니……."

안슈트는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가장 먼저 그 말을 의심했어야 한다. 붉은 학살자가 실바라니. 대체 그걸 왜 그렇게 철석같이 믿었단 말인가.

"이제 어쩌시겠습니까?"

"하아. 다시 한 번 정보를 모아 봐야죠. 그리고 그때 우리 돈을 받아간 사람, 싹 찾아야겠어요."

"돈을 돌려받으실 생각이십니까?"

클레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대로 된 정보를 들을 거예요. 어차피 그 돈은 정보비로 쓴 돈이니까요."

클레는 그렇게 말하며 조용히 결의를 다졌다. 어떻게든 붉은 학살자를 찾아내서 포섭하겠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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