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 새로운 팀
"정말 애썼나 보구나."
제론의 말에 세나는 그동안의 고생이 눈 녹듯 사라져 버리는 걸 느끼며 미소 지었다.
"이 붉은 실바가 선배님의 기간트인가요?"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실바는 그동안 무수한 공을 세웠다. 사실 레늄 왕국보다 벨룸 왕국 쪽에 훨씬 더 유명했다.
"너무하네요. 선배님이라면 훨씬 좋은 기간트를 타실 자격이 있는데."
"됐다. 난 이 실바가 좋으니까."
"하지만……."
세나가 더 말하려 하자, 제론이 씨익 웃으며 먼저 말했다.
"그보다 엔지니어가 되다니 정말로 의외인데? 마법 쪽으로도 제법 재능이 있었잖아?"
게다가 엔지니어는 여자가 하기에는 쉽지 않았다. 기간트의 부품을 갈기 위해선 상당한 힘이 필요했으니까.
"어떻게 해야 선배님께 도움이 될지 필사적으로 생각했어요."
제론은 세나의 마음이 고마웠다. 그리고 그런 세나와 함께 여기까지 와 준 바이스도 고마웠다.
"너도 이쪽으로 올 줄은 몰랐는데. 게다가 마법으로 갈아탔다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세나가 워낙 재능이 출중해서요."
"그래? 이거 기대되는군."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세나는 혼자서 기간트를 조립하라고 해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을 쌓았으니까요."
그 말에 제론의 눈이 커다래졌다. 사실 제론도 혼자서 기간트 하나를 조립한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건 태블릿의 도움을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기 졸업이 그렇게 쉬운 건 아니잖습니까. 세나는 아카데미의 기간트 한 대를 완전히 해체한 다음 다시 조립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너무나 든든했다. 이런 대단한 실력을 가진 엔지니어와 팀이 되었으니 앞으로 훨씬 여유가 생길 것이다.
제론은 대견한 눈으로 세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세나는 그런 제론의 눈길에 부끄러운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하지만 그 시선을 철저히 즐겼다. 솔직히 죽을 정도로 열심히 했다. 이 정도 대가는 받아야만 했다.
바이스는 그런 둘의 모습을 보며 빙긋 웃었다. 말은 안 하고 있지만 그 역시 엄청나게 노력했다. 전공을 바꾸고서 조기 졸업을 하는 건 정말로 힘든 일이었다.
세나가 기간트를 해체하고 조립했듯이 바이스도 그 비슷한 일을 해냈다. 바이스는 현존하는 대부분의 마법진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걸 이용해서 기간트의 부품 몇 개를 개선했다.
웬만한 베테랑 마법사도 잘 못하는 일을 해낸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다시 모였으니 됐어.'
바이스는 제론을 다시 만난 것이 너무나 기뻤다. 솔직히 아카데미에 함께 있는 것보다는 이렇게 군대에서 함께 지내는 것이 훨씬 나았다.
'같은 팀이니까.'
바이스는 따뜻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아마 제론은 자신이 왜 이렇게 제론을 따르는지 잘 모를 것이다.
"제가 개선한 부품이 몇 개 있는데, 일단 그걸 적용해 볼까요?"
앞으로 기간트에 관한 모든 것은 세나와 바이스에게 맡기면 된다고 생각하니 제론은 마음이 편해졌다. 하지만 그건 제론이 한 가지 결심을 한 뒤에야 가능한 일이었다.
'내 비밀을 전부 말해 줄 수는 없지.'
그건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절대로 알려선 안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거기에서 파생된 지식 몇 가지와 물건 몇 가지는 얼마든지 전해 줄 수 있었다. 상황을 잘 포장해서 말이다.
"일단 자리를 좀 옮기자. 특별히 할 말도 있고."
'특별한 말?'
세나는 눈을 빛냈다. 말만 들어 보면 제론이 자신의 비밀을 알려 줄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한데 선배님의 비밀이 뭐지? 그런 게 있긴 있나?'
세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1년 전 제론이 벨루스 영지에 놀러 왔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제론은 30미터 높이의 창문에서 아래로 가볍게 뛰어내렸다.
세나는 그 이후, 제론이 익스퍼트의 실력을 가졌다고 짐작했다. 그리고 이번에 밝히려는 비밀도 아마 그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세나가 빙긋 웃으며 제론 옆에 붙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제론의 팔짱을 꼈다.
"군대에서 이래도 되나?"
제론이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말하자, 바이스가 따라나서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충분히 편의를 봐주기로 했습니다."
"그거야 너희들 얘기고. 난 좀 달라."
"다르지 않습니다."
바이스의 단호한 말에 제론은 고개를 한 번 젓고는 밖으로 나갔다.
세나는 제론의 팔에 매달려 희희낙락이었다. 자신에게 이럴 때가 오리라고는 솔직히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저 바라만 보다가 이렇게 나란히 서게 되니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세 사람은 격납고 밖으로 나갔다. 제론은 나가며 교묘하게 팔을 흔들어 세나의 손을 떼어 냈다. 아무래도 군대이기에 그런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제론은 두 사람을 자신의 숙소로 데리고 갔다. 사실 훨씬 조용한 곳이 있긴 했지만, 그곳 역시 아무에게도 공개해선 안 되는 장소였다.
또한 체른산 유적으로 가는 비밀 통로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2왕자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2왕자는 유적에 과도하게 집착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언제까지나 이곳에 머물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은 왕실로 돌아가긴 했지만, 유적에 대한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면 언제든 다시 돌아올 것이다.
지금도 유적은 2왕자가 남겨 놓은 자들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고 있었다.
숙소에 도착한 제론은 두 사람을 보며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스스로의 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내가 정말로 이들을 믿고 있나? 이들을 정말로 믿어도 되나?'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나중에 자신이 어떤 마음을 먹을지도 믿지 못하는 게 사람이다. 지금이야 굳은 결심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결심이 어떻게 변할지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론은 눈앞에 선 세나와 바이스를 믿고 있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내가 유적 하나를 가지고 있는 거 알지?"
두 사람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에어스트 가문이 무리한 유적 발굴로 몰락했다는 건 상당한 이슈였다. 그리고 그로 인해 슈린 공작가가 훨씬 높은 곳으로 도약했다는 사실 또한 유명한 일이었다.
"그 유적에서 유물 하나를 찾았어. 이건 비밀이라는 거 말 안 해도 알겠지?"
두 사람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물은 모두 슈린 공작가에서 가지고 유적은 에어스트 백작가에서 가지기로 했다는 말도 안 되는 계약에 대해서도 잘 알려져 있었다.
만일 유물을 찾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슈린 공작가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어. 이건 유적 자체에 새겨진 거라서 슈린 공작가와의 계약에 위배되지 않으니까."
하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불안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슈린 공작가가 그런 사정을 봐줄 리 없었다. 그들은 유적의 조각이나 문양까지 몽땅 뜯어 갔다. 그리고 유적 곳곳을 파헤쳐 완전히 폐허로 만들었다.
"비밀만 지키면 돼."
그 말이 옳다. 비밀만 지키면 아무 일 없을 것이다. 세나와 바이스는 새삼스럽게 제론을 바라봤다. 그런 비밀까지 얘기해 준다면 정말로 자신들을 신뢰한다는 뜻 아닌가. 기분이 좋았다.
"내가 유적에서 얻은 건 마법과 기간트에 관한 지식이야."
제론의 말에 두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법과 기간트에 관한 지식이라니. 그것도 고대 문명의 지식이라니. 만일 제론의 말이 사실이라면 너무나 엄청난 보물이었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그럼 지금이라도 유적에 사람을 보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게 아직도 남아 있다면……."
"내가 남겨 뒀을 것 같아?"
바이스는 입을 다물고 제론을 바라봤다. 당연히 그랬을 리가 없다. 자신이 제론 같은 입장이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 아까웠다. 자칫 지식을 제대로 얻지도 못하고 지웠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자, 일단 테페룸에 관한 것부터 시작해 볼까?"
제론이 말을 시작하자, 바이스와 세나는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집중했다. 한마디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제론이 해 준 얘기는 많지 않았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포로스에 관한 것이었다. 테페룸의 가공물인 포로스에 대해서 알려 주지 않고는 그 이후의 얘기가 아예 진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포로스의 비밀에 대해 들은 바이스와 세나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이건 마법의 근간을 뒤흔들 혁명이었다.
"하면 지금까지 발굴형 기간트를 제대로 분석하지 못한 이유가……."
"그건 나도 확신하지 못하겠다. 어쩌면 숨겨진 마법진이 있을 수도 있지. 포로스를 이용하면 마법진이 아예 드러나지 않으니까."
바이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사실을 가문에 알리면 말레피 후작가는 엄청난 도약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면 포로스는 어떻게 얻습니까?"
"마나 코어가 부서지면 그 안에 있는 테페룸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나?"
"예. 쓸모없는 진흙이 되지 않습니…… 설마!"
제론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진흙을 가공해서 얻는다. 그걸 특별한 방법으로 가공하면 이런 게 만들어지지."
제론은 미리 준비한 포로스를 내밀었다. 투명한 젤리 같은 물질이었다. 하지만 마법사인 바이스와 한때 마법을 전공했던 세나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은은한 마나의 흔적을 말이다.
두 사람은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 쓸모없는 진흙이 이렇게 변한단 말인가.
아니, 생각해 보면 이상할 게 하나도 없다. 테페룸이라는 엄청난 물질이 아무리 마나 코어에 있다가 폭주했다고 하지만 아무 쓸모없는 진흙이 된다는 게 오히려 더 말이 안 된다.
"앞으로는 테페룸 진흙을 미리 확보해 놓는 게 좋을 거야."
제론의 말에 바이스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테페룸 진흙은 다들 그냥 내다 버린다. 미리 연락만 취해 놓으면 어떤 방법으로든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가문의 힘을 빌리기가 좀 그렇긴 한데…….'
바이스는 제론의 눈치를 살폈다. 가문에 말을 해 두면 분명히 이유를 물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포로스 가공법이 제론에게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될 것이다.
'어쨌든 가문에서도 비밀을 지키긴 하겠지만…….'
솔직히 바이스는 자신의 가문을 완전히 믿지 않았다. 바이스와 직계로 이어진 가족은 믿어도, 가문의 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남보다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3명이나 되는 그의 배다른 형제가 그러했고, 그들을 낳은 모친 역시 믿을 수 없었다. 다들 바이스를 가주가 되는 데 걸림돌이라고만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가공법을 알고 싶으면 말해라. 너희에게라면 얼마든지 알려 줄 수 있으니까."
제론의 말에 바이스와 세나는 헛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한동안 멍하니 제론을 바라보던 두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상태로 한참 동안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그건 선배님 혼자 알고 계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맞아요."
제론이 눈을 빛내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제가 알고 있으면 가문의 압력을 견디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바이스는 제론을 바라보며 씨익 웃고는 말을 이었다.
"어쨌든 저를 통하지 않고는 포로스를 얻을 수 없으니, 가문에서 제 위상이 상당히 올라갈 겁니다."
바이스가 눈을 빛냈다.
"이참에 후계자 싸움에 뛰어드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사실 바이스는 후계자 싸움에서 한 발 물러난 상태였다. 가문의 후계자 싸움에 참여했을 때는 그야말로 진흙탕 안에서 뒹구는 기분이었다.
"후계자가 되려고?"
"아뇨. 영향력만 가지고 있으려고 합니다."
"오히려 더 위험할 수도 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지금은 군부에 있으니까요."
바이스는 이곳에 있는 3년의 시간을 그냥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 사실 가문에 테페룸 진흙을 요구하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의 가능성을 발견해 뭔가를 좀 연구해 보고 싶다고 하면 얼마든지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었다.
아무리 말레피 후작가가 군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군부는 군부였다. 후작가가 이곳에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어쨌든 그건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지."
제론은 그렇게 말한 뒤, 나머지 내용을 얘기해 주었다. 제론이 두 사람에게 전해 준 것은 붉은 실바에 들어간 기술과 마법이었다.
앞으로 실바의 모든 정비를 두 사람이 도맡게 될 테니 확실히 알고 있는 편이 나았다.
제론은 당분간 자신의 붉은 실바를 버릴 생각이 없었다. 군대를 나가는 순간까지 붉은 실바만 탈 것이다.
지난 1년 동안 실바를 조금씩 개조해서 지금은 그 성능이 약간 더 좋아졌다. 이제는 두 번 정도 점프를 해도 하체 관절이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었다. 물론 점프는 거의 쓰지 않지만 말이다.
제론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여러모로 특별한 날이었다. 다시 보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던 두 사람을 만났고, 자신이 가진 비밀 중 일부를 털어놨다.
하지만 제론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이들로 인해 잘못될 일은 없을 것이다. 그건 자신했다. 이들을 믿어서가 아니었다. 충분한 대비책을 세워 놨기 때문이다.
'이제 7층을 클리어하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겠군.'
지금 제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시간이었다. 시간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 고작 포로스에 대한 비밀과 기간트에 관한 몇 가지 기술을 가지고 그걸 얻어 냈다면 정말로 싸게 먹힌 것이다.
'그리고 이들을 내 사람으로 품는다.'
제론은 군대를 나간 이후의 일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는 영지도 있다. 그 영지에 슈린 공작가가 분명히 뭔가 수작을 부려 놨겠지만 몽땅 타파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영지와 유적을 기반으로 도약할 토대를 다져야만 한다. 바이스와 세나는 그때를 위한 포석이었다.
"자, 그럼 앞으로 잘해 보자. 우린 분명히 좋은 팀이 될 거야."
제론의 말에 세나와 바이스가 환하게 웃었다. 그 한 마디와 지금 제론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보니 고생해서 여기까지 온 보람이 느껴졌다.
바이스와 세나가 각자의 숙소로 돌아가자, 제론은 아공간을 열어 그동안 모은 테페룸 진흙을 확인했다.
지난 1년 동안 가장 치열한 곳에서 전투에 참여했다. 당연히 수많은 기간트가 부서졌고, 그중에는 회생이 불가능한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제론은 그런 기간트의 마나 코어를 반드시 확인했다. 그리고 거기서 테페룸 진흙을 싹싹 긁어모았다. 쓸모없는 것이라 여겨졌기에 모으는 데에는 어려움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모은 테페룸 진흙이 무려 수백 킬로그램에 달했다. 그 정도라면 붉은 실바를 제대할 때까지 쓰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앞으로 포로스에 대해 연구하고 그걸 이용한 마법진을 써먹으려면 훨씬 많은 양이 필요했다. 수백 톤은 있어야 제대로 포로스를 이용해 뭔가를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말레피 가문이 나선다 하더라도 그 정도 양을 구할 수는 없어.'
테페룸 자체가 비싸고 귀하다. 기간트 하나에 들어가는 양이 고작 2킬로그램 정도이다. 그러니 지금 제론이 모은 테페룸 진흙의 양이 얼마나 많은 건지 알 수 있다.
무려 수백 기의 기간트가 희생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만큼 많은 전쟁 자금이 소요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뭔가 새로운 방법을 강구해야 돼."
분명히 뭔가 돌파구가 있을 것이다. 제론은 강력한 예감을 받았다. 초고대 문명을 살펴보면 테페룸이 쓰이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다.
또한 테페룸을 가공한 물질이 엄청나게 쓰였다. 오히려 테페룸보다 테페룸 가공물이 수십만 배 더 많이 쓰였다.
그것은 테페룸이 그만큼 많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다. 초고대 문명의 유적을 잘 살피고, 또 그 지식들을 다 살피면 바닥나지 않은 테페룸 광산을 하나쯤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좋아. 일단 황제 검술에 집중한다."
제론은 차분히 계획을 세웠다. 늘어난 시간을 모두 황제 검술에 쏟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최대한 유적에 가는 시간을 늘려 7층을 클리어하고 말 것이다.
"그나저나 대체 언제 7층을 클리어할지……."
7층에 대한 고민은 끝이 없었다. 제론은 손등에 새겨진 작은 문신을 다시 한 번 살펴봤다. 여전히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일단 지금으로선 그 외엔 방법이 없으니까.'
제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난 김에 유적에 가 보기로 했다. 문득 휴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도 마나의 흐름은 과격했다. 제론은 그 한가운데 가만히 서서 사방에서 쏟아지는 마나를 차분히 지켜보기만 했다.
스윽.
아공간에서 검을 뽑은 제론은 천천히 기초 검술을 펼쳤다.
평소와 마찬가지였다. 똑바로 휘두르려 애쓰지만 검은 끊임없이 흔들렸다. 마나의 흐름이 너무 과격해서 그것이 몸의 움직임에 지나칠 정도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
"후욱."
제론은 숨을 훅 내쉬며 검을 멈췄다. 그리고 가만히 서서 사방에 흐르는 마나를 가만히 느껴봤다.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마나의 흐름은 거칠고 불규칙했다. 그 안에서 규칙을 찾아내려는 노력은 이미 몇 달 전에 해 봤다. 하지만 이곳의 마나는 마치 폭풍처럼 휘몰아칠 뿐이었다. 규칙 따위 없었다.
문득 손등에 새겨진 문신이 떠올랐다. 그 문신의 효능이 뭔지 갖은 실험을 했던 일이 하나하나 생각났다.
혹시 특별한 주문이 있는 것이 아닌가 찾아보기도 했고, 마나에 반응하는지 확인도 해 봤다. 하지만 그 어떤 시도도 효과가 없었다.
제론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오늘 세나와 바이스가 오면서 심적으로 상당한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두 사람을 만나면서 반가움과 걱정을 비롯한 수많은 감정이 휘몰아쳤다.
그 여유와 감정 덕분에 오늘은 제론의 상태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제론은 모든 의념을 손등의 문신에 집중했다.
쉬이익!
뭔가가 문신을 관통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제론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 느낌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제론은 다시 의념을 집중했다. 그동안의 수련으로 집중력 하나만큼은 엄청나게 높아졌다. 이런 마나 폭풍 속에서 기초 검술을 수련한다는 건 보통 집중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문신에 제론의 모든 의식이 하나로 모였다. 그 순간, 다시 뭔가가 문신을 관통했다.
쉬이익!
이번에는 당황하지 않았다. 제론은 계속해서 문신에 집중했다. 그리고 문신을 통과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냈다.
'마나!'
끊임없이 문신을 통과하는 것은 마나였다. 문신에 모든 의념을 집중할 때만 문신이 활성화되었고, 그 순간 마나가 문신을 통해 끊임없이 유입되었다.
이 마나는 그동안 제론이 수련을 하면서 접한 마나와는 많이 달랐다.
마나 호흡이나 검술을 통해 몸에 유입되는 마나는 상당히 희박하고 거칠다. 그리고 불순물도 많이 섞여 있었다. 그걸 회전을 통해 체내에서 정제해 아랫배나 심장에 모으는 것이다.
한데 이 마나는 더할 나위 없이 순수했다. 따로 정제를 할 필요가 없었다. 문제는 그걸 체내에 쌓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문신을 통해 들어온 마나는 온몸을 휘돌고 바람처럼 빠져나갔다.
하지만 그렇게 마나가 온몸을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상쾌함이 함께 흘러갔다.
제론은 그 기분을 놓치기 싫어서 집중을 흩트리지 않았다. 집중을 유지하는 동안 문신은 끊임없이 마나를 빨아들여 정제했고, 그것을 온몸에 흘렸다.
그렇게 한창 마나를 받아들이고 있을 때, 손등의 문신이 기이한 울림을 토해 냈다.
우우우웅!
그리고 문신이 커졌다. 작은 점 같았던 문신이 순식간에 손등을 온통 뒤덮어 버렸다. 마치 스스로 마나를 먹고 자라난 것 같았다.
일단 확장된 문신은 커진 만큼 훨씬 많은 마나를 빨아들였다. 지금까지는 그저 폭풍처럼 지나가는 마나를 받아들였다면 이제는 강제로 마나를 빨아들였다.
쉬이이이이익!
마나의 폭풍이 몸속을 휩쓸고 지나갔다.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하지만 제론의 집중력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펑! 펑! 펑! 펑!
몸속에서 뭔가가 터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그리고 그렇게 터질 때마다 가슴이 뻥 뚫리는 것처럼 시원해졌다.
제론은 시원함을 느끼며 하마터면 집중이 흐트러질 뻔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곳에서 버티는 동안 쌓인 집중력은 그 정도로 사라지지 않았다.
우우우웅!
문신이 또 진동했다. 그리고 두 번째 확장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팔 전체가 문신으로 뒤덮였다. 당연히 빨아들이는 마나의 양도 급증했다.
꽝! 꽝! 꽝! 꽝!
연달아 울리는 폭음의 강도가 강해졌다. 이번 폭음은 강한 통증을 유발했다. 하지만 통증은 나타난 것보다 더 빠르게 사라지고, 그 자리를 시원함이 차지했다.
그 뒤로도 문신의 진동이 몇 번이나 이어졌다. 그때마다 문신이 커졌고, 유입되는 마나의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나중에는 온몸을 문신이 뒤덮었고, 휘몰아치는 모든 마나가 제론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제론은 감았던 눈을 떴다.
번쩍!
강렬한 섬광이 눈에서 폭사되었다. 마나 폭풍은 멎은 상태였다. 7층은 평범한 곳이 되어 버렸다.
제론은 7층의 마나를 이용해 온몸의 마나 로드를 완벽히 깨끗한 상태로 만들었다. 그리고 마나 로드를 다 뚫어 버리고 남은 마나를 싹 흡수했다.
그렇게 흡수한 마나가 아랫배에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제론은 온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워진 걸 느끼며 검을 휘둘렀다.
쉬아악!
검에서 바람이 쏟아져 나왔다.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벽을 그 바람이 긁었다.
콰드득!
놀랍게도 벽에 흔적이 남았다. 검으로 아무리 때려도 흠집조차 나지 않던 벽인데 그저 바람이 닿은 것만으로 상처가 난 것이다.
제론은 검에서 나간 바람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마나였다.
마나를 검에서 뽑아낼 수 있는 경지, 진정한 익스퍼트에 이른 것이다.
제론은 자신의 변한 몸을 하나하나 점검했다. 예전보다 훨씬 빨라지고 강해졌다. 마나가 몸 구석구석을 거침없이 돌아다녔다. 아랫배에 잠든 막대한 마나가 제론의 의지에 따라 너무나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그리고 검을 통해 그 마나를 뽑아낼 수 있었다. 검에 희미하게 어린 기운은 무엇이든 다 잘라 낼 수 있을 것처럼 날카로웠고, 그것을 날려 버리면 제론의 의지에 따라 날카로움을 유지하거나 폭발시킬 수도 있었다.
"엄청나군."
익스퍼트라는 것이 이렇게 대단한 것일 줄은 몰랐다. 제론은 문득 세상에 3명 있다는 마스터들을 떠올렸다. 아마 그들의 진정한 경지가 바로 지금 제론과 같은 익스퍼트일 것이다.
그들은 익스퍼트에 이른 기사 300명을 가볍게 상대할 수 있다고 한다. 예전에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이렇게 익스퍼트의 경지에 오르고 나니,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어쨌든 7층을 이제야 클리어한 건가?"
제론의 중얼거림이 채 끝나기도 전에 널찍한 방 한가운데에 기둥이 솟아올랐다. 그 안에 7층 클리어에 대한 보상이 있을 것이다.
제론은 기둥으로 다가가다가 문득 떠올라 손을 올려 확인했다. 문신이 온몸으로 퍼진 것이 생각난 것이다. 손은 깨끗했다. 마치 언제 문신이 있었냐는 듯했다.
손뿐 아니라 몸의 다른 부분을 모두 확인해도 마찬가지였다. 문신은 이 방의 마나를 받아들이는 통로였던 것이다. 6층 클리어의 진정한 보상은 7층에 폭풍처럼 휘몰아치던 마나였다.
"문신에 의념을 집중하기만 하면 되는데 왜 이리 오래 걸렸는지 모르겠군."
제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기둥 앞에 섰다. 사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렴풋이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동안 보낸 시간은 인내력과 집중력을 성장시켰다.
그 두 가지가 일정 수준 이상 되지 않으면 아무리 문신에 의념을 집중해도 이번 층을 클리어할 수 없었다. 중간에 집중이 흐트러지면 말짱 헛일이 되고 말 테니 말이다.
"자, 그럼 선물이 뭔지 확인해 볼까?"
기둥 안에 있는 것은 거무튀튀한 고리 4개였다. 그냥 둥그런 고리였는데, 척 보기에도 팔찌와 발찌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걸 팔다리에 차라는 건가?"
제론은 기대감 어린 눈으로 팔다리에 즉시 고리를 채웠다.
철컹! 철컹!
고리 한쪽이 열리며 팔목과 발목에 착착 채워졌다. 그렇게 채워진 고리는 이음새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마치 팔다리에 쇠를 녹여 붙여 고리로 만든 듯했다.
"상당하군."
역시 초고대 문명의 물건들은 어느 하나 평범하지 않았다. 이런 투박한 모양의 팔찌와 발찌조차 이 정도 기능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한데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거지?"
제론은 내심 기대하며 팔다리를 움직여 봤다.
"으윽!"
제론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리고 얼굴은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팔다리를 움직이는 것이 너무나 버거웠다. 마치 진흙으로 가득 찬 공간에서 팔다리를 허우적대는 것 같았다.
"이, 이게 뭐지?"
제론은 직감적으로 팔찌와 발찌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너무 당황스러워서 일단 팔찌를 벗으려 했다. 하지만 벗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황당했다. 대체 이게 무슨 선물이란 말인가. 지금 이대로라면 걷는 것도 쉽지 않았다.
제론은 일단 팔찌, 발찌에 적응하기 위해 계속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점성이 어마어마하게 높은 진흙 속에서 유영하는 기분이었다. 점프도 어려웠다.
"이래서야 기간트 탑승도 어렵겠는데?"
기간트 탑승도 문제지만 기간트를 조종하는 건 더 문제였다. 이렇게 움직이기가 힘든데 어떻게 기간트를 다룬단 말인가.
제론은 잠시 지하로 내려갈까 고민하다가 결국 체른산 유적으로 돌아갔다. 오늘은 익스퍼트가 된 걸 그저 충분히 즐기기로 했다.
물론 온몸을 뭔가가 짓누르는 것 같아 편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