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 벨룸 왕국의 반격
제론은 유적에 들어가자마자 곧장 통제실로 향했다. 일단 전체적으로 점검을 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이곳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지금이야 아무도 지키지 않지만, 조만간 또 근위 기사들이 이곳을 장악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드나들기가 참으로 난감해진다.
제론은 2왕자와 마기어 백작이 하는 말을 다 들었다. 이 근방에서 벌어지는 일은 대부분 확인이 가능했다. 특히 제론이 원하는 부분은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당연히 유적 안에서 벌어지는 일도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었다. 태블릿을 통해서 말이다.
"권한 설정을 다시 해야겠어."
통제실에 도착한 제론은 유적의 권한 설정을 손봤다. 이미 이 유적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 파악했다. 그렇기에 가디언의 권한 설정 정도는 얼마든지 조절이 가능했다.
제론은 2왕자의 가디언 권한을 조절해 유적의 출입만 가능한 걸로 바꿨다.
또한 통제실에 들어온 김에 유적의 기능을 좀 더 세부적으로 확인했다. 입구를 통하지 않고 이곳에 들어올 방법을 찾기 위함이었다.
"찾았다."
제론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유적 입구를 통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비밀 통로가 있었던 것이다.
"일단 통제실과 연결되는 동공에는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해 둬야겠군."
제론이 지하 유적으로 향할 때, 누군가 그곳에 있으면 곤란했다. 그래서 제론은 유적의 기본 기능인 환영 마법을 통해 동공 일부를 감췄다.
적절한 조치를 취한 제론은 오늘 2왕자가 읊은 주문을 떠올렸다.
마기어 백작이 알아낸 주문은 모두 유적 내부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벼락을 밖으로 쏟아 내는 명령은 가디언이기에 쓸 수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주문은 전혀 성질이 다른 명령이었다. 하위 가디언을 부리는 명령 코드였다. 만일 2왕자 아래에 귀속된 가디언이 있었다면 그 명령 코드에 따라 움직였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유적에 남은 가디언이 하나도 없었기에 명령 코드가 먹히지 않은 것이다.
가디언 명령 코드는 2왕자에게도 당연히 쓸 수 있었다. 하지만 2왕자는 만들어진 가디언이 아니라, 인간이 가디언으로 설정된 경우이기 때문에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스스로 가디언이 되겠다고 받아들인 이상, 몇 가지 중요한 코드는 작동이 가능했다. 예를 들어 가디언 권한 해제라든가 소멸, 동작 제한에 대한 코드가 그러했다.
'분명 유용하게 쓸 때가 올 거야.'
제론은 그렇게 믿으며 통제실에서의 일을 마무리했다. 이제 당분간 제론은 틈만 나면 중앙 유적에 다녀올 수 있게 되었다.
제론은 기념 삼아 곧장 중앙 유적으로 향했다. 그리고 원 없이 수련에 매진했다. 머지않아 6층을 클리어할 수 있을 듯했다.
☆ ☆ ☆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갔다. 제론이 입대한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났다. 전쟁은 여전히 레늄 왕국에 유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또한 제론이 소속된 체른산 방어군은 큰 전투가 없어 비교적 조용했다.
그 사이 아카데미에서 한 번 졸업식이 있었지만 체른산 방어군 쪽으로는 한 명도 오지 않았다. 굳이 인원을 충당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전쟁이 한쪽으로 일방적으로 흘러가는 듯했다. 하지만 벨룸 왕국은 그냥 무기력하게 무너지지 않았다.
쿵! 쿵! 쿵! 쿵!
지축을 울리는 굉음이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기간트의 발소리였다. 어마어마하게 큰 소리인 걸로 미루어 한두 대가 아니라 수백 대 단위일 거라고 여겨졌다.
당연히 기지가 발칵 뒤집혔다.
비상이 걸린 기지에서 수많은 사람이 우르르 달려갔다. 대부분이 라이더였다.
"적 규모가 얼마나 되나?"
"500기입니다."
"500기?"
사령관이 눈을 부릅떴다. 500기라니. 대체 벨룸 왕국에서 그 많은 기간트를 어떻게 동원할 수 있단 말인가.
"여길 위해 다른 곳을 포기하는 건가? 그동안 피해가 누적되어서 남은 기간트가 그리 많지 않을 텐데?"
사령관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체른산은 전력적이나 국가적으로 그렇게 중요한 곳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굳이 여기를 치겠다는 건, 체른산 유적에 미련이 남았거나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서둘러라! 일단 오는 적을 막아야 한다!"
사령관은 그렇게 명령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후퇴 준비도 함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현재 체른산 방어군은 300기의 기간트를 보유 중이었다. 그냥 싸우면 무조건 질 수밖에 없었다.
기간트 전투는 인간의 전투에 비해 변수가 상당히 적은 편이었다. 기간트의 움직임 자체가 인간처럼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기간트의 수가 이렇게 많이 차이 나면 결과도 이미 나온 거나 다름없었다.
어차피 질 싸움에 굳이 기간트를 쏟아부을 이유가 없었다. 체른산 유적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모를까.
사령관이 그렇게 결정하고 퇴각 준비를 미리 해 놓으라고 부관에게 명령을 내렸을 때, 2왕자가 나타났다.
"사령관, 어떻게 된 일이오?"
"적 기간트 500기가 진군 중입니다."
2왕자의 표정이 구겨졌다. 이대로라면 아무리 그가 데려온 근위 기사를 투입시킨다 하더라도 패배가 확실하다.
"후퇴할 생각인가?"
"그렇습니다. 의미 없이 기간트를 잃는 것보다는 후퇴해서 전력을 보존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야 그렇지."
2왕자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유적을 다시 빼앗긴다고 생각하니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간단한 주문 한 방에 유적 입구에 서 있던 기간트를 날려 버리는 힘까지 발견했기에 더 아쉬웠다.
"이번에 후퇴하면 언제 다시 체른산을 수복할 수 있을 것 같은가?"
"글쎄요.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지원군이 언제 도착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어쩌면 이곳을 그냥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건 안 되네!"
2왕자의 외침에 사령관이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이런 격렬한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기에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2왕자는 사령관이 당황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직접 지원군을 요청하겠네. 사령관은 이곳을 최대한 빨리 수복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해 놓게."
2왕자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반대할 수는 없었다. 사령관은 당황스런 표정을 억지로 지우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미리 준비해 두겠습니다."
"좋아. 믿겠네."
2왕자는 그 말을 남기고 서둘러 관사로 돌아갔다. 지원 요청을 하려면 마기어 백작이 필요했다. 통신 마법으로 왕실에 직접 요청할 생각이었다.
사령관은 멀어져 가는 2왕자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왠지 앞으로의 상황이 결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결국 체른산을 다시 벨룸 왕국 측에 빼앗기고 말았다. 피해는 많지 않았다. 미리 상황을 파악해 적절히 대처했기 때문이다.
사실 여기에는 제론의 노력이 깃들어 있었다. 미리 주변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기에 알게 모르게 아군에게 도움을 주었다.
제론은 자신이 그런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상당히 애썼다.
예를 들면 적이 진군하는 시간에 맞춰 미리 기간트 기동 훈련을 제안해 라이더가 모이는 데 걸리는 시간을 단축하는 식이었다.
그런 식으로 몇 가지 도움을 자연스럽게 주니, 벨룸 왕국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고, 또 퇴각도 큰 피해 없이 성공했다.
문제는 2왕자였다.
2왕자는 끊임없이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의 요청은 매번 뒤로 미뤄졌다.
당연히 그때마다 격분했고, 그 히스테리를 주변에 풀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현재 전쟁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다.
벨룸 왕국은 어디서 구했는지 막대한 기간트 전력을 동원해 모든 전선에 걸쳐 레늄 왕국군을 공격했다. 실로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그로 인해 레늄 왕국 쪽으로 넘어왔던 승기가 서서히 사라지더니, 이제는 양측이 팽팽하게 맞섰다. 이대로 시간이 더 흐르면 분위기가 벨룸 왕국 쪽으로 넘어가게 될 것이 분명했다.
어쨌든 전쟁이 더 치열해졌다. 거의 매일 전투가 벌어졌고, 수많은 기간트가 부서져 나갔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라이더가 죽음을 맞이했다.
그렇게 끔찍한 시간이 계속되었다.
☆ ☆ ☆
커다란 마차 한 대가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달리고 있었다. 마차 안에는 이제 막 아카데미를 졸업한 몇 명이 긴장한 얼굴로 앉아 있었고, 앞에 자리한 군부의 장교가 그들을 유심히 살폈다.
남자 둘과 여자 하나였는데, 여자의 경우 아카데미를 졸업해도 전선에서 복무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에 상당히 특이한 경우였다.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해도 좋다."
장교의 말에 여자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우리가 가는 곳이 체른산 방어군 맞나요?"
"그렇다."
이번에는 남자가 물었다.
"최고의 격전지라고 하던데 정말입니까?"
"지금까지 체른산의 주인이 스무 번 이상 바뀌었다면 대답이 되겠나?"
"충분합니다."
긴장감이 더욱 깊어졌다. 최고의 격전지로 간다는데 긴장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장교는 세 사람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저 중 둘은 지원이란 말이지.'
복무할 부대를 지원하는 경우가 사실 많았다. 하지만 지원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쪽으로 갈 수는 없었다. 원하는 곳이 다들 편하고 안전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체른산 방어군은 가장 위험한 곳이다. 그렇기에 아카데미 출신들이 지원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한데 둘이나 지원한 것이다.
'게다가 하나는 여자라니, 정말 특이하군.'
물론 나머지 한 명은 군부에서 선택했다. 라이더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본인은 운이 없다고 여기겠지만, 체른산 방어군은 위험한 만큼 공을 세우기도 좋았다.
"특별히 우리 부대를 지원한 이유가 있나?"
장교의 질문에 여자가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아는 사람이 있거든요."
"아는 사람?"
장교가 눈살을 찌푸렸다. 고작 아는 사람 때문에 지원했다니, 이 무슨 어린애 장난 같은 짓인가.
하지만 장교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자는 계속 말을 이었다.
"혹시 부대에 제론이라는 분이 있지 않나요?"
제론이라는 말에 장교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생각해 보니 제론 역시 아카데미 출신이었다.
'제론을 동경해서 우리 부대로 온 것인가?'
하지만 제론의 활약상은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아카데미의 학생이 제론이 얼마나 큰 공을 세웠는지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설마 없나요?"
여자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만일 제론이 부대에 없다면 자신은 완전히 헛짓거리를 한 셈이니 말이다.
"제론이 아카데미 생활을 제법 잘했나 보지?"
"최고였죠."
여자, 세나가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남자, 바이스도 함께 엄지를 들었다.
"제가 보기에는 천재였습니다."
장교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제론은 천재였으니까.
"그럼 제론과 같은 팀으로 들어가도 상관없겠군."
두 사람의 눈에서 일순 광채가 일어났다. 그리고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바로 저희가 원하는 거예요. 우리는 아마 좋은 팀이 될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제론 선배는 라이더로 활약하시는 거겠죠?"
"당연하다. 우리 체른산 방어군 최고의 실바 라이더지."
"시, 실바요?"
세나와 바이스의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입이 살짝 벌어졌다. 실바라니. 그건 제론의 재능을 완전히 낭비하는 꼴 아닌가.
최소 카타락타 정도는 몰게 해 줘야 제대로 활약할 거 아닌가. 아니, 제론이라면 발굴형 기간트를 맡겨도 된다. 그렇게 된다면 아마 엄청난 성과를 올릴 것이다.
두 사람의 뇌리에 남은 제론의 능력은 그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장교는 거기에 대해서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았다. 그저 의미심장한 미소만 살짝 머금었다.
마차는 쉬지 않고 텔레포트 게이트를 향해 달려갔다.
"오늘 아카데미에서 신입 라이더가 오는 날이지?"
수석 라이더는 그렇게 말하며 격납고에서 자신의 기간트를 살피는 라이더들을 둘러봤다.
최근 전투가 점점 격렬해지고 있었다. 당연히 죽는 사람도 많이 나왔다. 그리고 주인 잃은 기간트가 우수수 쏟아졌다.
그래서 서브 라이더가 많이 필요했다. 예전에는 메인 라이더 한 명에 서브 라이더 한 명이 보통이었지만, 지금은 서브 라이더를 최소 셋은 둬야만 했다.
"서브 모자라는 사람 있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선은 여기저기로 향했다. 서브 라이더가 2명 이하인 기간트를 본 것이다.
수석 라이더의 눈이 그들의 시선을 따라 정신없이 움직였다. 다들 2명의 서브 라이더를 가진 라이더였다. 그러던 수석 라이더의 시선이 한 명에게서 멈췄다.
'가만, 저기는 혼자인데…….'
수석 라이더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피식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서브를 둘 필요가 없는 기간트였다. 서브가 필요한 곳은 많았다.
"오, 카이트! 네가 데려가면 되겠군."
카이트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아카데미 출신이건 군부 출신이건 가릴 때가 아니었다.
"좋습니다. 이번엔 제가 받죠."
카이트는 그렇게 말하며 저 옆에서 자신의 기간트를 보고 있는 제론을 힐끗 쳐다봤다.
붉은 실바 앞에는 엔지니어 한 명이 붙어서 뭔가를 열심히 손보고 있었다. 제론은 옆에서 그가 일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고 말이다.
"언제 온답니까?"
"곧 온다. 여자도 한 명 끼어 있다니까 기대해도 좋을 거야."
"여자?"
"그게 정말입니까?"
여자의 경우 후방으로 빠지는 게 보통이었다. 한데 이런 최전방 격전지에 여자가 온다니 다들 너무나 놀랐다. 그리고 여자의 생김새를 제멋대로 정해 버렸다.
"제대로 생긴 여자가 이런 데에 올 리 없지. 아마 남자에 더 가까울걸?"
"으하하하!"
다들 왁자하게 웃었다. 수석 라이더는 그 모습을 보며 빙긋 웃기만 했다. 그 역시 다른 사람과 똑같은 생각이었으니까.
격납고 내에서 웃지 않는 사람은 제론뿐이었다. 제론은 웃느라 정신없는 엔지니어를 재촉했다.
"아직 멀었습니까?"
"아,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엔지니어는 찔끔 놀라 손놀림을 빨리했다. 그가 할 일은 발목의 부품 하나를 갈아 끼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좀 까다로운 위치에 있는 부품이라서 시간이 제법 필요했다.
제론은 엔지니어가 일하는 모습을 끈기 있게 지켜봤다. 부품을 갈고 나면 나중에 제론이 한 번 더 손을 봐야 한다. 부품에 들어가는 마법진을 손봐야 하기 때문이다.
'답답하군.'
최근 제론은 참으로 답답했다. 모든 것이 정체된 상태였다. 늘어나는 것은 전투에서 세우는 공적뿐이었다.
가장 답답한 부분은 바로 중앙 유적에서의 수련이었고, 그다음이 검술이었다. 마법 역시 정체였지만 그래도 검술보다는 나았다. 마법진을 익히면서 공부라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수련에 매진해도 모자란데, 이렇게 기간트 수리까지 신경을 써야 하니 더더욱 답답했다.
유적의 6층은 클리어했다. 하지만 7층에서는 아예 진도가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7층의 수련은 기이했다. 6층에서 받은 선물도 마찬가지였다.
제론은 왼쪽 손등을 힐끗 쳐다봤다. 그곳에 기이한 문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아주 작은 문신이었기에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얼핏 보면 작은 점이 찍힌 걸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것이 바로 6층을 클리어하고 받은 선물이었다. 문제는 이게 뭘 하는 건지 아직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7층 수련과 연관이 있는 게 분명한데…….'
지금까지 매 층을 클리어하고 받은 선물은 다음 층의 수련에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당연히 그럴 거라 여겼다.
7층의 수련은 정말로 기이했다. 7층에 가면 모든 감각이 흔들렸다. 마치 남의 몸을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고, 또 시각이나 청각, 후각이 완전히 뒤틀렸다.
감각이 뒤틀리긴 했지만 그래도 뭔가를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물론 익숙하지 않았고, 또 뭘 하든 속도가 느렸지만 말이다.
문제는 그곳에서 뭘 해야 할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7층에서는 감각이 뒤틀린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뭔가가 나와서 공격을 하지도 않고, 검술을 익혀야 한다는 말도 없었다.
그래서 제론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선택을 했다. 그곳에서 검술을 수련한 것이다.
황제 검술을 수련하는 건 어림도 없었다. 그렇게 감각이 뒤틀린 곳에서 황제 검술을 제대로 펼치는 건 불가능했다. 황제 검술이 너무나 복잡했기 때문이다.
7층은 마나의 흐름마저도 뒤틀린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황제 검술을 익히다가는 큰일 날 수도 있었다.
제론이 선택한 것은 기초 검술이었다. 가장 안정적이고 단순한 검술이니 그게 최선이었다.
기초 검술을 펼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모든 것이 뒤틀린 세상에서는 검을 휘두르는 행동 하나도 간단치 않았다.
그렇게 7층을 공략한 지 벌써 몇 달이 지났다. 거의 매일 중앙 유적으로 가서 수련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후우. 누가 기간트만이라도 맡아 줬으면 좋겠군.'
기간트 수리만 신경 쓰지 않아도 정말로 큰 여유가 생길 것 같았다. 전투가 워낙 많고, 기간트 훈련도 격렬하게 하니, 수리가 너무 잦았다. 그리고 그때마다 시간을 빼앗겼다.
"신입 라이더가 도착했습니다!"
격납고 입구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상황을 지켜보던 라이더가 신병을 태운 마차가 오는 모습을 보고 달려온 것이다.
다들 씨익 웃으며 하던 일을 마무리했다.
"자, 어디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보러 갈까?"
사실 이런 건 1년 전만 해도 없던 일이었다. 제론이 들어왔을 때는 관심을 가져 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때보다 훨씬 죽음에 가까웠다. 또한 군부건 아카데미건 상관이 없었다. 다들 똑같이 죽음에 한 발 내디딘 군인이었다.
새로운 동료가 온다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자기 대신 죽어 줄지도 모르는 사람인데 말이다.
모두의 얼굴이 기대와 흥분으로 얼룩졌다. 라이더는 물론이고 엔지니어까지 우르르 격납고에서 나갔다.
멀리서 마차 한 대가 기지로 들어서고 있었다.
마차가 멈췄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수많은 사람이 마차를 에워싸고 있었다. 마차에서 가장 먼저 내린 사람은 장교였다.
장교를 본 군인들의 눈에 실망이 살짝 스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다시 기대감이 타오르는 눈으로 마차 문을 바라봤다.
두 번째로 마차에서 내린 사람은 남자였다. 그가 바로 신입 라이더로 이곳에 오게 된 맥컬리였다.
맥컬리의 뒤를 이어 바이스가 내렸고, 그다음으로 세나가 내렸다.
세나의 등장에 일순 침묵이 감돌았다. 다들 충격적인 눈으로 세나의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뭐, 뭐야! 예쁘잖아!"
"누가 남자 같다고 했어!"
기대 이상이었다. 아니, 기대를 완전히 초월해 버렸다. 그들이 기대했던 남자에 가까운 여자는 없었다. 그곳에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세나는 아카데미 내에서도 가장 아름답다고 인정받은 여인이었다. 그러니 이 정도 반응은 사실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군대라는 낯선 곳에 와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니 온몸이 경직될 정도로 긴장해 버렸다.
모두가 놀랐지만 그중 가장 놀란 사람은 바로 제론이었다.
"세나? 바이스?"
제론의 중얼거림에 세나와 바이스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선배님!"
세나가 환한 표정으로 달려갔다. 누가 말리고 할 틈도 없었다. 그녀는 그대로 제론에게 몸을 날렸다.
제론은 당황한 눈으로 세나를 안았다. 설마 보자마자 이렇게 달려와 안길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세나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세나는 제론의 품에 안긴 채 눈을 지그시 감았다. 너무나 행복했다. 이렇게 다시 만나 제론을 안고 있으니 세상을 모두 얻은 것 같았다. 그녀의 눈에 살며시 눈물이 차올랐다.
"너무 보고 싶었어요."
제론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 감정이 정리되지 않았다. 못 본 지 1년이 넘었다. 하지만 바로 어제처럼 그때의 일들이 기억났다.
"약혼은 어떻게 됐지?"
제론의 물음에 세나가 환하게 웃었다. 첫 질문이 자신의 약혼에 관한 거라면 분명히 크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뜻일 테니까.
"걱정하실 거 없다고 했잖아요. 무사히 마무리했어요."
제론은 세나의 말에 고개를 돌려 바이스를 쳐다봤다. 바이스가 난감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약혼을 거부하고 입대했습니다."
제론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내 피식 웃어 버렸다. 지극히 세나다웠다.
"선배님, 그때 약속하신 거 기억하고 계시죠?"
"약속?"
"여유가 생기면 절 받아들이시겠다고 하셨잖아요."
제론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당시의 일은 명확히 기억한다. 마나 호흡을 시작한 이후로 기억력이 상당히 좋아졌기에 웬만한 일은 다 기억했다.
당시 제론은 분명히 그저 여유가 없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리고 여유가 생기면 봐 줄 거냐고 했던 세나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데 그 대화가 완전히 변신했다. 세나의 머릿속에서 말이다. 제론은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자신에게 여유가 생기려면 최소한 중앙 유적의 모든 층을 클리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난 아직 여유가 없다."
제론의 말에 세나의 표정이 더욱 환해졌다. 그녀도 자신이 억지를 부렸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한데 그 억지를 제론이 몽땅 받아 주었다. 그건 곧 자신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뜻 아니겠는가.
세나는 제론의 품에서 살짝 떨어졌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엄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제가 선배님께 여유를 찾아 드릴게요."
제론이 흥미로운 눈으로 세나를 쳐다봤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건지 궁금했다.
"저 전공 바꿨어요."
"전공을 바꿔?"
"예. 이제부터 엔지니어 세나라고 불러 주세요."
"엔지니어?"
제론의 표정이 묘해졌다. 참으로 공교롭긴 했다. 딱 엔지니어가 필요한 시점에 세나가 엔지니어로 앞에 나타나다니 말이다.
"전 마법으로 전공을 바꿨습니다. 세나 때문에요."
바이스의 말이었다. 제론은 바이스를 보면서도 묘한 표정을 지었다. 바이스는 엔지니어에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랬기에 가문에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그 길을 포기했다니, 믿기 어려웠다.
제론의 시선에 담긴 의미를 알아챈 바이스가 또 뒷머리를 긁적였다.
"세나의 재능이 생각보다 뛰어나더군요. 그러니 전공을 바꿨는데도 이렇게 조기 졸업을 하고 여기까지 오지 않았습니까."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세나도 그렇고 바이스도 그렇고 남들보다 1년 반이나 빠른 졸업이었다. 실로 어마어마한 노력과 재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론은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아직 군복무가 2년 남아 있다. 하지만 저들은 3년을 복무해야 한다. 자신을 보고 여기까지 왔는데 말이다.
제론이 1년 더 복무해서 함께 제대하는 방법도 있었다. 어차피 아카데미 출신에게 주어진 의무는 3년 이상 군복무를 하는 것이었다. 4년을 하든 5년을 하든 아무 상관없었다.
실제로 군대가 체질에 맞아 아예 군부에 눌러앉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제론은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천천히 생각해 봐야겠군.'
군대에 있는 것이 아예 시간 낭비라면 아무리 세나와 바이스가 있더라도 남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만일 뭔가 더 얻을 것이 있다면 잘 생각해 봐야 한다.
"계속 거기 서 있을 텐가? 사령관님께 보고는 드려야 하지 않을까?"
기다리다 못해 장교가 한마디 하자, 세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는 제론 때문에 주위를 보지 못하다가 이제야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수많은 사내가 제론과 세나를 중심으로 빙 둘러 있었다. 그들의 눈은 커다랬고, 입은 헤 벌어진 채였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서 가요!"
세나가 먼저 나서서 후다닥 자리를 떴다. 바이스가 그 모습을 보고는 빙긋 웃으며 제론에게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장교가 신병을 데리고 사령관실로 가자, 모였던 라이더가 제론에게 우르르 몰려들었다.
"대체 누구야!"
"아카데미 후배? 저런 미녀가 대체 여길 왜 온 거야?"
"설마 약혼녀?"
제론은 완전히 포위된 채로 모든 라이더의 질문에 하나하나 답해 주었다. 어려울 것도 없었다. 그의 표정은 시종일관 담담했다.
그리고 그런 제론의 태도에 다들 혀를 내둘렀다. 왠지 인간 같지가 않았다.
"말레피 후작가로부터 연락은 잘 받았네. 자네가 바이스인가?"
"예, 맞습니다."
사령관은 앞에 서 있는 바이스와 세나를 유심히 살폈다. 그들과 함께 온 맥컬리는 이미 카이트에게 보낸 뒤였다. 사실 지금 하는 얘기는 누가 들어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최대한 편의를 봐주라는 부탁을 받았네."
"부탁드리겠습니다."
바이스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말레피 후작가는 슈린 공작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렇기에 사령관은 말레피 후작가의 편의를 봐줌으로써 슈린 공작가를 견제하는 효과를 바랐다.
"원하는 게 뭔가?"
"제론 선배와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제론?"
사령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울 것 없었다. 제론의 현재 팀을 해체하고, 거기에 바이스와 세나를 넣으면 된다.
"한데 실력은 있나? 제론은 우리 기지에서 가장 뛰어난 라이더라네. 팀의 실력이 형편없으면 곤란해."
바이스가 씨익 웃었다.
"다른 엔지니어나 마법사보다는 훨씬 나을 겁니다."
바이스의 자신만만한 표정에 사령관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그럼 즉시 보직 명령서를 내주지."
사령관은 일사천리로 일을 처리했다. 그리고 명령서를 받은 바이스와 세나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부대 내에서 애정 행각이 너무 심하면 곤란하네. 안 보이는 데서 하게."
세나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