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 반격
제론의 귀환은 레늄 왕국군을 발칵 뒤집었다. 분명히 죽었을 거라고 여긴 사람이 살아 돌아왔으니, 그것도 적에 대한 중요한 정보까지 가지고 귀환했으니 다들 얼마나 놀랐겠는가.
"그게 정말인가?"
"예, 확실합니다."
사령관은 제론의 보고에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만일 그 정보가 잘못된 거라면 우리 왕국이 패망할 수도 있는 문제네. 정말로 확신하는가?"
"확신합니다."
제론의 보고가 정말이라면 시간이 없었다. 제론의 탈출로 인해 이미 적이 철수를 준비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사령관은 그래도 망설였다. 만일 제론이 잘못 안 거라면, 강력한 바위에 계란을 내던지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그건 그렇고 용케 살아 돌아왔군."
사령관은 일단 말을 돌렸다. 이 부분은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길게 고민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늦어도 오늘 중으로 결정해 내일 행동으로 옮길 것이다.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라……."
사령관이 날카로운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좋아. 어쨌든 고생 많았네. 돌아가서 쉬게."
제론은 군례를 취한 후, 사령관실에서 나갔다.
사령관은 제론이 나간 뒤에도 한참이나 생각에 잠겼다. 고민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부대의 명운을 넘어 왕국의 명운이 걸린 일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성공하기만 하면 정말로 멋진 일이 될 것이다. 현재 사령관이 부릴 수 있는 기간트의 수는 300기에 달한다. 적이 400기의 기간트를 보유하고 있으니 그들의 진격을 막으려면 최소한 그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물론 그들이 버티는 사이 주변의 다른 기지에서 원군을 보내는 식으로 막아야 한다.
전선의 다른 부분에서 대부분 우위를 차지하기 위함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
한데 적이 고작 200기의 기간트만을 보유하고 있다면, 정말로 한번 해 볼 만하다.
'벨룸 왕국에서 원군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라면 더 확실한데…….'
만일 원군이 오더라도 충분한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적 전력을 상당히 깎아 낼 수 있으니 말이다.
사령관은 밤이 새도록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리고 결정을 내렸다.
"왔구나!"
제론은 사령관실에서 나가자마자 카이트를 볼 수 있었다. 그는 당장 달려들어 제론을 꽉 끌어안았다. 그렇게 한 번 안은 뒤 제론을 살짝 밀어내고는 주먹을 휘둘렀다.
제론은 고개를 슬쩍 뒤로 젖혀 카이트의 주먹을 피했다.
부웅!
바람 소리를 들어보건대, 상당한 위력임이 분명했다. 아마 맞으면 한동안 부기가 빠지지 않을 것이다.
"이 자식! 좀 맞아 주면 어떻게 돼?"
부웅! 부웅!
카이트는 그렇게 소리치며 연달아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제론은 그 주먹에 맞아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결국 제풀에 지친 카이트가 두 손으로 무릎을 짚고 헐떡였다.
"허억! 허억! 지독한 놈!"
카이트는 흥분과 호흡을 가라앉힌 뒤, 제론에게 소리쳤다.
"네놈이 뭐라고 그딴 임무를 맡아! 넌 목숨이 10개쯤 돼?"
제론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이렇게 살아 돌아왔지 않습니까. 공까지 세우고."
카이트는 질린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공을 세우긴 세웠다. 마법 트랩으로 가득한 유적을 이용해 적의 일부를 완전히 박살 냈으니 보통 공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러면 뭘 하는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얻은 공인데. 한 번 그런 식으로 공을 세우면 앞으로도 계속 그럴 확률이 높았다. 사람이란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으니까.
"앞으로 다시는 그따위 무모한 짓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라."
"그러죠."
제론이 빙긋 웃었다. 카이트가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가슴에 와 닿았다. 문득 아카데미에서 자신에게 다가오려 애쓰던 두 사람이 떠올랐다.
"자, 내일부터는 바쁠지도 모르니까 어서 돌아가죠. 오늘 중으로 실바를 수리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건 불가능하겠죠?"
"그걸 말이라고 해!"
"하하하! 가죠. 오늘은 제가 거하게 한 잔 사겠습니다."
제론은 기분 좋게 웃으며 앞장섰다.
그런 제론의 모습을 뒤에서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카이트가 이내 피식 웃더니 걸음을 옮겼다. 그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끊임없이 맴돌았다.
'이렇게 살아 돌아와 줘서 정말 고맙다. 앞으로 다시는 널 사지로 내몰지 않는다. 목숨 빚은 목숨으로 갚으마.'
카이트는 주먹을 꽉 쥐며 결심했다. 중간에 군부를 나가는 한이 있어도 제론에게 진 빚을 갚겠다고 말이다.
"전군 대기!"
아직 채 해가 떠오르지도 않은 새벽부터 사령관의 우렁찬 외침이 기지를 쩌렁쩌렁 울렸다.
어스름한 빛이 우뚝우뚝 솟은 기간트의 위용을 비췄다. 무려 300기의 기간트가 언제라도 진군할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마쳤다.
사령관은 그 모습에 가슴이 뿌듯하게 차올랐다.
"진격!"
사령관의 외침과 함께 300기의 기간트가 일제히 걸음을 옮겼다.
쿵! 쿵! 쿵! 쿵!
기간트 군단이 진격하는 광경은 장엄하기까지 했다.
제론은 붉은 실바가 망가졌기 때문에 기간트 라이더가 아닌 기사로 출전했다.
100명의 병사를 이끌고 기간트가 진군하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기간트가 잔뜩 있었지만 그 어떤 것도 간단히 내보일 수 없었다.
"자, 우리도 출발한다."
제론은 기간트가 충분히 멀어졌을 때 출발 명령을 내렸다. 임무는 기간트 전투가 모두 끝난 뒤의 정리였다.
간단해 보이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은 임무였다. 제론과 같은 임무를 받은 기사가 무려 29명이나 더 있었다. 즉, 3천 명의 병사가 뒤처리를 위해 준비 중인 것이다.
만일 도시나 영지를 공격하는 입장이었다면 뒤처리가 전투보다 더 어렵다. 치안까지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고작 3천 명의 병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물론 영지의 규모에 따라 다르겠지만 말이다.
지금의 경우 뒤처리 부대가 할 일은 적 기사나 병사를 사로잡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포로는 나중에 전후 협상을 벌일 때 상당히 유리하게 작용한다.
포로는 일반적으로 몸값을 지불하고 데려가곤 한다. 물론 병사들은 그냥 노예로 끌려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기사나 귀족의 경우는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서라도 데려간다.
제론은 적당한 속도를 유지하며 움직였다. 적 사령관의 선택에 따라 전투가 길어질 수도, 또 짧아질 수도 있었다.
'확인을 좀 해 봤으면 좋겠는데…….'
지금 당장이라도 확인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병사들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는 상황에서 태블릿을 꺼낼 수는 없지 않은가.
'어쨌든 체른산을 다시 차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제론의 진짜 목적은 바로 그것이었다. 체른산을 다시 차지해서 언제든 원할 때 유적을 이용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게만 되면 다시 중앙 유적에서 수련을 시작할 수 있다. 심장의 마나링이 6개가 되었으니, 아마 5층은 금방 클리어할 수 있을 것이다.
5층의 목적은 마법을 익히고, 그것에 익숙해지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과연 5층을 클리어하면 뭘 받게 될까?'
제론은 그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분명히 수련에 도움이 될 선물일 것이다.
"후욱."
제론은 숨을 길게 내쉬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지금은 임무에 집중할 때였다. 전쟁은 어떤 돌발 상황이 나타날지 모른다. 방심하는 순간 가는 것이다.
'정신 바짝 차리자. 저놈들이 그냥 순순히 물러나기만 할 리 없으니까.'
적 사령관을 조금 지켜본 바로는 그리 멍청하지 않았다. 또한 야심도 많았다. 그런 자가 그냥 후퇴만 할 리 없었다. 분명히 뭔가가 있을 것이다. 그래야 나중에라도 할 말이 생길 테니까.
제론은 병사들과 함께 이동하다가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뭐지?'
갑자기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진정이 되지 않았다. 굉장한 위기감이 밀려왔다.
"멈춰!"
제론은 일단 이동을 멈췄다. 제론의 느닷없는 명령에 병사들은 걸음을 멈추면서도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제론은 그 모든 시선을 깡그리 무시하고 감각을 날카롭게 벼렸다.
제론의 감각은 이번 일을 겪으며 한 층 더 발전한 상태였다. 더욱 날카로워졌고, 훨씬 많은 범위를 커버할 수 있게 되었다.
일단 집중하기 시작하자, 제론은 감각을 건드리는 뭔가를 분명히 느꼈다.
'함정!'
적 기간트는 절대 아군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기간트 100기의 차이는 간단히 메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방어만을 작정하고 지형지물을 이용해 싸우면 어떻게든 버틸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적에게 피해를 강요하기 어렵고, 후퇴가 거의 불가능해진다.
현재 벨룸 왕국의 상황으로는 절대 원군을 기다리는 건 불가능하기에 그들은 후퇴가 용이한 작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뒤따르는 보병을 건드리는 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제론은 병사들에게 손짓했다. 뒤로 더 물러나라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자신도 조금씩 뒤로 이동했다.
제론은 일단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부대를 향해 소리쳤다.
"12백인대! 멈춰!"
제론은 13백인대를 이끌고 있었다. 12, 14백인대가 비교적 가까이 있었다.
"14백인대! 멈춰!"
제론이 큰 소리로 외쳤지만 12백인대장이나 14백인대장은 제론의 말을 그대로 무시했다. 그들이 보기에 제론은 라이더일 뿐이었다. 보병의 일은 보병이 가장 잘 안다.
그들이 판단하기에 지금은 절대 멈춰선 안 된다. 기간트 전투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만에 하나 지나치게 일찍 끝난다면 도착이 늦을수록 포로 확보가 어려워진다.
12백인대장과 14백인대장은 제론의 외침을 철없는 애송이가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말이라고 여겼다.
제론은 답답했다. 자신의 말을 대체 왜 듣지 않는단 말인가. 이러다가 완전히 당할 수도 있었다.
"멈추라니까!"
제론은 목소리에 마나까지 담아 외쳤다. 그 외침이 12백인대와 14백인대를 넘어 훨씬 멀리 위치한 백인대까지 퍼졌다.
하지만 제론의 말을 들은 백인대장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 같은 판단을 한 것이다.
제론은 이를 갈았다. 그래도 제론의 외침이 완전히 허무한 결과를 낸 건 아니었다. 그 외침은 레늄 왕국의 병사들만 들은 게 아니라 기습을 위해 숨어 있던 적도 함께 들었다.
콰르르!
"으악!"
"기간트다!"
"피해!"
땅속에 숨어 있던 기간트들이 불쑥 튀어나왔다. 더 기다렸다가 나왔다면 타이밍이 딱 맞아 보병들을 거의 몰살에 가깝게 처리할 수 있었겠지만, 제론의 외침으로 다급해지는 바람에 너무 일찍 튀어나왔다.
제론은 이를 갈았다. 대체 왜 자신의 말을 무시한단 말인가. 땅에서 솟아난 기간트는 모두 12기였다. 보병들을 몰살시켜 후퇴할 때 최대한 포로를 남기지 않으려는 작전이었다.
만일 타이밍이 딱 맞았으면 아주 훌륭했을 것이다. 보병에 심각한 타격을 준 다음 크게 우회해 도망치면 레늄 왕국의 기간트들도 섣불리 추적하기 어려우니 말이다.
하지만 타이밍이 어긋나는 바람에 작전이 크게 어그러졌다. 보병들은 기간트를 본 순간부터 돌아서서 우르르 도망쳤다. 기간트를 피하는 방법을 충실히 이행하면서 말이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보병을 보는 벨룸 왕국의 열두 라이더는 이를 갈았다. 그들이 선택한 행동은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제론을 노려보는 것이었다.
"다들 뭐 하고 있나! 피하지 않고!"
제론은 그렇게 외치며 돌아서서 달렸다. 제론의 병사도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쳤다.
쿵! 쿵! 쿵쿵쿵쿵!
열두 기간트 중 2기가 제론을 쫓았고, 나머지는 즉시 후퇴했다. 시간을 끌면 곤란했다. 작전 실패보다 기간트를 잃는 것이 훨씬 큰일이었다. 그건 절대로 피해야만 했다.
제론은 다리에 마나를 집중하며 달렸다. 하지만 기간트보다 빨리 달릴 수는 없었다. 점점 간격이 줄어들었다.
"죽어라!"
몰레스에 탄 기간트 라이더가 그렇게 외치며 검을 던졌다. 그는 이걸로 제론을 죽일 수 있다고 확신했다.
꽈앙!
제론이 조금 전까지 서 있던 자리에 검이 푹 박혔다. 하지만 제론은 죽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옆으로 몇 걸음 이동해 피한 것이다.
몰레스 라이더는 황당한 눈으로 제론을 노려봤다. 방금 전 제론의 움직임을 똑똑히 지켜봤다. 믿을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제론은 마치 얼음 위를 미끄러지듯 옆으로 이동했다.
'저게 가능해?'
더 놀라운 일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달려가는 제론의 속도가 빨라진 것이다.
'저게 사람이야?'
한 발 땅을 디딜 때마다 지나칠 정도로 긴 거리를 단번에 이동했다. 땅을 디디는 순간을 못 보면 날아간다고 착각할 수 있을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가까워지던 거리가 점점 멀어졌다. 몰레스 라이더는 순간 퍼뜩 정신을 차렸다. 쫓는 것에 심취해서 너무 멀리 온 것이다.
"젠장! 돌아가자!"
몰레스와 카타락타가 달리는 방향을 바꿨다. 이대로 달리면 적진으로 돌진하는 셈이 된다. 그건 곤란했다.
쿵쿵쿵쿵쿵쿵쿵!
2기의 기간트가 크게 우회해 멀어져 갔다. 제론은 보지 않고도 그걸 알았지만 달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일단 기지로 돌아가 재정비한 뒤에 다시 나오는 게 나았다.
그리고 3시간이 지난 뒤, 정비를 마친 보병이 다시 기지를 떠났다. 기간트를 보고 도망친 병사와 기사들이 모두 기지로 돌아온 것이다. 거의 희생이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제론의 공이었다. 기지를 떠나는 백인장들의 시선이 연방 제론의 얼굴로 향했다.
대승이었다.
일방적으로 후퇴하는 적을 섬멸하는 식의 전투였는지라 피해는 적고 성과는 많았다.
다만 전쟁의 흐름을 단번에 바꿔 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레늄 왕국 쪽으로 넘어온 건 확실했다.
그리고 이번 전투의 가장 큰 공은 제론에게 있었다.
사령관은 제론의 공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또한 예전부터 세웠던 모든 공을 그냥 유야무야 넘길 생각도 없었다.
제론의 모든 공이 차근차근 정리되어 총사령관에게 보고되었고, 총사령관 역시 사령관이 특별히 지목까지 해서 보고한 제론의 공을 최대한 자세히 확인하여 국왕에게 상신했다.
그러자 바로 상이 주어졌다. 국왕이 직접 하사하는 상과 총사령관이 내린 상 두 가지가 제론에게 주어졌다.
국왕이 내린 상은 영지였다.
비록 작은 영지지만 현재 제론의 땅으로 되어 있는 유적지에 인접한 곳이었다. 이제 직할령 자체가 거의 남지 않았기에 상당히 큰 포상이었다.
물론 전쟁에서 승리하면 훨씬 더 많은 영토를 얻을 것이다. 국왕 역시 그걸 염두에 두고 영지를 내렸다.
총사령관은 상당한 돈과 휴가를 상으로 내렸다.
하지만 제론은 그런 것보다 체른산을 다시 되찾았다는 사실이 훨씬 즐거웠다. 게다가 휴가까지 얻었으니 당분간 수련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제론은 휴가를 받자마자 곧장 체른산 유적으로 향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유적에 들렀다가 근방의 도시로 간다고 말해 뒀다. 물론 다른 곳에 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유적에 들어간 제론은 일단 그곳의 상태를 확인했다. 유적의 트랩은 총 3단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현재는 2단계까지만 설정한 상태였다.
3단계를 모두 활성화시키면 유적에 들어서는 모든 생명체를 향해 트랩이 발동한다. 2단계는 유적에 충격을 줄 경우 트랩이 발동한다. 1단계는 유적의 통제실에 들어가려 할 경우 트랩이 발동한다.
제론은 체른산 공방이 끝나자마자 유적의 트랩을 2단계로 설정했다. 체른산을 빼앗기기 전의 상태로 돌려놓은 것이다.
유적 끝에 도착한 제론은 곧장 지하 유적 로비로 이동했다. 그리고 즉시 공간 도약을 통해 중앙 유적으로 갔다.
제론의 몸이 눈부신 빛에 휩싸이더니 빛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중앙 유적 로비 한가운데 빛무리가 되어 다시 나타났다.
아련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본 제론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드디어 왔구나."
하던 수련을 마무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즐거웠다.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제론은 즉시 5층으로 향했다. 심장에 새겨진 6개의 마나링이 빙글빙글 돌았다.
5층은 마법을 수련하는 곳이었다. 사방에서 마법이 쏟아지면, 그 마법을 막아 내는 것이 이 방의 수련이었다. 단, 날아오는 마법을 정확히 파악해 그것을 완전히 해체할 수 있어야만 했다.
단순히 마법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날아오는 마법이 만들어 내는 마나의 파장과 흐름을 읽고 분석해 해체하는 것이다.
만일 마법사에게 이런 방식의 수련을 하라고 하면 대번에 미친놈 소리가 튀어나올 것이다.
현재의 마법사는 마나 스틱을 이용해 마법을 구현한다. 주로 마법진을 인챈트하는 데 특화되어 있고, 실제 마법을 쓰더라도 마나 스틱을 통해 마나의 흐름을 조절한다.
당연히 마나 스틱을 통해 마나를 다루기에 섬세한 조절이 어렵다. 그런 마법사들에게 날아오는 마법을 즉각적으로 파악해 분해하라는 건 그냥 죽으라는 것과 똑같다.
하지만 제론은 그걸 하고 있었다. 날아오는 마법을 정확히 파악해서 그것을 차근차근 해체시켰다. 물론 능숙하지는 못했다.
그나마 느린 속도로 날아오는 마법은 쉽게 해체가 가능했는데, 빠른 마법, 예를 들어 라이트닝 같은 경우는 거의 해체가 불가능했다.
그때마다 제론은 마법에 맞아 뒤로 나가떨어져야만 했다. 온몸이 타들어 가는 짜릿한 고통을 느끼면서 말이다.
마법을 해체하는 수련은 제론이 빠르게 마법을 익힐 수 있게 해 주었다. 일단 마법을 해체하려면 그 마법에 대해 빠삭하게 파악하고 있어야만 했다.
제론은 죽어라 마법을 익히고, 수련에 매진했다. 그렇게 차근차근 마법 실력을 키우고, 또 마법에 대한 내성을 키워 갔다. 마나를 읽는 눈과 감각 또한 급격히 성장했다.
이 모든 것이 6개의 마나링 덕분이었다. 만일 제론이 그걸 이뤄 내지 못했다면 5층의 수련은 정말로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화르륵!
커다란 불덩이 하나가 날아왔다.
제론은 순간적으로 불덩이를 이룬 마나의 구조를 읽고 만들어진 역순으로 해체했다.
화륵!
한순간 불이 크게 타오르더니 사라져 버렸다. 그 순간 제론은 이질적인 마나의 흐름을 느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나의 흐름을 파악해 그것을 그대로 해체해 버렸다.
빠지직!
라이트닝의 전조였다. 나타나려다 사라져 버린 라이트닝이 주변에 잔벼락을 흘렸다.
제론은 식은땀을 흘리며 감각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사방에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하나하나가 치명적인 마법이었다.
제론의 심장에 위치한 6개의 마나링이 맹렬히 회전했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 있는 마나의 흐름부터 차근차근 장악해 나갔다.
무서운 속도로 마법이 해체되었다. 제론의 집중력은 최고조에 달했다. 마법이 발현되는 속도를 파악해 순차적으로 하나하나 마법을 해체했다.
휘우웅!
바람이 한 차례 불었다. 마나의 흐름이 만들어 낸 바람이었다. 그 바람과 함께 모든 마법이 완벽하게 해체되었다.
제론은 뿌듯한 성취감을 느꼈다. 드디어 5층을 클리어한 것이다. 앞으로 어떤 상황에서건 마법을 해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 마법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는 전제가 붙긴 하지만 말이다.
지이잉!
5층을 클리어하기 무섭게 기둥 하나가 올라왔다. 매 층을 클리어할 때마다 주어지는 선물이었다.
기둥으로 다가간 제론은 카드와 검 하나를 볼 수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상당히 훌륭한 검이었다. 검신에 잔뜩 새겨진 문양은 분명히 마법진이었다. 마법이 인챈트 된 검이었다. 게다가 이 검은 통짜 테페룸으로 된 검이었다. 검을 쥔 순간 제론은 그 사실을 바로 알 수 있었다.
테페룸에 마법진을 새길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또 그 마법진이 제대로 동작한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제론이 검을 쥐자 마법진이 일제히 빛을 발하더니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검은 겉보기에 지극히 평범하게 변했다. 하지만 내재된 힘은 그대로였다.
제론은 카드를 들어 에너지를 공급했다. 카드가 가루가 되어 부서지며 제론의 몸에 흡수되었다. 이제는 카드의 재료도 테페룸의 가공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초고대에는 이렇게 테페룸을 이용한 물건들이 상당히 많았던 모양이라고 생각한 제론은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상념을 지우고 집중했다.
예상했던 대로 새로운 검술이었다. 이제 기사 검술에도 상당히 익숙해져 있기에 새로운 검술을 본 제론의 눈이 강렬하게 빛났다.
기사 검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검술이었다. 게다가 마나의 운용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려웠다.
이런 검술이 어떻게 가능한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검술의 이름도 엄청났다. 제국 황제 검술. 즉, 황제가 익히는 검술이라는 뜻이었다.
'황제도 검을 익혀야 하는 건가? 그럼 여긴 황제를 교육하는 곳인가?'
제론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지만 왠지 직감적으로 그건 절대 아닐 것 같았다.
체른산 유적을 이 중앙 유적에 등록시키며 이곳이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알았고 어쩌면 황제를 위한 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가능성일 뿐이었다.
제론은 이곳의 목적은 그보다 훨씬 더 거대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예를 들면…… 신이라거나.'
제론은 자신이 생각하고도 너무 허황되고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신을 만들기 위한 교육기관이라니 이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생각인가.
지금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제론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황제 검술에 집중했다. 그리고 거기에 푹 빠져들었다.
☆ ☆ ☆
제론이 중앙 유적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을 때, 체른산 방어군은 바쁘게 움직였다.
체른산을 다시 차지하고 적에게 심각한 타격을 줬으니 그 여세를 몰아 더 많은 성과를 위해 새로운 작전을 준비 중이었다.
체른산 방어군은 무려 300기의 기간트를 보유 중이었다. 그 정도 전력이라면 주변의 적 기지들을 초토화시킬 수 있었다.
일단 기지 방어용으로 100기 정도 남겨 두고 200기의 기간트로 주변을 휩쓸면 상당한 성과를 얻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방어군 사령관은 욕심을 냈다. 가능성이 지극히 높은 욕심이었다. 아마 작전을 시작하면 벨룸 왕국은 크게 긴장할 것이다.
그렇게 긴장감을 조성해 병력을 이쪽으로 집중시키는 것만으로도 전쟁을 효과적으로 이끌 수 있었다.
체른산 방어군은 최대한 서둘러 작전을 이행했다. 그리고 원하던 성과를 얻어 냈다.
전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