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 탈출 작전
벨룸 왕국 진영은 발칵 뒤집혔다. 갑자기 유적이 미쳐 날뛰는 바람에 안에 투입된 모든 병력이 사라져 버렸으니 당연하다.
사령부의 분위기도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사령관인 카이아스는 입을 꾹 다문 채 부관들을 쳐다봤다.
이윽고 카이아스가 입을 열었다.
"탐사는 여전히 불가능한가?"
"그렇습니다. 유적에 들어가려고만 하면 벼락이 치는 바람에 엄두도 못 내고 있습니다."
"기간트로도 안 되는가? 발굴형 기간트라면 그깟 벼락쯤이야 얼마든지 버틸 수 있을 것 같은데."
만일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이라면 이런 말을 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무리 기간트라도 진짜 벼락을 맞으면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마법으로 일으킨 벼락이라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마법으로 만든 벼락은 익스퍼트에 오른 기사가 테페룸이 섞인 검을 들고 있으면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다. 당연히 수준 높은 마법사도 막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니 마법에 대한 내성이 있는 기간트라면 말할 것도 없다. 더구나 발굴형 기간트는 일반적인 기간트보다 마법에 대한 내성이 훨씬 뛰어났다.
카이아스도 그걸 염두에 두고 물은 것이다. 하지만 부관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합니다. 이미 해 봤지만 아무리 발굴형 기간트라 하더라도 그 벼락을 쉽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카이아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쉽게 견딜 수 없다고? 그렇다는 건 견딜 수는 있다는 뜻 아닌가. 유적 안에 쌓인 기간트를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 그렇게라도 꺼내야 할 것 아닌가."
"이미 시도해 봤습니다만, 작업이 불가능했습니다."
부관은 카이아스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벼락이 너무 강해 서 있으면 균형을 잡기도 어렵습니다. 게다가 대 마법 방어진도 한계가 있는지라……."
"그럼 어쩌자는 건가? 이대로 포기하자고?"
"그것이……."
부관은 말을 잇지 못하고 주변 다른 부관들을 도와달라는 듯 바라봤다. 하지만 다들 시선을 돌리며 외면했다. 그들 역시 할 말이 없었다.
"허어. 어이가 없군. 좋다. 어쩔 수 없지. 내일까지 최대한 방법을 찾아봐라."
그 말을 하는 카이아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때까지 성과가 없다면 그냥 이대로 보고를 해야만 한다. 자신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분명히 피해를 받을 것이다.
'다 끝났군.'
카이아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그렇게 불안했던 모양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레늄 왕국이 교묘하게 만든 함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더욱 답답해졌다.
"뭐 하고 있나! 다들 나가서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카이아스의 호통에 부관들이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 어찌나 놀랐는지 미처 군례도 취하지 못했다.
그들이 모두 나가자, 카이아스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지독한 두통이 밀려왔다.
☆ ☆ ☆
제론은 유적 입구에서 외부의 동태를 살폈다. 유적의 통제실에서 외부를 확인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 기능은 없었다. 아니, 세월이 너무 오래되어 유적 외부에 설치되었던 마법진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한밤중이었기에 유적 밖은 깜깜했다. 제론은 달빛으로 인해 드리워진 그림자 속에서 주위를 유심히 살펴봤다.
'많기도 하군.'
유적 주위에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밤이 늦었는데도 다들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만일 이런 상황에서 나가면 대번에 들키고 말 것이다.
곳곳에서 횃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유적 입구 가까운 곳에 십여 명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심각하게 대화 중이었다.
제론은 귀에 마나를 집중해 청력을 높였다.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뭔가 돌파구가 열리지 않을까 기대했다.
"일단 생명이 없는 물건이 들어가면 괜찮은 것 같소."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하면 기간트도 괜찮은 것 아니겠소?"
"기간트 내부의 생명을 찾아낸 걸로 보이오."
그들은 유적 안에 들어갈 방법에 대해 논의 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논의를 계속해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입구 근처에 있는 것들이라도 수거해야 하지 않겠소?"
"거기까지 들어가는 게 가능하겠소?"
"강철을 이용해 긴 낚싯대를 만들어서 낚는 건 어떻소? 기간트를 쓰면 그걸 다루는 건 문제가 아닐 것 같은데."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쯤 해 볼 만한 방법이었다. 문제는 어디쯤 기간트가 놓여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유적 내부는 너무 어두웠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될 정도로 어두워서 유적 외부에서는 내부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것은 유적을 보호하는 마법의 효과 중 하나였지만, 이들이 그걸 알 리 없었다.
제론은 입구에 서서 그 논의를 모두 듣고는 피식 웃었다. 참으로 특이한 발상 아닌가.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들도 나름대로 절실하기에 저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론은 입구에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계속 동태만 살폈다. 그렇게 그날은 큰 성과 없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다음 날, 벨룸 왕국군은 기간트까지 동원해서 거대한 강철 낚싯대를 만들었다.
이른 아침부터 꽝꽝대니 그 소리가 유적 안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제론은 깊은 잠에 빠졌다가 그 소리에 깼다.
"정말로 할 모양이네."
제론은 입맛을 한 번 다신 다음 주위를 둘러봤다. 동공 한가운데에서 잤는데, 생각보다 불편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왠지 낯이 익어."
동공의 모양을 보니 뭔가 익숙했다. 이유는 금세 떠올랐다. 지금까지 왜 그 생각을 못했는지 이해하지 못할 정도였다.
"내 유적과 똑같이 생겼군."
유적의 모양은 틀렸지만 동공이 똑같았다. 동공의 유무가 아니라, 동공의 형태가 똑같았다. 규모도 비슷한 듯했다.
제론은 문득 팔을 들어 팔찌를 쳐다봤다. 처음 초고대 문명의 유적을 찾아 들어가던 생각이 떠올랐다.
"아네모스."
휘류루루루룽!
제론의 부름에 바람이 뭉치며 정령이 나타났다. 제론은 즉시 정령을 팔찌에 넣었다.
화아악!
팔찌가 빛났다. 그리고 그 빛이 제론을 휘감았다.
우르르르릉!
유적 전체가 흔들렸다.
그리고 제론은 몸이 아래로 쑥 내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어딘가로 빨려가는 듯했다. 아주 익숙했다. 초고대 문명의 유적에 들어갈 때마다 느끼던 것이었으니까.
눈앞이 깜깜해졌다가 다시 밝아졌다. 그리고 화려한 문양이 가득 찬 공간에 도착했다.
"이럴 수가……!"
제론은 정말로 놀랐다. 설마 이 유적 아래에도 이런 식으로 또 다른 유적이 존재할 줄 몰랐다.
"설마 여기도?"
제론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쳐다봤다. 투명한 천장을 통해 유적 내부의 모습이 보였다. 그곳과 아주 똑같았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스터 인증 시작합니다.
지잉!
붉은 빛줄기가 제론의 이마를 향해 쏘아졌다. 제론은 이 역시 경험한 일인지라 가만히 있었다.
―확인 완료. 시스템을 가동합니다.
유적의 문양들이 차례차례 점멸했다. 마치 주인을 환영하기라도 하는 듯했다.
제론은 신기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봤다. 자신의 유적과는 조금 달랐다. 하지만 상당 부분 유사했다.
"설마 이렇게 모든 유적 지하에 이런 식으로 또 다른 유적이 존재하는 건 아니겠지?"
제론은 과연 이 유적에는 뭐가 있을지 궁금했다. 분위기를 보니 자신의 유적과는 좀 다른 듯했다.
"일단 아래층이 존재하나 확인해 볼까?"
제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로비 한가운데 섰다. 그리고 아래로 내려갔다.
"역시!"
역시 지하층이 존재했다. 제론은 사방을 둘러봤다. 이곳도 수련을 위한 장소일 수도 있었다. 만일 그렇다면 또 선물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기본 물품이라도 받고 내려왔어야 했는데."
제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사방 벽에 문양이 가득했다. 문양들은 빛나고 있었는데, 그 빛을 통해 마나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마스터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콜로니의 통제실은 5층에 있습니다.
제론은 그 말에 눈을 빛냈다. 이곳은 자신의 유적과는 달랐다. 원하면 5층까지 곧장 내려갈 수 있는 모양이었다.
더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다음 일은 일단 통제실로 간 다음에 생각하는 게 낫다. 제론은 곧장 지하 5층으로 내려갔다.
☆ ☆ ☆
카이아스는 한심한 눈으로 유적 입구에서 몇 기의 기간트가 벌이는 촌극을 쳐다봤다.
갈고리가 달린 긴 강철봉을 유적 안으로 쭉 집어넣은 뒤 이리저리 휘젓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기간트가 걸리면 끌어내겠다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휘저어도 갈고리에 걸리는 게 없었다.
"강철봉이 너무 짧은 모양입니다!"
기간트 라이더의 외침에 좀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부관들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정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이게 벌써 세 번째였다. 강철봉을 두 번이나 바꿨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또 이 모양이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멍청한 놈들."
카이아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대놓고 뭐라고 욕할 수는 없었다. 그 역시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했으니 말이다.
'저 안에 대체 얼마나 많은 기간트가 잠들어 있는 건지…….'
일단 불을 밝히고 유적 발굴을 돕기 위해 들어간 기간트만 정확히 206기였다. 그뿐 아니다. 하트넥 공작을 비롯한 귀족의 호위 기사가 착용하고 있던 기간트가 또 수십 기였다.
귀족의 호위 기사가 착용하는 기간트가 예사로울 리 없다. 최소한이 몰레스였고, 개중에는 베르를 착용한 자들도 있었다.
만일 그 모든 걸 고스란히 잃어버린다고 생각하면 실로 천문학적인 손실이었다.
누군가가 그 손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일단 하트넥 공작에게 몽땅 뒤집어씌우는 수밖에.'
그게 최선이었다. 부관들이나 나머지 기사들도 하트넥 공작이 하는 행동을 다 지켜봤으니 아마 뒤집어씌우기도 편할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레늄 왕국에 당했다는 점이지.'
그 책임은 피하기 어려웠다. 어쨌든 총사령관은 카이아스였다. 그 생각만 하면 지독한 두통이 찾아왔다.
"후우. 더 볼 수가 없군."
카이아스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굉음이 울렸다.
꽈르르르릉!
빠지지지직!
다급히 고개를 돌린 카이아스는 경악한 눈으로 유적 입구를 바라봤다.
강철봉을 잡고 있던 3기의 기간트가 봉을 잡은 채로 나가떨어졌다. 기간트의 몸체를 타고 흐르는 뇌전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멍청한! 트랩을 또 건드리다니!"
강철봉을 얼마나 세게 휘저었으면 트랩을 건드린단 말인가. 카이아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당장 봉을 놓고 유적에서 떨어져!"
카이아스의 외침에 즉각적으로 반응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고작 두어 명만 무작정 달렸고, 나머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카이아스를 바라봤다.
그리고 일이 터졌다.
꽈르릉!
수십 줄기의 벼락이 유적에서 쏟아져 나왔다. 유적 가까이 있던 기간트들이 가장 먼저 벼락을 뒤집어썼다. 그리고 기간트를 딛고 사방으로 퍼져 나간 벼락이 근방에 있던 사람들을 덮쳤다.
꽈르릉! 꽈르릉!
빠지지지직!
"크아아아악!"
"아아악!"
연달아 비명이 터졌다.
벼락이 워낙 빨라 미처 피하고 자시고 할 틈도 없었다. 처음 도망친 사람 중 한 명만 간신히 살아남았고, 나머지는 몽땅 새까맣게 타 죽었다.
파직! 파직! 파지지직!
기간트와 강철봉을 타고 잔벼락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흘러갔다.
카이아스는 그 처참한 광경에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정말 짜증 나는군."
진전은 없는데, 피해만 가중되고 있으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지금 체른산을 두고 대치 중인 레늄 왕국군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사실 지금 레늄 왕국과 벨룸 왕국의 전쟁은 상당히 미묘한 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데 단번에 200기가 넘는 기간트의 공백이 생겼으니, 레늄 왕국이 이를 눈치채고 전력을 집중하면 정말로 큰 곤란을 겪게 될 것이다.
'여기가 완전히 밀려 버리면?'
카이아스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이곳에 남은 기간트는 200기에 불과하다.
원래는 500기였지만 200기는 유적에서 잃었고, 100기는 다른 전선으로 보내 빈틈을 메웠다.
이런 상황에서 레늄 왕국이 여유 전력을 이쪽으로 집중시켜 밀어 버리면, 순식간에 200기의 기간트가 더 사라져 버릴 위험이 있었다.
그렇게 되면 전쟁은 끝이다. 끊임없이 밀리다가 결국 패망하게 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온갖 치욕을 무릅쓰고 협정을 맺거나.
'절대 들키면 안 돼.'
카이아스는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몸을 돌렸다. 당장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 이곳의 전력을 들켜선 안 된다. 아니면 서둘러 이곳을 포기하거나.
☆ ☆ ☆
제론은 가만히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마나가 그의 세포 하나하나를 자극했다. 그의 표정은 경이로 가득했다.
이 경이로운 유적의 주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이 초고대 문명의 유적은 로비를 제외하면 총 5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통제실인 5층에 도착한 제론은 이 유적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제론이 처음 얻었던 유적과는 달리 참으로 친절했다. 물론 언어를 완벽하게 익히고 있어야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제론은 이미 초고대 문명의 모든 언어를 익혔기에 아무런 문제없이 유적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제론이 처음 얻었던 유적과 달리 이 유적의 로비에는 별다른 것이 없었다. 그저 아래로 내려가는 기능과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몇 가지 편의 시설만 존재할 뿐이었다.
1층은 수련실이었고, 2층과 3층은 숙식을 해결하기 위한 장소였다. 그리고 4층은 이 유적의 진짜 기능인 정보 수집을 위한 수많은 아티팩트를 보관하는 곳이었다.
현재 제론은 1층 수련실에 앉아 마나 호흡을 통해 아랫배와 심장의 마나를 더욱 단단히 다지는 중이었다.
이 유적은 초고대 문명의 지배자들을 위한 곳이었다. 많은 인원이 상주하며 근방의 모든 정보를 수집했다.
제론은 이미 유적의 주인이 되었기에 임의로 유적을 이용할 수 있었다. 사람이 직접 통제하면 훨씬 세밀하고 다양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지만, 유적의 인공지능에 맡겨도 근방의 정보를 얻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4층에 보관 중이던 수많은 아티팩트는 오랜 잠을 깨고 현재 근방에 퍼져 있었다.
이 유적이 커버할 수 있는 범위는 사방 100킬로미터였다. 그 정도면 전황을 아는 데에는 충분했다.
제론은 태블릿과 이 유적의 통제실을 연결했다. 그래서 언제든 원하는 때에 이 근방의 정보를 열람할 수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게 전부라는 사실이었다. 이 유적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오로지 정보뿐이었다. 그것도 반경 100킬로미터의 범위에 국한한 정보 말이다.
제론은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이 정보는 제론에게 정말로 큰 무기였다. 탈출에 큰 도움이 될 테니 말이다.
현재 유적 근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유적의 트랩을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수많은 벼락이 벨룸 왕국군을 무차별 공격했기 때문이다.
벨룸 왕국군은 일단 유적에서 한 발 물러난 상태였다.
"정말 큰 걸 얻었어."
제론은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로비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얻은 가장 큰 것은 사실 정보가 아니었다.
"설마 그게 가능할 줄이야."
처음 발견한 유적과 이곳을 연결할 수 있었다. 이곳 로비에서 언제든 원하면 제론의 유적 로비로 이동이 가능했다.
제론이 처음 발견한 유적이 중심이었다. 이곳은 그 유적의 하부 조직으로 편입된 것이다. 세계에는 이런 식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유적이 무수히 많았다. 그 모든 곳을 연결하는 게 가능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나는 셈이지."
모든 유적을 얻었을 경우에 그렇게 된다. 제론은 충분히 시간을 투자해 대부분의 유적을 얻겠다고 다짐했다. 그것은 앞으로 제론이 하려는 일에 정말로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제론은 당장이라도 중앙 유적으로 가고 싶었지만 일단 꾹 참았다. 앞으로도 얼마든지 갈 수 있었다. 지금은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계획을 머릿속으로 다시 한 번 차근차근 정리한 제론은 로비로 이동했다.
드디어 탈출할 시간이 되었다.
붉은 실바 한 기가 미끄러지듯 걸어가고 있었다. 제론이 탄 실바였다.
바닥을 미끄러지듯 걷기 때문에 기간트가 걸을 때 나던 특유의 땅울림 소리가 전혀 나지 않았다.
웬만한 라이더는 꿈도 꾸지 못할 조종 실력이었다.
발바닥이 땅에 닿을 듯 말 듯하게 미끄러지듯 걷는 건, 균형감각은 물론이고 울퉁불퉁한 바닥을 순간적으로 보고 높낮이의 변화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뿐이랴, 발을 내딛는 속도가 너무 느리면 균형을 잃어 비틀거리게 된다. 비틀거리다가 내딛는 발에는 더 큰 소리가 나기 마련이다.
제론은 지금 걸음으로 자신의 감각이 한 층 더 성장했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예전에도 이렇게 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자연스럽고 빠르게는 불가능했다. 또한 중간 중간 불안하게 흔들리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치 진짜 몸을 움직이는 것처럼 너무나 간단하게 해내고 있었다.
붉은 실바는 어느새 유적 입구에 도착했다. 유적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기부터가 중요했다.
벨룸 왕국군은 체른산을 중심으로 반경 20킬로미터를 장악했다. 예전 체른산 방어군이 있던 기지도 당연히 장악한 상태였다.
그곳에서 10킬로미터를 더 가야 레늄 왕국군의 새로운 기지가 있었다. 거기까지 가야만 한다.
제론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꼭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벨룸 왕국군은 결코 섣불리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자칫 레늄 왕국이 오해하기라도 하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현재 벨룸 왕국군은 자신의 전력을 꼭꼭 숨겨야 할 입장이었다. 200기에 달하는 기간트의 공백을 어느 정도 메우기 전까지는 말이다.
붉은 실바가 예의 소리 없는 걸음으로 유적을 나섰다.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조금만 더 걸어가도 특유의 붉은빛은 적의 눈에 고스란히 띄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제론은 그것도 모두 염두에 뒀다.
"자아, 가 볼까?"
최대한 유적에서 들키지 않고 이동할 수 있는 거리라고 해 봐야 고작 수백 미터 정도였다. 제론은 그렇게 이동한 뒤, 그대로 내달렸다.
쿵쿵쿵쿵쿵!
유적이 있던 위치가 산 중턱이었기에 내리막길을 통해 속도가 점점 붙었다.
그냥 사람이 달리더라도 이런 식이면 금방 균형을 잃고 바닥을 구르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붉은 실바는 용케 균형을 잃지 않았다. 또한 속도를 늦추지도 않았다.
붉은 실바가 뛰며 큰소리가 나기 시작하자, 수많은 사람이 그 모습을 발견했다.
"저거 뭐지?"
"기간트다!"
"어떻게 된 건지 알아봐!"
벨룸 왕국이 곧장 대응을 했다면 탈출이 조금 더 어려워졌을 것이다. 제론도 그렇게 될 것을 예상하고 계획을 짰다.
하지만 막상 그런 상황이 되자, 벨룸 왕국군은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상부에 보고를 하고, 사령부의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 지켜보며 대기했다.
비록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이 성패를 완전히 갈라 버렸다.
"일단 막아라!"
"기간트를 소환해!"
곳곳에서 기간트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붉은 실바가 산 아래로 내려온 뒤였다. 어마어마한 속도를 얻은 상태로 말이다.
쿵쿵쿵쿵쿵쿵쿵!
붉은 실바의 다리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당연히 달리는 속도도 빨랐다.
옆에서 달려오던 기간트는 붉은 실바를 잡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나마 앞쪽에 있던 십여 기의 기간트가 길을 막고 단단히 버틸 준비를 했다.
아무리 실바라도 달리는 속도를 보면 막는 순간 충격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걸 예상해 다들 몸을 숙여 충돌 순간 균형을 잃지 않도록 대비했다.
쿵쿵쿵쿵쿵!
붉은 실바가 맹렬히 그들을 향해 달려갔다. 이대로라면 충돌을 면치 못할 것이고, 실바는 크게 뭉그러지고 말 것이다.
어쨌든 실바를 막아선 기간트는 몰레스와 카타락타였다. 실바보다 출력도, 성능도 뛰어난 기체들이었다.
쿵쿵쿵쿵쿵!
붉은 실바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충돌 직전의 순간, 길을 막아선 기간트들이 더욱 자세를 낮췄다. 붉은 실바가 달려드는 기세가 너무 거칠어 자신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갔다.
꽈앙!
땅이 뒤집히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그리고 그 소리와 함께 붉은 실바가 공중에 붕 떴다.
자세를 한껏 낮췄던 기간트들은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진 실바 때문에 크게 당황했다.
꽈앙!
그들은 뒤에서 들린 굉음에 일제히 돌아섰다. 그리고 빠르게 멀어지는 붉은 실바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쿵쿵쿵쿵쿵!
속도가 점점 줄어들고 있긴 했지만 여전히 빨랐다. 누구도 붉은 실바를 쫓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뭣들 하고 있나! 어서 쫓아! 저놈을 놓치면 안 돼!"
카이아스의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제야 부랴부랴 수십 기의 기간트가 움직였다.
쿵쿵쿵쿵쿵!
최대한 빠르게 달렸지만 처음 벌어진 거리를 좁히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그들은 붉은 실바가 레늄 왕국의 기지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렇게 제론의 탈출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물론 탈출이 끝난 제론의 붉은 실바는 대대적인 수리가 필요할 정도로 망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