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6/217)

Chapter 4 유적의 주인

제론은 숙소로 돌아가 침대에 누워 태블릿을 꺼냈다. 일단 라이더의 경우 개인실을 쓰기에 누군가가 볼 염려는 없었다.

하지만 혹시 모르기에 언제든 태블릿을 치울 수 있도록 아공간을 열어 놨다.

제론은 복사한 설계도를 살펴봤다. 상당히 복잡한 설계도였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대충 확인한 것만으로도 대략적인 모양은 알 수 있었다.

"기간트가 아니로군."

제론은 살짝 실망했다. 만일 기간트의 설계도라면 실바나 다른 기간트를 개조하거나 할 때 큰 도움이 될 텐데 말이다.

일단 좀 더 살펴보고 분석할 필요가 있었다. 제론은 정확히 이것이 어떤 설계도인지 파악하기 위해 더욱 집중했다.

엄청나게 많은 마법진이 복잡하게 얽힌 물건이었다. 그냥 아티팩트가 아니었다. 이건 살상을 목적으로 하는 무기가 분명했다.

그동안 늘어난 마법 실력과 태블릿의 지식, 그리고 태블릿에 내장된 기능이 합해지니 그 복잡한 설계도가 차츰 베일을 벗었다.

제론은 눈을 빛냈다. 태블릿에 완성된 형태의 무기가 입체적으로 빙글빙글 돌았다. 기간트의 팔에 장착하는 형태의 무기였다.

평소에 마나를 충전했다가 그걸 이용해 강력한 마법을 쏟아 내는 무기였다. 마나를 완전히 충전하는 데 일주일이나 걸리고, 고작 5발을 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위력은 엄청났다. 제대로만 맞으면 웬만한 기간트를 반파시킬 수 있을 정도라니, 어마어마하다고 할 수 있었다.

더구나 그 기준이 발굴형 기간트 아닌가. 발굴형 기간트는 제작형에 비해 내구성이 어마어마하게 높다. 게다가 마법에 대한 내성이 뛰어나 일단 탑승만 하면 마법 걱정은 거의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발굴형 기간트를 반파시킬 수 있다면, 엄청난 전략무기가 될 수 있었다.

'만들고 싶어도 재료를 구하는 것부터 문제로군.'

그냥 강철로 만들 수 있는 무기가 아니었다. 아주 특별한 금속과 마나 스톤이 필요했다. 그리고 테페룸도 필요했다.

제론은 일단 이 무기의 설계도를 통해 마법에 대한 공부를 하기로 했다. 지금은 그걸로 만족하지만, 나중에는 어떻게든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그나저나 이 태블릿, 정말 대단하긴 대단하군.'

사실 제론이 가져온 설계도는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미완성 설계도였다. 그걸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태블릿 덕분이었다.

태블릿에 저장된 마법 지식은 방대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무기에 쓰인 마법진의 기본이 되는 원형이 몽땅 있었다. 심지어는 예전 제론이 카드를 이용해 복사했던 베르의 마법진도 원래 있었다.

그 마법진들 덕분에 미완성 무기를 완성할 수 있었다.

'어쩌면 원래의 무기보다 그 성능이 훨씬 뛰어날지도 모르지.'

제론은 완성되어 분석까지 끝난 무기의 설계도를 차근차근 공부했다. 이것도 수련의 일환이었다. 이 마법진들을 다 이해할 수 있다면 제론이 쓰는 마법 수준이 한 단계 올라갈 수도 있었다.

아주 작은 깨달음이라도 하나 얻는다면 제론은 여섯 번째 마나링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초고대 문명의 마법사들은 마나링의 개수를 늘리는 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가장 뛰어난 마법사가 13개의 마나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일단 마법사라고 불리려면 5개의 마나링은 있어야 했다. 그리고 제법 수준이 뛰어난 마법사의 경우 7개나 8개의 마나링을 가지고 있었다.

아홉 번째부터 마나링을 새로 얻는 데 드는 깨달음이나 마법적 지식의 강도가 엄청나게 올라간다. 그래서 9개의 링을 가진 마법사도 상당히 드물었다.

제론은 이제 고작 5개의 마나링을 가졌으니 마법사라는 이름을 얻은 셈이었다. 물론 초고대 문명을 기준으로 말이다.

제론은 마법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수많은 마법진이 분해와 조립을 반복하며 제론의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유적 입구에 모인 사람들은 난감한 표정으로 2왕자의 눈치를 살폈다. 벌써 유적 발굴을 시작한 지 이틀이 지났다. 그런데도 아무런 성과가 없으니 다들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2왕자는 짜증 가득한 눈으로 유적 입구를 노려봤다.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유적은 누구의 발걸음도 허용하지 않았다. 누구든 들어가려고만 하면 벼락을 쏟아 내는데, 어찌나 강렬한지 버틸 재간이 없었다.

"아직 입구도 뚫지 못했다는 게 말이 되느냐! 마법사들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게냐!"

2왕자의 호통에 마법사들이 급히 시선을 돌렸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마법을 해체하려면 일단 마법진을 확인해야 하는데, 그게 불가능하니 말이다.

그게 아니면 상극이 되는 마법을 통해 와해시켜야 하는데, 그조차 불가능했다. 쏟아지는 벼락이 너무 강력해 그걸 와해시킬 만한 마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2왕자는 답답한 한숨을 토해 냈다. 이렇게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유적을 정복하고 이 안에 잠들어 있다는 기간트 설계도를 얻어야만 했다.

'형님을 이길 유일한 방법인데!'

2왕자가 이를 갈았다. 일단 왕좌에 오르기만 하면 뭐든 잘 해낼 자신이 있었다. 자신이 1왕자보다 못한 게 뭐란 말인가. 나라를 다스리는 건 자신이 훨씬 더 잘할 수 있었다.

하지만 1왕자는 고작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왕위를 예약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고작 그 이유 하나로 왕위가 결정되다니!

하지만 발만 동동 굴러 봐야 뾰족한 수가 없었다. 유적은 인간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았다. 저 무시무시한 벼락은 기간트도 날려 버린다.

에스타스에 타고서도 벼락을 완전히 견뎌 내지 못했는데, 크라테르나 카타락타가 들어가면 어떤 꼴이 될지 너무나 뻔했다.

'대체 뭐가 문제지? 그놈은 그냥 들어갔는데……!'

2왕자는 문득 제론이 떠올랐다. 그놈은 그냥 들어갔다. 입구만 확인하고 나왔다고 했지만, 어쨌든 그 붉은 실바가 들어갈 때는 벼락이 치지 않았다.

"마기어 백작!"

2왕자의 부름에 왕실 수석 마법사인 마기어 백작이 즉시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왕자님."

2왕자는 처음 유적을 발견한 제론의 얘기를 꺼냈다. 당시의 상황까지 모두 설명하자 마기어 백작의 안색이 심각해졌다.

"유적 중에는 상당히 특이한 것들이 존재합니다."

"특이한 것들?"

"예를 들면 주인을 정하는 유적이 있습니다."

"주인을 정한다고?"

"예. 조건은 그때그때 다릅니다. 특정한 피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고, 종족을 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 하면 이 유적도 그런 경우일 수도 있나?"

"거의 그럴 것입니다. 무엇보다 트랩이 바뀌지 않고 벼락만 쏟아 내는 걸로 봐서는 더 그렇습니다."

2왕자는 그 말을 듣는 즉시 옆에 있는 근위 기사에게 명령했다.

"가서 그 실바의 라이더를 데려오도록!"

근위 기사가 즉시 몸을 날려 산을 내려갔다. 2왕자는 그 모습을 잠시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마기어 백작을 바라봤다.

"그 실바의 라이더가 특별한 피를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되나?"

"그보다는 이 유적이 어쩌면 처음 들어온 사람을 주인으로 받아들인 것일 확률이 큽니다."

2왕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입구에서 쏟아지는 마법만 봐도 정말 대단한 유적이 분명했다. 한데 이런 유적의 주인이 고작 실바를 모는 라이더로 정해졌다니. 화가 치밀었다.

"후우우. 하면 그 라이더만 오면 유적 발굴은 아무 문제가 없겠군?"

"예. 아마 그와 함께 들어가면 큰 위험 없이 유적을 발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기어 백작은 기대감을 숨기지 못했다. 입구에 있는 마법 트랩만 분석할 수 있어도 얼마나 대단한 마법을 얻을 수 있겠는가. 기간트를 밀어낼 수 있을 정도로 굉장한 마법이다.

'어쩌면 새로운 마법의 지평을 열 수도 있겠어. 내 손으로!'

대마법사는 마법 한 방으로 전황을 뒤바꿔 버렸다고 전해진다. 물론 전설에나 나오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하지만 마기어 백작을 비롯한 모든 마법사는 그 전설을 허무맹랑하게 취급하지 않는다.

사실 기간트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분명히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지금의 마법사들도 충분히 강력한 마법을 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마법은 인간을 상대하는 데에나 유용하다. 기간트를 상대로는 아예 소용이 없었다.

기간트에는 기본적으로 대 마법 방어진이 잔뜩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설사 그것이 없다 하더라도 마법에는 엄청난 내성을 가지고 있다. 마나 코어 때문이다.

그로 인해 기간트가 전쟁에 등장한 이후, 마법의 전략적 사용이 상당히 제한되고 말았다.

마법사들은 기간트의 개발 쪽으로 방향을 돌려 훨씬 더 위상이 높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전장을 지배하던 예전의 꿈을 잃지 않았다.

한데 이번에 그 가능성을 지닌 유적이 발견되었다. 어찌 흥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기어 백작은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근위 기사가 데리러 간 실바의 라이더를 기다렸다.

반면 2왕자는 여전히 심기가 불편했다. 그는 내심 억지로 스스로의 마음을 다독였다. 유적이 실바의 라이더를 인정했다 하더라도 그 라이더의 주인이 자신이니, 자신이 유적의 주인인 거나 다름없다고 여기면서 말이다.

2왕자는 문득 자신이 그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유적을 최초로 발견한 공로자인데,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는 건 사실 좀 문제가 있었다.

'젠장. 정말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놈이야.'

이곳에는 이제 사령관도 없기에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체른산 방어군의 기간트들은 대부분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제부터는 이 유적을 지켜야만 한다.

잠시 후, 붉은 실바가 산을 올라왔다. 2왕자는 못마땅한 심정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지만,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은 다들 흥미로운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정말로 실바가 맞나?'

실바가 오히려 근위 기사의 크라테르보다 더 자연스럽고 빠르게 산을 오르고 있었으니 놀라는 게 당연했다.

붉은 실바는 순식간에 산을 타고 올라 2왕자 앞에 섰다.

푸쉭!

실바의 해치가 열리고 그 안에서 제론이 휙 뛰어내렸다.

탁! 탁! 탁!

제론은 가볍게 실바의 허리와 무릎을 딛고 바닥에 내려섰다. 너무나 깔끔한 동작이었다.

사실 2왕자가 자신을 왜 찾는지 알지 못했다. 제론은 의아한 눈으로 2왕자를 향해 가슴에 주먹을 올려 예를 취했다.

2왕자는 못마땅한 눈으로 제론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마기어 백작에게 눈짓을 보냈다. 직접 상대하기 싫으니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마기어 백작은 2왕자의 의중을 알아차리고는 앞으로 나섰다.

"반갑네. 난 왕실 마법사인 마기어라고 하네. 소개를 부탁해도 되겠나?"

"제론 폰 에어스트입니다."

제론의 대답에 마기어 백작뿐 아니라 2왕자도 깜짝 놀랐다. 설마 에어스트 가문의 후계자일 줄은 몰랐다. 두 사람이 즉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에어스트 백작가와 슈린 공작가 사이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들 또한 그 일과 완전히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크흠, 그랬군. 아무튼 잘 왔네. 다름이 아니라 유적 발굴을 좀 도와 달라고 불렀네."

"유적 발굴을 말입니까?"

마기어 백작은 난감한 표정으로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그 설명을 들은 제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왠지 신빙성이 떨어졌다.

다른 건 몰라도 처음 유적에 들어간 사람을 주인으로 인식한다는 조건을 이해할 수 없었다. 누가 들어갈지 어떻게 알고 그런 조건을 설정한단 말인가.

"이해가 안 가겠지만, 사실이네. 유적이 오래된 경우 주인 인식 시스템이 리셋되는 경우가 있네. 아마 이번 유적이 그런 것 같네."

제론은 순간 자신이 초고대 문명의 유적을 처음 발견했을 때가 떠올랐다. 왜 자신이 네오 마스터가 되었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서 리셋된 거였어.'

제론의 표정이 밝아지자, 마기어 백작은 자신의 설명이 먹혔다고 여기고는 말을 이었다.

"일단 혹시 모르니 기간트를 타고 움직이게. 나머지 인원이 최대한 뒤에서 도와줄 걸세."

마기어 백작은 그 뒤로 다른 사람들에게 세심한 주의를 당부했다. 결코 제론을 앞서 나가지 말아야 하며, 또 자신의 허락 없이는 어떤 것도 손대지 말라고 몇 번이나 반복해서 설명했다.

그렇게 새로운 유적 발굴팀이 조성되었다. 그리고 즉시 유적 안으로 들어갔다.

제론은 붉은 실바를 조종해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유적 안으로 발을 들였다.

다들 벼락이 쏟아질 것에 대비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제론이 완전히 안으로 들어가자, 유적 안이 환해졌다.

길을 따라 천장과 벽에서 수많은 불이 켜졌다. 마치 새로운 주인을 환영하듯이.

유적 발굴은 차근차근 이루어졌다. 정말 놀랍게도 제론과 함께 있으면 트랩이 발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제론이 있는 곳과 거리가 벌어지면 여지없이 트랩의 공격을 받아야만 했다.

처음 그 사실을 몰랐을 때, 뒤늦게 유적에 들어간 자들이 몽땅 벼락에 타 죽어 버렸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최대한 제론 근처에 붙어서 유적을 발굴했다.

일단 입구부터 시작해 트랩을 해체하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이 유적은 지금까지 발견된 그 어떤 유적과도 달랐다.

보통은 유적의 트랩을 어떻게든 해체할 수 있다. 물론 상당한 비용과 희생이 필요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 유적은 트랩 자체에 또 트랩이 걸려 있었다.

결국 트랩을 해체하지 못하고, 그저 제론을 따라가며 유물을 챙기거나 외부로 드러난 마법진을 베끼고 또 그것을 연구하는 식으로 진행했다.

마기어 백작은 눈앞에 드러난 마법진을 보며 희열에 몸을 떨었다. 외부로 드러난 마법진은 대부분 트랩에 연계된 것들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방식이었다.

"이 부분은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군."

마기어 백작은 다른 마법사들과 마법진 하나를 놓고 토론과 연구를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다들 고개를 내저었다. 이번에도 그저 마법진을 베껴 놓고 나중에 연구를 해야 할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새 이 부분의 발굴이 끝났는지 2왕자가 다가왔다.

"다음 구역으로 넘어가야 하니 마무리하게."

"예, 왕자님."

마기어 백작은 아쉬운 눈으로 마법진을 보다가 마법사들에게 그것을 베끼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제대로 마법진을 베끼는지 옆에서 일일이 확인했다.

마법진은 선 하나만 잘못 그려도 완전히 달라진다. 만일 그 선이 메인 마나 로드에 해당한다면 폭주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마법진을 베끼는 마법사들의 손과 눈은 신중함에 푹 빠져 있었다. 또한 그것을 지켜보는 마기어 백작의 눈도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이내 마법진을 모두 베끼고 몇 번이나 확인한 마기어 백작이 2왕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끝났습니다."

"그래? 그럼 가지."

2왕자는 지루한 표정으로 기다리다가 끝났다는 말에 반색하며 붉은 실바를 쳐다봤다. 이곳에 있는 유일한 기간트였기에 제론의 역할은 그야말로 막중했다.

다른 기간트는 아예 들어올 수가 없었다. 이 유적은 다른 기간트를 일체 허용하지 않았다. 어김없이 벼락이 쏟아졌고, 근처에 있던 사람들까지 몽땅 그 벼락에 휘말려야만 했다.

그렇기에 제론의 중요도가 훨씬 더 높아졌다. 처음에는 그저 유적 안내꾼과 다름없는 취급을 받았지만, 이제는 제대로 된 발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인재가 되었다.

쿵! 쿵! 쿵! 쿵!

붉은 실바가 천천히 움직였다. 그러자 유적 발굴팀이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실바가 최대한 천천히 걷긴 했지만 보폭이 인간과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서둘러야만 했다.

다음 구역으로 이동한 발굴팀이 다시 발굴을 시작했다. 제론은 인간의 힘으로 들기 어려운 것들만 골라서 통로 중앙에 내려놓았다. 이건 나중에 제론이 혼자 유적 밖으로 날라야 했다.

'생각보다 일이 많군.'

일이 많다기보다는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아니, 낭비하는 시간이 많았다.

이렇게 큰 유물들을 옮겨 놓으면 그 뒤로는 멍하니 기다려야 했다. 제론은 그렇게 기다리는 동안 기간트 내부에서 마법 공부를 하거나 마나 호흡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벌써 열흘이 지났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유적의 절반밖에 발굴하지 못했다. 트랩을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걸 감안하면 정말로 느린 속도였다.

'신기한 유적이야.'

물론 제론이 발견한 초고대 문명의 유적보다는 훨씬 못하다. 그곳은 신비로 점철된 곳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그나마 뭐가 뭔지 알아볼 수 있었다.

제론은 유적을 발굴하면 발굴할수록 점점 더 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이 유적이 왠지 모르게 낯익었다.

'닮았어.'

이 유적은 제론이 발견한 초고대 문명의 유적과 유사한 점이 꽤 많았다. 마치 누군가 초고대 문명의 유적 일부를 보고서 흉내라도 낸 것 같았다.

제론의 머릿속이 팽팽 돌았다. 그리고 미완성이었던 무기의 설계도가 떠올랐다.

'어쩌면!'

제론은 급히 태블릿을 꺼내 조작했다. 그리고 수십 가지 키워드를 통해 검색을 했다.

"찾았다!"

태블릿을 통해 설계도를 완성시켰던 무기의 정보가 태블릿에 저장되어 있었다. 즉, 원래 있던 무기를 이 유적의 주인이 복원한 것이다.

초고대 문명에서는 흔히 쓰이던 무기였는지, 거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비롯해 설계도까지 첨부되어 있었다.

제론은 2개의 설계도를 비교했다. 그리고 실소를 머금었다. 완전히 달랐다. 이 유적의 주인은 처음부터 잘못 짚었다.

"인간이 쓰기 위해 만든 무기를 기간트용으로 착각하니 이런 일이 벌어지지."

결과적으로 두 무기는 완전히 달랐다. 그 원인은 무기의 용도를 착각했기 때문이다. 인간용 무기를 기간트용으로 만들면서 마법진이나 구조가 많이 달라졌다. 물론 위력도 현저히 달라졌다.

제론은 흥미로운 눈으로 두 설계도를 비교하며 차근차근 그 지식을 머릿속에 저장했다.

같은 물건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며 나타난 결과를 보니 불현듯 그동안 잡힐 듯 말 듯 희미했던 몇 가지 깨달음이 뇌리에 푹푹 박혔다.

제론은 그 자리에 눈을 감고 앉아 그 깨달음을 정리했다.

후우우웅.

미약한 마나의 흐름이 제론을 감쌌다.

우우웅!

실바의 마나 코어가 맹렬히 움직이며 마나를 토해 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마나 코어에서 흘러나온 마나가 제론의 몸으로 유입되었다. 그리고 선명한 마나링을 심장에 새겼다.

제론은 한동안 그 상태로 깨달음의 바다에 빠져 즐겁게 유영했다.

☆ ☆ ☆

2왕자는 점점 초조해졌다. 제약이 너무 심해 유적 발굴 속도가 좀처럼 빨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원하는 물건은 아직도 나오지 않았다.

유적의 끝까지 가 봤지만 눈에 드러난 유물은 없었다. 예전 제론이 복사한 설계도도 지금은 사라진 상태였다.

사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론도 의아했다. 자신이 갔을 때는 동공 한가운데에 있던 설계도가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하지만 그것은 제론이 유적의 주인이라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 설계도는 유적의 주인만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혹시라도 설계도를 강탈당하지 않기 위해 유적의 진짜 주인이 만들어 놓은 일종의 락(Lock)이었다.

"백작, 유적 발굴 속도를 좀 더 높일 순 없나?"

2왕자의 어조에 어린 짜증을 읽은 마기어 백작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최대한 서둘러 보겠습니다. 하지만 이곳 유적은 고대에 아주 뛰어났던 마도사의 연구실 같습니다. 자칫하면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서두르게. 이러다가 자칫 벨룸 왕국 놈들이 대대적인 공세라도 펼치면 난감한 일 아닌가!"

"그리하겠습니다."

마기어 백작은 그렇게 대답했지만 정말로 속도를 높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유적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더 복잡해졌다.

만일 제론이 없었다면 발굴 자체가 아예 불가능했을 것이다. 마기어 백작은 복잡한 시선으로 제론이 타고 있는 붉은 실바를 바라봤다.

☆ ☆ ☆

한편 실바 안에서 태블릿을 통해 유적의 마법진을 하나하나 뜯어 살펴보고 있던 제론은 문득 이 유적 자체를 함정으로 이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려면 타이밍이 맞아야 하는데…….'

발굴을 최대한 서둘러야만 한다. 그렇게 유적을 싹 털어 간 다음 벨룸 왕국의 대대적인 공세를 이용해 체른산을 내주고 다른 지역을 얻으면 최상의 결과를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제론은 이 작전을 통해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을 떠올려 봤다. 이 작전이 성공한다면 정말로 큰 공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함께 작전을 펼쳐야 하는 상대가 2왕자와 마기어 백작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들은 슈린 공작 일파였다. 제론의 공을 얼마든지 가로챌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공을 돌려야겠어.'

제론은 사령관을 떠올렸다. 아주 마음에 드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군부와 왕국을 생각하는 마음은 누구보다 뛰어났다.

그리고 나름 의리도 있었다. 아마 제론의 도움으로 공을 세우면 절대 모른 척하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그러려면 유적 발굴을 좀 더 빨리 끝내야만 했다. 제론은 방법을 떠올려 봤다. 의외로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현재 이 유적의 주인은 나다.'

유적의 주인이라는 것은 유적의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또한 유적의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유적을 쉽게 발굴할 방법도 분명히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겠군.'

사람들이 있으면 마음대로 유적을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제론이 지금 답답한 것은 이렇게 한자리에 오랫동안 머물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덕분에 마나는 엄청나게 늘어났다. 꾸준히 마나 호흡을 하는데다가, 실바의 마나 코어에서 흘러나오는 마나가 유입되면서 급격히 마나가 불어났다.

제론은 마나 호흡을 하며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마나 코어가 조용히 진동하며 마나를 흘렸고, 제론은 차분히 그 마나를 흡수했다.

밤이 되었다. 유적을 탐사하던 사람들은 일단 밖으로 나갔다. 이렇게 철수할 때 제론이 실바를 이용해 짐을 모두 나르기 때문에 반드시 잠은 유적 밖에서 잤다.

밤새 작업을 할 수도 있지만, 제론이 계속 남아 있어야 하기에 밤에는 작업을 포기했다. 제론에게도 휴식이 필요했으니까. 어차피 물건을 나르려면 제론이 기간트로 날라야 한다. 이렇게 밤에는 나와서 자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다.

2왕자를 비롯해 높은 지위의 사람들은 기지로 돌아가 편안한 잠자리에 들었다. 이곳을 지키는 건 나머지 사람들의 몫이었다.

물론 제론도 이곳을 벗어나지 않았다. 또 벗어날 생각도 없었다. 제론은 이번 기회에 충분히 수련과 공부를 했다. 그리고 오늘은 미래를 위한 특별한 일을 할 계획이었다.

순식간에 잠자리가 정리되었고, 다들 피곤한 몸을 뉘었다. 그리고 2왕자와 귀족들은 기지로 돌아갔다.

제론은 사위가 고요해지고 다들 깊은 잠에 빠졌을 때, 조용히 움직였다.

물론 불침번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제론을 결코 발견할 수 없었다. 제론의 움직임은 밤 고양이보다 더 은밀하고 조용했다.

제론은 조용히 유적 입구 근처에서 몸을 숨겼다. 유적 입구를 지키는 병사들이 있었지만, 그들도 제론의 움직임을 잡아낼 수 없었다.

'불이 켜지면 곤란한데…….'

제론이 유적 안으로 들어갔을 때, 불이 켜지면 혼자 몰래 유적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이 알려진다. 그래선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유물을 빼돌린다는 누명이라도 쓰면 곤란했다. 어차피 관심도 없는 유물들인데 말이다.

제론은 잠시 머뭇거렸다. 자신이 들어가면 불이 켜질 게 분명하다. 하지만 진짜 유적의 주인이라면 그조차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유적을 만든 사람이 그런 것도 고려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제론은 입구 근방을 은밀히 살피며 아공간을 열어 태블릿을 꺼냈다.

입구 근처에 쓰인 마법진은 모두 태블릿에 복사했기에 언제든 불러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제론은 입구부터 시작해 발굴이 끝난 지점까지의 마법진 지도를 만들어 뒀다.

제론이 세운 대책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 마법진들을 분석해 유적의 시스템을 조작할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물론 낮에 기간트 안에서 충분히 들여다보고 연구를 했기에 어느 정도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확인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확신하지는 못했다.

제론이 파악한 바로 입구에서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은 불을 켜고 끄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이 안의 트랩 시스템을 무력화시키려면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순차적인 마법진의 흐름을 보면 그게 분명했다.

그래서 이 야밤에 그것을 확인하려 하는 것이다. 그게 된다면 더 이상 제론은 필요치 않다. 또한 더욱 빠르게 유적 발굴을 끝낼 수 있다. 무지막지한 인력을 동원하면 그야말로 순식간에 끝나 버릴 테니까 말이다.

제론은 일단 자신이 파악한 마법진을 이용해 스위치 하나를 껐다. 물론 심장의 마나링을 이용해야만 했다.

딸깍!

미약한 소리와 함께 점등 시스템이 꺼졌다. 제론은 조심스럽게 유적 안으로 발을 들였다. 불은 켜지지 않았다.

일단 불이 켜지지 않은 걸 확인한 제론은 유적 끝까지 단숨에 주파했다. 마나가 충만했기에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었다.

유적의 끝에 도착한 제론은 태블릿과 복사 카드를 이용해 근방의 마법진을 몽땅 담았다. 입구의 마법진을 분석하는 것보다 이곳의 마법진을 분석하는 게 훨씬 쉬웠다.

입구와 상통하는 부분도 있었고, 또 상대적으로 간단한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제론은 간단히 유적의 기본 방어 시스템을 껐다.

이제 더 이상 유적의 트랩은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유물을 가져가는 것에만 적용된다. 유적의 마법진을 파헤치거나 유적 자체를 손상시키려는 자들이 있다면 즉시 트랩이 발동할 것이다.

만일 제론이 유적의 시스템을 완전히 꺼 버렸다면 누가 유적을 파괴하든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제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중에 이 유적을 다시 써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작업을 마친 제론은 빠르고 조용하게 유적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아침이 되었다.

"허어. 한순간에 이렇게 바뀔 수도 있나?"

2왕자의 허탈한 말에 마기어 백작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 사실을 조금만 더 빨리 알았다면 유적 발굴을 벌써 끝내고 돌아갔을 것 아닌가.

"아무래도 유적이 오래되어 시스템에 뭔가 이상이 생긴 모양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애먹이던 트랩들이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졌으니……."

"그래도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닙니다. 유적 자체를 파괴할 수 없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2왕자는 아직도 이해되지 않았다. 만일 우연한 일로 병사 하나가 안전 범위 밖으로 벗어나지 않았다면 발굴이 끝날 때까지도 이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물론 아직도 기간트를 안으로 들일 수는 없었다. 제론의 기간트가 아니면 유적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인간의 경우는 전혀 제약이 없었다.

덕분에 발굴 속도가 상당히 빨라졌다. 이대로라면 이틀 안에 모든 발굴이 끝날 것 같았다. 그야말로 거침이 없었다.

"그나저나 아직도 그걸 발견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군."

2왕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가 진짜 원했던 것, 기간트의 설계도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다. 어쩌면 이 유적 안에 설계도가 없을지도 모른다.

혹은 벌써 누군가가 설계도를 빼돌렸을지도 모른다. 2왕자는 사실 제론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마기어 백작도 마찬가지였다.

"감시는 제대로 하고 있나?"

"예. 그의 모든 소지품을 다 뒤져 봤지만, 없었습니다."

"그럼 유적 어딘가에 있긴 있다는 건데……."

2왕자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유적을 바라봤다. 유적 입구를 수많은 사람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유적 앞 공터에 유물이 한가득 쌓여 갔다.

"저는 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마기어 백작이 2왕자에게 예를 취하고 유적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최근 유적 안의 마법진을 연구하느라 바빴다.

"그놈은 어제 뭘 하더냐?"

2왕자의 물음에 근처에 있던 근위 기사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목욕 후 잤습니다."

"몸은 뒤져 봤느냐?"

"예. 돈주머니 하나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2왕자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론은 설계도를 빼돌리지 않았다.

"그럼 저 안에 있다는 건데……."

2왕자의 눈이 탐욕으로 물들었다.

"일꾼들의 감시는 제대로 하고 있느냐?"

"모든 근위 기사와 근위병들을 투입해 감시 중입니다. 안에서 빼돌릴 가능성은 없습니다."

"좋아. 발굴이 모두 끝나기 전에는 결코 마음을 놓지 말도록."

"예, 명심하겠습니다."

2왕자는 다시 시선을 유적 입구로 돌렸다. 마침 붉은 실바가 유물을 잔뜩 들고 나타났다.

쿵! 쿵! 쿵! 쿵!

붉은 실바는 유물을 공터 한가운데에 쌓아 놓은 뒤 다시 유적 안으로 들어갔다.

2왕자도 천천히 유적을 향해 걸어갔다. 어쨌든 책임자는 자신이다. 유물 발굴 현장을 확인할 의무가 있었다. 그의 눈은 여전히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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