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체른산의 유적
기지가 시끌시끌했다. 워낙 많은 사람이 유입되었기에 소란이 끊이지 않았다.
사령관이 모든 병력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다뤘다면 아무 문제도 잡음도 없었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기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체른산에 유입된 병력은 정확히 세 부류로 나뉜다. 첫 번째가 체른산 방어군에 곧장 편입될 증원군이었다. 이들은 당연히 사령관 휘하로 들어갔다.
원래 계획된 증원이었고, 딱 여기까지만 이루어졌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체른산을 탐사하는 병력이었다. 가장 다양한 병과를 보유한 병력이기도 했다. 게다가 100명이나 되는 마법사가 포함되었다.
문제는 그들을 지휘하는 사람이 바로 2왕자라는 사실이었다. 왕궁에서 체른산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실이었다.
사령관은 남작이었다. 고작 남작이 왕자에게 명령을 할 수는 없었다. 여기서 군의 지휘가 흔들렸다.
가장 큰 문제는 세 번째 부류였다.
그들은 2왕자를 호위하기 위해 온 병력이었다. 근위 기사들과 근위병들이었는데, 워낙 콧대가 높고 목이 뻣뻣해서 모두의 반감을 샀다.
그들은 오직 2왕자의 명령만 따랐다. 당연히 그들을 사령관이 통제하는 건 불가능했다.
근위 기사는 남작의 작위를 가진다. 기사단장이 되면 백작이 되고, 부단장만 되어도 자작의 위를 받는다. 당연히 남작인 사령관이 어쩔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으로 인해 기지는 매일이 시끄러웠다. 물론 강력한 전력이 보강되었기에 벨룸 왕국의 도발로부터는 많이 안전해졌지만 말이다.
그런 기지의 상황은 제론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일단 몸은 완벽하게 회복된 것을 넘어서서 다치기 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감각도 예민해졌고, 집중력도 향상되었다.
한데 정작 기간트 훈련을 할 수가 없었다. 기간트 훈련장을 근위 기사단이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제론은 마나 호흡과 검술, 그리고 마법 수련에 매달렸다. 덕분에 빠르게 성장한 능력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창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개인 수련에 열중하던 제론은 사령관의 호출을 받고 숙소를 나섰다.
사령관실로 가는 도중, 제론은 수많은 라이더를 만났다. 그들 역시 사령관의 호출을 받고 온 것이다.
'드디어 기간트를 본격적으로 투입하는 건가?'
2왕자가 이끌고 온 병력에도 기간트의 수가 제법 많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체른산을 몽땅 훑는 건 불가능했다.
현재 체른산 방어군이 보유한 기간트의 수는 무려 200기에 달한다. 벨룸 왕국이 뭘 노리는지 알기에 전력을 제법 많이 집중시켰다.
그 기간트들이 몽땅 나서면 체른산 하나 갈아엎는 건 일도 아니었다.
"너도 호출받은 모양이군."
제론은 뒤로 다가와 자신의 어깨에 손을 얹은 카이트를 슬쩍 쳐다봤다.
카이트는 제론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체른산을 본격적으로 뒤집을 모양인데?"
제론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습니다."
"그렇지? 근데 이상하단 말이야. 아무리 유적이 있을지도 모른다지만 이렇게까지 나서는 이유가 말이야. 유적이라면 우리 왕국에도 제법 있잖아?"
유적의 가치가 대단한 건 사실이지만, 그 때문에 전쟁까지 할 정도는 아니었다.
"뭔가 이유가 있겠죠. 예를 들면 정말 대단한 기간트가 있거나, 아니면……."
제론은 뒷말을 삼켰다.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이트는 그런 제론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아니면, 뭐? 뭐가 또 있는데?"
제론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기간트의 설계도가 있거나 하면 그 정도 가치가 있지 않겠습니까?"
카이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계도?"
만일 고대 유적에서 그런 게 발견되면 그건 혁명이었다. 설계도가 있다면 발굴형 기간트를 양산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아니, 그 정도까지는 어렵더라도 제작형 기간트의 한계라 일컬어지는 출력 2.3의 벽을 넘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설마……."
카이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유적에 설계도가 있는지 없는지 아직 파 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안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억측이었다.
"서두르죠. 우리가 제일 늦은 것 같습니다."
제론의 말에 카이트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걸음을 빨리했다. 두 사람은 다른 라이더들보다 조금 늦게 사령관실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간 제론과 카이트의 눈이 살짝 커졌다. 사령관실에는 사령관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곳에는 2왕자가 함께 있었다.
"이제 다 온 건가?"
사령관의 자리에 앉은 2왕자가 라이더들을 쭉 둘러보며 물었다.
사령관은 그 옆에 서서 즉시 대답했다.
"다 왔습니다."
2왕자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한 번 라이더들을 훑어봤다. 그의 눈빛이 번득였다. 위엄이 대단했다. 나이가 많지는 않지만 왕자는 왕자였다.
"대충 짐작을 하겠지만 제군들은 앞으로 체른산에서 발굴을 도와야 한다. 우리가 찾는 건 유적이다."
아무도 동요하지 않았다. 다들 짐작하던 바였다. 아니, 오히려 좀 허탈했다. 고작 유적 때문에 전쟁이 다시 일어났으니 말이다.
"이 유적에는 아주 중요한 것이 잠들어 있다. 우리의 목표는 그걸 확보하는 것이다."
2왕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한 번 좌중을 둘러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적에 설치된 트랩이나 가디언도 보통 수준이 아닌 것 같으니 각별히 조심해라. 유적을 탐사했다고 끝이 아니다. 그걸 지켜 내는 게 훨씬 중요하다."
2왕자는 입을 꾹 다물고 눈에 힘을 줬다. 그리고 벅찬 마음을 담아 말했다.
"향후 우리 레늄 왕국은 제국으로 발돋움할 것이다."
그 말에는 다들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제국이라니. 대체 그 유적에 뭐가 있기에 제국 운운한단 말인가.
라이더들이 당황하자, 2왕자가 빙긋 웃었다.
"다들 나가서 준비를 하도록. 즉시 체른산으로 간다."
2왕자의 명에 라이더들이 일제히 가슴에 주먹을 올려 예를 취했다. 그리고 곧장 뒤돌아 사령관실에서 나갔다. 다들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밖으로 나온 카이트는 제론을 보며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네 말이 맞을 수도 있겠는데?"
카이트는 2왕자의 말을 듣는 내내 정말로 놀랐다. 만일 제론의 예상대로 기간트의 설계도가 유적에 있다면 2왕자가 한 말이 모두 설명된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그런 걸 알았단 말인가. 카이트가 의문을 가득 담은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대체 어떻게 안 거야?"
"안 게 아니라 짐작한 겁니다."
카이트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았다. 유적을 찾은 사람에게 큰 공이 돌아간다는 것 말이다.
"내가 찾아내고 말겠어."
제론은 주먹까지 쥐며 의지를 불태우는 카이트를 보며 피식 웃었다. 솔직히 거기까지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딱 남들 하는 만큼만 하겠다고 생각했다.
'조심해야 돼.'
제론은 벨룸 왕국이 기습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든 공을 세우긴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아무리 공을 세우면 뭐 하는가. 죽으면 모든 게 끝인데.
그때는 너무 흥분했다. 앞으로 절대 흥분해선 안 된다. 항상 냉철함을 유지해야만 한다. 제론은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전 격납고로 가서 실바를 끌고 가겠습니다. 먼저 가십시오."
"아, 네 실바에는 아공간 기능이 없지?"
카이트는 그제야 떠올랐다는 듯 자신의 머리를 탁탁 두드렸다.
"알았어. 그럼 난 먼저 갈 테니까 서둘러서 와. 너야 이미 공이 크지만, 이번에 공을 또 세우면 아마 상당한 포상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예. 금방 가겠습니다."
카이트는 손을 흔들어 주고는 서둘러 체른산으로 향했다. 마음 같아서는 기간트를 소환해 타고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지금 그곳으로 달려가는 라이더가 200에 가깝다. 그들이 모두 기간트를 꺼낸다면 기지는 아수라장으로 변할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다들 그냥 달리는 것이다.
물론 잠시 후, 그들을 실어 나를 말과 마차가 다가왔다. 라이더들은 말과 마차에 적당히 나눠 타고 빠르게 체른산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잠시 후, 격납고에서 붉은 실바가 나왔다. 붉은 실바는 마치 사람이 달리는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게 체른산으로 뛰어갔다.
제론은 기지의 라이더 중 가장 먼저 체른산에 도착했다.
200기가 넘는 기간트가 체른산을 한바탕 뒤집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기간트가 움직이는데도 산 하나를 완전히 파헤치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제론의 붉은 실바도 그 기간트들 사이에 있었다. 실바는 크기가 좀 작은 편이지만, 붉은색은 정말로 드물었기에 상당히 눈에 띄었다.
제론은 설렁설렁 탐색을 하고 땅을 파헤치면서 실바의 색을 바꿀까 고민했다. 아무래도 너무 눈에 띈다. 예전에는 차라리 적이 달려들면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으니 좋다고 여겼지만, 지금은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안전한 게 최고다. 상대가 우르르 몰려들면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소용이 없다는 걸 이번에 뼈저리게 느꼈다.
'과연 도색을 새로 할 수는 있는 걸까?'
제론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피식 웃었다. 이미 붉은 실바는 체른산 방어군에서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
벨룸 왕국의 기습을 막아 낸 영웅적인 기간트가 바로 붉은 실바 아닌가. 물론 체른산 방어군에만 해당되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사실 원래대로라면 이 정도 공을 세우면 영웅 만들기에 들어가 상당한 포상을 받고, 왕국 차원에서 우상화를 시킨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안이 좀 특별했다. 바로 체른산의 존재 때문이었다. 체른산에 유적이 있다는 사실은 아직까지 정보가 통제되고 있었다.
그로 인해 벨룸 왕국의 기습 자체가 큰 이슈로 떠오르지 않았다. 왕국 정보부에서 미리 막았기 때문이다.
또한 벨룸 왕국에서도 그 일을 소문낼 이유가 없었다. 너무나 처참한 패배였기 때문에 왕국의 명예에 흠집이 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벨룸 왕국 또한 체른산 유적에 대한 소문이 퍼지는 걸 원치 않았다. 조만간 그것을 다시 찾아올 거라고 믿었으니까 말이다.
아무튼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걸 모르는 제론은 마음 편하게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며 설렁설렁 바위를 치우고 나무를 뽑았다.
기간트의 힘이 워낙 좋아서 그렇게 대충 일하는 데도 작업 진척 속도가 무척 빨랐다.
무심코 바위 하나를 치우던 제론은 갑자기 온몸을 엄습하는 기이한 느낌에 움직임을 멈췄다.
"뭐지?"
제론은 다시 바위를 내려놨다. 그리고 느낌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쿵! 쿵! 쿵! 쿵!
다른 기간트들이 중간 중간 있었지만 누구도 제론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지금 체른산은 기간트로 넘쳐 났다. 갑자기 기간트들이 불쑥불쑥 나타나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제론은 느낌을 따라 걸으며 의아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점점 주변에 기간트가 보이지 않았다. 이곳으로는 기간트들이 오지 않는 것이다.
느낌을 따라 몇 걸음 더 걸어가던 제론은 걸음을 멈췄다. 그의 눈앞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
붉은 실바가 바위를 번쩍 들어 올렸다. 엄청나게 큰 바위였는데도 별 무리 없이 들어서 옆으로 치울 수 있었다.
기간트의 키보다 더 큰 바위를 치우고 나니 커다란 동굴이 보였다. 바위가 동굴을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동굴 역시 어찌나 큰지 기간트가 똑바로 서서 걸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제론은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쿵! 쿵! 쿵!
동굴 안은 어두웠다. 하지만 기간트가 들어가자 사방에 불이 번쩍번쩍 들어왔다.
제론은 아무런 제지 없이 동굴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갈 수 있었다.
유적이 분명했다. 곳곳에 유물이 보였다. 각종 예술품과 보물이 보였다. 하지만 제론은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공간이 있으니 몽땅 담을 수도 있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돈은 충분했다. 어차피 이 유적은 보고해야 한다. 그때 이상하게 보여선 안 된다.
제론은 유적 끝에서 주위를 면밀히 살폈다. 이곳에 먼저 들어와 살핀 것은 자신이 예상했던 그것이 과연 정말로 있을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저기 있군.'
제론은 단번에 알아봤다. 모를 수가 없었다. 마치 그것을 보관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소 같았다. 그것은 유적 끝 통로보다 살짝 넓은 동공 한가운데에 있었다.
예전 초고대 문명의 유적에서 각종 물품을 얻었던 기둥과 비슷한 것이 서 있었고, 그 안에 뭔가가 들어 있었다.
푸쉭!
제론은 해치를 열고 실바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동공 한가운데에 있는 기둥으로 다가갔다. 확실히 비밀 유적에서 본 것과 비슷했다. 안에 물건이 담긴 방식도 똑같았다.
기둥 중간에 공간이 있고, 그 안에 동그란 수정구가 들어 있었다. 어린아이 머리만 했는데,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제론은 망설임 없이 그것을 꺼냈다. 그리고 그 수정구에 마나를 불어 넣었다.
고대 유물은 대부분 이런 방식으로 동작한다.
마나를 받아들인 수정구가 은은히 빛났다. 그리고 수정구 내부에 복잡한 문양과 글자가 나타났다. 제론은 그것이 무언가의 설계도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복사해야겠군."
제론은 아공간에서 카드를 꺼냈다. 카드가 빛나며 수정구 안에 떠오르는 문양과 글자를 몽땅 복사해 냈다. 그렇게 카드에 담긴 설계도는 고스란히 제론의 태블릿에 저장되었다.
제론은 설계도의 복사가 끝난 뒤 수정구를 원래 자리에 놓았다. 수정구는 허공에 둥둥 뜬 채 빛을 잃어 갔다. 마치 아무도 건드린 적 없는 것처럼.
제론은 다시 실바에 올라탔다. 그리고 혹시 또 확인할 것이 있나 주위를 살폈다. 아무것도 탐나는 것이 없었다.
쿵! 쿵! 쿵! 쿵!
제론은 미련 없이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유적 밖은 여전히 적막이 감돌았다. 아무도 이곳으로 오지 않은 것이다. 마치 유적이 사람들을 밀어내는 것 같았다.
제론의 실바에는 통신 장치도 없었기에 일단 사령관을 찾아갔다. 산을 내려가 사령관이 머무는 막사로 향하자,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느껴졌다.
다른 기간트들은 산을 오르락내리락 정신이 없었는데, 실바 한 기가 어슬렁거리며 산을 내려와 사령관 막사로 향하니 눈에 띈 것이다. 더구나 피처럼 붉은 실바라서 더 시선을 끌었다.
사령관 막사 앞에는 크라테르 2기가 서 있었다. 근위 기사였다. 막사 안에 2왕자도 함께 있다는 뜻이었다.
크라테르가 팔을 뻗어 길을 막았다.
"멈춰라."
위압감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근위 기사는 붉은 실바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냐!"
"사령관께 보고할 일이 있습니다."
제론의 담담한 말에 근위 기사가 눈썹을 한 번 꿈틀하고는 말했다.
"내게 보고해라."
제론은 어이가 없어 근위 기사가 탄 크라테르를 쳐다봤다. 그리고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실바의 확성관을 최대한 이용하고, 목소리에 마나까지 담았다.
"사령관님께 보고드린다고 말했을 텐데요."
"이놈이!"
기지 전체를 울릴 듯 쩌렁쩌렁한 소리에 근위 기사가 크게 당황했다. 그래서 다급히 제론을 제지하려 했다.
하지만 제론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다가오는 크라테르의 팔을 옆으로 슬쩍 피하며 손바닥으로 팔뚝을 슥 밀었다.
텅!
크라테르가 살짝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물론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제론은 그렇게 얻은 시간에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설마 사령관님의 공을 가로채려는 것입니까!"
이번에는 그 소리가 더욱 컸다. 근위 기사는 정말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입 닥치지 못하겠느냐!"
근위 기사가 어느새 다시 균형을 잡고 붉은 실바를 노려봤다. 당장이라도 몸을 날려 박살을 내버릴 기세였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만!"
근위 기사가 당황한 눈으로 막사 입구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사령관과 2왕자가 서 있었다.
"이게 지금 뭐하는 짓들인가! 지금이 어떤 때인데!"
근위 기사는 사령관에게 뭐라고 큰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어차피 작위는 같다. 자신도 남작이었다. 당연히 사령관과 동급이라고 여겼다. 한데 사령관도 아니고 고작 일개 라이더에게 이런 무시를 받았으니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입을 꾹 다물고 화를 참을 수밖에 없었다. 사령관 옆에 서 있는 2왕자 때문이었다.
사령관은 근위 기사의 크라테르와 제론의 실바를 번갈아 노려보다가 2왕자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사령관이 죄송할 게 뭐 있겠나? 사람을 다루다 보면 이런 일이야 비일비재한 법 아니겠나? 자, 보고나 들어 보지. 이런 소란을 일으킬 정도면 제법 좋은 소식을 가져왔을 것 같은데 말이야."
2왕자는 그렇게 말하며 붉은 실바를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에는 기대감이 일렁이고 있었다. 또한 약간의 분노도 섞여 있었다. 만일 별것 아닌 보고라면 반드시 이 일을 문제 삼아 불이익을 잔뜩 안겨 주겠다고 마음먹었다.
제론은 2왕자의 말에도 사령관을 보며 기다렸다. 그 모습에 2왕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사령관은 사령관대로 그런 제론의 모습에 크게 당황하며 다급히 말했다.
"뭘 기다리고 있나! 어서 보고하도록!"
그제야 제론이 입을 열었다.
"유적을 발견했습니다."
제론의 말에 주변에 흐르던 분위기가 완전히 뒤집혔다.
2왕자는 반색하며 제론에게 물었다.
"그게 정말인가? 어디 있나!"
"체른산 중턱에 있습니다."
2왕자는 당장이라도 그곳에 달려가고 싶어 사령관을 쳐다봤다.
"당장 가 봐야겠네. 사령관도 함께 가겠나?"
왕자가 간다는데 사령관이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물론입니다. 저도 즉시 준비를 하겠습니다."
2왕자는 자리를 확보한 뒤 기간트를 불러냈다. 발굴형 기간트 중에서도 상당한 출력을 자랑하는 에스타스였다.
사령관도 서둘러 기간트를 소환했다. 사령관의 기체는 크라테르였다.
에스타스에 탑승한 2왕자는 빨리 안내하라는 듯이 제론을 바라봤다.
"뭐 하느냐! 어서 안내하지 않고!"
2왕자의 재촉에 제론은 돌아서서 체른산으로 향했다. 제론의 뒤를 에스타스 하나와 크라테르 3기가 뒤따랐다.
여전히 유적 입구는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상태였다. 커다란 동굴이 크게 입을 벌리고 있고, 그 옆에 동굴을 막고 있던 바위가 서 있었다.
2왕자는 그 모습을 보며 흥미로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당장 들어가 봐야겠어."
2왕자가 앞으로 나서려 하자, 사령관이 급히 말렸다.
"안에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릅니다. 인원을 더 보강해서 차근차근 파고들어야 합니다."
사령관의 말에 2왕자가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적이 흥미롭긴 하지만, 또 이 유적에 있을 거라 예상되는 그것 때문에 욕망이 들끓었지만, 그것도 목숨이 붙어 있어야 의미가 있는 법이었다.
유적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조사했기에 2왕자도 고집을 세우지는 않았다.
"뭣들 하느냐! 가서 사람들을 불러오지 않고!"
2왕자의 외침에 근위 기사들이 제론을 바라봤다. 이런 일에 자신들이 나설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표정을 단번에 일그러뜨리는 말이 들려왔다.
"그 실바는 내버려 두고 너희들 중 하나가 다녀와라. 내 할 말이 있으니."
"명을 따르겠습니다."
근위 기사 중 하나가 서둘러 산을 내려갔다. 나머지 하나는 2왕자 근처에 서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2왕자는 붉은 실바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이 유적을 네가 발견했느냐?"
"그렇습니다."
"안에 들어가 봤느냐?"
"입구 안쪽만 확인했습니다."
제론은 사실대로 말할 생각이 없었다. 그 안에서 이미 설계도 하나를 얻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향후 큰 곤욕을 치를 것이다.
"하긴, 그 정도는 확인해야 유적인지 아닌지 알 수 있겠지."
2왕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유적을 향해 성큼 움직였다.
"하면 입구 안쪽까지는 아무런 장치도 없다는 뜻이겠군."
2왕자는 그렇게 말하며 유적 안으로 들어갔다. 사령관과 근위 기사가 급히 그 뒤를 따랐다. 아무리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다.
가끔 들어갈 때마다 트랩이 달라지는 유적도 있었다. 이 유적이 그런 곳이 아니라는 보장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2왕자가 입구로 들어선 순간, 벼락이 쏟아졌다.
꽈르릉!
빠지지직!
2왕자는 깜짝 놀라 양팔을 들어 쏟아지는 벼락을 막아 냈다. 그러나 에스타스의 능력으로도 그 벼락을 모두 막아 낼 수가 없었다.
"크으윽!"
2왕자는 주춤주춤 유적 밖으로 물러났다. 유적 안으로 채 한 걸음도 들어가지 못하고 다시 나온 것이다.
2왕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이이……! 감히 내게 거짓을 고하다니!"
2왕자가 제론을 향해 소리쳤다. 당장이라도 목을 날려 버리고 싶었다. 에스타스가 허리춤에 매달린 검 손잡이를 꽉 쥐었다. 하지만 2왕자는 굳이 나설 필요도 없었다.
근위 기사가 앞으로 나서며 검을 뽑았다. 그리고 크라테르의 거검을 제론이 탄 붉은 실바의 목에 겨눴다.
"감히 왕자님께 위해를 가하다니!"
다들 난리가 났는데, 정작 제론은 멍했다. 자신이 들어갔을 때는 아무 일 없었는데, 갑자기 벼락이 쏟아지다니.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제론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
"제가 들어갔을 때는 아무 일 없었습니다."
제론의 말에 근위 기사가 호통을 쳤다.
"웃기지 마라! 네놈 눈에는 왕자님께서 어떤 일을 당하셨는지 보이지도 않는단 말이냐! 그래! 그럼 네놈이 들어가 보면 되겠구나!"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벼락이 쏟아지면 당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죽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까와 뭐가 달라졌는지 확인해 봐야겠어.'
제론은 목에 겨눠진 크라테르의 검을 옆으로 치우고는 유적 입구로 향했다.
쿵! 쿵! 쿵! 쿵!
제론의 행동에 다들 입을 꾹 다물고 지켜봤다. 심지어 2왕자까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제론의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제론이 유적 입구에 들어섰다. 벼락은 더 이상 쏟아지지 않았다. 제론은 확실히 하려는 듯 안으로 세 걸음 더 들어갔다. 하지만 여전히 벼락은 치지 않았다.
제론이 돌아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2왕자와 근위 기사, 그리고 사령관을 쳐다봤다.
"보시다시피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습니다만."
2왕자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치욕적이었다. 마치 유적이 왕자인 자신을 내팽개치고, 저 붉은 실바만 받아들인 것 같아 화가 치밀었다.
화가 난 왕자 옆에 서 있던 사령관이 말했다.
"아무래도 트랩이 바뀌는 구조의 유적인 듯합니다. 드물긴 하지만 보관하는 물건의 중요도를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령관의 말에 2왕자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말인즉슨, 이 유적 안에 정말로 중요한 물건이 보관되어 있다는 뜻 아니겠는가.
"그, 그렇군. 그래서……."
2왕자는 억지로 납득했다. 어느새 제론은 다시 유적에서 나와 일행과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더 이상 유적에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표현이었다.
잠시 후, 수많은 기간트가 몰려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발굴팀이 달려왔다. 수많은 마법사와 전문가가 유적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제론은 그 광경을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지켜봤다. 그런 제론에게 사령관이 크라테르를 탄 채로 다가왔다.
"괜찮은가?"
"예, 괜찮습니다."
"조심하게. 2왕자는 생각보다 집요한 구석이 있어."
사령관의 말에 제론이 살짝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설마 사령관이 이런 말을 해 줄 줄은 몰랐다.
"아무리 그래도 난 군부에 뼈를 묻은 사람일세. 왕자보다는 우리 부대의 사람이 더 중요하네."
정말로 의외였다. 어쨌든 군부도 왕국 소속이다. 그렇다면 왕자를 이런 식으로 대해선 안 되는 것 아닌가.
"2왕자는 슈린 공작과 손을 잡았네. 왕위에 욕심이 대단하지. 그가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일세."
모든 걸 짐작하게 해 주는 말이었다. 슈린 공작과 군부는 오래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가 군부를 장악하기 위한 압력을 지속적으로 해 왔기 때문이다.
당연히 군부에 뿌리를 내린 사령관이 슈린 공작과 손잡은 2왕자를 곱게 볼 리 없었다. 2왕자가 정권을 잡으면 군부는 상당한 칼질을 각오해야만 할 것이다.
"어쨌든 유적을 발견한 공은 내가 반드시 챙겨 주도록 하겠네."
제론은 상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유적을 발견한 상은 사실 이미 받았다. 유적에 들어가 설계도를 복사해 왔으니 말이다.
"그리고 벨룸 놈들이 이대로 그냥 있을 리 없네. 우리가 유적을 발견했다는 것도 아마 다 알 거야. 조만간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될 걸세. 미리 대비하는 게 좋아."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부분은 제론 역시 생각했다. 아마 벨룸 왕국은 이 유적이 모두 개발되기 전에 이곳 체른산을 차지하려 할 것이다.
'그 설계도가 정말로 기간트의 설계도라면,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지.'
베르의 설계도일 가능성이 가장 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베르는 무려 2.8의 출력을 가진다.
현재의 기술로 낼 수 있는 출력의 한계가 2.3이었다. 한데 만일 베르를 양산할 수 있게 된다면 힘의 판도를 완전히 뒤바꿀 수도 있었다.
사령관은 잠시 제론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고 싶으면 돌아가도 좋네. 좀 쉬어 두는 편이 좋겠지."
사령관의 말에 제론은 반색하며 군례를 취하고 산을 내려갔다. 사실 여기 더 있고 싶지 않았다. 빨리 돌아가서 조용한 곳에서 새로 얻은 설계도를 살펴보고 싶었다.
사령관은 서둘러 산을 내려가는 붉은 실바를 복잡한 눈으로 바라봤다.
경사가 가파른 지점만을 골라 쭉쭉 내려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단언컨대, 저렇게 기간트를 잘 모는 사람은 전 대륙을 다 뒤져도 몇 없을 것이다.
이제 조만간 벨룸 왕국이 다시 도발을 시작할 것이다. 어쩌면 기습할지도 모른다.
'한데 이런 상태면…….'
분위기가 너무 좋지 않다. 모두의 신경이 유적에 몰려 있었다. 절대 방심해선 안 되는 상황인데 다들 방심하는 걸 보니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더구나 지금은 모든 기간트가 움직였다. 훈련을 한 것도 아니고 유적을 찾기 위해 오랫동안 기동했다.
'만일 이 순간을 노려서 벨룸 놈들이 쳐들어오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물론 대비를 어느 정도 하긴 했지만, 쉽지 않은 전투가 될 건 불을 보듯 훤했다.
꽈르르릉!
빠지지직!
사령관은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상념에서 벗어났다. 상당히 익숙한 소리였다. 고개를 돌려 확인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유적 입구에 새카맣게 재가 되어 쓰러진 병사들이 보였다.
"젠장! 조심했어야지!"
사령관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물론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령관은 일단 2왕자의 눈치를 한 번 살핀 후, 인상을 구기며 유적 입구로 다가갔다.
유적에서는 아직도 벼락의 잔해가 남아 있었다. 빠직거리며 잔벼락이 바닥을 타고 뱀처럼 꿈틀꿈틀 흘러 다녔다.
아무래도 유적 발굴은 쉽지 않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