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붉은 실바
체른산 전투는 즉각 왕궁으로 보고가 되었다. 레늄 왕국이 발칵 뒤집혔다.
벨룸 왕국과의 협정은 마지막 조율만 남아 있었다. 한데 그 협정이 채 이뤄지기도 전에 벨룸 왕국이 진격한 것이다. 그것도 기습으로 말이다.
레늄 왕국과 벨룸 왕국 간의 전선에는 다시금 긴장감이 차올랐다. 그리고 서로가 전력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언제 다시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어도 이상할 것 없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가장 큰 변화를 맞이한 곳은 당연히 체른산 방어군이었다.
비록 첫 번째 전투에서 큰 승리를 취했다 해도, 그래 봐야 국지전이었다.
체른산 방어군이 보유한 기간트의 수는 100기도 되지 않는다. 또한 습격한 기간트 역시 그 정도 숫자였다.
벨룸 왕국의 습격 규모가 작았던 이유는 기습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전쟁이 소강상태고, 마지막 협정을 남겨 두고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정보전은 멈추지 않았다.
적군의 기간트가 대대적으로 이동하면 그 경로를 파악하는 게 당연했다. 최대한 정보에 걸리지 않고 공격해 체른산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그들도 허를 찌르는 작전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레늄 왕국은 벨룸 왕국의 병력이 체른산 방면으로 이동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왕궁은 귀족들을 소집해 대책을 마련하는 한편 체른산 방어군의 병력을 확충하고 대체 벨룸 왕국이 무엇을 노리는지 조사했다.
왕국 전역이 들썩였다. 전쟁이 확대되면 다들 힘들어진다. 또한 새로운 기회가 생기기도 한다.
병력과 물자가 이동하니, 상인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또한 과도한 긴장감이 사람들을 바짝 조였다.
벨룸 왕국의 습격이 있은 지 열흘째 되던 날, 대대적인 병력이 체른산 방어군 진지에 도착했다.
전쟁의 기운이 더욱 짙어졌다.
☆ ☆ ☆
"여어! 몸은 좀 어때?"
제론은 새하얀 침대에 누운 채 의무실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카이트를 비롯한 라이더들이었다.
"나쁘지 않습니다."
"나쁘지 않긴. 온몸에 타박상을 입고, 인대도 늘어나고, 내상도 입었다면서? 그게 나쁘지 않은 거면 나쁜 건 대체 어떤 건데?"
카이트가 타박하듯 말했다.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말투 곳곳에 제론에 대한 고마움과 걱정이 묻어 있었다.
카이트뿐 아니라, 함께 병문안 온 다른 라이더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카이트가 아니었다면 아마 다 죽었을 것이다.
제론은 지난 전투가 끝나자마자 정신을 잃었다. 적 기간트들 사이에서 그렇게 심한 공격을 무수히 당하면서도 조종석을 지킨 덕분에 목숨은 잃지 않았다.
하지만 그 충격으로 붉은 실바는 처참하게 망가졌고, 제론은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
적이 물러간 뒤, 카이트가 나서서 해치를 뜯어내지 않았다면 제론은 실바 안에서 죽었을 것이다.
"그래도 정신을 차려서 정말 다행이야."
카이트의 말에 제론이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카이트가 찾아왔기에 치료사들로부터 제대로 된 설명도 듣지 못했다.
"제가 얼마나 누워 있었습니까?"
"오늘이 딱 열흘째. 어때? 이제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었는지 깨닫겠어?"
제론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열흘이나 정신을 잃고 있었다니, 상태가 심각하긴 정말 심각했던 모양이었다.
'마나는?'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바로 마나였다. 만일 이번 일로 마나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면 큰일이었다.
제론은 즉시 마나를 점검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뭐지? 이 어마어마한 마나는?'
아랫배의 마나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전과 비교하면 3배는 늘어난 것 같았다.
제론은 마나 호흡의 필요성을 느꼈다. 아랫배의 마나가 많긴 하지만 제대로 정제되지 않아 너무나 거칠었다.
"왜 그래? 몸이 안 좋아?"
카이트가 제론의 표정을 보고 딱딱하게 굳어진 안색으로 물었다. 혹시라도 제론이 잘못될까 봐 엄청나게 신경을 쓰고 있었기에 약간의 변화도 심상치 않게 느껴진 것이다.
제론은 카이트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서둘러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약간 피곤해서요."
"아, 그래? 그럼 쉬어야지. 나중에 다시 올 테니까 푹 쉬어 두라고."
카이트는 그렇게 말하고는 동료들을 재촉해서 서둘러 병실을 빠져나갔다.
제론은 그들의 기척이 완전히 멀어진 뒤에야 침대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나 호흡을 시작했다.
터질 것 같았던 아랫배가 점점 진정되었다. 거친 마나가 정제되어 순수하게 변했다. 그리고 아랫배에 차곡차곡 쌓였다.
더불어 남은 마나가 온몸을 휘돌아 심장에 안착했다. 심장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5개의 마나링이 그 마나를 날름날름 삼켰다.
심장의 마나링도 빵빵해졌다. 아마 이대로 가면 조만간 마나링 하나가 더 만들어질 것 같았다. 물론 6개째의 마나링은 그저 마나가 많다고 생기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마나 호흡을 완전히 끝낸 제론은 천천히 눈을 떴다. 온몸에 충만한 힘이 느껴졌다. 근육의 타박상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손상을 입은 곳 역시 상당히 호전되었다.
'마나라는 건 정말 대단해.'
그저 몸속을 한 번 휘돌았을 뿐인데 자잘한 상처가 씻은 듯이 나았다. 아마 마나를 이용해 본격적으로 치료하면 훨씬 더 효과가 클 것이다.
'그리고 이럴 때 마법이 필요하지.'
제론은 심장을 휘도는 빵빵한 마나링을 가속시켰다. 5개의 마나링이 주변의 마나를 세밀히 조작해 마법진 하나를 만들어 냈다.
제론의 손바닥 위로 푸른빛을 발하는 마법진이 떠올랐다.
"힐링!"
마법진이 산산이 흩어지며 제론의 몸에 그대로 흡수되었다. 제론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온몸을 휘도는 청량감을 만끽했다.
나머지 상처가 크게 호전되었다. 당장 움직여도 괜찮을 정도로 몸이 나아진 것이다.
제론은 침대에 앉은 채로 심장의 마나를 가속시켰다. 마나의 실이 풀어져 나와 제론의 손끝에 맺혔다. 그것을 다뤄 마법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초고대 문명에서 쓰던 마법은 심장의 마나링을 이용해 마나로 이루어진 마법진을 그려 마법을 발현한다.
현대의 마법처럼 마나 스톤으로 만들어진 스틱을 이용해 미리 그려진 마법진을 활성화시키거나, 주문을 통해 마나를 배열하는 방식과는 많이 달랐다.
초고대 문명의 마법은 심장의 마나에서 풀려 나온 마나의 실을 얼마나 세밀하게 다룰 수 있느냐가 중요했다. 그렇기에 이런 식으로 틈날 때마다 연습을 해 주어야만 했다.
실바를 만들면서 마나의 실을 다루는 능력이 엄청나게 발전했다. 제론은 이제 슬슬 여섯 번째 링이 생기지 않을까 기대했다.
한동안 마나링을 통해 마나 컨트롤을 연습하던 제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슬슬 움직여야 할 때가 되었다. 자신의 기간트인 붉은 실바도 마음에 걸렸고 말이다.
"사람이 늘었군."
사람만 늘어난 게 아니라 기간트도 늘어났다. 병력이 대대적으로 확충된 것이다. 아직 더 알아봐야겠지만 전쟁이 다시 시작된 게 분명했다.
제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곳 체른산이 앞으로 가장 격전지가 될 것 같았다.
'대체 왜 여기지?'
제론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려고 애썼다.
이번에 벨룸 왕국이 이곳을 기습한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 그들은 최소한의 병력으로 이곳을 집어삼키려고 했다.
어쩌면 더 이상 전쟁을 확대하는 것을 원치 않았을지도 모른다.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원하는 게 뭐지?'
만일 그렇다면 원하는 게 무엇일까? 제론의 뇌리에 체른산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 크지도 높지도 않아 기지에서도 잘 보이지 않았다. 제론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체른산이 있는 방향을 쳐다봤다.
'거기 뭔가가 있나?'
제론은 이내 생각을 접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체른산에 뭐가 있는지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제론의 뇌리에 다시금 붉은 실바에 대한 생각이 꽉 차올랐다.
격납고에 들어간 제론은 한가운데에 서 있는 실바를 보고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있긴 했지만, 멀쩡했다.
"벌써 수리가 끝난 건가?"
"그래도 마나 코어가 멀쩡해서 비교적 수리가 쉬웠습니다."
제론은 고개를 돌려 다가온 수석 엔지니어를 쳐다봤다. 수석 엔지니어는 빙긋 웃으며 제론 옆에 섰다. 그리고 함께 실바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걸 혼자 조립했다니, 난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군요. 수리를 하면서 보니 일반적인 실바와는 약간 다르던데, 일부러 그렇게 한 겁니까?"
"어떤 점이 달랐습니까?"
제론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물론 일부러 지은 표정이었다. 자신이 실바를 조립한 것은 최대한 운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어야 했다.
"글쎄, 뭐라고 설명하기 어렵군요."
수석 엔지니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냥 보기엔 다른 게 하나도 없습니다. 한데 뭔가 미묘하게 느낌이 다르거든요."
"다른 엔지니어들도 다 같은 느낌이라고 하던가요?"
그 질문에 수석 엔지니어가 머쓱하게 웃었다.
"그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제론은 그제야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석 엔지니어만 그렇게 느낀 것이다.
'날 떠보려고 한 말이었군.'
확신은 못 가지겠고, 뭔가 있긴 한 것 같아서 은근슬쩍 말을 흘려 본 것이다.
수석 엔지니어는 제론과 몇 마디를 더 하다가 더 얻을 것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돌아갔다.
제론은 실바로 다가가 칠이 벗겨진 부분을 살폈다. 실바 앞에 사다리가 달린 발판이 있기에 높은 곳도 확인이 가능했다.
제론은 발판에 올라 실바를 좀 더 자세히 살폈다. 부서졌다가 다시 고친 부분을 중점적으로 살폈다.
'망가진 부품들은 어떻게 처리한 거지?'
그 부품들에 새긴 마법진은 사실 원래의 마법진과 조금 다르다. 물론 겉으로 보면 알 수 없다. 직접 마나를 주입해 마법진을 활성화시켜야 감춰진 선들이 나타난다.
부품이 망가졌다는 것은 마법진도 망가졌다는 뜻이기에 큰 염려는 없지만, 그래도 그 마법진들이 마법사들의 눈에 띈다면 상당한 곤란을 겪을 수도 있었다.
제론은 사다리를 이용해 조종석에 올라탔다. 평소처럼 뛰어서 탈 수도 있었지만, 굳이 무리하지 않았다. 아직 몸이 완전치 않았다.
지이이잉!
해치가 닫히고, 실바의 눈이 번쩍였다.
제론은 실바를 움직여 격납고를 나섰다. 남들이 보기에는 시험 기동을 한다고 여기겠지만, 사실 그게 아니라 새 부품의 마법진을 손보기 위함이었다.
쿵! 쿵! 쿵! 쿵!
제론의 실바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실바에 아공간 기능이 없는 것이 참으로 아쉬웠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한 곳으로 가고 싶은데, 그것이 쉽지 않았다.
쿵쿵쿵쿵!
실바가 뛰기 시작했다. 일단 달리기 시작하자 금세 사람들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제론은 실바를 타고 체른산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산에 들어가면 좀 더 은밀한 곳을 찾을 수 있었고, 또 체른산에 과연 무엇이 있는지 둘러보고 싶기도 했다.
체른산에 도착한 제론은 제법 많은 사람과 기간트가 돌아다니는 모습에 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이지? 왜 여기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거야?'
이곳에서 있었던 전투의 흔적은 거의 정리되어 있었다. 노획한 적 기간트들은 모두 엔지니어의 공방에 이동되었고, 전투로 인해 망가진 도로도 대충 복구되었다.
벌써 열흘이나 지났으니 당연했다. 기간트를 이용하면 그런 일은 순식간에 해치울 수 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사람이 많다는 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제론은 그것이 이번에 벨룸 왕국이 이곳을 공격한 이유라고 판단했다.
'역시 체른산에 뭔가가 있었군.'
레늄 왕국 측에서도 정보를 입수한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저렇게 수많은 사람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 아니겠는가.
제론은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원래는 한적한 곳에서 차분히 새롭게 간 부품을 손보려 했다. 바꿔야 할 마법진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물론 한 번 해 본 일이니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이렇게 사람이 많아서야 그것도 불가능했다.
제론이 망설이는 사이 기간트 한 기가 다가왔다. 크라테르였다. 기간트의 어깨에 그려진 문양을 보니 군부 소속이 아니었다.
'근위 기사단의 문양이로군.'
근위 기사단이 이곳에 왔다는 건, 왕궁에서 이곳에 관심을 가졌다는 뜻이었다.
"소속과 이름을 밝혀라."
근위 기사의 어조에는 권위가 잔뜩 묻어났다.
제론은 어조나 태도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근위 기사단에 오래 있다 보면 지극히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었다.
"체른산 방어군 기갑 부대 소속 제론입니다."
만일 제론이 제대를 해서 작위를 받으면 아무리 근위 기사라 하더라도 이런 태도를 보여선 안 된다. 하지만 제론은 아직 아무런 작위가 없는 일개 라이더일 뿐이었다.
"제론?"
근위 기사는 익숙한 이름에 멈칫하더니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 금세 이번 전투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라이더라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물론 그에게 그 사실은 그리 중요치 않았다.
"여기는 무슨 일인가?"
"기간트 점검과 기동 훈련을 겸해 왔습니다."
"이곳은 출입이 금지되었으니 돌아가도록."
근위 기사의 태도는 시종일관 고압적이었다. 제론은 가만히 서서 근위 기사가 탄 크라테르를 쳐다봤다. 그리고 그 뒤에 펼쳐진 광경을 다시 한 번 눈에 담았다.
수많은 사람과 기간트가 움직이고 있었다. 제론은 그들이 체른산에서 뭔가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유적이라도 찾는 건가?'
그제야 조금 이해가 갔다. 체른산에 고대 유적이 있었던 것이다. 벨룸 왕국은 그 유적을 차지하기 위해 기습을 한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뭔가 석연치가 않아.'
고작 유적 하나를 차지하려고 그런 모험을 감행했다니, 믿기 어려웠다.
유적에서 각종 유물과 고대 마법 아티팩트를 얻을 수 있다지만, 또 고대에 만들어진 발굴형 기간트가 있을 확률도 있지만, 고작 그런 걸로 전쟁을 다시 벌인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득보다 실이 훨씬 많았다.
제론은 그들의 모습을 확실히 눈에 담은 뒤 돌아섰다. 어차피 이곳에 이렇게 사람이 많다면 다른 장소를 찾아야만 했다.
아직 실바의 관절을 비롯해 곳곳의 움직임이 삐걱거렸다. 제대로 조율도 해야 하고, 마법진도 고쳐야 했다.
제론은 날카로운 근위 기사의 기세를 등 뒤로 느끼며 느긋하게 걸어갔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제론이 너무 천천히 움직여 근위 기사도 짜증이 났다. 그는 뭐라고 한마디 소리치려다가 참았다. 괜한 분란을 일으켜선 안 된다.
'어차피 조만간 이곳 군부의 도움을 받아야 하니까.'
근위 기사는 그렇게 짜증을 삼키며 멀어져 가는 제론의 등을 바라봤다.
결국 제론이 찾아간 곳은 처음 실바를 조립했던 예비 창고였다.
예비 창고를 지키는 병사가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기간트를 손보는 것은 창고 안에서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제론은 서둘러 창고 문을 닫고 기간트에서 내렸다. 손봐야 할 부품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어쩌면 오늘 중으로 다 끝내지 못할지도 몰랐다.
일단 발부터 시작하기로 결정한 제론은 차분히 심장의 마나링을 가속시켰다. 제론의 손가락 끝에 새파란 마나가 맺혔다.
그냥 마법을 쓰는 게 아니라 마법진을 손보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마나를 직접 몸에서 끌어내야만 했다.
제론은 아공간을 열어 남은 포로스 중 일부를 꺼냈다. 포로스는 예전에 잔뜩 구했다. 망가진 마나 코어로부터 나온 진흙은 그냥 쓰레기였기에 사방에 버려지고 방치된다.
제론은 그것을 샅샅이 뒤져서 모았다. 그 진흙은 테페룸의 가공물이다. 당연히 특별한 마나 파장을 방출했고, 그것만 캐치하면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었다.
그렇게 찾아낸 진흙을 가공해 포로스를 잔뜩 만들었다.
제론은 포로스에 마나를 주입했다. 포로스가 젤리처럼 뭉클거렸다. 마나의 흐름에 따라 포로스가 조금씩 떨어져 나가 기간트의 발로 스며들었다.
뇌리에 마법진이 그려졌다. 마치 눈앞에서 보는 듯했다. 제론은 놀라울 정도로 급성장한 자신의 감각에 살짝 놀랐지만 이내 평정을 찾고 작업에 집중했다.
포로스가 투명하게 변하며 마법진에 보이지 않는 선 몇 개를 그렸다.
제론은 자신의 능력이 놀라울 정도로 높아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나를 이용해 포로스를 마법진에 입히는 것이 마음먹은 순간 뚝딱 이루어졌다.
마치 눈앞에 그려진 마법진에 펜으로 선을 찍찍 긋는 것처럼 간단했다.
제론은 이 감각이 사라지기 전에 더 많은 마나를 다뤄 보고 싶었다. 서둘러 포로스에 마나를 주입했고, 다음 마법진을 개조했다.
제론은 순식간에 발에 새겨진 마법진을 손봤다. 그리고 차근차근 올라가며 다리의 마법진을 처리했고, 이어 중간 중간의 마나 로드에 포로스를 조금씩 섞는 작업을 했다.
그 모든 일을 마무리하는 데 고작 반나절밖에 걸리지 않았다. 제론은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놀라울 정도였다.
'죽음의 위기가 능력을 한 단계 올린 건가?'
그 외에는 딱히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떤 메커니즘으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니 조금 답답하긴 했다. 정확히 원인을 파악해야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을 때 당황하지 않고 적절한 조치를 취할 텐데 말이다.
어쨌든 제론은 다시 실바를 끌고 격납고로 향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엔지니어들이 균형만 맞춰 주면 끝난다. 기본적인 균형은 맞췄지만, 아직 좀 더 세밀히 손을 봐야 한다. 물론 그 이후에 도색도 새로 할 것이다. 피처럼 붉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