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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 12화 (13/217)

2권

Chapter 1 제론의 실력

쿵! 쿵! 쿵! 쿵! 쿵!

기간트들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잠깐 뒤엉켜 있긴 했지만 서로 떨어져 동료들과 진형을 맞춰 자리를 잡고 견제를 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피처럼 붉은 실바가 있었다.

붉은 실바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몰레스 한 기를 쳐다봤다. 몰레스들의 리더였다.

제론이 그를 다음 타깃으로 정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가 리더인 것처럼 보여서가 아니라 그의 실력이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다.

제론의 날카로운 감각은 적군과 아군의 모든 움직임을 포착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을 통해 대략적인 실력을 파악했다.

그동안 매번 하던 일이니 어려울 건 없었다. 다만 이런 실전에서도 그 능력을 얼마나 잘 발휘할 수 있느냐가 문제인데, 제론은 평소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쿵!

붉은 실바가 발을 구르며 몸을 날렸다, 거의 점프에 가까운 동작이기에 다른 기간트들은 붉은 실바의 움직임에 제대로 대응하지를 못했다.

기간트는 그냥 사람이 움직이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그렇기에 그 대처도 사람과는 달랐다.

갑자기 기간트가 그동안 전혀 하지 않았던 동작을 하니, 그 대응이 간단치 않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훈련도 아니고 실전인데 말이다.

쿵쿵쿵!

제론이 몸을 날려 얻은 추진력을 등에 업고 빠르게 달렸다. 이곳에 있는 그 어떤 기간트보다 빨랐다.

꽈앙!

붉은 기간트가 강하게 땅을 박차고 앞으로 뻗어 나갔다. 점프를 위로 하지 않고 앞으로 한 것이다.

어찌나 빨랐는지 몰레스들의 리더는 그저 손을 들어 올리는 것 외에 어떤 대처도 하지 못했다.

꽈광!

콰직!

양팔이 맥없이 튕겨 나갔다. 그리고 그렇게 활짝 벌어진 몸에 붉은 검이 꽂혔다. 정확히 조종석이 있는 곳이었다.

끼이익!

쿠웅!

붉은 실바가 발을 들어 몰레스를 밀고 검을 뽑았다. 몰레스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뭐하는 거냐! 놓치지 말고 잡아!"

벌써 셋이나 당했다. 아군이 아홉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대로 붉은 실바를 잡지 못하면 전혀 승산이 없었다. 붉은 실바의 움직임은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쿵쿵쿵쿵!

8기의 몰레스가 붉은 실바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실바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꽈앙!

실바가 바닥을 박차더니 뒤로 훌쩍 뛰었다.

순식간에 포위망을 벗어나 버린 실바를 몰레스들이 멍하니 쳐다봤다. 이건 사람도 아니고 대체 어떻게 저런 움직임이 가능하단 말인가.

'실바가 가벼워서 가능한 건가?'

그렇게 생각한 몰레스 라이더들은 즉시 고개를 저었다. 실바의 무게는 카타락타와 비슷하다. 하면 같은 무게에 출력이 훨씬 높은 카타락타도 점프가 가능해야 한다. 하지만 그건 가당치도 않다.

몰레스 라이더들은 등줄기를 타고 달리는 소름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들의 시선은 붉은 실바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실바 한 기에 농락당하다가 작전이고 뭐고 다 실패하게 생겼다.

"시간이 없다! 어떻게든 저놈들을 죽여야 돼!"

몰레스 중 하나에서 거친 외침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냉정을 되찾은 카이트는 그걸 듣고 상황을 약간이나마 파악했다.

'이놈들, 뭔가가 있다!'

시간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는 건 이 상황을 빨리 마무리해야 할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카이트의 뇌리에 가정 하나가 번갯불처럼 번쩍 지나갔다.

"설마!"

만일 자신의 생각이 맞는다면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2조는 본대로 귀환한다!"

카이트의 외침에 다들 멈칫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2조가 본대로 귀환하면 7기밖에 남지 않는다. 적은 아직도 아홉이나 남아 있는데, 그렇게 되면 남은 적을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뭐하는 거야! 어서 돌아가라니까!"

카이트의 외침이 재차 터지자, 그제야 2조가 슬그머니 움직였다. 5기의 카타락타와 1기의 크라테르였다.

그 모습에 몰레스들이 크게 당황했다.

"안 돼! 막아라!"

곧 본대를 공략하기 위해 벨룸 왕국군이 진격할 것이다. 하지만 적의 눈을 기본적으로 속여야 하기 때문에 압도적인 화력으로 쓸어버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런 작전을 짠 것이고 말이다.

한데 이런 와중에 6기나 되는 기간트가 기지로 돌아간다면 벨룸 왕국의 본대가 임무를 성공할 확률이 훨씬 낮아진다.

쿵쿵쿵쿵쿵!

몰레스들이 일제히 달렸다.

"막아!"

카이트가 외치며 앞으로 몸을 숙였다. 자신이 최소한 2기는 맡아야 한다. 그렇게 준비하며 옆을 힐끗 바라봤다.

붉은 실바가 눈을 빛내며 굳건히 서 있었다. 덩치는 작지만, 그 누구보다 듬직했다.

쿵쿵! 꽈앙!

붉은 실바가 먼저 내달리며 점프했다. 놀라웠다. 그 무거운 몸체를 훌쩍 띄우는데 자그마치 몰레스의 가슴 어림까지 올라갔다.

가장 앞에서 달려가던 몰레스는 이런 갑작스러운 붉은 실바의 움직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꽈광!

붉은 실바가 허공에서 두 번이나 양다리를 휘저었다. 그리고 그 다리에 몰레스 2기의 목이 걸렸다.

달려오던 힘이 비틀어지며 사선으로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쿠과과과과광!

2기의 몰레스가 넘어지며 참상이 벌어졌다. 가장 앞에서 달리던 2기가 쓰러지는 바람에 뒤에 따라오던 몰레스 중 4기가 한데 뒤엉켜 바닥을 굴렀다.

기간트는 거대하고 무겁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바닥을 구르면 다시 균형을 잡고 일어나는 게 쉽지 않다. 최소 카이트 정도 되는 베테랑 라이더는 되어야 구르는 와중에 균형을 잡고 일어날 수 있는 법이다.

꽝!

붉은 실바는 조금도 균형을 잃지 않고 바닥에 착지했다. 쓰러진 몰레스들 사이에 서서 검을 뽑은 실바는 근처에 있는 몰레스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콰직!

조종석이 꿰뚫리고 피가 튀었다. 붉은 실바는 기계적으로 다음 몰레스로 다가가 같은 일을 반복했다.

콰직!

그제야 남은 몰레스들이 정신을 차리고 실바에게 달려들었다.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붉은 실바도 도망갈 틈이 없었다.

만일 이 자리에 제론 혼자 있었다면 여기서 모든 상황은 끝났을 것이다. 제론은 제법 지쳐 있었고, 또 이렇게 적들이 다수로 몰려드는 상황을 피하는 건 상당히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 제론은 혼자가 아니었다.

쿵쿵쿵!

꽈앙!

어느새 다가온 카이트와 동료들이 몰레스들의 진로를 몸으로 막았다. 그리고 검을 뽑아 싸움을 시작했다.

꽝! 꽝! 꽝! 꽝!

적도 7기, 아군도 7기였다. 하지만 기체의 차이로 인해 조금씩 밀리는 형국이었다.

물론 그 와중에 붉은 실바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휴식을 취했다. 실바가 움직이는 순간이 모든 상황이 종료되는 시점이 될 것이다.

그 사실을 모두 알기에 몰레스들은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또한 카이트도 필사적으로 그들을 막았다.

제론은 거의 탈진에 가까운 상태였다. 사실 웬만한 라이더들은 여기까지 달려온 것만으로도 완전히 지쳤을 것이다.

하지만 제론은 보통 라이더들과는 달랐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상당한 경지에 오른 기간틱 나이트였다.

그래서 더 무리를 했다. 카이트가 위기에 빠진 걸 보고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점프를 했다.

점프를 한 번 할 때마다 몸에 무리가 쌓였다. 하지만 그 힘을 이용하면 적을 효과적으로 분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 파탄이 찾아왔다. 온몸이 부서질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그것을 참아 냈다.

아랫배에 뭉쳐 있던 마나가 혈관을 타고 움직였다. 그렇게 온몸으로 흩어진 마나가 몸에 조금씩 기력을 찾아 주었다.

위이잉!

심장의 마나링이 가속했다. 그렇게 온몸에 흩어진 마나를 끌어들이더니 한데 뭉쳤다. 그리고 그것을 폭발시켜 버렸다.

화아아악!

제론은 청량감이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실바는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만신창이가 되어 가는 동료들의 모습이 보였다.

두근!

심장이 뛰었다. 그리고 그 깊은 곳에서 뭔가가 울컥 솟아났다. 제론의 시선이 동료들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지나갔다.

금방이라도 다들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누구도 죽지 않았다. 그거면 충분했다.

제론은 다시 아랫배에 단단히 뭉치는 마나를 느끼며 천천히 몸을, 아니, 기간트를 움직였다.

키이이잉!

날카로운 굉음과 함께 붉은 실바가 움직였다.

쿠웅!

붉은 실바가 한 걸음 걸었다. 그 육중한 울림이 전장에 퍼지며 순간적으로 싸움을 소강상태로 만들었다.

경악에 찬 몰레스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리고 신뢰가 묻어나는 카이트의 시선도 느껴졌다.

붉은 실바가 몰레스 중 하나를 노리고 달려갔다.

쿵쿵!

꽈앙!

비스듬하게 점프한 붉은 실바의 발이 몰레스의 가슴에 정확히 틀어박혔다.

쿠과광!

콰직!

몰레스가 쓰러지며 정확히 조종석에 검이 꽂혔다. 눈앞에서 지켜보면서도 믿어지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이런 움직임을 보이려면 최소한 발굴형 기간트 중에서도 상급 기체라고 인정받는 아우틈이나 히엠스 정도는 되어야 한다.

한데 고작 실바로 어떻게 이런 결과를 만들어 낸단 말인가. 아니, 설사 그런 상급 기체를 타고 있다 하더라도 기간트가 점프를 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솔직히 이곳에 있는 라이더들 중 기간트가 점프하는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그럴 수도 있더라 하는 말만 들었을 뿐이었다.

한데 고작 실바가 하늘을 붕붕 날아다니니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쿠오오오오!

붉은 검이 바람을 찢으며 옆에 서 있던 몰레스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후웅!

몰레스는 간신히 그 검을 피했다. 그리고 라이더는 식은땀을 흘렸다. 너무 빨랐다. 대응이 어려울 정도였다. 마치 베테랑 라이더가 모는 발굴형 기간트를 상대하는 것 같았다.

꽝! 꽝! 꽝!

붉은 실바와 몰레스 2기의 검이 연달아 부딪쳤다. 놀랍게도 2개의 검을 동시에 쳐 내면서도 여유가 넘쳤다. 붉은 실바가 검을 휘두르는 속도가 몰레스들보다 훨씬 빨랐다.

붉은 실바가 몰레스 2기를 맡는 동안 카이트가 동료들을 이끌고 나머지 몰레스들을 몰아붙였다.

안 그래도 수적으로 불리했는데, 붉은 실바가 하나를 부수고 2기를 동시에 맡으니 그 불리함이 너무 커졌다.

고작 4기의 몰레스로 5기의 카타락타와 2기의 크라테르를 상대하는 건 너무나 버거웠다. 더구나 크라테르 중 하나는 카이트가 몬다.

비록 카이트가 너무 지치고 충격이 누적되긴 했지만 그래도 그 실력이 어디 가지 않았다. 원래부터 몰레스 2기를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이 있는 라이더였다. 당연히 그 실력이 크게 빛을 발했다.

꽈앙! 꽈앙!

콰직!

카이트의 활약으로 몰레스가 하나씩 쓰러졌다. 그리고 조종석이 꿰뚫리며 빛을 잃었다.

모든 몰레스가 바닥에 눕는 데 30분이 걸렸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때에 제론이 상대하던 몰레스 2기도 빛을 잃었다.

제론은 이번 실전을 통해 제국 기사 검술을 기간트로 펼치는 게 가능해졌다.

"후욱, 후욱. 제론, 괜찮나?"

"예."

"그럼 조금 쉬었다가 기지로 복귀하자. 아무래도 네가 먼저 이동해야 할 것 같다."

"그렇게 하죠."

제론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렇게 격렬하게 움직였는데도 멀쩡했다. 아무래도 조금 전 마나가 폭발적으로 온몸을 훑을 때 뭔가 변화가 생긴 모양이었다.

"어쩌면 지금 기지가 공격받고 있을지도 몰라."

카이트의 말에 제론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제야 제론도 지금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아, 그럼 그게……!'

이곳에 달려오기 전 느꼈던 불안감의 정체가 어쩌면 기지가 공격당할 위험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론 근처에 있던 기간트들이 갑자기 사라졌다. 그리고 라이더들을 토해 냈다. 소환을 해제한 것이다. 카이트도 마찬가지였다.

기간트를 타고 있는 자체로 체력을 계속 깎아 먹는다. 쉴 때는 이렇게 기간트에서 내리는 편이 나았다.

그 모습을 본 제론이 카이트에게 말했다.

"전 기지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분위기를 보면 큰 위험이 있을 것 같진 않지만 네가 가면 큰 도움이 되겠지. 가 봐라. 대신 조심해라. 기간트도 멀쩡하지 않아 보이는데."

"알겠습니다. 그럼."

제론은 기간트에 탄 채로 가슴에 주먹을 올려 군례를 취했다. 그리고 돌아서서 서둘러 달려가기 시작했다.

쿵쿵쿵쿵쿵!

지축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제론의 붉은 실바가 멀어져 갔다.

카이트와 동료들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쓰러진 몰레스들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그들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전리품들이었다.

군대라는 특성상 이 기간트들을 이용해 큰 이득을 취할 수는 없겠지만, 제대로 공을 세운 셈이니 상금을 받고 진급하는 정도는 충분할 것이다.

그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며 몸과 마음을 다스렸다. 일단 후들거리는 다리만 진정되면 바로 기지로 돌아갈 것이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곳에는 그저 숨소리만 가득했다.

기지에 도착한 제론은 표정이 굳었다. 기지 곳곳이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멀리서 굉음이 들려왔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기간트들이 싸우는 게 분명했다.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서둘러 달려가서 도와야 했다.

"후우욱!"

제론은 일단 숨을 길게 쉬어 기력을 회복했다. 호흡과 함께 아랫배의 마나가 불길처럼 일어나 몸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었다.

제론은 정말 신기할 정도로 피로가 싹 사라진 걸 느끼고는 다시 달렸다.

쿵쿵쿵쿵쿵!

붉은 실바가 그 어떤 기간트보다 빠른 속도로 기지를 가로질렀다.

양 진영의 싸움은 팽팽했다.

사실 벨룸 왕국의 계획대로만 되었다면 압도적으로 밀어붙이는 상황이 되었겠지만, 계획이 실패하는 바람에 접전이 되었다.

제론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상황을 지켜봤다.

벨룸 왕국도 주력 기체는 카타락타였다. 그리고 간간이 몰레스가 섞여 있었다.

그것은 레늄 왕국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대부분 카타락타였고, 벨룸 왕국과 비슷한 수의 크라테르가 있었다.

'당황했군.'

제론은 냉정하게 전황을 파악했다. 벨룸 왕국 측은 동요하고 있었다. 심하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동요했다. 그렇기에 전황이 변하지 않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전력을 분석하면 벨룸 왕국 측이 약간 더 높았다. 게다가 기습이었을 게 분명하니 레늄 왕국이 밀려야 정상이다.

'이 동요가 끝나면 돌이킬 수 없다.'

지금이야 동요로 인해 우왕좌왕하고 있지만 그 시간이 끝나면 훨씬 조직적으로 밀고 들어올 것이다.

기간트 간의 싸움은 비교적 단순하다. 더구나 이렇게 양측이 제대로 된 진형을 이루고 있을 때는 더 단순해진다.

콰앙! 콰앙! 콰앙!

기간트들이 서로의 검을 마구 휘둘렀다. 검으로 검을 막고 적을 내리치는 행위를 반복했다.

기간트 자체가 워낙 크고 무겁기 때문에 움직임이 크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런 집단전의 경우 기량이 크게 차이 나거나 기체의 차이가 크지 않으면 상대를 압도하기 어려웠다.

벌써 수십 기의 기간트가 부서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 기간트의 잔해가 변수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 발에 걸리거나 해서 균형을 잃으면 진형이 흔들릴 수도 있었다.

제론은 더 기다리지 않았다. 적의 진형을 크게 한번 흔들어 줘야 한다.

쿵쿵쿵쿵!

붉은 실바가 빠르게 달렸다. 굉음이 퍼져 나갔다. 하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 훨씬 더 큰 소리가 전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꽈앙!

붉은 실바가 높이 뛰어올랐다. 지금까지 중 가장 높은 점프였다. 마치 하늘을 나는 듯했다.

점프를 할 때 터진 굉음이 어찌나 컸는지 몇몇 기간트들이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곳을 쳐다봤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당황했다.

붉은 실바가 하늘을 날아 벨룸 왕국 진영에 떨어지고 있었다.

꽈아아앙!

벨룸 왕국의 몰레스 하나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어깨가 움푹 들어가 있었다. 실바의 발이 어깨를 부순 것이다.

콰직!

붉은 실바의 검이 유유히 조종석을 꿰뚫었다.

제론은 지금까지 같은 패턴으로 적을 상대했다. 점프해서 발로 내려찍은 뒤, 쓰러진 기간트의 라이더를 죽이는 방식이었다.

이는 제론의 균형 감각이 지나칠 정도로 뛰어나기 때문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점프를 해서 내려찍으면 제론도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균형이 흔들리는 게 당연했다.

한데 제론은 그 와중에 조금도 균형이 흐트러지지 않고 정확히 조종석을 꿰뚫어 버리니 보는 사람들이 질릴 지경이었다.

벨룸 왕국 진영 한가운데에 선 제론이 검을 크게 휘두르며 몸을 한 바퀴 빙글 돌렸다.

콰과과과광!

몇몇은 검을 들어 그것을 막았고, 몇몇은 검을 허용했다. 하지만 검을 허용한 기간트들도 크게 부서지지 않았다. 그저 검을 맞아 장갑이 살짝 찌그러지거나 상처가 난 정도였다.

"잡아!"

누군가가 외쳤다.

제론 근방에 있던 기간트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틈이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제론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 세상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7개나 되는 손이 다가오는 걸 보며 그중 하나를 향해 몸을 던졌다.

콰득!

붉은 실바가 카타락타의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팔을 확 당기며 몸을 회전시켰다.

카타락타와 붉은 실바의 자리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다들 당황했지만 뻗던 손을 회수하지 못했다.

콰자자자작!

카타락타의 몸체에 6개의 손이 틀어박혔다. 원래는 잡으려 했지만 카타락타가 빠르게 다가가는 바람에 다들 손을 몸에 박아 넣은 것이다.

만신창이가 된 카타락타가 비틀거렸다.

그리고 제론은 그 자리를 빠져나가 옆으로 빠르게 달렸다.

쿵쿵쿵!

물론 멀리 가지 못했다. 적 진영에서 달려 봐야 또 적이 있을 뿐이다. 제론은 금세 다시 포위당했다.

쾅! 쾅!

콰직!

제론은 정신없이 검을 휘둘렀다. 사방에서 검격이 쏟아졌기에 그걸 모두 막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치명적인 것만 쳐 냈다.

벨룸 왕국의 라이더들은 붉은 실바의 위용에 기가 질렸다. 홀로 적진 한복판에 들어와 이 정도로 휘젓고 다니는 것이 고작 실바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붉은 실바가 적진을 한 번 휘저은 덕분에 레늄 왕국 측은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꽈과과과광!

레늄 왕국 측 기간트들이 조직적으로 적진에 파고들었다. 벨룸 왕국 측에서는 일단 진형이 흔들린 이상, 단단한 진형을 이뤄 밀고 들어오는 적들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콰앙! 콰앙! 콰앙!

벨룸 왕국의 카타락타들이 속절없이 부서지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몰레스는 좀 나았지만 그래도 무사하지 못했다.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장갑이 떨어져 나갔다.

"밀어붙여라! 쉬지 마!"

사령관의 외침에 레늄 왕국 라이더들이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진형을 유지하는 게 중요했다. 하지만 마음은 조급해졌다.

전투의 흐름을 단번에 뒤엎어 버린 붉은 실바가 절체절명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를 잃을 수는 없었다.

꽈과과과광!

여기저기서 굉음이 울렸고, 기간트의 잔해가 날아다녔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전쟁에서는 승리하겠지만 더욱 압도적으로 밀어붙이지는 못했다.

이대로 가면 붉은 실바는, 아니, 붉은 실바의 라이더인 제론을 구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급박한 상황이 되었을 때, 7기의 기간트가 나타났다.

"가서 제론을 구해라!"

카이트였다. 그리고 카이트와 함께 체른산으로 갔던 기간트들이었다.

무려 크라테르가 2기였고, 카타락타가 5기나 되었다. 그들은 그대로 붉은 실바를 향해 돌진했다.

꽈과과과광!

검을 휘두르지도 않았다. 그냥 어깨로 상대를 들이받았다. 상대도 충분히 방비를 했지만 그 충격을 모두 해소하지는 못했다.

카이트는 그동안 늘어난 실력을 자랑이라도 하듯 곧장 균형을 되찾고 검을 휘둘렀다.

꽝! 꽝! 꽝! 꽝!

카이트와 동료들의 난입은 벨룸 왕국 측 기간트의 진형을 더욱 크게 무너뜨렸다.

그리고 사령관이 그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밀어 버려! 진형을 무시하고 다들 부숴 버려! 돌격!"

사령관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크라테르들이 먼저 달려 나갔다.

꽝! 꽝! 꽝! 꽝!

크라테르들의 뒤를 이어 카타락타들도 우르르 몰려갔다.

난전이 되었지만, 기세를 탄 레늄 왕국군이 기가 죽은 벨룸 왕국을 완전히 압도해 버렸다.

꽈과과과광!

벨룸 왕국의 기간트들이 낙엽 떨어지듯 우수수 무너졌다. 결국 벨룸 왕국은 피눈물을 흘리며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쫓아라! 한 놈도 놓치지 마라!"

레늄 왕국의 기간트들이 후퇴하는 벨룸 왕국군을 쫓아가 마구 공격했다.

벨룸 왕국군은 전멸의 위기를 맞았다. 그리고 그 순간 벨룸 왕국 쪽에서 거대한 불덩이 하나가 날아왔다.

휘우우우우우!

꽈아아아아아아앙!

거대한 화염이 가장 앞에서 추격하던 레늄 왕국의 기간트들을 덮쳤다.

불바다가 펼쳐졌다. 기간트들은 화염에도 어느 정도 내성이 있고 방어가 되긴 하지만, 워낙 뜨거운 불이라서 곳곳이 망가졌다. 다행히 라이더들에게는 큰 피해가 가지 않았다.

대신 더 이상 추격을 하는 건 무리였다.

그렇게 그날의 전투가 끝났다.

전투는 끝났지만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날 전투는 긴 전쟁의 신호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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