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 기습
암시장에서 테페룸 동전을 구입한 사람은 리오 마탑의 탑주인 가이스트 폰 헤르츠였다.
리오 마탑은 크란 제국 제일의 마탑이었다. 보유한 마법사의 수만 해도 3백 명이 넘었고, 마탑이 개발한 기간트도 5가지나 될 정도였다.
또한 가장 먼저 기간트 양산에 성공한 마탑이기도 했다. 즉, 실바를 설계하고 제조한 마탑이 바로 리오 마탑이었다.
가이스트는 심각한 표정으로 눈앞에 놓인 10개의 동전을 세심히 살폈다.
"정말로 정교한 세공이로군. 대체 무슨 수로 이런 세공을 했지?"
사실 그저 세공만 정교한 테페룸 동전이었다면 150만 골드나 써 가면서 이걸 구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이스트의 마음을 끈 것은 동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기묘한 느낌이었다. 마치 누군가 마법을 쓰기 직전인 듯한 느낌이었다.
그건 마법사라고 해도 알아차리기 어려운 느낌이었다. 가이스트처럼 감각이 예민하고 마나에 대한 감응력이 뛰어난 사람만 간신히 알아차릴 수 있는 느낌이었다.
그렇기에 가이스트는 경쟁적으로 경매에 참여해 이것을 샀다. 아마 자신과 경쟁하던 몇몇 사람도 분명 그걸 느끼고 경매에 열을 올렸을 것이다.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가이스트는 그들이 다른 마탑의 주인일 거라고 확신했다. 아니라면 100만 골드가 넘는 돈을 경매에 제시할 가능성이 없었다. 고작 동전 10개에 말이다.
"이런 동전이 존재하다니. 믿을 수가 없군."
고대에 관심이 많았기에 수많은 고대 유물을 모아 왔다. 그리고 고대에 대한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가이스트는 고대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자신일 거라고 자신했다.
한데 이 동전은 아무리 살펴봐도 그 연원을 알 수가 없었다. 고대의 어떤 나라에서 쓰던 동전인지, 또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는지도 알 수 없었다.
동전의 문양은 또 어떠한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양식의 그림이었다. 그려진 사람의 정체도 유추가 거의 불가능했다.
"보면 볼수록 신비로워."
가이스트는 황홀한 눈으로 나란히 놓인 10개의 동전을 바라봤다. 150만 골드라는 어마어마한 거금이 들었지만, 그 돈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뭔가 비밀이 숨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비밀을 알아내려면 뭔가 다른 것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이 동전과 함께 발견된 다른 유물 같은 것들 말이다.
가이스트의 눈빛이 음험하게 빛났다.
☆ ☆ ☆
"도색이라……."
수석 엔지니어는 턱을 쓰다듬으며 제론의 실바를 바라봤다. 도색을 요구한 사람은 제론이 아니라 카이트였다. 그렇기에 제론은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군부의 기간트는 도색법이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개인 기체에는 그 법이 살짝 느슨했다. 그렇기에 개인 기간트의 경우는 각자 차별화를 두기 위해 색다른 도색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곤란하면 굳이 안 하셔도 됩니다."
제론의 말에 카이트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나섰다.
"되긴 뭐가 돼! 해 주십시오. 검붉은 색으로 부탁드립니다. 전장에 서면 눈에 확 띄게 말이죠."
수석 엔지니어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이야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으니 상관없지만, 갑자기 확전이 되면 어쩌려고 이런단 말인가.
"눈에 띄면 타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상당히 위험합니다."
카이트가 씨익 웃었다.
"괜찮습니다. 어디에서건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 더구나 밖에는 못 나가고 기지 방어만 할 건데 무슨 상관입니까."
그 말에 수석 엔지니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건 그렇습니다만……."
어쩌면 그렇게 튀게 만들어 적을 끌어들인다면 좀 더 다양한 작전의 구사가 가능해진다. 거기까지 생각한 수석 엔지니어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당장 해 드리죠. 피처럼 붉은색으로 눈에 아주 확 띄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카이트가 환하게 웃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하하."
제론은 그런 카이트의 모습에 고개를 한 번 젓고는 살짝 미안한 눈으로 수석 엔지니어를 쳐다봤다.
"부탁드립니다."
"염려 마십시오. 아주 멋진 놈으로 만들어 드릴 테니까. 하하하하."
수석 엔지니어의 밝은 웃음에 제론도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기대감 어린 눈으로 자신의 실바를 쳐다봤다.
지금은 아예 도색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여기저기 강판을 대고 부품을 끼운 티가 확 났다. 마치 누더기를 입은 것 같았다.
하지만 도색이 끝나고 나면 아마 그 어떤 기간트보다 멋지게 변할 것이다.
제론의 눈에 어린 기대감이 점점 짙어졌다.
☆ ☆ ☆
일단의 무리가 은밀하게 이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멋들어진 흉갑을 입고 거대한 검을 등에 메고 있었다.
흉갑과 검에는 기묘한 문양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마법진이었다. 마법진 자체가 무늬처럼 흉갑과 검을 장식해 멋을 더해 주었다.
그런 방식의 흉갑과 검은 기간틱 라이더를 상징한다. 아공간에 보관한 기간트의 매개체가 바로 흉갑과 검이었다.
총 15명으로 이루어진 무리였는데, 모두 기간트를 소유한 기간틱 라이더였다.
가장 앞에서 달리던 사내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손을 슬쩍 들었다.
그러자 따라가던 사내들도 그와 행동을 같이 했다.
리더가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허리에 검을 찬 기사 한 명과 창을 든 병사 다섯이 보였다.
기간트 라이더가 되려면 기본적으로 실력이 뛰어나야 한다. 마나를 다루지 못하면 기간트를 가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기간트 라이더는 기사인 경우가 많았다.
15명의 기사가 고작 기사 하나와 병사 다섯으로 이루어진 무리를 두려워할 리 없었다. 다만 그들은 만에 하나 자신들의 침입이 알려지는 것을 경계할 뿐이었다.
그들은 가장 완벽한 기회가 올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렸다.
"지금."
리더가 나직이 말했다. 그와 동시에 열다섯 라이더가 일제히 병사들을 덮쳤다.
푹! 푹! 푹!
병사들은 제대로 된 반항 한번 못해 보고 당했다. 하지만 기사는 그렇지 않았다. 놀라며 검을 뽑아 대항하려고 했다.
챙!
검을 뽑는 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그와 동시에 기사의 온몸으로 마나를 머금은 검이 날아갔다.
서걱!
기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절명했다. 놀랍게도 열다섯 모두가 익스퍼트였다.
"서둘러라. 일단 순찰조 하나를 처리했으니 당분간은 안전할 것이다. 체른산을 먼저 확보해야 한다."
열다섯 라이더는 속도를 높였다.
그들은 벨룸 왕국의 기사들이었다. 그들이 먼저 체른산에 자리를 잡아 적을 움직이면, 그 틈을 타서 본대가 밀고 내려오는 작전이었다.
무려 15대의 기간트가 나타나면 체른산 방어군이 얼마나 동요하겠는가. 그 동요가 바로 첫 번째 핵심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실력이 두 번째 핵심이었다.
그들은 벨룸 왕국에서도 손가락에 꼽히는 기간틱 나이트들이었다. 비록 체른산 방어군이 보유한 기간트의 수가 50대를 넘어가지만, 얼마든지 버틸 자신이 있었다.
그들이 오랫동안 버티면 버틸수록 작전이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렇게 작전이 계획대로 진행되면 체른산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전선을 조금 변경시켜 체른산을 확보하는 것이 이번 작전의 진짜 목적이었다.
열다섯 라이더는 그 뒤로 두 번이나 순찰조를 만나 처리했다. 그리고 체른산에 들어갈 수 있었다.
부대가 발칵 뒤집혔다. 간밤에 3개의 순찰조가 사라진 것이다. 체른산 방어군 사령관은 즉시 병력을 투입해 순찰조를 찾게 했다.
하지만 시체는 못 찾고, 피를 흘린 흔적만 찾아냈다. 상황은 자명했다. 누군가 침투해 습격한 것이다.
방어군이 채 상황을 완전히 파악하기도 전에 체른산이 쿵쿵 울렸다. 그리고 7기의 기간트가 나타났다. 벨룸 왕국이 자랑하는 기체인 몰레스였다.
몰레스는 크라테르보다 약간 성능이 뛰어난 기체였다. 레늄 왕국에서 라쿠스를 개발한 이유가 바로 몰레스 때문이었다.
그런 몰레스가 7기나 나타났으니 얼마나 당황스럽겠는가.
사령관은 즉시 전력을 투입했다.
몰레스 7기를 처리하려면 최소한 맞서는 수가 그 이상이라야 한다. 몰레스를 몬다는 것은 벨룸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10기의 카타락타, 그리고 3기의 크라테르가 체른산으로 향했다.
카이트는 크라테르를 탄 채 가장 앞에서 달려갔다. 체른산은 부대 바로 옆에 위치했기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정지!"
카이트는 적이 보이자마자 멈췄다. 그의 직감이 더 이상 움직여선 안 된다고 경고했다.
적이 몰레스 7기라고 해서 무려 13기나 이끌고 왔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갑자기 든 것이다.
"방어진을 구축하고 대기한다!"
카이트의 말에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곳의 책임자는 카이트였기에 군소리 없이 명령에 따랐다.
카이트가 산 아래에서 방어선을 짜고 대기하자, 이번에는 산을 점령한 벨룸 왕국의 라이더들이 당황했다. 원래 계획은 이게 아니었다.
자신들을 노리고 달려드는 적을 숨은 8명의 라이더와 합세해 박살을 내서, 전력을 이쪽으로 집중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한데 저렇게 방어 진형으로 대기해 버리면 그 작전을 아예 쓸 수가 없지 않은가.
벨룸 왕국 라이더들의 리더가 심각한 표정으로 주위에 명령을 내렸다.
"이대로라면 시간에 맞출 수가 없다. 일단 저들을 최대한 빨리 박살 내야 한다."
리더의 표정은 어두웠다. 저렇게 단단히 방어 진형을 구축하면 짧은 시간 안에 저들을 부수기가 어렵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최소한 저들을 부수고 다음 전력을 이쪽으로 끌어들이지 않으면 단시간 안에 전선을 변경시킬 수가 없었다.
"이 체른산을 무조건 확보해야만 한다. 나머지도 탑승해!"
리더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은 8명의 라이더가 기간트를 소환했다. 모두 몰레스였다.
갑자기 몰레스가 15기로 늘어나자, 카이트가 크게 당황했다. 하지만 쉽게 당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카이트는 자신의 실력을 믿었고, 또 동료들의 힘을 믿었다.
"기지에 지원을 요청해야 합니다!"
라이더 중 하나가 외쳤다. 카이트도 그렇게 생각했기에 당연히 통신을 시도했다. 하지만 통신 마법이 완전히 먹통이었다.
카이트는 그제야 체른산 중턱에 높게 솟아 있는 첨탑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철골구조를 가진 첨탑이었는데, 마법 통신망을 무력화시키는 기기였다.
"젠장! 자리를 철통같이 지켜라! 무조건 버틴다!"
일단은 버티면서 시간을 끌어야 한다. 시간이 지나도 자신들이 돌아가지 않으면 기지에서 뭔가 조치를 취해 줄 것이다.
쿵쿵쿵쿵쿵!
15기의 몰레스가 일제히 체른산에서 아래로 내달렸다. 경사를 달리며 점점 속도가 붙었다. 그렇게 얻은 힘으로 방어진을 단번에 부숴 버릴 작정이었다.
하지만 카이트 역시 다 생각이 있었다. 카이트는 눈을 빛내며 타이밍을 쟀다. 이미 이와 비슷한 상황에 대한 훈련이 충분히 되어 있었다.
쿵쿵쿵쿵쿵!
경사를 내달리니 속도가 어마어마하게 붙었다. 이대로 충돌을 하면 레늄 왕국측 기간트들이 제대로 버티기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
일단 성능은 몰레스에 비해 크라테르나 카타락타가 확실히 모자라기 때문이다.
"지금!"
카이트가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방어진 선두에 있던 크라테르 한 기가 옆으로 내달렸다. 카이트는 그와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하압!"
2기의 크라테르가 두꺼운 쇠사슬 뭉치를 양쪽으로 팽팽하게 당겼다. 워낙 타이밍이 좋아 가장 앞에서 달려오던 몰레스 6기가 꼼짝없이 걸려들었다.
꽈과과과광!
6기나 되는 몰레스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카이트를 비롯한 크라테르들이 일제히 바닥에 쓰러진 몰레스의 등에 검을 꽂았다.
콰직! 콰직! 콰직!
3기의 몰레스가 무력화되었다. 그들은 정확히 라이더가 위치한 곳에 검을 찔러 넣었다. 라이더가 죽은 이상 다시 몰레스가 움직일 수는 없었다.
카이트는 서둘러 방어진에 끼어들었다. 그리고 나머지 두 크라테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동료들이 넘어지는 바람에 주춤한 몰레스들이 다시 달려왔을 때는 이미 방어진이 완성된 후였다.
"좋아! 이제 해 볼 만하다!"
적은 12기, 아군은 13기. 충분히 해 볼 만했다. 물론 이기는 건 쉽지 않겠지만, 시간을 끄는 건 가능했다.
카이트는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며 적의 공격을 차분히 막아 냈다. 또한 위험에 처한 동료들까지 살펴 주었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좋아졌어.'
카이트는 자신의 실력이 예전에 비해 월등히 높아졌다는 걸 이번에 여실히 느꼈다. 몰레스가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콰과과광!
금속과 금속이 충돌하고 흙먼지가 피어났다. 기간트용 거검이 허공을 갈랐고, 또 다른 검이 그것을 막아 내는 일을 반복했다.
싸움은 점점 치열해져 갔다.
☆ ☆ ☆
제론에게는 특별한 명령이 따로 하달되지 않았다. 사실 제론이 실바를 완성하고 훈련에 참가하기 시작한 지 불과 열흘 정도였다.
아직 제론은 명확한 팀도 정해지지 않았다. 분위기를 봐서 카이트의 팀으로 들어가게 될 확률이 높았지만,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최근 기간트를 혼자 조립하면서 제론은 정말로 많은 것을 얻었다. 마법은 물론이고, 기간트에 대한 지식도 상당히 얻었다.
제론이 얻은 기간트 지식은 현재 통용되는 최신 지식이나 정보를 넘어서는 것들이었다. 바로 초고대 문명의 지식들이었다.
그중 몇 가지는 직접적으로 제론의 실바에 적용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액체 테페룸이었다.
액체이기에 테페룸으로부터 마나 코어에 전해지는 에너지의 효율이 완전히 달랐다.
제론의 실바는 그 출력이 0.8이다. 출력 자체는 다른 실바와 똑같았지만, 에너지 효율이 훨씬 뛰어나니 최종적으로 나타나는 결과가 완전히 달랐다. 실제로는 1.2의 출력이나 다름없는 성능을 발휘했다.
아무튼 그렇게 마법 수준이 높아지고, 지식을 얻은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마나 호흡법이나 검술이 한 단계 더 발전했다는 점이 훨씬 중요했다.
기간트를 혼자 조립하면서 손가락의 세심한 움직임과, 마나 로드를 따라 움직이는 마나의 미세한 조절 능력이 발전했다.
또한 무거운 부품을 연달아 들고 나르다 보니, 순간적으로 마나 로드에 부하가 걸릴 정도로 많은 마나를 다루기도 했다.
그 두 가지가 어느 순간 조화를 이루더니 순식간에 한 단계 수준이 올라가 버렸다. 검술과 마나 호흡법 두 가지 모두 말이다.
제론은 그로 인해 예전보다 감각이 훨씬 예민해졌다. 그 예민한 감각이 끊임없이 제론을 자극했다.
"왜 이렇게 불안하지?"
제론은 안절부절못했다. 계속 서성이며 불안감의 정체를 파악하려 애썼다.
사실 그 불안감의 정체는 기지로 엄습하는 전쟁의 기운이었다. 벨룸 왕국군이 체른산 방어군을 향해 진군을 준비하고 있으니, 그 기세와 투기가 제론에게 전해진 것이었다.
하지만 제론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오늘 작전에 투입된 카이트 때문이었다.
제론은 이 불안감이 카이트 때문에 생긴 거라고 판단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그랬으니까.
제론은 고개를 들어 오연히 서 있는 붉은 실바를 쳐다봤다. 어서 타 달라고 소리 지르는 것 같았다. 도색이 끝난 이후로는 아직 한 번도 타 보지 않았다.
붉은 실바를 본 뒤로 제론의 망설임이 사라졌다. 제론은 그대로 땅을 박차고 점프했다.
탁! 탁!
무릎과 허리를 디디고 조종석에 앉은 제론은 눈을 빛냈다. 해치가 닫혔고, 실바가 기동했다.
우우웅!
진동과 불빛. 기간트가 기동 완료되었다는 신호였다. 제론의 붉은 실바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쿵! 쿵! 쿵!
지축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격납고에서 나온 붉은 실바는 체른산을 향해 이동했다.
처음에는 걸었지만 점점 걸음이 빨라지더니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소란에 병사와 장교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리고 붉은 실바가 달리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허둥지둥 사령관에게 보고하기 위해 뛰어 들어갔다.
카이트는 점점 버거워졌다. 카이트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카이트의 동료들은 그렇지 않았다.
벨룸 왕국의 몰레스는 출력이 1.8이다. 크라테르보다도 0.1이 높다. 한데 레늄 왕국측은 크라테르보다 카타락타가 훨씬 많았다. 카타락트의 출력은 고작 1.2, 차이가 너무 심했다.
게다가 실력도 달랐다. 벨룸 왕국에서 온 라이더들은 다들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다. 벨룸 왕국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뛰어난 상급 라이더들만 있었으니 차이가 더 컸다.
처음에는 카이트의 압도적인 실력으로 어떻게든 균형을 유지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니 굳건했던 방어진에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카이트의 마음이 알게 모르게 조급해졌다. 그리고 그 조급함이 금세 결과로 나타났다.
콰과광!
"크윽!"
카이트가 뒤로 한 발 물러났다. 근처에 있던 몰레스 한 기가 거의 주저앉다시피 해서 다가와 다리를 후려친 것이다.
평소라면 알아차리고 대처를 했을 것이다. 사실 그 행동 자체가 벨룸 왕국 측에서 건 모험이었다. 카이트가 냉정히 판단하고 대처했으면 상황을 약간이나마 반전시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벨룸 왕국의 리더가 카이트의 조급함을 아주 정확히 찔렀다.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은 카이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자신 때문에 만들어진 빈틈으로 몰레스 2기가 들어와 카이트 양옆을 지키고 있던 두 크라테르를 덮쳤다.
콰쾅! 쾅!
굉음과 함께 싸움이 더욱 격렬해졌다. 그리고 방어진의 균열이 더욱 커졌다.
'내 실수다!'
카이트는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꽝! 꽝! 꽝!
온 힘을 다했다. 크라테르와 동화된 카이트의 몸에 충격이 누적되었다. 하지만 카이트는 검을 멈추지 않았다.
크라테르 2기가 막힌 상황이고, 몰레스 2기가 카이트를 덮쳤다.
그리고 나머지 10기의 카타락타를 몰레스 8기가 상대하는 형국이 되었다. 방어진의 균열을 비집고 들어간 2기의 몰레스가 만들어 낸 결과였다.
10기의 카타락타는 정신없이 밀렸다. 순식간에 방어진이 와해되었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카타락타들이 무너지려 했다.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카타락타가 단 한 기라도 무너지면, 연쇄적으로 당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끝장이었다. 아무리 카이트라도 몰레스 3기가 붙으면 거의 버티지 못한다.
사실 지금도 버거웠다. 온몸이 비명을 질렀다. 아마 이 싸움이 끝나고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한동안 기간트를 타지 못할 것이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온몸에 누적된 충격이 뇌를 흔들었다. 카이트는 점점 멀어져 가는 의식 너머로 문득 제론이 떠올랐다.
'그놈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제론의 실력은 카이트가 가장 잘 안다. 최근에는 그래도 비교적 대등한 싸움을 이어 갔다고 하지만, 그건 그동안 카이트가 실전에서 쌓은 임기응변 덕분이었다.
제론의 센스는 카이트가 결코 따라갈 수 있을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또한 동화율이 얼마인지 파악조차 안 된다.
그렇게 제론을 떠올리며 정신을 잃으려는 카이트의 귓가로 거친 소리가 울렸다.
쿵쿵쿵쿵쿵!
누군가 기간트를 타고 달려오는 것이 분명했다.
"크윽!"
카이트는 혀끝을 세게 깨물었다. 짜릿한 통증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직 이렇게 무너져선 안 된다. 누군지 모르지만 동료가 왔다. 이대로라면 달려온 동료도 무참히 부서질 것이다.
비릿한 피 맛이 입안을 감돌았다. 카이트는 다시 힘을 내서 검을 휘둘렀다.
꽈광!
그야말로 초인적인 의지와 힘이었다. 순간적으로 동화율이 치솟으며 크라테르를 마치 자신의 몸처럼 움직였다.
몰레스 2기가 주춤 물러나는 게 보였다. 카이트가 사납게 웃으며 그중 하나에 달려들었다.
어차피 이제는 진형이고 뭐고 의미가 없었다. 하나라도 더 적을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꽈앙!
카이트가 모는 크라테르와 몰레스의 검이 부딪혔다. 거친 충격이 온몸을 휘감았다. 하지만 카이트는 물러나지 않았다.
카이트의 발이 몰레스의 허벅지를 때렸다.
꽝!
몰레스가 비틀거렸다. 그때, 뒤에 있던 몰레스가 자세를 갖추고 달려들었다. 그리고 카이트의 등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부우웅!
바람이 찢어지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카이트는 아차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억지로 몸을 비틀어 돌아섰다. 몰레스의 거검이 정수리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건 도저히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붉은 덩어리 하나가 몰레스 위로 떨어졌다.
꽈아아아앙!
몰레스가 덩어리에 맞아 그대로 쓰러졌다. 휘두르던 검 역시 바닥에 떨어지며 튕겨 나갔다. 자욱한 흙먼지가 일어났다.
워낙 빠르게 뭔가가 떨어져 내렸기에 순간적으로 붉은 바위가 몰레스를 때린 줄 알았다.
한데 흙먼지가 걷히고 드러난 광경은 카이트의 입이 떡 벌어지게 만들었다.
"제론?"
붉은색 실바가 몰레스의 등을 밟고 오연히 서 있었다. 그렇다면 방금 허공에서 떨어진 것이 제론의 붉은 실바란 말 아닌가!
싸움터가 정적에 휩싸였다. 마치 누군가 전설의 마법을 부려 시간을 멈춘 것 같았다.
"서, 서, 설마 점프를 했단 말이야? 실바로?"
카이트가 경악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그의 외침이 이 광경을 지켜보는 모든 사람의 심정을 대변해 주었다.
붉은 실바가 천천히 돌아섰다. 바닥에 쓰러진 몰레스의 등에는 검이 박혀 있었다. 정확히 조종석을 꿰뚫었다.
콰칭!
검을 뽑은 붉은 실바가 몰레스들을 슥 둘러봤다. 어마어마한 위압감이 몰레스의 라이더들을 덮쳤다.
"꿀꺽!"
누군가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상대는 고작 실바였다. 하지만 아무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마치 피로 온몸을 칠한 것 같았다.
붉은 실바가 걸음을 옮겼다.
쿵! 쿵!
그리고 그대로 속도를 올리며 달렸다.
쿵쿵쿵!
다섯 걸음을 달려 추진력을 얻은 붉은 실바가 땅을 강하게 박찼다.
꽈앙!
붉은 실바가 허공에 떠올랐다. 정말로 점프를 한 것이다.
꽈과광!
붉은 실바의 발이 거의 무방비로 서 있던 몰레스의 가슴을 때렸다. 점프에서 떨어지며 때렸기에 그 충격이 어마어마했다.
흙먼지가 일었고, 다시 걷혔다. 붉은 검에 조종석을 꿰인 몰레스와 그 옆에 오연히 서 있는 핏빛 실바가 보였다.
휘이잉!
한 줄기 바람이 전장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 바람은 몰레스를 탄 라이더들의 귓가에 스산하게 울렸다. 그리고 카이트를 비롯한 레늄 왕국 라이더들의 가슴에 뜨겁게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