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1/217)

Chapter 10 제론의 실바

제론이 소속된 곳은 체른산 방어군이었다. 규모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부대였는데, 중요도는 딱 그 규모 정도였다.

체른산 방어군의 수석 라이더인 카이트는 멍하니 자신의 기간트가 수리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고작 아카데미를 갓 졸업한 애송이에게 자신이 패하다니. 그것도 고작 카타락타에게 말이다.

크라테르는 1.7의 출력을 가진다. 그리고 카타락타는 고작 1.2에 불과하다. 속도나 힘에서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차이가 나는데 이렇게 어이없이 패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카이트는 멍하니 있다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수석 엔지니어를 보고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떻습니까?"

"마법사를 불러야겠습니다. 아마 일정이 밀려 있어서 이틀쯤 더 걸릴 것 같습니다."

이틀이라는 말에 카이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패배의 아픔과 치욕이 다시 밀려왔다.

"뭐가 문제입니까?"

"어깨는 관절과 장갑을 교체하면 끝나는데, 문제는 조종석과 마나 코어 사이에 있는 마나 로드입니다."

"마나 로드가 끊어졌군요."

"예. 웬만해서는 이런 식의 파손은 잘 일어나지 않는데 운이 나빴습니다."

카이트는 대꾸하지 않았다. 운이 아니다. 이건 엄연한 실력이었다. 실력이 모자라서 당했고, 그래서 이런 손상을 당한 것이다.

"휴우.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부탁드립니다."

"염려 마십시오. 부대 최고의 라이더인 카이트 님의 기간트인데 마법사들도 많이 고려를 할 겁니다."

카이트는 다시 한 번 부탁한다는 말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착잡했다.

'뭘 한다…….'

라이더에게 갑자기 기간트가 사라지니 할 일이 없었다. 사실 검술이라도 수련하면 되지만 그런 생각은 아예 들지도 않았다.

멍하니 기계적으로 걷던 카이트의 눈에 어딘가로 향하는 제론의 모습이 보였다.

제론은 그 이후로 일과 시간을 보장받았다. 다른 라이더의 훈련을 굳이 볼 필요가 없다는 걸 실력으로 입증했으니 누구도 뭐라 할 수 없었다.

'아니, 그보다는 사령관님의 관심이 생겨서 그런 거겠지.'

카이트는 문득 제론이 어디에서 뭘 하는지 궁금해졌다. 얘기는 들었다. 하지만 그걸 믿지는 않았다.

부서진 실바를 사서 그 구조를 이해하는 중이라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마법사도 엔지니어도 아닌 라이더가 대체 그걸 왜 알아야 한단 말인가.

카이트는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제론을 따라갔다.

제론은 예비 창고로 들어가 버렸다. 카이트는 서둘러 따라갔다. 그리고 예비 창고의 문을 열었다.

부서진 실바가 카이트의 눈동자를 가득 메웠다.

제론은 카이트가 따라오고 있다는 걸 처음부터 알았기에 실바 앞에서 그저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카이트는 대답이 궁색했다. 뭐라고 한단 말인가. 그냥 쫓아왔다고 말하면 완전히 실없는 놈이 될 판이었다.

"그…… 나도 실바의 구조를 보고 싶어서 와 봤네."

카이트는 즉석에서 생각해 낸 답치고는 썩 괜찮았다고 생각하며 제론의 반응을 살폈다.

제론은 눈살을 찌푸렸다. 말이 실바의 구조를 보는 거지, 사실은 실바를 수리하고 있는 상황 아닌가. 사실 엔지니어들의 도움을 받으면 훨씬 빠르고 간단하다.

어차피 중요한 부분은 다 해결했다. 가장 어려운 마나 코어를 완전히 만들었으니 반 이상 만든 거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아공간에 넣어 둬서 다행이군.'

마나 코어는 완성된 즉시 아공간에 넣었다. 혹시라도 누군가 마나 코어가 완벽하게 복구된 걸 발견하기라도 하면 참으로 곤란했다.

"이쪽으로 오시죠."

제론은 일단 카이트를 가까이 불렀다. 거절하면 모양새가 이상해진다. 또 의심을 살 수도 있었다. 이럴 때는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중요했다.

카이트는 제론에게 다가가 바닥에 널브러진 실바를 쳐다봤다. 솔직히 관심이 없었다. 그저 제론이 여기서 뭘 하는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실바를 가지고 기간트의 구조를 파악한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믿어 주지.'

카이트는 관심 있는 척 실바를 좀 더 살폈다. 한데 뭔가 조금 이상했다. 상태가 너무 좋았다.

"이거 이쪽 관절들은 다 멀쩡하군."

반쯤은 고철로 분류해 녹이는 것이 맞지만, 절반 정도는 따로 떼어 예비 부품으로 남겨 놓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처음에는 고철을 3천 골드나 주고 샀다고 해서 멍청하다고 생각했는데, 상태가 이 정도라면 바가지를 쓴 건 아닌 것 같군."

이 정도라면 마나 코어가 남아 있으면 억지로라도 수리를 해서 쓰는 것이 나았다.

"마나 코어는 상태가 어떻던가?"

카이트가 조금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 재론은 솔직히 대답해 주었다.

"코어의 핵심에 진흙 같은 것들이 잔뜩 있더군요."

카이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예상대로 마나 코어가 완전히 못쓰게 되어 버렸다. 코어의 핵심부만 남아 있어도 어떻게든 수리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자네는 하던 일을 계속하게. 난 조금만 구경하다가 가겠네."

카이트의 말에 제론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실바의 부품 하나를 살폈다.

다른 사람이 보고 있으니 마법을 써서 마법진을 복원하거나 관절을 고치는 일은 못하겠지만, 그것 말고도 할 일은 엄청나게 많았다.

혼자서 거의 기간트 하나를 새로 조립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냥 부품만 가져다 조립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망가진 부품을 고치면서 조립하는 거니 얼마나 어렵고 일이 복잡하겠는가.

제론은 부서진 관절의 부품들을 모았다. 그리고 모양을 차근차근 모양을 맞춰 갔다. 일단 이렇게 맞는 부품을 찾아 둬야 나중에 일하기 편하다.

또 사라진 부품은 새로 만들거나 구입해야 하고 말이다. 제론은 구입해야 할 부품 목록을 차근차근 정리했다. 물론 아무도 없을 때 태블릿에 기록했다.

그렇게 2시간이 지나갔다.

카이트는 결국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그가 보기에 제론은 정말 가당찮은 일을 하고 있었다. 아무 의미 없는 일이었다.

"대체 그걸로 뭘 얻을 수 있나?"

카이트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뭐든 얻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여기서 구경하며 날린 2시간이 너무나 아까웠다. 물론 그게 아니라도 할 일은 없었지만.

"기간트 조립해 보셨습니까?"

제론의 말에 카이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제론과 바닥에 보기 좋게 늘어선 부품과 실바의 잔해들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의 입이 점점 크게 벌어졌다.

"설마 이걸 조립하고 있었단 말인가!"

"개인 기간트를 소유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지 않습니까."

카이트는 멍하니 제론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집념에 존경심마저 일어났다. 이제야 자신이 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가 왜 아직까지 저 절박함과 독기를 못 알아봤을까.'

제론을 처음 보면 잘생긴 얼굴에 자신도 모르는 선입견을 갖게 된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서 세상의 풍파를 겪으면 금방 좌절할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카이트는 자신을 비롯한 동료들이 얼마나 제론을 잘못 판단했는지 깨달았다. 제론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카이트는 제론을 똑바로 바라봤다. 사람이 완전히 달라 보이니 이미지도 확 바뀌어 버렸다. 그러고 보면 잘생기고 기간트 조종 실력도 뛰어나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추진하는 집중력과 끈기도 대단한 사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괜찮은 놈이잖아?'

카이트는 제론에 대한 호감이 살짝 생겨났다. 그래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말을 던졌다.

"내가 뭐 도와줄 일은 없나? 엔지니어를 소개해 줄 수도 있네."

제론의 눈이 살짝 커졌다. 갑자기 변한 카이트의 태도를 얼른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런 눈으로 볼 것 없네. 사실 우리 부대의 에이스를 언제까지 이렇게 방치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제론은 갈등했다. 엔지니어의 도움을 받으면 훨씬 수월하게 일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자신의 능력이 필연적으로 알려진다.

"그보다는 부품을 좀 구입하고 싶습니다."

"그걸로 되겠나? 잘 생각하게. 자네 의지는 알겠지만 기간트 조립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

"일단 부품 수급만 원활해도 해 볼 만합니다."

카이트는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결국 실패를 하더라도 할 만큼 해 보지 않으면 미련이 남게 된다.

"좋아. 부품 쪽은 내가 선을 대 주지. 대신 나중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꼭 나한테 부탁을 하게. 그게 조건이네."

제론은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솔직한 심정이 들어간 인사였다. 카이트는 그 인사 하나만으로도 뭔가 큰 보상을 받은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감사할 것 없네. 어차피 부품도 자네 돈으로 사야 하는 거니까. 한데 돈은 있나?"

"영지를 팔고 남은 돈이 좀 있습니다. 기간트를 살 정도는 안 되지만 부품을 구입할 정도는 차고 넘칩니다."

카이트는 영지를 팔았다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제론도 결코 쉬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좀 이해가 가는군. 저 절박함과 독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카이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섰다.

"그럼 난 엔지니어들에게 가 볼 테니까 부품 목록이나 준비해 놓게. 마법사 쪽도 소개해 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쪽은 내 능력 밖의 일이라서. 마법사들이 워낙 까다로운 족속들 아닌가."

"부품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카이트는 돌아선 채 손을 한 번 들어 주고는 창고에서 나갔다. 제론은 그런 카이트의 뒷모습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기분이 좀 이상하군."

하지만 낯선 기분은 아니었다. 바이스나 세나를 만났을 때와 비슷했으니까.

제론은 눈을 빛내며 다시 시선을 부서진 실바에게로 향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제론의 심장에 자리 잡은 5개의 마나링이 힘차게 가속했다.

카이트의 도움으로 실바의 조립 속도가 급격히 올라갔다. 두 달 동안 진행한 것보다 카이트의 도움을 받은 이후, 일주일 동안 진행한 일이 훨씬 많았다.

물론 처음 두 달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기본기를 다지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제론에게 좋은 소식도 하나 있었다. 제론이 조립한 실바가 만일 완성된다면 개인 기체로 등록이 가능해졌다.

사령관과 카이트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체른산 방어군 내에서 제론의 입지가 조금씩 단단해졌다. 이 역시 카이트의 노력 덕분이었다.

물론 모든 부대원이 제론을 인정하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삐딱한 시선이 있었고, 또 제론을 시기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하프트를 중심으로 제론을 적대시하는 무리가 생겨났다.

제론은 부대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온통 실바의 조립에만 매달렸다.

실바의 관절 부분에 새겨진 모든 마법진이 복원되었다. 또한 그 효율이 높아졌다.

하지만 기존의 실바와 가장 달라진 점은 바로 마나 로드였다.

제론은 실바의 마나 로드에 특별한 물질을 썼다. 바로 상처 난 마나 코어에 들어 있던 테페룸이었다.

마치 진흙처럼 변한 테페룸은 아무런 쓸모도 없다. 하지만 거기에 특별한 마법적 처리를 해 주면 아주 특별한 물질로 가공된다.

초고대 문명에서는 흔히 쓰던 물질이었다. 테페룸을 가공해 여러 가지 성질을 가진 새로운 물질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데, 마나 코어에서 진흙처럼 변한 것은 그 가공의 중간 단계였다.

제론은 그 진흙을 가공해서 포로스라는 물질을 만들었다. 마나 전달의 효율이 가장 높은 물질이었다. 당연히 마나 로드를 만드는 최고의 재료이기도 했다.

포로스는 제론이 조립한 실바의 곳곳에 쓰였다. 마나 로드뿐 아니라, 마법진에도 일부가 쓰였다. 포로스를 정확한 방법으로 가미하면 마법진의 효율도 극단적으로 높일 수 있었다.

포로스는 무색투명한 액체였기에 누군가 혹시 기간트를 분해해 분석하더라도 그 존재를 알아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마나 로드나 마법진에 지극히 미량만 섞기 때문에 그 성분을 분리해 내는 것이 더더욱 어려웠다.

아마 제론의 기간트를 누군가 정밀하게 분해하면 이상한 점을 딱 하나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마나 코어의 핵심에 들어 있는 테페룸이다. 그곳에 있는 테페룸은 액체 상태로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도 알아내지 못하지. 지금 당장 분해하지 않는 한.'

제론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실바를 가동시켰다.

키이이이잉!

초기 가동 상태가 되며 오너 각인을 기다리는 실바를 보며 제론이 씨익 웃었다.

이제 마나 코어의 테페룸도 걱정할 게 없다. 아마 코어를 분해하면 남는 건 진흙뿐일 테니까.

쿵! 쿵! 쿵! 쿵!

예비 창고의 문이 열리고 9미터에 달하는 기간트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제론의 실바였다.

갑자기 나타난 실바의 모습에 근처에 있던 병사들이 깜짝 놀랐다. 그리고 서둘러 보고를 했다.

라이더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실바를 멍하니 바라봤다.

설마 정말로 저걸 만들어 낼 줄은 몰랐다. 엔지니어도 아니고 라이더가 대체 저걸 어떻게 조립한단 말인가.

아무리 부품을 수급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불가능했다.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령관까지 달려왔다. 사령관 역시 실바를 보고는 입을 떡 벌렸다.

"카이트가 바보짓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군. 저놈 정말 괴물이야."

사령관은 수많은 아카데미 출신 기사와 장교를 겪어 왔다. 하지만 그들에게 뭔가 기대를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카데미 출신의 군인들은 3년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견딜 것인지만 고민한다. 일을 하긴 하지만 의욕적으로 덤벼들지는 않는다.

그것이 아카데미 출신 군인들이었다. 군부 출신 라이더들이 아카데미 출신 라이더들에게 기간트를 잘 내주지 않으려 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쿵! 쿵! 쿵! 쿵!

실바는 사령관 앞까지 걸어갔다.

푸쉭!

해치가 열렸고, 그 안에서 제론이 훌쩍 뛰어내렸다. 허리, 무릎, 발등을 밟고 가볍게 바닥에 착지한 제론은 사령관 앞으로 다가가 가슴에 주먹을 올렸다.

"실바의 정비가 끝났습니다."

사령관은 멍하니 제론의 모습을 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정비라고 표현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어 보이는군. 그 고철을 가져다가 뚝딱 기간트를 만들어 내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군."

사령관은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한데 마나 코어는 어떻게 한 건가? 분명 쓸 수 없을 지경이었을 텐데."

"마침 실바의 마나 코어 하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령관의 눈이 커다래졌다.

"실바의 마나 코어를 가지고 있었다고? 그런 걸 본 기억은 없네만……."

"제 개인 물품 보관함에 넣어 두고 있었습니다."

사령관의 표정이 살짝 날카로워졌다. 즉, 그런 물건을 몰래 들여와 감춰 두고 있었다는 뜻 아닌가. 당장 문제 삼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3년이라는 짧은 기간이나마 군의 전력이 늘어나게 되었으니 대충 넘어가는 게 옳겠지.'

사령관은 입맛을 다시며 제론의 실바를 바라봤다. 이걸 군에 귀속시킬 수 있다면 정말로 좋을 것 같았다. 그 정도 실적이라면 진급도 노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면 승작도 가능하지.'

군부의 사령관은 최소 남작 위를 가진다. 이곳 체른산 방어군의 사령관도 남작이었다.

하지만 군부의 남작은 영지를 가지지 못한다. 군부 소속 귀족이 영지를 가지려면 최소한 백작 이상은 되어야 한다.

사령관은 자신도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고작 실바 한 기로 백작을 바라는 건 도둑놈 심보지만 말이다.

"좋아. 약속대로 이 실바를 자네의 개인 기간트로 인정하지. 메인 라이더는 자네가 맡게. 서브 라이더를 두는 것이 원칙이긴 하지만, 개인 기간트라는 점을 감안해 강요는 하지 않겠네."

사령관은 그렇게 말하고는 의아한 눈으로 제론의 몸을 살폈다.

"한데…… 아공간 마법이 각인된 매개체가 안 보이는군."

"이 실바에는 그런 기능이 아예 없습니다."

사령관의 눈이 커다래졌다. 아공간 기능이 없다니. 그럼 전략적으로 가치가 너무 떨어진다. 이 커다란 기간트를 타고 이동하며 임무를 수행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럼…… 기지를 방어하는 것 외에는 별 쓸모가 없겠군."

"그렇습니다."

제론의 수긍에 사령관은 진한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긴, 거기까지 바랄 수는 없었다. 생각해 보니 이건 제론이 혼자서 조립한 기간트였다. 어떤 문제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서브 라이더는 두지 않는 편이 낫겠군.'

사령관은 물론이고 그곳에 있던 모든 라이더나 장교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그들은 조금 불안한 눈으로 제론의 실바를 바라봤다.

하지만 엔지니어들은 조금 생각이 달랐다. 그들은 상당히 복잡한 시선으로 제론의 실바를 바라봤다.

아무리 실바가 좀 단순한 구조를 가진 기종이라고 하지만 혼자서 그걸 조립했다는 건, 상급 엔지니어도 쉽게 못 하는 일이었다.

물론 제론의 실바가 완벽히 동작할 거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혼자서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더구나 그들은 처음 이 실바가 어떤 상태였는지 아는 사람들이었다.

"정말 놀랍군요. 부품들을 넘겨주면서도 설마설마했는데, 이렇게 멋지게 완성시켰을 줄은 몰랐습니다."

수석 엔지니어가 다가와 감탄하며 말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제론의 말에 수석 엔지니어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운이 좋았다. 사실 저렇게 걷다가 균형을 잃고 넘어졌어야 정상이다.

기간트라는 건 그냥 부품을 조립했다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었다. 조립 후 가장 중요한 작업이 남아 있었다.

바로 균형 맞추기였다. 제대로 균형을 맞추지 않으면 걷는 것도 불가능하다.

한데 제론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여기까지 걸어왔다. 균형이 어느 정도 맞았다는 뜻이다.

'말 그대로 운이지.'

운이 좋아 균형이 맞은 것이다. 하지만 전문가가 직접 맞추는 것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생각하면 제론의 센스가 정말로 뛰어나다는 뜻이었다.

수석 엔지니어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아카데미를 갓 졸업해서 부임한 애송이었다. 한데 부임하자마자 부대를 몇 번이나 발칵 뒤집어 놓는 걸 보면 인물은 인물이었다.

"방금 조립을 끝냈다면 아직 균형이 안 맞을 텐데, 우리가 좀 봐 드리겠습니다."

제론은 사양하지 않았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만일 마법사가 접근했다면 단호히 거절했을 것이다. 물론 마법사가 들여다본다고 해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이 많지는 않다. 그래도 미리 조심하는 편이 좋았다.

하지만 엔지니어의 경우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기본적인 관절이나 강판 등의 구조는 기존의 실바와 완전히 똑같았다.

태블릿의 지식을 이용하면 그걸 더 좋은 성능으로 바꿀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기간트는 라이더 혼자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엔지니어의 손길이 필수였다. 마법사는 없어도 괜찮다. 특별한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면 말이다.

어차피 부품을 교체하고 수리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마법진이 손상된 부분은 부품 자체를 아예 바꾸면 된다.

처음 실바를 조립할 때는 엔지니어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지만, 균형을 맞춘다거나 간단한 부품을 교체해서 수리를 하는 정도는 얼마든지 괜찮았다.

'무엇보다 내가 실바를 고집할 이유는 없으니까.'

제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실바에 달려드는 엔지니어들을 쳐다봤다. 균형을 제대로 맞추려면 사흘은 걸릴 것이다. 사흘 후부터는 본격적으로 기간트를 탈 수 있게 된다.

'3년만 버티면 돼.'

3년 동안 탈 기간트를 얻은 걸로 충분했다. 또한 부수적으로 기간트를 조립하면서 태블릿의 지식 중 일부를 자신의 것으로 소화했다.

이는 향후 제대로 된 기간트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상념에 잠겨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제론의 귓가로 사령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기간트도 생겼으니 앞으로는 훈련에 참여하겠군."

"물론입니다."

사령관이 씨익 웃었다.

"기대하겠네. 아마 다른 라이더들에게도 좋은 자극이 될 거야."

제론은 그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자신의 실력을 키우는 데에만 집중할 생각이었다.

제론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카이트를 쳐다봤다. 아마 앞으로 서로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카이트 정도의 실력을 가진 라이더는 쉽게 찾기 어렵다. 실전에 가까운 훈련을 할 아주 좋은 상대였다. 물론 그것은 카이트도 마찬가지이리라.

카이트가 제론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카이트가 먼저 씨익 웃었다.

제론은 그런 카이트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이렇게 실바를 완성하는 데, 카이트의 도움이 너무나 컸다. 제론은 진심을 담아 감사를 표했다.

카이트의 표정이 더욱 환해졌다.

기간트 훈련장 한가운데에서 제론과 카이트가 마주 섰다. 물론 각자의 기간트를 탄 채였다.

카이트는 상대가 실바라고 방심하지 않았다. 기종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라이더가 훨씬 중요하다는 걸 익히 경험했다.

카이트는 조금씩 움직이며 제론을 견제했다. 실바의 출력은 고작 0.8. 게다가 키도 작고 무게도 가볍다. 힘으로 압도하면 승부는 금세 난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싸울 생각은 없었다. 힘으로 압도하다 보면 섬세함이 떨어진다. 제론은 힘을 섬세하게 역이용할 수 있는 수준의 라이더였다.

쿵!

카이트가 한 발 내디디며 검을 쭉 내질렀다. 힘이 실리진 않았다. 견제의 의미가 훨씬 강한 찌르기였다.

제론은 기다렸다는 듯 검 면을 손바닥으로 쳐 냈다.

꽝!

카이트의 검이 옆으로 휙 밀려났다. 제론은 망설임 없이 검을 치는 힘을 이용해 비스듬하게 앞으로 달려들었다.

워낙 강력한 일격이 검에 들어갔기에 카이트는 순간적으로 팔이 확 벌어져 당황했다. 설마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그나마 다행인 건 상대가 품으로 파고들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옆을 내준 것 역시 치명적이었다.

후웅!

실바의 검이 옆구리를 노리고 날아왔다. 카이트는 서둘러 검을 회수해 그것을 막았다.

꽈앙!

카이트의 눈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저 상대의 검을 막으려고 휘둘렀다. 한데 제론은 그조차 흘려 버렸다.

제론은 카이트의 검을 흘림과 동시에 품으로 파고들었다.

"젠장!"

카이트는 제론이 뭘 하려는지 알기에 이를 악물고 몸을 숙였다. 상대의 어깨가 가슴이나 배에 박히기 전에 충격을 줄이려 대처를 한 것이다.

쿠웅!

제론이 온몸으로 카이트를 들이받았다. 카이트가 채 무게중심을 낮추기 직전에 그 아래를 파고들었기에 카이트는 그냥 당할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실바의 키가 작았기에 카이트의 기종인 크라테르의 대응이 조금 늦는 건 당연했다.

콰과광!

카이트가 바닥에 쓰러졌다.

힘이 실리지 않은 찌르기가 어떻게 역습의 발판이 되는지 너무나 잘 보여 주는 한 판이었다.

물론 상대가 제론이었기에 당한 것이다. 제론은 실바의 신장까지 적절히 이용했다.

'센스가 정말 장난 아니로군.'

카이트는 혹시라도 남아 있을지 모르는 자만심을 싹 청소했다.

"다시 해 보지."

카이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래는 점검을 한 뒤에 훈련을 이어 가야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카이트의 투지에 불이 붙었다.

그리고 제론도 그런 카이트를 보며 기분이 좋아졌다. 카이트는 더욱 거칠게 싸울 것이다. 바라던 바였다.

제론과 카이트는 일과가 끝날 때까지 속이 후련하도록 붙어 싸웠다.

제론도 그 이후로는 처음처럼 카이트를 압도하지는 못했다. 카이트도 기간트 센스가 대단했다.

둘의 얼굴에 더할 나위 없는 즐거운 표정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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