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10/217)

Chapter 9 입대

방학이 끝나자마자 아카데미 학장이 제론을 호출했다.

제론은 마음의 준비를 미리 하고서 학장실에 찾아갔다. 학장실은 행정부 최상층에 있었다.

노크를 하고 학장실 안으로 들어가자, 탄탄한 몸을 가진 중년인이 날카로운 안광을 번득이며 제론을 노려봤다. 그가 바로 이곳 켄트 아카데미의 학장인 리히츠 폰 켄트였다.

"왔나? 거기 앉게."

제론은 학장이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 학장은 그런 제론을 유심히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요즘 자네에 대한 얘기로 아카데미 전체가 시끄럽더군."

제론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의도로 자신을 불러 저런 얘기를 하는지 이미 알기에 다음 말을 가만히 기다렸다.

"얼마 전 아카데미의 교관과 교수를 모두 모아 회의를 했네."

학장이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다들 이구동성으로 말하더군. 자네에게 더 가르칠 게 없다고. 아카데미에 있어 봐야 의미가 없다고 말일세."

학장은 제론이 여전히 평정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며 눈에 이채를 띠었다. 확실히 특이한 학생이긴 했다.

"아카데미에서 졸업하면 의무적으로 군대에 가야 한다는 건 알고 있겠지? 받게."

학장이 내미는 서류를 받은 제론은 그것을 대충 확인했다. 졸업장이었다.

"보면 알겠지만 졸업장일세. 조만간 군부에서 사람이 나와 자네를 데려갈 걸세. 그전까지 떠날 준비를 끝내 놓게."

학장은 그 말을 끝으로 턱을 까딱였다. 밖으로 나가라는 뜻이었다.

제론은 학장의 말에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곧장 밖으로 나갔다. 그 어떤 의문도 없는 모습에 학장이 고개를 한 번 저었다.

"쯧. 정말 짜증이 나는군. 아카데미의 학장인 이 리히츠 폰 켄트가 이따위 일이나 처리해야 하다니."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상대는 자신의 약점을 꽉 틀어쥐고 있었다. 그 약점을 없애는 대가로 이 정도 일은 아주 싸게 먹힌 거였다.

학장은 이내 모든 걸 잊고 다시 업무에 열중했다. 학장실에 고요가 찾아왔다.

제론은 담담히 기숙사를 향해 걸어갔다. 바이스로부터 미리 언질을 받았기에 전혀 당황스럽지 않았다. 다만 조기 졸업에 대해서는 조금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예전에도 드물게 조기 졸업이 있어 왔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지독할 정도로 특별한 사람의 일이었다. 그들에 비하면 제론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지극히 평범했다.

'고작 기간트에 대한 센스가 있다는 이유로 조기 졸업을 시키는데도 나중에 문제가 안 생기나?'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졸업장을 내민 것으로 보아 문제는 없을 것이다. 아마 그건 학장 고유의 권한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군대가 문제로군.'

제론이 알기로 군부는 슈린 공작의 영향력에서 많이 벗어난 곳이었다. 그렇기에 아카데미보다는 못해도 그냥 밖에 있는 것보다는 훨씬 안전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도 기회는 기회인데…….'

하지만 제론은 아직도 유적에서 더 얻을 게 많았다. 군대에 있으면서 그걸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아, 한 가지 더 확인할 것이 있군."

제론은 일단 행정부로 향했다. 정확한 일정을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그래야 미리 준비를 할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시간이 많이 남으면 유적에도 한 번 다녀올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약간의 착오도 용납이 안 된다. 자칫 일정을 못 맞추면 탈영으로 간주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일이 커진다.

제론은 일단 행정부에서 향후 일정을 확인했다. 이미 군부로 제론의 졸업에 대한 서류가 넘어간 상태였고, 입대일도 결정이 된 상황이었다.

'빠르기도 하군.'

그야말로 순식간에 처리되었다. 제론에게 통보하기 전에 이미 처리가 이루어졌다는 뜻이었다. 남은 시간은 보름이었다. 이 정도면 유적에 다녀오는 편이 나았다.

'4층을 클리어할 수도 있겠어.'

아마 5층은 4층에서 만든 것을 토대로 마법을 익히는 수련이 될 것이다.

'마법이라…….'

마나링을 이용한 마법을 제대로 익히면 정말로 큰 힘이 될 것이다. 어쨌든 지금 시대에는 그런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말이다.

행정부를 나와 조금 걷고 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세나가 달려왔다.

"선배님!"

제론은 걸음을 멈추고 세나를 쳐다봤다. 세나는 제론 앞에 도착한 뒤 한참 동안이나 호흡을 조절하느라 말을 못했다. 제론은 끈기 있게 그것을 기다려 주었다.

"선배님, 졸업하신다는 게 정말인가요?"

제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대수롭지 않은 표정과 태도였다.

"그, 그럼 바로 군대에 가시겠네요?"

"그렇게 됐다."

세나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이제야 간신히 제론과 조금 가까워졌는데, 이렇게 제론이 가버리면 2년이 넘게 애쓴 보람이 없지 않은가.

군대에서 무려 3년을 있어야 한다. 군부의 특성상, 일단 군대에 가면 외부와의 접촉이 극도로 제한된다.

세나는 2년이 넘게 자신이 노력해서 간신히 만든 유리성 같은 관계가 3년이라는 긴 시간과 군대의 특성 때문에 산산이 부서질까 봐 두려웠다.

"어, 언제 가세요?"

"보름 후에 간다. 아, 부탁 하나 들어주겠어?"

제론의 말에 세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자신이 제론의 부탁을 들을 줄은 몰랐다. 세나는 그 사소한 하나에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 말씀해 보세요. 얼마든지 도와 드릴게요."

설사 기간트를 달라고 해도 줄 기세였다. 세나는 제론의 말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군부에 내 입대에 관한 일정을 좀 알아봐 줘."

"예?"

"아카데미 행정부에 확인하긴 했는데, 왠지 믿을 수가 없어서."

세나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만 믿으세요."

"그럼 부탁하지."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 걸음을 옮겼다. 대화가 길어져야 서로 좋을 게 없었다. 조만간 군에 가야 한다. 관계가 더 깊어지면 세나는 지금보다 훨씬 힘들어질 것이다.

'나야 별 상관없지만.'

제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기숙사로 향했다. 그러면서 보름의 시간을 어떻게 이용할지 차분히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세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하염없이 제론을 바라봤다. 가슴이 저려 왔다. 그렇게 한동안 서 있던 세나는 갑자기 주먹을 꼭 쥐며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할 거야!'

세나는 제론과 함께할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이 조기 졸업이라는 지극히 어려운 일일지라도, 또 여자들에게는 피해 갈 수 있는 길이 널려 있는 군 복무의 길일지라도 말이다.

결과적으로 행정부에서 알아본 것과 군부에서 알아본 일정이 닷새나 달랐다. 실제로는 열흘밖에 시간이 없었다. 만일 아카데미의 일정만 믿고 유적에 다녀왔다면 문제가 생각보다 커졌을 것이다.

제론은 슈린 공작가의 치졸함에 짜증이 났다. 대체 왜 자신을 이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란 말인가.

짜증이 커질수록 복수심도 커져 갔다. 가문을 무너뜨리고 아버지를 죽인 것도 모자라 자신까지 이렇게 핍박하니 복수심이 깊어지는 게 당연했다.

제론은 짜증을 꾹 눌러 참고 유적으로 갈 준비를 했다. 열흘의 시간 동안 무조건 4층을 클리어해야만 한다. 제론은 이를 악물고 팔찌에 아네모스를 넣어 유적으로 텔레포트했다.

그리고 열흘이 지나갔다.

마차 한 대가 켄트 아카데미의 정문을 통과했다. 푸른색 드래곤을 배경으로 붉은 방패 위에 새까만 검 2자루가 교차된 문양이 그려진 마차였는데, 그 문양을 쓰는 곳은 군부뿐이었다.

마차는 아카데미의 행정부 앞에 멈춰 섰고, 이내 무뚝뚝한 인상의 사내 한 명이 마차에서 내렸다. 새로운 입대자를 인수하기 위해 온 군부의 장교였다.

장교가 내리자마자 행정부 건물 안에서 제론이 나타났다. 장교는 제론의 모습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방금 날 선 기세가 느껴졌는데?'

마치 거짓말처럼 기세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 기세는 백전노장이나 소드 마스터의 벽을 눈앞에 두고 있는 익스퍼트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기세였다.

하지만 그런 기세를 풍길 수 있는 사람이 이런 아카데미에 남아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장교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제론을 바라봤다.

지극히 평범해 보였다. 외모는 제법 출중했지만 전장에서 필요한 것은 외모가 아니라 실력이었다.

'특이하군.'

보통 입대를 눈앞에 둔 사람들은 두려운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세상과 단절된 전혀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기분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지금은 전쟁 중이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까지 더해져 약간이라도 주눅이 들어야 정상이었다.

'묘하게 당당해.'

제론의 눈빛에는 그런 두려움이 일절 없었다. 온몸에서 은은히 풍기는 당당함을 보고 있으니 그가 지금 입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꼭 베테랑 장교 같았다.

"제론 폰 에어스트?"

"예."

"마차에 타도록."

장교는 일체의 설명도 없이 명령했다. 제론은 즉시 마차에 탔다. 그 모습을 본 장교의 눈이 또 이채를 발했다.

"이거 물건인데?"

장교가 씨익 웃으며 행정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서둘러 서류를 처리한 뒤 마차에 올랐다.

군부의 마차가 다시 움직였다.

수많은 시선이 마차로 향했다. 제론을 아는, 또 제론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마차는 들어올 때보다 훨씬 빠르게 정문을 빠져나갔다. 그들은 아쉬운 눈길로 멀어져 가는 마차를 끝까지 바라봤다.

제론은 마차에 탄 채로 창밖을 내다봤다. 마차는 놀라울 정도로 편안했다. 바퀴나 축에 마법적인 처리가 되어 있음이 분명했다.

예전 같으면 아무 관심 없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제론은 심장을 힘차게 휘도는 5개의 링을 차분히 느끼며 조금씩 의념을 보냈다.

'당분간 유적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군.'

유적에서 얻는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하지만 아직 많이 모자랐다. 더 많은 힘이 필요했다.

'3년은 너무 긴데…….'

그래도 그동안 할 일이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유적 4층을 클리어하고 얻은 보상은 예상대로 마법이었다. 이제 마법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마법을 공부하고 익힐 수 있게 되었으며, 아울러 마법진에 대한 공부도 더욱 깊이 있게 할 수 있었다.

3년 동안 유적에 못 가는 건 아쉽지만, 그래도 그동안 마법을 꾸준히 익히고 검술을 수련하면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아도 될 테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제론은 잠시 상념에 잠겼다가 힐끗 시선을 돌려 앞자리에 앉은 장교를 쳐다봤다.

장교는 제론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아직 도착하려면 멀었으니 대화나 하지. 기간트에 대한 센스가 그렇게 뛰어나다고?"

장교의 물음에 제론은 의례적인 대답을 했다.

"그저 남들 정도에 불과합니다."

"아니지. 실바로 베르를 물리치는 걸 아무나 할 수 있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상대 라이더가 멍청했을 뿐입니다."

의외의 대답에 장교의 눈이 살짝 커졌다. 하지만 이내 마음에 든다는 듯 씨익 웃었다.

"슈린 공작가의 후계자를 멍청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로군."

제론은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장교는 그것도 마음에 들어 또 한 번 씨익 웃었다.

"상대가 멍청했든 어쨌든 실바로 베르를 이긴 건 실력이 뛰어나다는 뜻이지. 그 실력으로 카타락타를 몰면 어떤 위력을 낼 수 있을지 궁금하군. 기대할 테니 잘해 봐."

카타락타는 레늄 왕국 군부에서 쓰는 범용 기간트였다. 군부에 소속된 기사들은 대부분 카타락타를 쓴다.

크라테르보다 훨씬 못하지만 그래도 만드는 단가에 비하면 성능이 뛰어난 편이기에 많은 왕국의 주요 기체였다. 물론 실바에 비하면 훨씬 좋은 기체였다.

제론은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사실 지금 제론의 뇌리는 유적에 대한 일로 꽉 차 있었다.

"쯧. 재미없군. 대화라는 게 오가는 맛이 있어야지. 할 말이 그렇게 없나?"

장교의 말에 제론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전쟁 상황은 어떻습니까?"

장교가 눈을 빛냈다.

"왜? 두렵나?"

장교는 그렇게 물으면서도 제론이 전쟁을 두려워하기보다는 기대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제론의 눈에 어린 분명한 기대감을 확인했다.

"큰 싸움이 거의 없네. 아마 이대로 소강상태가 이어지다가 종전으로 이어질 확률이 제일 크지."

제론은 안도감과 함께 실망감이 동시에 들었다. 사실 아카데미에서 하는 대련만으로는 더 이상 가슴이 떨리지 않았다. 진짜 제대로 된 대결을 해 보고 싶었다.

그건 라이더가 가지게 되는 자연스러운 감정의 흐름이었다. 이제 장난 같은 대결에 흥미가 일지 않는 것이다.

"아쉬운가?"

장교는 그렇게 물으며 제론의 얼굴과 눈빛을 확인하고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 아쉬운가 보군. 죽음이 두렵지 않은 건가? 전장은 아카데미의 대결과는 차원이 다르네. 살기와 투기가 넘치지.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죽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전장이네. 그런데도 아쉬운가?"

"잘 모르겠습니다."

장교는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왠지 기대가 되는군."

정말로 기대 만발이었다. 제론이 전장의 공포에 먹혀 버리는 것도 나름 재미난 구경거리가 될 것이다. 또한 그걸 극복하고 진짜 무시무시한 라이더가 된다면 그 또한 재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전쟁이 끝나가는 게 아쉬울 줄은 몰랐군.'

장교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제론의 모습을 살폈다. 제론은 어느새 시선을 창밖으로 돌려 혼자만의 상념에 잠겨 있었다. 이 또한 흔치 않은 일이었다.

'저놈, 너무 차분해.'

입대를 하면서 이렇게 차분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장교는 묘한 기대감이 들어 부대에 도착할 때까지 끊임없이 제론을 관찰했다.

제론은 자신에게 배정된 기간트를 가만히 쳐다봤다. 10미터나 되는 몸체는 보기만 해도 위압감이 넘쳤다. 레늄 왕국 범용 기체인 카타락타였다.

마차 안에서 장교가 언급했던 기체이기도 했다. 카타락타를 보는 제론의 표정에서 만감이 교차했다. 카타락타는 에어스트 가문의 기사들이 쓰는 기체이기도 했다.

제론은 카타락타에 한 발 더 다가갔다. 그리고 다리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카타락타는 제론의 기체이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없다. 가문이 몰락하면서 남아 있던 모든 기간트를 팔아치워야 했고, 기사단은 해체되었다.

카타락타를 쓰다듬으며 감회에 젖어 있던 제론은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에 손을 떼고 돌아섰다. 최근 마나 호흡법의 성취가 늘어나 주변의 기척이나 흐름이 점점 선명해졌다.

"거기서 뭐 하나? 왜? 타고 싶나?"

다가온 사람은 제론의 선임인 하프트였다.

보통 기간트 한 기에는 2명의 라이더가 배정된다. 메인 라이더와 서브 라이더의 개념이었다. 하프트는 카타락타의 메인 라이더였다.

"아닙니다."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 카타락타에서 한 발 물러났다. 하프트는 그런 제론을 차가운 눈으로 노려봤다.

"너는 절대 탈 일 없으니까 일찌감치 포기해."

하프트는 제론과 달리 아카데미 출신이 아니었다. 그는 아카데미 출신의 기사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자들은 군부에서 뼈를 묻을 작정이 아니라면 군대에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본래 군부의 기간트는 라이더의 소유가 아니라 왕국의 소유였다. 그렇기에 메인 라이더와 서브 라이더가 적절히 시간을 나누어 운용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군대라는 곳은 원칙대로 돌아가는 일보다 그렇지 않은 일이 더 많았다.

하프트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제론은 전역할 때까지 한 번도 기간트를 탈 수 없을 것이다.

제론은 가만히 하프트를 보다가 걸어서 격납고를 나가 버렸다. 하프트는 그런 제론의 뒷모습을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봤다.

"흥. 아카데미의 샌님이 감히 내 카타락타에 눈독을 들여? 어림도 없지."

하프트는 한동안 제론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려 카타락타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이 한없이 부드러워졌다. 그는 라이더의 상징인 흉갑을 입고 방패와 검을 차고 있었다. 일순 그것들에 새겨진 마법진이 빛나기 시작했다.

카타락타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자세를 낮췄다. 하프트는 조종석에 가볍게 올라탄 뒤 해치를 닫았다.

쿵! 쿵! 쿵!

하프트가 조종하는 카타락타가 격납고를 나섰다. 그리고 기간트 연무장으로 향했다. 하프트는 기간트 훈련을 단 하루도 빼먹은 적이 없었다.

'흥, 3년 동안 어디 푹 썩어 봐라.'

하프트는 카타락타를 움직이며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절대 카타락타를 넘기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카데미 출신이었던 지난번 서브 라이더에게 했듯이 말이다.

제론은 숙소로 돌아가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프트의 치졸한 행동에 살짝 짜증이 났다. 물론 카타락타를 그가 내주지 않아도 지금 당장은 상관없었다. 그것 말고도 제론은 할 일이 엄청나게 많았다.

본격적으로 기사 검술을 수련해서 진짜 익스퍼트가 되어야 했다. 또한 심장의 마나를 이용해 마법도 익혀야만 했다. 그밖에 태블릿을 통해 각종 지식을 섭렵할 계획이었다.

문득 제론은 대체 그 유적의 정체가 무엇일지 궁금해졌다. 아무리 태블릿을 뒤져도 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었다. 또한 세상의 모든 유적이 지하에 그런 식으로 다른 유적을 품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기회가 되면 확인을 해 봐야겠군.'

제론이 판단하기에 유적은 주인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졌다. 마치 아카데미처럼 말이다. 초고대에는 그런 식으로 교육이 이뤄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률은 한없이 낮다.

아무리 초고대 문명이라 하더라도 모든 학생을 그런 식으로 가르쳤을 리가 없다. 유적의 마스터는 단 한 명뿐이었다. 그렇다면 유적을 수천, 수만 개나 만들어야 하는데, 그런 일이 상식적으로 가능할 리가 없었다.

'물론 그렇게 했을 수도 있지만.'

아직 초고대 문명에 대해서는 거의 모른다. 그저 태블릿을 통해 엄청난 힘과 지식을 가진 문명이었을 거라고 짐작하는 게 전부였다.

그렇기에 어쩌면 진짜 모든 학생에게 그런 유적을 하나씩 만들어 줬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절대 아니야.'

이건 순수하게 제론의 감이었다. 그 유적은 제론이 판단하고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제론은 유적에 갈 때마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일단 계속 내려가다 보면 언젠가는 답이 나오겠지.'

지금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유적에 다녀올 시간이 없다는 점이었다. 휴가라도 받으면 다녀올 텐데, 아직 휴가를 받으려면 한참이나 남아 있었다.

이곳은 군대였다. 아카데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폐쇄적이고 자유롭지 못한 곳이었다.

제론은 그래도 아카데미 출신 기간트 라이더였다. 즉, 기사라는 뜻이다. 기사는 일반 병사들과는 많이 다른 대우를 받았다. 제론도 장교 대우를 받고 있었다. 권한은 별로 없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슬슬 기간트에 타고 싶은데…….'

기간트 라이더의 경우 일과 시간에 기간트 훈련을 해야 한다. 대부분이 개인적인 훈련이고, 일주일에 한 번 모여서 집단전을 훈련한다.

하지만 제론은 그 어떤 기간트 훈련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사실 그건 제론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아카데미 출신의 경우 제론과 비슷한 처지인 사람이 제법 많았다.

'일단은 검과 마법을 수련하는 수밖에 없군.'

하지만 상당히 조심해서 수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군대는 기본적으로 외부와 단절된 곳이지만, 내부적으로 보면 대부분 오픈된 장소였다.

혼자 몰래 수련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게다가 군대의 특성상, 마법사도 상당히 많았다. 괜히 마법 수련을 하다가 마법사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곤란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마법사들이 과연 그걸 알아볼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제론은 그렇게 차분히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며 숙소로 향했다.

'그래도 기간트에 대한 건 정말 아쉽군.'

기간트에 대한 센스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그것을 갈고 닦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제론은 이러다가 자신의 센스가 무뎌지는 것이 걱정이었다. 무려 3년 동안이나 기간트를 조종할 수 없다면 그렇게 되는 것은 필연이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도 대책을 마련해야겠군.'

검과 마법으로 힘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힘은 기간트였다.

그렇게 숙소로 걸어가던 제론은 수십 대의 마차가 서로 연결되어 움직이는 광경을 발견했다. 그 수십 대의 마차가 끌고 있는 짐은 놀랍게도 기간트였다.

"실바인가?"

반쯤 부서진 실바였다. 제론은 그것을 보며 눈을 번득였다. 아마 저것은 더 이상 쓰지 못할 것이다. 물론 고칠 수 있는지 확인은 하겠지만 그게 전부였다.

용광로에 들어갈 확률이 99퍼센트였다. 쓸 만한 것들은 분리해서 재활용하겠지만, 그조차 없을 확률이 높았다.

'마나 코어는 남아 있을까?'

기간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기간트를 움직일 힘을 주는 부품인 마나 코어였다. 그곳이 부서졌다면 기간트의 수명도 끝났다고 봐야 했다.

제론은 움직이는 마차를 향해 다가갔다. 조금 더 자세히 살피고자 함이었다.

'역시 실바였군.'

가까이서 보니 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실바였다. 사실 아직도 실바는 군대에서 제법 쓰인다. 또한 용병들이 쓰는 기종은 대부분 실바였다.

실바는 3대의 마차에 나뉘어 실려 있었다. 당연히 3대 모두 수십 대의 마차를 연결해서 거대하게 만든 것들이었다.

한 대에는 실바의 머리와 가슴이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대에는 팔다리가 실려 있었고, 마지막 한 대에 가장 중요한 마나 코어가 탑재된 하체가 있었다.

실바의 상태는 심각할 정도였다. 이 정도면 회생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가까이서 보니 99퍼센트였던 확률이 100퍼센트로 올라갔다. 게다가 마나 코어에도 심각한 손상이 있었다.

제론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과연 이걸로 자신이 뭘 할 수 있을지 떠올렸다. 생각은 길지 않았다. 제론은 이것을 얻기로 작정했다.

"그나마 돈이 많아서 다행이군."

고철이 된 실바의 가격은 그리 높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엄청난 액수였다. 기간트의 가격 자체가 워낙 높기에 그러했다.

일반적으로 제법 잘 사는 평민 가정이 한 달을 풍족하게 살아가는데 들어가는 돈이 1골드였다.

그리고 중고가 된 실바의 가격은 무려 2만 골드였다.

말이 2만 골드지, 보통 사람이라면 꿈도 꿀 수 없는 거액이었다. 하지만 제론에게는 테페룸 동전을 팔고 남은 돈이 있었다.

제론은 고철이나 다름없는 부서진 실바를 3천 골드에 매입했다. 사실 상당히 바가지를 쓴 셈이었지만, 현재 군대에 있다는 신분상의 불이익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제론은 거대한 창고 한구석에 널브러져 있는 자신의 실바를 보며 눈을 빛냈다. 이제 이걸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향후 3년간의 일정이 완전히 바뀔 것이다.

"일단 도난을 방지해야 하는데……."

사실 도난을 방지할 가장 좋은 방법은 팔찌의 아공간에 보관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된다. 또한 앞으로 실바를 쓸 수도 없다. 그건 곤란했다.

일단 이 창고는 제론의 숙소에서 제법 떨어진 곳이었다. 숙소에 안 들어갈 수는 없기에 이런 고철 상태의 기간트는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잘라서 훔쳐갈 수 있었다.

창고를 지키는 병사가 있긴 하지만 그 병사들조차 믿을 수 없었다. 기간트를 만드는 재료는 양질의 강철이다. 또한 몇 가지 특별한 금속이 섞여 있다. 모든 게 돈이었다. 그러니 이런 고철을 3천 골드나 주고 산 것 아니겠는가.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마법이지.'

제론은 심장에서 회전하는 5개의 마나링을 가속시켰다.

위이이잉!

이명이 느껴졌다. 마나링이 회전하는 소리였다. 제론은 고철 더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주변의 마나가 거칠게 움직였다. 조금 더 마법에 익숙해지면 이런 현상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슬립 트랩!"

제론의 손바닥 앞에 파랗게 빛나는 마법진이 하나 떠올랐다. 그 마법진은 잠시 존재감을 뿌리다가 순식간에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현재 제론이 쓸 수 있는 마법은 십여 가지에 불과했다. 하지만 하나하나가 제법 쓸 만했다.

슬립 트랩은 건드린 사람을 잠에 빠뜨리는 마법이었다. 본래는 1회성 마법인데, 몇 가지 조치를 취하면 지속적으로 유지시킬 수도 있었다.

제론은 마나링을 움직여 트랩에 지속성을 부여했다. 그리고 효과를 조금 더 강화시켰다. 그 모든 것은 마나를 공급함으로써 이뤄진다. 제론은 심장의 마나 대부분을 소진시켜 마법을 완성했다.

이제 이곳에 다가오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잠에 빠질 것이다. 사실 더 위험한 마법도 있었지만, 그랬다간 마법의 존재가 들킬 위험이 있었다.

'뭐, 지금도 위험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아직 직접 겪어 보지 않아 확신은 할 수 없지만, 만일 마법사가 이곳에 온다면 들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법사가 이런 허름한 창고에 왜 오겠는가. 이 고철을 훔칠 것도 아니고 말이다.

이 창고는 예비 창고였다. 몇 가지 물품이 쌓여 있긴 하지만 중요한 것들은 아니었다. 물론 그럼에도 지키는 병사는 존재했다.

제론이 대비한 건 그 지키는 병사들에 대한 것이었다. 아마 그런 간 큰 짓을 벌일 병사는 많지 않겠지만, 확실히 대비를 해 둬야만 했다.

제론은 부서진 기간트를 보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과연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자신감을 잃지는 않았다. 실패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두렵지는 않았다.

'어쨌든 큰 경험이 되긴 할 테니까.'

제론은 이제 자신의 것이 된 실바를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었다.

군대의 일과는 지극히 단조로웠다. 새벽에 기상해 인원 점검을 마치면 체력 훈련을 한다. 그 이후 식사를 마친 뒤, 일과에 들어간다.

일과라는 건 훈련과 임무를 말한다. 또한 진지를 보수하는 일도 모두 일과 시간에 한다.

오전 일과가 끝나면 점심을 먹고 오후 일과가 시작된다. 오후 일과가 끝나면 저녁을 먹고 취침 전까지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이 주어진다.

매일 같은 일정이 반복된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말이다. 그렇기에 아카데미 출신 기사들은 그 중간 일과 시간에 쓸데없는 짓을 하기도 한다.

몰래 부대를 빠져나가 근처 환락가에서 돈을 쓰기도 하고, 사고를 치기도 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무료하게 다른 일을 찾는다. 시간을 빨리 보낼 수 있는 자극적인 일들 말이다.

그나마 기간트 학부가 아닌 다른 학부의 졸업생들은 할 일이 있었다. 하지만 기간트 학부의 경우 몇몇을 제외하면 다들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

"나도 이놈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됐겠지."

제론은 피식 웃으며 실바의 가장 중요한 부분, 마나 코어를 살펴봤다. 마나 코어에는 기간트의 검이 깊숙이 가르고 지나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군부의 엔지니어들은 왕궁 엔지니어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더구나 실전을 풍부하게 경험하기에 임기응변도 대단하다.

그런 군부의 엔지니어들이 포기할 정도면 어디에 가도 고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마나 코어의 상태를 보면 그들이 왜 포기했는지 알 수 있었다.

제론은 일단 마나 코어를 뜯어냈다. 실바의 구조에 대한 것은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훤했다. 그것이 바로 태블릿의 힘이었다. 또한 초고대 마법의 힘이었다.

'일단 마나 코어를 살리는 게 우선이군.'

마나 코어가 살아나지 않으면 다른 부분을 아무리 고치고 개선해 봐야 소용이 없다.

마나 코어의 크기는 상당했다. 어른 몸통 2, 3개를 뭉쳐 놓은 정도의 크기였다. 하지만 그 핵심에는 어른 머리통만 한 진짜 코어가 존재했다.

진짜 코어를 각종 마법진으로 감싸 안정화시킨 것이 마나 코어의 정체였다.

당연히 제론은 그것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마나 코어의 외벽을 분해하자, 마법진이 조각조각 갈라졌다. 아마 이것을 제대로 복원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분해와 동시에 사라져 버리는 선들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대단하긴 대단하네. 이런 방식으로 마법진을 만들어 핵심 기술을 보호하다니."

선 몇 개로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 마법진이었다. 당연히 몇 개의 선이 사라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보안이 가능했다.

물론 제론은 그런 저급한 마법진들이 전혀 필요 없었다. 제론에게 필요한 것은 핵심 코어뿐이었다. 나머지 마법진들은 얼마든지 새로 그려 넣을 수 있었다.

"핵심 코어도 부서졌군."

상당히 심각했다. 코어를 가르고 지나간 검이 핵심 코어에도 상처를 만든 것이다.

제론은 조심스럽게 핵심 코어를 분해했다. 어려웠다. 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제론은 태블릿의 도움을 받아 핵심 코어를 완벽하게 분해했다. 물론 그 와중에 십여 개의 마법진이 지워졌다. 당연히 그것도 상관없었다.

"후우.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군."

정말 중요한 건 지금부터였다. 핵심 코어를 고치고 다시 조립하면서 성능을 개선할 것이다. 물론 실바의 코어를 쓰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기간트로 탈바꿈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제법 많은 출력의 향상을 기대할 수는 있었다.

제론은 아공간에서 테페룸괴를 하나 꺼냈다. 제론이 이 쓸모없는 실바를 3천 골드나 주고 산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테페룸괴에 걸린 추적 마법은 이미 완벽하게 해체시켰다. 제론이 유적에서 마법을 익힌 이후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야 안전하게 테페룸을 이용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테페룸이 전략물자로 취급되는 이유는 바로 기간트 때문이었다. 기간트에는 다량의 테페룸이 들어간다. 특히 코어에는 상당한 양의 테페룸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미량의 테페룸이 함유된 무기는 엄청난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제론은 분해한 코어에 새겨진 마법진을 태블릿에 복사했다. 태블릿의 기능을 이용해 마법진을 분석하기 위함이었다.

마법진을 확실히 분석하면 사라진 마법진이나 불완전한 마법진도 충분히 복원할 수 있었다. 또한 몇 가지 마법진을 더 추가해 성능 향상을 꾀하는 것도 가능했다.

제론은 불안한 심정으로 그 작업을 했다. 사실 확신을 가지고 시작한 일이 아니었다. 만일 이것이 실패하면 그때부터는 고철을 내다 팔아야 했다. 막대한 손해를 감수하고 말이다.

그렇기에 제론은 감각을 극도로 예민하게 세웠다. 단 하나의 마법진도 놓쳐선 안 된다. 차근차근 마법진을 태블릿에 복사한 제론은 분석을 시작했다.

태블릿의 성능은 놀라웠다. 모든 마법진을 분석하고 그것을 재구성하는 데 1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고작 그 시간에 핵심 코어뿐 아니라 코어의 껍질에 새겨진 마법진까지 몽땅 분석한 것이다.

"어마어마하구나."

제론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태블릿을 보며 그 안에 나열된 마법진을 확인했다. 이제 이 마법진을 이용해 코어를 다시 조립하면 된다. 물론 그전에 사라진 마법진을 복원하고, 테페룸으로 망가진 부분을 고쳐야 하지만 말이다.

제론은 태블릿을 조작해 사라진 마법진을 복원하도록 만들어 둔 뒤, 핵심 코어의 망가진 부분을 확인했다.

"역시 테페룸이 문제였군."

테페룸이 있어야 할 곳에 테페룸이 아닌 진흙 같은 다른 물질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코어에 상처가 나며 그렇게 된 것이다. 이것은 코어에 쓰는 테페룸의 특성이었다.

마나 코어에 들어가 작동할 때는 멀쩡하다가 이렇게 상처가 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으면 완전히 다른 물질로 바뀌어 버리는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 수많은 마법사가 오랜 세월 연구했지만 누구도 그것을 밝혀내지 못했다. 하지만 제론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일단 이걸 싹 긁어낸 다음 새 테페룸을 채워야겠군."

필요한 테페룸의 양이 상당했다. 그러니 마나 코어를 만드는 데 돈이 많이 들어가는 것 아니겠는가. 기간트의 가격이 4만 골드라면 마나 코어의 가격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또한 마나 코어의 가격 상당 부분을 테페룸이 차지한다.

신형 실바의 가격은 3만 골드였다. 그중 테페룸이 차지하는 가격이 무려 12,000골드였다. 실바에는 1.5킬로그램의 테페룸이 쓰인다.

제론은 1.3킬로그램의 테페룸을 괴에서 떼어 냈다. 그리고 그것을 코어의 핵심에 채워 넣었다.

잠시 심호흡을 한 제론은 심장의 마나를 가속시켰다.

우우우웅.

마나가 회전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주변의 마나가 거칠게 움직였다. 제론은 차분히 마나를 움직여 마법을 완성시켰다.

"멜팅."

코어의 핵심부에 담긴 테페룸이 그대로 녹아 버렸다. 테페룸을 녹이는 것은 오로지 마법으로만 가능했다. 자연적인 불로 녹이는 건 아무리 온도가 높아도 불가능했다.

아마 다른 마법사가 지금 제론이 만들어 낸 광경을 봤으면 놀라 자빠졌을 것이다. 아무리 마법을 쓴다 하더라도 테페룸을 이렇게 단번에 간단히 녹이는 건 불가능했다.

엄청나게 복잡한 마법진과 마나 스톤을 이용해 오랜 시간을 들여 마법을 퍼부어야 간신히 모양을 조금 바꿀 수 있는 것이 바로 테페룸이었다.

그렇기에 코어에 들어가는 테페룸은 모양이 코어에 딱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한데 제론은 그저 주문 한 번으로 그것을 녹였다. 당연히 코어의 모양과 테페룸의 모양이 일치했다.

액체 테페룸을 내부에 채운 제론은 코어를 봉합했다.

"리스토링!"

제론이 펼친 손바닥 앞에 파랗게 빛나는 마법진이 떠오르더니 코어에 흡수되었다. 그러자 코어가 단번에 원래대로 복구되었다. 부서진 부분이 완벽히 메워진 것이다. 물론 복구에 모자라지 않도록 미리 재료를 충분히 준비했다.

일단 모양은 복원되었다. 테페룸도 충분히 채웠다. 이제부터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다. 한순간도 긴장을 늦춰선 안 된다. 마법진을 새기고 마나 스톤을 장착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사실상 이게 진짜 코어를 만드는 작업이라 할 수 있지.'

마법진을 그냥 새기는 게 아니다. 보안까지 신경을 써야만 한다. 마법진이 새겨지는 장소는 코어의 외벽이 아니라 내벽이었다. 즉, 미리 준비된 마법진을 그곳에 투영시켜서 새겨야 했다.

테페룸이 들어 있는 용기 내부에 마법진을 생기는 것은 엄청난 고급 기술이었다. 기간트 생산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기도 했다. 또한 그 때문에 기간트 개발이나 생산이 어려운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나마 실바라서 다행이야.'

실바는 비교적 단순한 마법진을 이용한 코어를 쓴다. 하지만 여전히 코어에 대해서는 보안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런 사소한 기술이나 마법진 하나가 유출되면 새로운 생산국이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제론은 온 힘을 기울여 마법진을 준비했다. 코어 내벽에 마법진을 새기는 이유는 테페룸의 힘을 직접 받아들여 외부로 발산하기 위함이었다.

외벽에 마법진을 새기면 그 효율이 너무 낮아져 제대로 된 마나 코어로의 역할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우우우웅!

마나링이 맹렬히 회전했다. 제론은 미리 준비된 마법진을 허공에 그렸다. 제론의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푸른 선이 허공에 빛나는 마법진을 그렸다.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이 작업이 잘못되면 코어가 폭발할 수도 있었다.

"실링!"

제론의 외침과 동시에 새로운 마법진이 손바닥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단숨에 코어로 흡수되었다. 그러자 허공에 손가락으로 그린 마법진이 순식간에 작아지더니 역시 코어로 흡수되었다.

제론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며 중얼거렸다.

"성공이야!"

하지만 이제 첫 번째 단추를 채웠을 뿐이다. 길고 고달픈 여정이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제론의 표정은 너무나 밝았다. 시작이 반이다. 이제부터는 길을 따라 그저 달리기만 하면 된다.

그날, 제론은 마나 코어를 완성했다. 물론 원래 실바의 것과는 조금 다른 구조의 마나 코어였다.

제론이 입대한 지 두 달이 지났다. 제론은 매일 한 치도 어긋나지 않고 똑같은 일과를 보냈다. 하지만 오늘은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사령관님."

제론은 가슴에 주먹을 대며 인사를 했다.

사령관은 제론의 인사를 대충 받으며 곧장 용건을 꺼냈다.

"부서진 실바를 자네가 개인적으로 구입했다고 하던데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그걸 예비 창고에 보관했고?"

"예. 문제가 됩니까?"

사령관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문제가 되지. 군의 창고를 개인적으로 이용한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사령관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거기서 그걸로 뭘 하고 있나?"

"분석하고 있습니다."

"분석?"

"기간트의 구조에 대해 잘 알아야 잘 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호오."

사령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탄성을 흘렸다. 하지만 속으로는 제론을 한껏 비웃었다. 라이더가 구조를 파악하려면 직접 탑승해서 움직여 봐야지 그걸 그냥 눈으로 확인하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분석도 좋고, 다 좋은데 여기는 군대야. 일과 시간에는 훈련을 받아야 할 것 아닌가. 아무리 전쟁이 소강상태라지만 이건 기본적인 기강 문제일세."

"무슨 훈련을 하란 말입니까."

제론은 설마 아카데미 출신 라이더와 군부 출신 라이더 사이의 알력을 사령관이 모르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라이더의 기동 훈련을 지켜보는 것도 중요한 일 같은데. 안 그런가?"

제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분위기를 보니 사령관도 아카데미 출신 라이더를 좋게 보지 않는 듯했다.

"일단 그렇게라도 참여하겠습니다."

"일단? 무조건 참여하게. 이건 명령일세."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론은 즉시 대답했다. 하지만 사령관의 명령을 무조건 수용할 생각은 없었다.

"한데 과연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 효과가 있겠습니까?"

사령관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무슨 뜻인가?"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확실히 효과가 있습니까?"

"당연히 효과가 있지. 자신보다 뛰어난 라이더의 훈련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실력이 늘어난다네."

"실력이 뛰어난 경우로군요."

제론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렇게 말하자 사령관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 태도는 뭔가? 설마 10년이 넘게 라이더로 활동한 베테랑들의 실력을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내일부터 명령대로 훈련에 참관을 하겠습니다."

사령관이 불쾌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오게. 내 충분히 납득을 시켜 주지."

사령관은 그렇게 말하며 성큼성큼 걸어 밖으로 나갔다. 그의 표정은 한껏 굳어 있었다. 하지만 내심은 그렇지 않았다.

이는 아카데미 출신 길들이기의 일환이었다.

아카데미 출신은 대부분 귀족 자제였기에 그 자부심이나 명예욕, 그리고 자존심과 고집이 엄청나게 높았다. 초반에 그것을 꺾지 못하면 두고두고 말썽의 소지를 만들기에 미리 그것을 한 번 꺾을 필요가 있었다.

제론은 사령관의 내심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기에 묵묵히 그 뒤를 따르며 오만 생각을 다 했다. 하지만 어떤 상황이 벌어질 것인지는 대충 예상을 했다.

'과연 군부의 베테랑들에게도 내 실력이나 센스가 통할까?'

통하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그래도 해 보고 싶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투지와 승부욕이 들끓었다.

사령관이 제론을 데려간 곳은 기간트 훈련을 하는 거대 연병장이었다. 연병장에는 수십 기의 기간트가 각자 훈련 중이었다. 움직임을 점검하기도 하고 기간트를 탄 채 검을 휘두르기도 했다.

제론은 연병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들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살폈다. 다들 단순한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기에 정확한 실력을 파악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 단순한 동작이 얼마나 깔끔하고 자연스러우냐를 보면 실력의 차이는 알 수 있었다.

대부분 카타락타였고, 크라테르가 5기 있었다. 그리고 실바도 몇 기 있었다. 제론의 시선은 그중 가장 실력이 뛰어난 걸로 보이는 기간트에게 최종적으로 고정되었다. 크라테르였는데, 다른 기간트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자, 다들 주목!"

사령관이 우렁차게 외쳤다. 그의 외침에는 마나가 담겨 연병장 구석구석을 파고들었다.

제론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사령관을 쳐다봤다. 사령관이 익스퍼트라는 건 알고 있었다. 온몸이 마나로 꽉 차 자연스럽게 외부로 흘러나오고 있었으니 척 보면 알 수 있었다.

한데 그 마나를 이렇게 자연스럽게 목소리에 싣는 걸 보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제론의 시선은 다시 가장 뛰어난 기간트로 향했다. 그와 한 번 붙어 보고 싶은 생각이 무럭무럭 들었다.

"우리 신입 라이더가 제군들의 실력에 의문이 든다고 한다. 누가 나서서 우리 군부의 실력을 보여 주겠나!"

사령관의 말에 제론은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언제 그런 식으로 말을 했단 말인가.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모든 기간트에서 일제히 투기와 분노가 뿜어져 나왔다.

"제가 해 보겠습니다!"

쿵! 쿵! 쿵!

카타락타 한 기가 앞으로 나섰다. 제론은 그 목소리만으로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메인 라이더 하프트였다.

하프트는 자신의 서브 라이더가 그따위 소리를 지껄였다는 사실에 누구보다 크게 분노했다. 또한 부끄러웠다. 자신이 후임 관리를 제대로 못 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하니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제론은 유심히 카타락타의 움직임을 살폈다. 하프트는 군부에서 10년 이상 훈련을 받고 실전을 겪어 왔다. 당연히 그 실력도 대단할 것이다. 하지만 제론은 결코 호락호락 질 생각이 없었다.

"보시다시피 전 기간트가 없습니다만."

제론의 말에 사령관이 연병장을 쭉 둘러봤다.

"같은 기종이 좋겠지. 아니, 차라리 크라테르로 해 볼 텐가?"

사령관이 살짝 도발했다. 그리고 제론은 피식 웃으며 그 도발에 넘어가 주었다.

"실바라도 상관없습니다."

"감히!"

분노를 터트린 것은 하프트였다. 감히 갓 아카데미를 졸업한 애송이가 고작 실바로 자신의 카타락타를 상대하겠다니, 버릇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쿵쿵쿵!

하프트가 제론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거검을 높이 치켜 올리며 그대로 내리쳤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제지하지 않았다.

제론은 자신의 머리를 향해 떨어지는 검을 가만히 노려봤다. 여기서 개죽음을 당할 수도 있지만 그의 감각이 결코 피해선 안 된다고 알려 주었다.

'역시!'

카타락타의 거검은 제론의 바로 옆을 노리고 있었다.

콰앙!

제론은 바로 옆 바닥을 푹 파고들어 간 검을 힐끗 쳐다보고는 카타락타의 조종석을 노려봤다.

"호오. 의외로 강단이 있군. 좋아. 일단 공평하게 카타락타로 하지."

사령관이 그렇게 정리를 했다.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하프트는 분통을 터트리면서 뒤로 물러났고, 새로운 카타락타 한 기가 준비되었다.

카타락타를 빌려 준 라이더는 조종석에서 내린 뒤 일부러 카타락타를 똑바로 세웠다. 올라타기 어렵게 만든 것이다.

제론은 군부의 기사들이 벌이는 치졸한 작태에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물론 그런 작태에 놀아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탁! 탁! 탁!

재론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발등, 무릎, 허리를 밟고 점프해 자연스럽게 조종석에 앉았다.

다들 놀란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기간트 탑승하는 것만 보면 웬만한 베테랑 못지않군."

사령관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 묘한 기대감이 떠올랐다. 어쩌면 정말로 물건 하나가 들어왔을 수도 있었다.

얼마 전 제론을 데려온 장교의 보고가 생각났다. 제론이 아카데미에서 어떤 일을 벌였는지, 또 왜 조기 졸업을 했는지에 대한 보고였다.

'실바로 베르를 물리쳤다고 했지?'

사실 그걸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어설픈 아카데미생을 물리치는 정도는 군부의 베테랑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한데 지금 탑승 모습을 보니 어쩌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실력이 뛰어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탑승 멋지게 한다고 기간트를 잘 다루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제론이 탄 카타락타가 천천히 움직였다. 사실 제론은 카타락타를 워낙 많이 타 봤기에 적응 훈련도 필요 없었다. 탑승해서 동화한 순간 이미 자신의 몸처럼 카타락타를 인식했다.

당연히 이 역시 제론의 특별한 센스 덕분이었다. 다른 라이더들은 기종을 바꿀 때마다 최소 1시간 이상의 적응 훈련을 거치지 않으면 평소 실력을 내기 어려웠다.

쿵쿵쿵!

제론은 천천히 걸어 하프트 앞에 섰다.

"치명적인 수는 쓰지 마라! 그리고 마나 코어를 부수지 마라! 이상!"

기간트 간의 대결에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조종석을 파괴해 라이더를 죽이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군끼리의 대결이기에 써선 안 되는 수법이었다.

또한 마나 코어를 부수면 기간트 자체를 아예 못쓰게 된다. 그건 왕국의 손실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그 두 가지를 제외하면 웬만한 피해는 복구가 가능하니 비교적 자유로운 대결이 이루어진다. 최소한 기간트에 관한 한, 상당한 지원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애송이, 아주 곡소리 나게 해 주마."

치명적인 수를 쓰지 않더라도 라이더를 괴롭힐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균형을 무너뜨려 충격을 지속적으로 주면 아무리 조종석이 보호되고 있어도 라이더에게 충격이 누적되기 마련이다.

하프트는 그런 방식으로 제론을 가지고 놀 생각이었다.

2기의 카타락타가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하프트는 자신의 패배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제론은 아직 카타락타에 제대로 적응할 시간도 없었다. 그런 어설픈 상대에게 진다면 메인 라이더 자리에 앉을 자격도 없지 않겠는가.

먼저 움직인 것은 하프트였다.

쿵! 쿵!

빠르게 두 발 앞으로 다가간 하프트가 제론의 목을 노리고 검을 내질렀다.

제론은 가볍게 목을 까딱이는 것만으로 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냈다. 그와 동시에 앞으로 한 발 걸어 하프트에게 다가갔다.

제론이 몸을 숙이자 하프트가 당황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도 경험적으로 상대가 완벽하게 품으로 파고들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쿵쿵쿵!

빠르게 뒤로 물러났지만 앞으로 돌진하는 것보다는 느렸다. 제론이 웅크렸던 몸을 펴며 그대로 돌진했다.

응축된 힘이 폭발하며 엄청난 속도로 하프트의 가슴에 어깨를 박았다.

꽈앙!

쿵쿵쿵쿵!

하프트가 충격에 균형을 잃고 정신없이 물러났다. 하지만 꼴사납게 자빠지지는 않았다. 그도 경험 많은 베테랑이었다. 힘겹게 균형을 잡고 제론의 다음 공격에 대비했다.

하지만 제론은 이미 그의 오른쪽을 점했다. 하프트가 균형을 잡느라 잠깐 신경을 못 쓴 사이 자리를 잡은 것이다.

콰득!

제론은 양팔로 하프트의 오른팔을 감쌌다. 하프트는 제론이 뭘 하려는지 알고 깜짝 놀라 외쳤다.

"아, 안 돼!"

콰지지직!

하지만 제론은 인정사정없었다. 그대로 팔을 뽑아 버렸다. 순간적으로 제론이 낸 괴력에 구경하는 모두가 깜짝 놀랐다. 이 정도 힘을 발휘하려면 웬만한 동화율로는 어림도 없었다.

팔을 뽑은 제론은 하프트가 다시 움직이기 전에 재빨리 움직여 그의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 한쪽 팔을 갑자기 뽑혀 순간적으로 균형이 흐트러진 하프트의 등을 두 손으로 강하게 밀며 한쪽 발을 가랑이 사이로 넣어 가볍게 다리를 걸었다.

콰과광!

너무나 간단히 하프트가 앞으로 엎어졌다. 한 팔이 없기에 제대로 바닥을 디디지도 못했다. 그 충격이 고스란히 온몸으로 퍼졌다.

충격 흡수 시스템 덕분에 조종석에 가해진 충격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정신적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쿵! 쿵!

제론이 성큼성큼 걸어 하프트 옆으로 가서 등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았다. 그리고 손으로 목을 콱 눌렀다.

하프트는 아예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뿐이었다.

"내가…… 졌다."

하프트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치욕도 이런 치욕이 없었다. 고작 아카데미 졸업생에게 이렇게 처참히 당하다니. 앞으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닌단 말인가.

제론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프트는 확실히 강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진짜 강한 사람은 절대 방심하지 않는다. 이미 처음 검을 내지를 때 방심한 상태였기에 승부가 난 거나 다름없었다.

쿵! 쿵! 쿵!

제론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의 승부욕과 투지는 여전히 타올랐다. 갈증이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처음 연병장에 왔을 때 발견한 크라테르에게로 향했다.

"놀랍군."

사령관은 정말로 놀랐다. 기간트 센스가 대단하다는 보고는 들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 정도면 웬만한 베테랑 이상이었다.

'이대로 익스퍼트에 오르면 바로 기간틱 나이트가 되겠군.'

익스퍼트에 오른다는 건 육체적, 정신적으로 성장한다는 뜻이었다. 물론 기간트 조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아니, 약간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성장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기간트는 인간의 육체와는 많이 다르다. 육체가 강하다고 기간트가 강해지는 건 절대 아니었다.

사실 제론은 이미 기간틱 나이트였지만 제론이 익힌 마나 호흡법의 특성 때문에 제론의 경지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사령관은 고민에 빠졌다. 오늘 이 자리는 제론을 돋보이기 위해 만든 게 아니었다. 제론을 한 번 꺾어서 앞으로 고분고분한 군인으로 만들기 위한 자리였다.

'쯧. 아무래도 좀 귀찮아지겠군.'

더구나 지금 제론이 박살 낸 카타락타는 제론의 기간트이기도 했다. 비록 서브 라이더이긴 했지만 말이다.

메인 라이더인 하프트와의 관계를 고려하면 최악의 결과가 나와 버렸다. 사령관은 심각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음?"

사령관의 눈이 다시 빛났다. 제론이 누구를 보고 있는지 확인한 것이다.

'카이트를 알아봐? 보는 눈도 제법이야.'

사령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왜? 관심 있나? 상대는 크라테르인데 괜찮겠나?"

"해 보고 싶습니다."

제론은 방금 전에 한 번 싸웠지만 육체적이나 정신적으로 전혀 지치지 않았다. 얼마든지 더 싸울 수 있었다. 사실 하프트와의 대결은 너무 싱거워서 힘을 쓰다 만 느낌이었다.

"카이트! 자넨 어떤가?"

"하겠습니다."

카이트는 즉시 대답했다. 그 역시 제론과 한 번 싸워 보고 싶었다. 온 힘을 다하는 제론과 제대로 붙고 싶었다. 카이트의 눈에 투지가 활활 타올랐다.

카이트가 성큼성큼 제론에게 다가갔다.

쿵! 쿵! 쿵! 쿵!

카이트는 제론 옆에 떨어져 있는 카타락타의 팔을 주워 옆으로 휙 던졌다.

쿠웅!

카타락타의 팔은 정확히 본체 옆에 떨어졌다. 놀라울 정도의 힘 조절이었다.

제론은 그것을 보며 짜릿한 소름이 등줄기를 쫙 훑고 지나가는 걸 느꼈다. 이 정도 기량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신의 실력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사령관은 굳이 시작 신호를 보내지 않았다. 그가 신호를 보내기도 전에 이미 싸움은 시작되었다.

쿵쿵쿵!

카이트가 먼저 움직였다. 카이트는 달려가며 검을 내질렀다. 조금 전 하프트와 똑같은 공격이었다. 하지만 하프트의 공격보다는 훨씬 빠르고 강했다.

제론은 몸을 옆으로 틀며 검을 피했다. 그리고 자신의 검을 강하게 올려 쳤다.

꽈앙!

카이트의 검이 그 충격으로 휙 들렸다. 하지만 카이트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몸을 한 바퀴 빙글 돌며 검을 휘둘렀다. 제론이 공격한 힘을 이용한 것이다.

강한 힘이 더해져 검은 훨씬 빠른 속도로 제론의 허리춤을 향해 날아갔다.

부웅!

어마어마한 풍압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아슬아슬하게 검격을 피한 제론이 헛손질 때문에 균형이 약간 흐트러진 카이트의 어깨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후웅!

제론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카이트가 검을 휘두르던 힘을 이용해 몸을 옆으로 빙글 돌려 피한 것이다.

카이트는 그걸로 만족하지 않았다. 검을 피함과 동시에 상체를 숙이며 발을 뒤로 쭉 뻗었다.

꽈앙!

쿵쿵쿵!

제론이 팔뚝으로 카이트의 발을 막았다. 하지만 그 충격으로 인해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야만 했다.

물론 그냥 물러나기만 하지 않았다. 물러나며 날카롭게 검을 올려 쳤다.

텅!

카타락타의 발끝이 검에 걸렸다. 카이트는 순간적으로 균형이 앞으로 무너졌지만 자연스럽게 팔을 짚더니 앞구르기를 하며 벌떡 일어났다.

다들 입을 헤 벌리고 그 광경을 지켜봤다. 마치 기간트끼리 싸우는 게 아니라 사람 2명이 싸우는 것 같았다. 이렇게 자연스럽고 격렬한 움직임을 끊임없이 해내는 대결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사람들이 놀라든 말든 제론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카이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동시에 앞으로 달려가 서로의 몸통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꽈앙!

검과 검이 부딪치며 격렬한 굉음을 토해 냈다. 출력이 모자란 제론의 기간트가 당연히 조금 밀렸다.

카이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맹렬히 검을 휘둘렀다.

꽝! 꽝! 꽝! 꽝!

제론은 차분하게 카이트의 검격을 막아 냈다. 물론 막을 때마다 밀려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제론이 다시 승기를 잡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제론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카이트의 검을 막기만 하는 건 결코 아니었다.

제론은 뒤로 계속 밀리면서도 눈을 빛내며 기회를 기다렸다. 카이트가 빈틈을 보일 리 없으니 스스로 그것을 만들어 내야만 했다.

카이트의 검이 비스듬하게 떨어졌다. 서로의 거리가 가깝고 검격이 빠르고 강해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검을 들어서 막을 수밖에 없었다.

제론은 다시 검을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전과는 달랐다.

스릉!

제론이 카이트의 검을 비스듬하게 흘려 버렸다. 그리고 흘리면서 받은 힘으로 검을 빙글 회전시켜 카이트의 어깨를 내리쳤다.

꽈앙!

카이트는 최대한 몸을 비틀었지만 완벽히 피할 수 없었다.

만일 기간트가 아니라 직접 검을 맞대고 싸우는 거였다면 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간트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만큼의 유연성이 없었기에 어깨에 검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카이트의 어깨가 움푹 들어갔다. 비틀거리며 물러나려 했지만 제론이 그냥 두지 않았다.

제론의 발이 앞으로 쭉 뻗었다. 제론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넓게 다리를 벌렸다. 제론의 발끝이 물러나는 카이트의 다리를 툭 때렸다.

텅!

카이트의 균형이 크게 흔들렸다.

쿠웅!

다른 라이더라면 넘어졌겠지만 카이트는 억지로 발을 디뎌 버텨 냈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제론이 앞으로 뻗은 발을 디딘 채 나머지 다리를 차올린 것이다.

꽈앙!

카이트의 옆구리에 제론의 다리가 깊이 박혔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카이트는 온몸이 뒤흔들리는 충격을 견디며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질린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제론은 어느새 자세를 바로잡고 카이트의 품에 파고든 뒤였다.

꽈앙!

제론의 팔꿈치가 카이트의 배를 가격했다. 마나 코어와 조종석 사이를 정확히 가격했기에 라이더에게도 마나 코어에도 거의 충격이 가지 않았다.

쿵쿵쿵쿵!

카이트가 정신없이 뒤로 물러갔다. 충격이 워낙 컸기에 마나 코어에서 흘러나오는 마나의 흐름이 흐트러졌다. 충격을 받은 부분이 너무 나빴다.

카이트는 순간적으로 움직임이 멈추는 바람에 크게 당황했다. 그리고 그런 카이트의 눈에 순식간에 다가오는 제론의 모습이 보였다.

꽈아아앙!

그걸로 대결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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