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9/217)

Chapter 8 방학

제론은 아공간 가득 보관된 금화를 생각하며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이번 테페룸 동전 경매는 대성공을 거뒀다.

동전 하나의 무게는 50그램에 불과했다. 동전 10개라고 해 봐야 500그램이니 원래 가치를 생각하면 2,500골드에 불과하다. 하지만 고대 유물이라는 점과 희소성이 수집가와 고대를 연구하는 마법사들의 욕심에 불을 지폈다.

결국 10개의 동전은 150만 골드에 낙찰이 되었다. 발굴형 기간트보다 더 높은 가격에 낙찰된 것이다. 이는 암시장이 생긴 이래 최고의 기록이었다.

경매장 측에 수수료로 15만 골드를 주고, 펠젠에게 5만 골드를 주었다. 제론은 130만 골드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다.

제론은 돈을 받은 즉시 아카데미로 복귀했다.

펠젠은 죽이지 않고 놔주었다. 대신 벨룸 왕국으로 넘어간다는 조건을 달았다. 펠젠은 제론의 말을 거스를 수 없었기도 하고, 어차피 그쪽으로 넘어갈 계획이었기에 흔쾌히 조건을 받아들였다.

제론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아카데미에 들어섰다. 곧 방학을 한다. 제론은 방학 동안 본격적으로 수련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돈도 얻었으니 남은 건 힘뿐이었다.

☆ ☆ ☆

퍼억!

카체 알트는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도 못하고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슈린 공작이 던진 촛대에 이마가 찢어졌지만 고통을 느낄 정신이 아니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그냥 잃어버렸고, 찾을 수 없다고 보고하면 끝인가? 대책을 내놔야 할 것 아닌가! 그게 어떤 건지나 알고 있느냔 말이야!"

슈린 공작이 이렇게 화를 내는 것도 당연했다. 카체는 정말로 할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하겠는가. 자신의 기사단이 테페룸 이송 임무를 맡았고, 그걸 고작 용병 나부랭이들에게 빼앗겼는데.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을 정도로 치욕적이었다.

"추적 마법도 안 걸었나?"

"걸었습니다. 테페룸괴 하나하나에 강력한 추적 마법을 걸었습니다."

슈린 공작이 이를 갈았다.

"그럼 추적해서 찾아와! 그놈들이 갈 데라고는 뻔하지 않은가! 암시장을 뒤져!"

"추적이 안 됩니다. 그리고 암시장은 이미 감시 중입니다. 하지만 암시장에도 테페룸괴가 나돌지 않습니다."

"암시장에 테페룸이 없다고?"

"최근 암시장에서 거래된 테페룸은 유물로 알려진 동전들이 전부입니다."

카체도 조사를 할 만큼 했다. 하지만 테페룸괴는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감쪽같이 사라진 채로 나타나지 않았다.

"마법사들을 중심으로 조사해. 강력한 추적 마법을 없앨 수 있는 건 마법사들뿐이니까. 안 그런가?"

카체는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이번에 건 추적 마법은 설사 괴를 녹여도 사라지지 않는다. 특별한 방식으로 건 마법이었기 때문에 마법 자체를 해체하지 않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후우. 뭐 하나? 가지 않고!"

카체가 힘없이 예를 취하고 물러갔다. 슈린 공작은 한참 동안 씩씩대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후우. 정말 짜증 나는군. 그 테페룸을 내가 어떻게 구한 건데!"

테페룸은 전략물자로 취급되기에 아무리 공작이라도 쉽게 구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번에 쓸 테페룸은 신형 기간트를 만들기 위한 재료였다.

무려 100킬로그램이었다. 그걸 구하는 데 들어간 돈만 해도 엄청났다. 한데 그 모든 게 싹 사라져 버린 것이다.

다시 구하기 위해 그 막대한 돈을 또 쓴다면 아무리 슈린 공작가라도 휘정거릴 것이다. 데다가 그걸 다시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슈린 공작이 그렇게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집사였다.

"깁스 남작이 찾아왔습니다."

깁스 남작이라는 말에 슈린 공작이 반색했다.

"어서 들라 하게."

집사가 정중히 허리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깁스 남작이 미소를 머금은 채 나타났다.

"어서 오게. 안 그래도 자네를 좀 보고 싶었네."

"수심이라도 있으십니까?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요즘 왜 이렇게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지 모르겠군. 자네가 라쿠스의 설계도를 가져온 일 빼고는 몽땅 어그러지고 있네."

슈린 공작은 난감한 표정으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슈린 공작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깁스 남작의 얼굴이 점점 굳어 갔다.

"큰일이로군요. 테페룸은 앞으로 진행할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데 말입니다."

"그러니 내가 이렇게 걱정을 하고 있는 것 아니겠나."

깁스 남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그렇게 귀중한 물건을 나르는데 보안이나 호위가 너무 적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공작님의 의도는 아니었을 듯한데……."

깁스 남작의 말에 슈린 공작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카체 알트, 그놈이 방심한 대가라네. 피닉스 기사단에 맡겼는데 이렇게 되고 말았군."

"피닉스 기사단이 나섰는데도 그런 일이 생겼단 말입니까?"

깁스 남작은 이 상황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눈빛이 강렬하게 빛났다.

'뭔가 음모가 있어.'

슈린 공작은 아직 모르지만 분명히 누군가가 개입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 누군가가 이미 테페룸을 가로챘을지도 모른다.

"일단 그 일에 대해서는 제가 조금 더 알아보겠습니다. 하지만 테페룸을 되찾는 건 힘들 테니, 다른 방도를 마련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슈린 공작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이렇게 어그러지고 나니 기운이 쭉 빠졌다. 깁스 남작조차 테페룸을 되찾기 어렵다고 하니 더 그랬다.

"어쩌면 좋겠나? 그 정도 양의 테페룸을 다시 구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네. 더구나 왕국에서 허락이 떨어질 리도 없고 말이네. 100킬로그램도 쉽지 않았는데, 거기에 또 100킬로그램을 더 구한다고 하면 아마 다른 모든 귀족이 들고일어날지도 모르네."

"그러니 은밀히 구하셔야지요."

"은밀히?"

"제가 암시장 쪽에 선을 대 보겠습니다."

슈린 공작은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선 그 외엔 방법이 없었다. 100킬로그램이나 되는 테페룸을 고작 용병들에게 강탈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공작가의 명예가 바닥으로 추락할 것이다.

"끄응. 어쩔 수 없지. 그렇게 하게."

슈린 공작은 속이 쓰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쨌든 테페룸을 구해야 하니까.

암시장에서 구하려면 훨씬 더 많은 돈이 들어갈 것이다. 당장 그 돈을 준비하려면 얼마나 골치 아플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차피 대업이 끝나면 몇 배로 돌아올 돈 아닙니까. 너무 심려 마십시오."

깁스 남작의 말에 슈린 공작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다만, 당장 눈앞의 힘겨움이 더 커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당분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리라.

☆ ☆ ☆

켄트 아카데미의 방학은 여름에 2달, 겨울에 3달이다. 1년의 거의 절반은 노는 것이다.

방학 동안 대부분은 모자랐던 공부를 한다. 검술이나 마법을 더 가다듬는 것이 보통이었고, 이론에 약한 자들은 가정교사를 초빙하기도 한다.

방학이란 아카데미 학생들에게 쉴 수 있는 시간임과 동시에 더 높은 곳으로 뛰어오를 발판을 만드는 시기이기도 했다.

아카데미의 성적은 몇몇에게는 아주 중요했다. 조금 어중간한 가문의 자제들은 성적에 거의 목숨을 걸었다.

그것이 자신들이 내보일 수 있는 능력의 잣대가 되기 때문이었다. 아카데미의 성적은 나중에 무슨 일을 하건 그를 판단하는 근거가 된다.

제론은 방학이 시작하자마자 유적으로 가려고 했다. 왠지 이번 방학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무려 2달이다. 지금까지 그렇게 오랫동안 수련을 한 적이 없으니 이번 기회에 제대로 수련에 푹 빠져 볼 작정이었다.

3층을 클리어하는 것은 물론이고, 죽을 정도로 수련에 매진해 4층도 클리어할 작정이었다.

각 층에서 얻게 될 힘과 선물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웃음이 나왔다. 그 모든 것은 향후 슈린 공작에게 복수를 할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다.

방학식은 아주 간단히 끝났다. 제론은 서둘러 기숙사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를 떴다. 방에 틀어박힌 다음 새벽쯤 유적으로 텔레포트를 할 계획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돌아올 때는 그놈들이 안 보이던데, 슈린 공작이 또 무슨 흉계를 꾸미는 거지?'

이번 테페룸 강탈 사건에 모든 미스트 드래곤의 요원들이 투입되었다. 제론은 그 사실을 모르니 의심스러운 게 당연했다.

하지만 제론은 금세 그 생각을 털어 버렸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방학이 되면 유적으로 가서 수련에 매진할 테니까. 그럼 저 지긋지긋한 파인트의 얼굴도 당분간 볼일이 없을 것이다.

제론은 힐끗 시선을 돌려 파인트를 쳐다봤다. 무슨 일이 있는 건지 파인트의 안색이 상당히 안 좋았다. 평소와 분위기가 너무나 달랐다.

하지만 제론은 바로 신경을 껐다. 파인트가 저러고 있으면 귀찮을 일이 대폭 줄어드니 오히려 좋은 일 아니겠는가.

제론은 서둘러 건물을 나섰다. 그러자 세나가 다급히 건물에서 뛰어나와 제론을 불렀다.

"선배님!"

제론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세나가 반색하며 더욱 빠르게 달렸다. 제론 앞에 도착한 세나는 두 손으로 무릎을 짚고 헐떡였다.

"하악. 하악. 서, 선배님."

"안 도망갈 테니 말해라."

제론의 말에 세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봤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왠지 모를 여유가 살짝 흐르는 듯했다. 세나의 눈이 조금 더 커졌다.

"저…… 방학 때 뭐 하세요?"

세나는 기대감 어린 눈으로 물었다. 조금 전의 반응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분명히 승산이 있었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제론을 바라봤다.

제론이 답을 하지 않자, 세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트, 특별한 일정이 없으시면 저희 영지에 가 보시지 않으시겠어요?"

"벨루스 영지에?"

"네!"

"내가 거길 왜 가야 하지?"

세나는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생각해 보니 그저 제론과 함께 영지로 가서 아버지를 만나게 할 계획만 세웠지, 그 당위성에 대해서는 하나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 그러니까……."

세나는 잠시 말을 더듬으며 맹렬히 생각했다. 그러다가 퍼뜩 뭔가가 하나 떠올라 다급히 외쳤다.

"기, 기간트가 하나 남아서요!"

제론이 어이없는 눈으로 세나를 쳐다봤다. 세나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기간트가 남는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핑계가 어디 있단 말인가.

벨루스 영지에 기간트를 보유하지 못한 기사가 얼마나 많은데 기간트가 남는다는 얘기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 그, 그러니까…… 서, 선배님이 꼭 타 주셨으면 하는 기간트가 있어서……."

제론에게 기간트를 하나 선물하고자 마음먹은 건 사실이었다. 벨루스 백작이 세나에게 선물한 기간트가 아직 오너 각인도 이뤄지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다.

세나는 그 기간트를 제론에게 주고 싶었다. 어차피 자신이 갖고 있어 봐야 타지도 않을 텐데 굳이 갖고 있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제론은 세나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세나는 그 웃음이 마치 자신을 비웃는 듯해서 마음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이러려던 게 아닌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세나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지기 직전, 제론이 그녀의 머리에 슬쩍 손을 얹었다. 그리고 살짝 머리를 헝클었다.

"됐다. 마음만 받으마."

세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제야 제론의 미소가 달리 보였다. 제론은 자신을 향해 진짜 웃어 주고 있었다.

"방학에는 나도 반드시 가 봐야 할 곳이 있어서 벨루스 영지에 가는 건 곤란해. 그러니 개학 전에 한번 들르도록 하지."

제론은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세나는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얼른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얼굴이 타오르는 촛불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내, 내가 잘못들은 거 아니지?"

세나는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려 양손으로 뺨을 감쌌다. 달아오른 얼굴은 쉽게 식지 않았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후훗. 개학 때 들르신다고 했지? 잘됐다. 정말 잘됐어."

세나는 한동안 안절부절못하고 그 자리를 서성였다. 달아오른 뺨이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제론은 기숙사 입구에 도착하며 눈에 이채를 띠었다. 그곳에서 바이스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선배님, 오셨군요."

"날 기다렸나?"

바이스가 빙긋 웃었다.

"예. 아무래도 기숙사에 들어가신 다음에는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요."

제론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요즘 아카데미 내에서 제론은 제법 신비로운 선배가 되어 있었다. 언제 빠져나갔는지 모르게 사라져 버리니 말이다.

누군가가 텔레포트 마법을 사용해 빠져나가는 거라고 추측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마법 학부의 학생들이 대거 동원되어 제론의 기숙사 근방에서 마나 유동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추측은 그 뒤로 사라졌다. 아무런 마나 유동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제론은 마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빠져나갔다고 결론이 내려졌다.

"선배님, 혹시 조기 졸업에 대한 얘기 들으신 거 없으십니까?"

바이스의 말에 제론의 눈이 살짝 커졌다. 조기 졸업이라니. 갑자기 그런 얘기가 왜 나온단 말인가.

"조기 졸업? 내 얘긴가?"

"예. 아마 이번 방학이 끝나면 논의가 마무리될 것 같습니다."

제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래도 아직 시간이 어느 정도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니었다.

'이번 방학이 끝인가?'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직 유적은 껍데기도 다 벗기지 못했다. 한데 이 상태로 군대에 가게 되면 최소 3년 동안은 유적을 방치해야만 한다.

유적이 어디 도망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이 쓰였다. 조금 더 시간이 있으면 유적에서 돌아오는 초장거리 텔레포트의 사용 방법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슈린 공작가에서 힘을 쓰는 것 같습니다."

"슈린 공작가에서?"

제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이 그럴 이유가 없었다. 슈린 공작가는 군부에 대한 영향력이 크지 않다. 자신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슈린 공작이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걸 믿기 어려웠다.

"특정 지역으로 몰아넣으려는 움직임을 포착했습니다. 그러니…… 조심하십시오."

바이스는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고는 돌아가 버렸다.

제론은 멀어지는 바이스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씨익 웃었다.

기분이 좋아졌다. 철저히 혼자일 거라고 생각했던 아카데미에서 2명이나 건졌으면 참으로 남는 장사 아닌가.

제론은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 기숙사 안으로 들어갔다.

방학이 벌써 보름이나 지나갔다. 제론은 그동안 죽음을 무릅쓰고 수련을 했다. 그 결과 3층을 클리어할 수 있었다. 아직도 방학은 한 달 반이나 남았다. 그동안 4층도 클리어할 작정이었다.

제론은 심장이 위치한 가슴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심장이 두근거리는 진동만 느끼겠지만 제론은 그 외에 다른 감각을 하나 더 느낄 수 있었다.

제론의 심장에서는 지금 마나가 맹렬히 회전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3층을 클리어하고 받은 선물이었다.

"마법이라니."

제론은 아직도 놀람이 다 가시지 않았다. 이 마나링은 마법을 쓰기 위한 것이었다.

현재의 마법사들이 마법을 쓰기 위해 마나 스톤을 가공한 스틱을 이용하는 걸 생각하면 정말로 굉장한 일이었다.

기간트의 발전으로 인해 마법 역시 그쪽을 중시했다. 일반적인 마법보다는 마법진에 의한 마법이 훨씬 중요한 시대가 된 것이다.

마법진을 안착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법사가 필요했다. 기간트 산업에서 마법사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하지만 일반적인 전투에서 보면 마법사는 참으로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

오래전에는 마법사들의 대규모 살상 마법이 전투에서 큰 역할을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마법사가 아무리 뛰어나도 기간트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수는 없다.

자연스럽게 전투에는 마법사가 아닌, 마법사가 만든 마법 물품들이 더 많이 쓰이게 되었다. 자연스러운 시대의 흐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전투에서 뒷전으로 밀려난 이후에 훨씬 더 마법사들의 위상이 올라갔다. 어떤 마법진을 새로 개발했느냐에 따라 전투의 향방이 갈리는 경우도 있었다.

한데 제론이 심장에 만든 마나링은 현재의 마법 개념에 아예 없었다. 제론은 심장의 마나를 이용해 스틱 없이 마법을 구현하는 것이 가능했다.

더구나 위력도 훨씬 뛰어났다. 아마 마법사들이 알면 놀라 자빠질 것이다. 스틱 없이 마법을 쓸 수 있다니. 게다가 마나를 몸에 저장하다니, 그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마나를 몸에 저장하는 것은 기사들뿐이었다. 마법사는 마나에 대한 감응 능력만 극대화시키고, 그 감응 능력으로 스틱의 마나를 이용해 마법을 구현한다.

하지만 제론은 마나링을 만듦으로써 그 두 가지를 모두 얻었다.

"대체 이곳은 뭘 원하는 곳이지?"

제론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검을 수련하는 곳이라고 여겼다. 한데 심장에 마나링을 만들고 그에 대해 알고 나니 혼란스러웠다.

난데없이 마법이라니. 하면 마검사라도 만들려 한단 말인가?

제론은 잠시 유적에 대해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고는 4층으로 내려갔다. 지금은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려야 할 시점이었다.

4층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공간이었다.

거대한 방이었다. 아카데미의 건물만 한 크기의 공간이었다. 게다가 사방 벽에 기묘한 문양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 문양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제론은 그 방 한가운데 서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 어마어마한 밀도의 마나가 느껴졌다. 사방에서 빛나는 문양은 마법진이 분명했다. 초고대 문명의 마법진이었다.

그리고 그 마법진의 역할은 이곳에 마나를 모으는 것이었다. 제론은 직감적으로 그것을 알아챘다. 또한 4층에서 원하는 것이 무언지도 알 수 있었다.

제론은 가만히 서서 심장의 마나링을 회전시켰다. 심장에 단단히 뭉쳐 있던 마나가 압축되어 만들어진 것이 바로 마나링이었다. 그리고 그 마나링은 완벽하게 제론의 의지하에 놓여 있었다.

마나링이 회전하며 사방의 마나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것을 흡수해 자신의 크기를 불려 갔다.

마나링은 처음 만들어졌을 때, 그 두께가 머리카락 정도였다. 한데 이렇게 마나를 흡수하니 아주 조금씩 두께가 커졌다.

제론의 집중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순식간에 시간이 흘러갔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마나가 제론의 몸으로 끊임없이 유입되었다.

그렇게 흡수된 마나의 대부분은 심장의 마나링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일부의 마나는 제론의 몸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었다가 아주 천천히 심장과 아랫배로 흘러갔다.

그 와중에 자연스럽게 제론의 몸을 씻어 내고 불순물을 태워 버렸다.

그렇게 시간이 끊임없이 흘러갔다.

제론은 잘 정비된 도로를 걸으며 내심 감탄했다. 벨루스 백작이 얼마나 영지 관리를 잘하는지 도로와 그 주변 건물들, 그리고 돌아다니는 영지민들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조금 서둘러야겠군."

제론은 이곳 벨루스 백작령에 오기 위해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했다. 슈린 공작이 자신의 이동 경로를 알아차리면 당장이라도 손을 쓸지도 모른다.

사실 슈린 공작은 당분간 제론에 대해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당연히 제론이 가로챈 테페룸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론은 그 사실을 모르니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제론이 텔레포트 게이트에서 나온 지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사두마차 한 대가 맹렬히 달려왔다. 그 마차는 제론 앞에서 급격히 멈췄다.

제론은 걸음을 멈추고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언제든 단전의 마나를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마차에서 한 사람이 내리는 순간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선배님!"

세나였다. 그녀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제론에게 마치 안기기라도 할 것처럼 달려들었다.

"왜 이제 오신 거예요! 벌써 방학이 다 끝났단 말이에요!"

세나는 살짝 원망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표정을 바꿔 환하게 웃었다.

"그래도 이렇게 약속을 지켜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세나의 환한 웃음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어서 가요. 제가 영지 구경시켜 드릴게요."

세나는 그렇게 말하며 제론의 팔을 슬그머니 안고 끌어당겼다. 그리고 제론이 혹시라도 팔을 뿌리칠까 봐 마음을 졸였다.

제론은 묵묵히 세나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세나는 너무나 기뻐 또 한 번 환하게 웃었다.

벨루스 백작령은 참으로 살기 좋은 곳이었다. 땅은 비옥했고, 상업도 발달해 돈이 넘치도록 흘렀다. 당연히 그런 좋은 영지를 기반으로 한 벨루스 가문 역시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그런 막대한 부를 통해 군사력 또한 단단하게 다졌기에 벨루스 백작가가 가지는 영향력은 상당했다.

하지만 그런 벨루스 백작가도 제론의 가문인 에어스트 백작가에는 미치지 못했다. 에어스트 백작가는 슈린 공작가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대단한 가문이었다.

벨루스 백작령을 돌아보고 있으니 우후죽순처럼 추억이 불쑥불쑥 떠올랐다.

"선배님?"

제론의 표정을 보고 오히려 마음을 졸인 것은 세나였다. 세나는 자신이 제론의 심기를 어지럽힌 건 아닌지 조마조마했다.

'내가 왜 영지를 구경시켜 드리겠다고 한 거지? 아우, 이 바보!'

제론은 영지가 몰락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한데 마치 자랑하듯 자신의 영지를 구경시켜 줬으니 얼마나 상심했겠는가. 그 생각을 하니 세나는 제론에게 미안해 견딜 수가 없었다.

"저…… 저, 배가 고픈데 우리 이제 슬슬 성으로 돌아가서 식사를 할까요?"

세나의 조심스러운 말에 제론은 추억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그녀를 쳐다보고는 잠시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세나의 태도가 어딘가 좀 이상했다.

'아, 나 때문이로군.'

세나가 왜 이런 말을 했는지도 금방 이해했다. 제론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세나를 봤다. 확실히 좋은 여자였다.

'하지만 내가 지금 여자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는 아니지.'

제론은 문득 자신이 왜 여기에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는 세나의 표정을 보고 그렇게 약속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약속을 했으니 지키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지. 나도 슬슬 배가 고픈 참이다."

제론의 말에 세나가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미안함과 안도가 뒤섞여 있었다.

두 사람은 곧장 백작성으로 이동했다.

시간이 조금 일렀기에 저녁을 먹을 때까지는 여유가 좀 있었다. 세나는 그조차 미안하게 여겼지만 제론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차피 거기까지 예상을 했다.

제론은 저녁 만찬이 시작되기 전까지 조용히 앉아 심장에서 빙글빙글 도는 마나링을 가속시키며 수련에 매진했다.

현재 제론의 심장에는 3개의 마나링이 겹겹이 회전하고 있었다. 방학 동안의 수련을 통해 마나링을 3개나 만든 것이다.

마나링이 늘어나며 움직일 수 있는 마나의 양도 급격히 늘어났고, 또한 마나를 훨씬 더 정교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마나링이 늘어난다는 건 마나를 다루는 손이 늘어나는 것과 같다. 3개의 마나링이 있으면 3개의 손을 갖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당연히 더 복잡한 마나의 조작이 가능해진다.

제론은 지금 오로지 마나링을 키우고, 새로운 마나링을 만드는 수련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마나링을 이용해 마법을 익혀야 진짜 마법사가 되는 것인데, 아직 익힌 마법이 단 한 개도 없었다.

마법을 익히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다. 또한 시간도 모자랐다.

태블릿에는 각종 마법에 대한 지식이 잔뜩 있었는데, 정작 중요한 마법 발현에 대한 설명은 단 한 줄도 없었다. 태블릿에 있는 마법은 몽땅 마법진에 관한 것뿐이었다.

마법을 익히려면 4층을 클리어하는 수밖에 없는 듯했다. 제론은 어렴풋이 마나링 5개를 만드는 것이 4층의 클리어 조건이 아닐까 짐작했다.

그래서 이렇게 틈날 때마다 마나링 수련을 했다. 마법을 쓸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언제 어떤 순간에 마법을 이용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을지 모른다. 뭐든 익혀 힘을 키워 둬야만 했다.

3개의 마나링은 두께가 일정했다. 이제 다음 단계에 이르기 직전이라는 뜻이었다. 조금만 더 하면 네 번째 마나링이 생겨날 것 같았다.

한참 동안 앉아서 마나 수련을 하던 제론은 자신의 방에 누군가 다가오는 인기척에 눈을 떴다.

마나 수련을 하면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진다. 제론은 다가오는 사람에게서 아주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세나로군.'

보통은 시녀를 시켜 손님을 모셔오도록 하는데, 이렇게 세나가 직접 오는 걸 보면 그녀의 마음이 어떤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제론의 표정이 조금 씁쓸해졌다.

똑똑!

"저 세나예요. 들어가도 되죠? 선배님?"

제론은 직접 문을 열어 주었다. 놀라 눈이 동그래진 세나의 얼굴이 보였다. 제론은 순간적으로 굳게 먹었던 마음이 살짝 풀려 버리는 걸 느끼고 조금 당황했다.

"저, 저녁 만찬이 준비되어서……."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

준비할 것도 없었기에 제론은 바로 세나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세나와 함께 걸어가며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복수가 끝나기 전까지는 칼날 같은 마음을 유지해야만 한다. 그래야 긴장이 풀리지 않고, 실수를 하지 않는다.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게 끝장날 수도 있어.'

제론은 혼자고, 상대는 왕국 제일의 가문이었다. 최소한의 힘을 만들기 전에는 결코 긴장을 놓아선 안 된다. 설령 그것이 세나 앞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저녁 만찬의 분위기는 그리 좋지 않았다. 사실 제론은 세나의 아버지인 벨루스 백작에게 인사도 드리지 못했다. 그는 아예 제론을 만나 주지도 않았다.

그리고 저녁 만찬에서 제론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표정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그 차가운 표정이 곧바로 만찬의 분위기로 이어졌다. 때문에 오늘 저녁 만찬은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가장 당황한 사람은 세나였다. 그녀는 만찬이 시작되기 직전 갑자기 변한 아버지의 분위기에 깜짝 놀랐다. 또한 제론에게 미안해 견딜 수가 없었다.

만찬장의 적막을 가장 먼저 깬 것은 가주인 벨루스 백작이었다.

"오늘 슈린 공작가에서 사람이 왔다."

벨루스 백작의 말에 제론의 눈이 번득였다.

그리고 세나의 눈이 커다래졌다. 갑자기 이 자리에서 슈린 공작가의 얘기를 꺼내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슈린 공작가와 제론이 어떤 관계인지 다 알면서 말이다.

"슈린 공작가의 후계자인 파인트 폰 슈린으로부터 청혼이 들어왔다."

"아버지!"

"조용히 해라. 넌 그저 내 말을 따르면 돼. 그게 제일 행복해지는 길이다."

"그래서…… 그래서 저보고 그 망나니 자식에게 시집을 가라고요?"

"그래."

벨루스 백작은 재고의 여지가 없다는 듯 그렇게 말하고는 제론을 쳐다봤다.

"자네의 처지는 안타깝게 여기지만, 내 딸을 줄 수는 없네. 그러니 혹시라도 마음이 있다면 이만 접게. 조만간 약혼식을 할 텐데, 그전에 괜한 추문이 돌면 곤란하니까. 알아듣겠나?"

제론은 어이가 없는 눈으로 벨루스 백작을 쳐다봤다. 제론은 가타부타 대답을 하지 않고 세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세나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제론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거렸다.

세나의 눈물을 보니 제론은 순식간에 끓어오르던 화가 식어 버렸다. 생각해 보면 이 자리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세나였다.

"진짜 행복이 뭔지는 잘 모르시는 분이로군요."

제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세나를 보며 말했다.

"나 때문이라면 울 것 없다. 난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제론의 의연하고 당당한 태도에 세나는 눈을 크게 떴다. 제론의 새로운 면모를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사정없이 뛰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채 진정시키기도 전에 제론이 벨루스 백작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뒤 나가 버렸다.

벨루스 백작은 그런 제론을 보며 화를 냈다.

"저, 저런 버릇없는 녀석 같으니!"

세나는 눈에 고였던 눈물을 싹 닦아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 정말 너무하세요."

"넌 그냥 내가 하자는 대로 따르면 돼!"

벨루스 백작의 완고한 태도에 세나는 결국 한숨을 한 번 내쉰 후 만찬장에서 나가 버렸다.

"어딜 가느냐! 이리 오지 못해! 뭣들 하고 있는 거냐! 너희들의 동생이 저러고 있는데 다들 가만히 있어도 되는 것이냐! 가서 잡아오지 못해!"

벨루스 백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역정을 냈다. 그러자 만찬장에 함께 있던 세나의 오빠들이 슬그머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에잉! 쓸모없는 것들."

벨루스 백작은 털썩 자리에 앉아 나머지 식사를 마무리했다.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벨루스 백작가의 집사는 어두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럴 때 돌아가신 백작 부인이 계셨더라면…….'

백작 부인이 죽은 뒤로 벨루스 백작의 완고함은 더더욱 굳건해졌다. 이젠 벨루스 백작가에서 그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영지 경영과는 전혀 관계없는 집안일일 뿐이었다. 하지만 집안일이 언제 영지일로 발전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문제였다.

집사는 불안한 심정을 감추며 벨루스 백작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 피처럼 붉은 와인이 백작의 잔에서 찰랑였다.

"선배님, 정말 죄송해요. 이러려고 초대한 게 아닌데……."

세나는 제론의 방까지 찾아가서 몇 번이고 사과를 했다. 제론은 그녀의 사과에 빙긋 웃어 주었다.

"됐어. 솔직히 별로 기분이 나쁘지도 않아. 다만……."

제론은 세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세나의 반짝이는 눈빛을 보니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파인트가 너한테 눈독을 들이는 것 같은데 괜찮겠어?"

세나가 코웃음을 쳤다.

"흥. 그 망나니 자식은 걱정 마세요. 제가 그딴 놈한테 넘어갈 것 같아요? 아버지가 청혼을 받아들이시면 가출이라도 할 테니까 염려 마세요."

제론은 세나의 당찬 말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가출이라니. 그런 말을 그렇게 쉽게 꺼내다니, 왠지 세나답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다.

"에이, 걱정하지 마시라니까요? 전 이렇게 선배님과 함께 여기 있다는 사실만으로 너무 기뻐요."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좋아. 그럼 난 슬슬 가 볼게."

세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가신다고요? 지금요? 지금은 밤이에요!"

제론이 씨익 웃었다.

"괜찮아. 오히려 지금 당장 가는 편이 더 안전할걸?"

세나는 제론의 말에 순간적으로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더없이 슬픈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죄송해요. 이것도 저 때문이네요."

제론은 세나의 머리를 헝클어 주었다. 마음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하니 솔직히 이젠 더 편했다. 또 세나를 대하는 것도 더 여유로워졌다.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 마. 난 아카데미로 바로 갈 테니까 넌 며칠 쉬다가 천천히 돌아와."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세나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창문을 뛰어넘었다.

"꺄악! 선배님!"

세나가 기겁을 하며 창가로 달려갔다. 그리고 고개를 창밖으로 내밀어 아래를 쳐다봤다.

제론이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세나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세상에……!"

제론이 머물던 방은 성에서도 제법 높은 곳에 위치한다. 창에서 바닥까지의 거리가 30미터는 된다.

그동안 제론이 기간트에 탑승하는 모습을 보며 상당한 실력일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건 상상 이상이었다.

세나는 한동안 제론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다가 이내 결연한 표정을 지은 뒤, 방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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