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8/217)

Chapter 7 암시장

아벤드는 낮보다 밤이 더 아름다운 도시였다. 그리고 암시장이 열리는 곳이기도 했다.

암시장에서는 어떤 물건이든 돈만 주면 구할 수 있었다. 노예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기간트까지 살 수 있었다.

제론은 아벤드의 빈민가 깊숙한 곳에 숨은 펠젠을 확인한 뒤 빈민가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 위치한 여관에 방을 잡았다.

제론은 침대에 앉아 제국 기사 검술을 차분히 떠올렸다.

그동안 유적에서 괴물들을 상대로 실전을 겪으며 정말로 실력이 많이 올라갔다. 하지만 정작 검술 자체를 차분히 들여다보고 수련한 건 오래되었다.

실전에 급급해서 기본을 등한시한 느낌이었다.

제론은 벌떡 일어나 방 한가운데 섰다. 굳이 검을 뽑을 필요는 없었다. 가상의 검을 손에 쥐고 휘두르면 된다. 마나의 흐름만 느껴도 충분히 수련이 된다.

제론은 기사 검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아랫배에서 뜨거운 기운이 불쑥 튀어나와 온몸을 휘돌았다. 제론은 마나의 유장한 흐름을 느끼며 가슴이 뿌듯하게 차올랐다.

기사 검술은 기초 검술에 비해 조금 더 복잡하고 길긴 하지만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한 번 펼치는데 5분 정도면 충분했다. 하지만 진짜 수련은 그 이후부터였다.

상황에 따른 변화를 염두에 두고 검술을 펼쳐야 한다. 언제 어느 때 검을 휘두르더라도 기사 검술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하며, 마나가 흐르는 경로도 일정해야만 한다.

사실 그 과정이 진짜 기사 검술이라 할 수 있었다.

제론은 쉬지 않고 끊임없이 검술을 펼쳤다. 모든 상황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형식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완전히 몸에 각인시켜 반사적으로 검을 휘두를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제론은 점점 몸이 가벼워지는 걸 느끼고는 더욱 힘차게 가상의 검을 휘둘렀다.

후웅!

갑자기 마나가 손을 통해 불쑥 솟아났다.

제론은 깜짝 놀라 검술을 멈췄다. 그러자 마나가 금세 사라져 버렸다. 잠시 조금 전의 감각을 떠올린 제론은 다시 한 번 가상의 검을 휘둘렀다.

후웅!

제론의 손과 팔이 바람을 갈랐다. 하지만 이번에는 마나가 튀어나오지 않았다. 제론은 기사 검술을 펼칠 때 흐르는 마나의 흐름을 떠올리며 다시 손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번에도 실패였다.

그렇게 수십 수백 번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제론은 조금 전의 그 감각을 다시 한 번 맛보고 싶었다. 뭔가 막힌 것이 확 뚫리는 듯한 시원한 감각이었다.

"후우. 잘 안 되는군."

제론은 잠시 휴식을 취했다. 뭔가에 막히는 상황이 지속되니 다시 몸이 무거워지고 극심한 피로가 몰려왔다.

일단 마나 호흡법을 통해 기력을 다시 회복한 제론은 조용히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직감적으로 이 부분이 뚫리면 기사 검술의 다음 단계로 올라가게 된다는 걸 느꼈다.

제론은 손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그리고 다시 밤이 찾아올 무렵 손을 통해 빠져나가는 마나를 느꼈다.

후웅!

이번에는 당황하지 않았다. 제론은 연달아 손을 휘둘렀다. 이 감각을 계속 느끼는 게 중요했다. 완전히 몸과 뇌리에 각인시켜야 한다.

후웅! 후웅! 후웅!

손에서 끊임없이 마나가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때마다 막혔던 뭔가가 뻥뻥 뚫려 나가는 것 같았다.

후웅! 후웅! 후웅!

제론은 흥에 겨워 계속 손을 휘둘렀다. 그런 식으로 기사 검술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펼쳤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더 이상 뚫리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제론은 서서히 움직임을 멈췄다.

"후우우우."

길게 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본 제론은 쓴웃음을 지었다. 방 안은 엉망이었다. 아무리 맨손으로 했다지만 마나가 튀어 나갔으니 주변이 멀쩡할 리 없었다.

방 안에 있던 모든 집기와 가구가 잘려 나갔다. 마치 날카로운 검으로 잘라 낸 듯했다.

"크윽. 이게 무슨 냄새지?"

제론은 코를 찌르는 악취에 인상을 찡그렸다. 냄새의 근원을 찾아보니 자신이었다. 입고 있던 옷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확인해 보니 시커먼 땀을 잔뜩 흘렸다. 악취는 그 땀에서 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군."

제론은 일단 창문을 열어 환기를 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점원을 찾았다.

마침 빈 방을 정리하고 있던 점원이 제론을 발견했고, 그와 동시에 코를 틀어쥐었다.

"우웁!"

제론은 점원의 행동을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목욕물을 준비해라."

제론이 다시 방으로 돌아가자, 점원이 슬그머니 코에서 손을 뗐다. 하지만 악취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우욱! 대체 이게 무슨 냄새지? 우우웁!"

조금 전에 먹은 아침밥이 넘어올 것 같았다. 점원은 다급히 손으로 입을 막고 후다닥 달려갔다.

말끔히 목욕을 한 제론은 점원을 시켜 새로 구입해 온 옷을 입고 여관을 나섰다. 집기에 대한 보상과 점원이 고생한 대가는 충분히 치렀다.

이제 슬슬 암시장을 통해 테페룸 동전을 팔아야 한다. 아카데미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이제 고작 이틀밖에 안 남았다. 오늘 동전을 팔고 내일 중으로 돌아가야 한다.

제론은 후드를 뒤집어쓴 뒤 빈민가로 들어갔다.

펠젠을 찾는 건 간단했다. 빈민가의 골목 구조가 상당히 복잡했지만 제론은 어렵지 않게 길을 찾았다. 막히면 훌쩍 날아 담이나 집을 아예 건너뛰어 이동했다.

검술과 마나 호흡법이 새로운 경지로 들어섰기에 움직임이나 정령을 이용하는 것까지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다.

펠젠은 빈집 하나를 용케 찾아 그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제론은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펠젠 외에는 아무도 없었기에 당당하게 걸었다.

"설마 날 피해서 숨어 있었던 건 아니겠지?"

제론의 말에 펠젠이 기겁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로써 얼마 전 제론이 자신에게 한 말이 입증되었다. 이젠 빼도 박도 못하게 되어 버렸다. 살고 싶으면 무조건 제론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준비는 끝났나?"

"끄, 끝났소. 오늘 그냥 가서 경매로 팔아넘기면 되오."

펠젠은 대답을 하면서 차츰 여유를 되찾았다. 생각해 보니 이렇게 되었는데 제론이 자신을 괜히 죽일 이유가 없었다. 제론에게는 아직도 팔아야 할 테페룸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가.

'그나저나 설마 그 테페룸을 그냥 가져온 건 아니겠지?'

그 테페룸에는 슈린 공작가에서 추적 마법을 세심하게 걸어 놨다. 그걸 그냥 가져왔다면 날 잡아가 달라고 애원하는 꼴이었다.

펠젠은 불안했지만 감히 그걸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는 제론이 너무 무서웠다.

"아, 안내하겠소."

펠젠이 서둘러 집을 나섰다. 제론은 그런 펠젠의 목덜미를 콱 움켜쥐었다. 펠젠이 깜짝 놀라 제론을 힐끗 돌아봤다. 그리고 경악에 빠졌다.

제론이 펠젠을 쥔 채로 훌쩍 날아오른 것이다. 빈민가 골목을 복잡하게 돌아다니기 싫어서 그냥 날아가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은 밤이라서 조금 높이 날면 사람들에게 발견될 리도 없었다.

그렇게 날아 이동하니 빈민가를 벗어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펠젠은 바닥에 내려서며 질린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마음 같아서는 저 후드를 확 벗겨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모험을 하기에는 제론에 대한 공포가 너무나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서둘러라."

제론의 말에 펠젠이 정신을 차리고 걸음을 옮겼다. 암시장은 너무 늦으면 입장이 곤란하다. 더구나 경매에 참여하려면 좀 더 서둘러야만 했다.

펠젠은 아벤드에서 가장 번화한 곳으로 향했다. 암시장은 그곳에서도 가장 큰 건물에서 열린다.

"이쪽이오."

펠젠은 건물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는 미로처럼 길이 얽혀 있었다. 그곳을 능숙하게 이리저리 찾아 들어가니 이내 작은 철문 하나가 나왔다.

"여긴가?"

"맞소. 참고로 생각보다 무서운 곳이니 정신 바짝 차려야 할 거요. 남 뒤통수 치고 물건 빼앗아 가는 게 비일비재한 곳이오."

"그럴 일은 없을 테니 앞장서라."

제론은 마나 호흡법과 기사 검술을 통해 예민해진 자신의 감각을 믿었다. 설사 누군가 몰래 뒤로 다가온다고 해도 얼마든지 알아차릴 자신이 있었다.

끼이이익!

요란한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렸다. 제법 커다란 방이 나왔고, 그 안에 우락부락한 인상의 사내들이 십여 명이나 있었다. 그들은 문을 통해 들어오는 펠젠과 제론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언제든 검을 뽑을 수 있도록 준비가 된 사람들이었다.

펠젠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의 시선을 넘기고 방을 가로질러 갔다. 이 방은 암시장을 보호하는 최소한의 보호 장치였다.

방을 가로지르니 커다란 문이 있었다. 근육질의 사내 2명이 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펠젠이 품에서 검은 광택이 흐르는 펜던트를 보여 주자, 문을 열어 주었다.

그르르르릉!

문은 엄청나게 두꺼웠고, 당연히 무거웠다. 두 사내는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힘을 쓰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열린 문 안으로 펠젠과 제론이 들어갔다.

제론은 눈을 빛내며 사방을 둘러봤다. 암시장의 규모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컸다. 건물 지하에 이렇게 넓은 공간이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 안에 또 건물이 있고, 좌판들이 가득하다는 건 더 놀라웠다.

'1,000명은 있는 것 같군.'

그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제론은 주위를 구경하면서 펠젠을 놓치지 않고 따라갔다. 펠젠은 뭐가 그리 바쁜지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이곳이오."

펠젠은 그렇게 말하고는 천장에 닿을 정도로 높고 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제론은 건물을 한번 확인하고는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곳곳에서 강렬함이 느껴졌다. 이 건물 안에는 강한 사람들이 많았다.

'익스퍼트들이 발에 차일 정도로 많을 줄이야.'

제론은 예민한 감각을 이용해서 익스퍼트들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만 한다.

익스퍼트들 중에는 예전 아카데미로 들어갈 때 본 자들처럼 자신의 마나가 최대한 외부로 흘러나가지 않도록 조절하는 사람들도 제법 많았다.

펠젠은 익숙하게 모든 사람을 지나쳐 말끔하게 차려입은 중년인에게로 다가갔다. 금방이라도 기름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느끼하게 생긴 사내였다.

"호오. 이게 누구야. 펠젠 아닌가. 프렉타에서 누군가 한탕 했다고 하던데, 자네 맞지?"

펠젠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아니니까 어디 가서 헛소리하지 마쇼. 오늘은 경매에 좀 참여하려고 왔소."

"수수료는 10퍼센트다. 알고 있겠지?"

"아니까 이거나 좀 봐 주쇼."

펠젠이 주머니 하나를 내밀자, 중년인이 그것을 받아 펼쳤다. 그의 눈이 날카롭게 번득였다.

"호오. 이거 굉장한 물건을 가져왔군. 아무래도 여기서 확인하기에는 좀 그러니 이쪽으로 오게."

그들을 유심히 살피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중년인은 펠젠과 제론을 근처에 있는 밀폐된 방으로 데려갔다. 안전장치가 몇 단계로 되어 있어 이곳의 대화나 행동이 외부로 흘러나갈 일은 없었다.

촤르륵!

중년인은 탁자에 주머니를 쏟았다. 테페룸 동전이 탁자에 펼쳐졌다.

"테페룸으로 만든 동전이라니. 이거 대체 어디서 발견한 유물인가?"

"말해 줄 것 같소?"

중년인이 빙긋 웃었다.

"당연히 아니지. 자, 어디 조금 자세히 살펴볼까?"

중년인은 주머니에서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돋보기를 꺼내 그걸로 동전들을 하나하나 세심히 살폈다.

"호오. 정말 굉장하군. 테페룸으로 이 정도 세공을 하다니. 믿을 수가 없어. 역시 고대 유물이야."

중년인은 크게 흥분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유물이었다. 이 정도라면 이번 경매를 통해 한탕 크게 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그런 동전이 무려 10개나 된다.

원래 이 정도 양의 테페룸이라면 2,500골드쯤 한다. 하지만 유물이니 조금만 포장하면 수백 배로 만들 수 있었다.

"좋아! 나한테 맡겨 봐! 내가 제대로 값을 만들어 보지."

"직접 한단 말이오? 그럼 나야 좋지만……."

"50만 골드쯤 받으면 나한테 5만 골드가 떨어지는데 이걸 누구에게 맡기겠나? 안 그런가?"

50만 골드라는 말에 펠젠은 깜짝 놀랐다. 당연히 제론도 놀랐다. 하지만 둘 다 전혀 그것을 표정에 드러내지 않았다.

펠젠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좋소. 어디 그 실력 오랜만에 한번 봅시다."

중년인은 즉석에서 경매에 올릴 동전 케이스를 만들었다. 커다란 상자에 고급스러운 천을 깔고, 동전 앞면과 뒷면이 보이도록 나란히 늘어놓았다.

그렇게 한 다음 유리로 된 뚜껑을 덮으니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였다.

"가자고."

중년인은 그것을 들고 밖으로 나가 경매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펠젠과 제론이 기대감 어린 눈으로 그 뒤를 따랐다.

그날 고대 유물인 테페룸 동전은 암시장 경매의 기록을 갈아 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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