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7/217)

Chapter 6 용병들

제론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로비 한가운데 널브러졌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3층 수련은 기사 검술을 이용한 실전이었다.

끝도 없이 몰려오는 듣도 보도 못한 괴물들을 물리쳐야만 했다. 과연 그 끝이 존재하기는 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몰려왔다.

처음에는 괴물 한 마리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다. 괴물들은 그 정도로 강했다. 하지만 열흘이 지난 지금은 최소 1시간은 버틸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3층을 완전히 클리어하려면 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최대한 빠르게 클리어할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제론은 정말 죽어라 노력했다. 죽음을 무릅쓰고 괴물들을 상대했다. 자연히 제론의 실력도 가파르게 상승했다. 기사 검술은 몸에 완전히 각인될 정도였다.

그리고 이제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제론은 슈린 공작을 극도로 경계했다. 당연히 돌아가는 길에 거쳐 갈 도시도 매번 바꾸었다.

"지난번에는 샤임이었지? 그럼 이번에는 프렉타로 할까?"

시간이 조금 더 걸리겠지만 샤임에서 수도 방향으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프렉타에서 텔레포트를 이용하기로 했다.

문득 제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확실히 문제는 문제였다. 만일 군대에 가게 되면 유적을 오가는 것이 훨씬 더 힘들 것이다. 뭔가 방도를 만들지 않으면 곤란했다.

하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제론은 일단 유적을 나와 프렉타로 향했다. 유적은 드넓은 황무지 한가운데 있었고, 그 황무지를 넘어서더라도 인적이 드물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들킬 염려는 없었다.

프렉타는 샤임보다 훨씬 더 큰 도시였다. 제론은 여유롭게 프렉타 시를 걸었다.

아직 시간은 많았다. 이번에는 사흘이나 일찍 유적을 나섰기 때문이다. 제론은 느긋하게 걸으며 유적에 대해서 생각했다. 대체 얼마나 더 내려가야 수련이 끝날지 까마득했다.

하지만 그 모든 수련을 끝내면 확실히 강해질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여관이 하나 나왔다. 제론은 망설임 없이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여관은 시끌벅적했다. 여느 여관이 다 그렇듯 1층에서는 술과 음식을 판매하고 숙소는 2층부터 있었다.

여관 1층에는 용병으로 보이는 자들이 많았는데, 저마다 목소리를 높이며 거침없이 맥주잔을 비워 댔다.

제론은 여관에 들어가자마자 종업원을 찾았다. 밥 생각은 없었지만 여기저기서 맥주잔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니 술 생각이 좀 났다.

마침 맥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열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급히 달려와 제론에게 허리를 꾸벅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혼자십니까?"

제론이 고개를 끄덕이자, 소년이 능숙하게 질문을 이어 갔다.

"식사는 어쩌시겠습니까? 1층을 원하시면 자리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원치 않으시면 방으로 직접 날라다 드릴 수도 있습니다."

"방부터. 밥은 됐다. 나중에 내려와서 맥주를 마실 테니 미리 준비해 두도록."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소년에게 동전 하나를 손가락으로 튕겨서 던져 주었다. 소년이 그것을 착 채가듯 잡더니 허리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제론은 소년을 따라 2층의 구석에 위치한 방으로 들어갔다. 여관의 상태는 썩 좋지 않았다. 하지만 못 지낼 정도는 아니었다.

예전 같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충분히 참을 만했다.

제론은 백작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귀족은 이런 곳에 오지 않는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호텔에 묵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귀족이라고 다 부자인 것은 아니다. 그런 경우에도 이런 싸구려 여관에는 웬만해선 묵지 않는다.

하지만 제론은 일부러 이런 선택을 했다. 이런 큰 도시의 호텔에서 묵으려면 신분이 노출될 확률이 높았다.

괜한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다. 이런 싸구려 여관이라면 슈린 공작가의 눈도 쉽게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방에는 따뜻한 물이 찰랑이는 목욕통이 놓여 있었다. 제론은 굳이 목욕을 할 필요가 없었기에 그것을 그냥 지나쳐 침대에 올라가 앉았다.

일단 마나 호흡법을 통해 피로를 풀어야 했다. 목욕을 통해 피로를 푸는 것보다 마나 호흡법이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유적 내부에는 놀랍게도 샤워를 할 수 있는 시설도 있었기에 제론은 몸을 깨끗이 유지할 수 있었다. 굳이 이런 여관에서 목욕을 할 필요가 없었다.

마나 호흡법을 끝낸 제론은 바로 1층으로 내려갔다. 여전히 시끌벅적했지만 그래도 빈자리가 몇 개 있었다.

제론은 그중 가장 구석 자리에 앉았다. 처음 제론을 안내했던 소년이 후다닥 달려왔다.

"맥주. 그리고 안주는 적당히 알아서."

"즉시 대령하겠습니다."

소년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물러갔다.

잠시 후, 제론의 탁자에 맥주와 먹음직스런 안주가 깔렸다. 제론은 맥주를 꿀꺽꿀꺽 마셨다. 시원하고 짜릿한 느낌이 목을 타고 쫘악 내려갔다.

"좋군."

단숨에 잔을 비운 제론은 다시 한 잔을 주문했다. 맥주가 또 한 잔 탁자에 놓였다.

제론은 맥주를 조금씩 마시며 차분히 앞으로의 일을 계획했다.

최종 목표는 일단 슈린 공작가에 복수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난관도 많고, 갈 길이 너무 멀었다.

'지금은 일단 유적에 관한 것만 생각하자.'

제국 기사 검술을 떠올리니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그 검술의 위력은 제국 기초 검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일단 마나의 효율이 완전히 달랐다. 또한 검술에 포함된 수련 검식을 꾸준히 펼치면 마나 호흡법과 동일한 효과를 얻을 수도 있었다.

제론은 기사 검술을 몸에 새기며 한 가지 확신을 가졌다. 기초 검술과 기사 검술은 둘이 아니라 하나였다.

기초 검술은 기사 검술의 토대나 다름없었다. 즉, 이 말은 기사 검술을 토대로 한 새로운 검술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아래로 계속 내려가다 보면, 결국 얻을 수 있어.'

만일 초고대 문명에서 말하는 진짜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있다면, 제론이 복수를 하는 데 정말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경지는 정말로 요원했다. 아직 진짜 익스퍼트에도 이르지 못했으니 말이다.

'기사 검술을 익히면 분명히 익스퍼트가 될 수 있어.'

기초 검술로도 얼마든지 익스퍼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린다. 효율 문제였다. 기사 검술은 훨씬 더 빨리 높은 경지로 제론을 데려다 줄 것이다.

제론이 그렇게 검술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여관 안이 갑자기 훨씬 소란스러워졌다.

"음?"

제론은 그제야 상념에서 벗어나 주위를 둘러봤다.

"다들 꼼짝 마라!"

어느새 병사들이 20명이나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병사들의 뒤에 기사 1명이 서 있었다. 방금 외친 건 기사였다.

"이곳의 용병들을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체포해라!"

제론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자신의 행색은 누가 봐도 용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병사 2명이 제론에게 다가와 창을 겨눴다.

"일어나라!"

제론은 잠시 고민했다. 여기서 정체를 밝히면 슈린 공작가에 위치가 노출될 확률이 거의 100퍼센트였다. 하지만 이대로 잡혀간다면 어떤 꼴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고민은 짧았다. 제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슈각! 슈각!

빛이 번득였고, 병사들이 든 창이 싹둑싹둑 잘렸다. 두 병사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제론은 즉시 앞으로 움직여 병사들의 명치를 후려쳤다.

뻐벅!

"커헉!"

두 병사가 그대로 무릎을 꿇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뭐야!"

"반항인가! 저놈부터 잡아라!"

기사가 제론을 가리키며 명령했다. 당연히 제론은 그냥 당해 줄 생각이 없었다. 더구나 기사는 익스퍼트도 아니었다.

제론은 자신의 얼굴이 알려지기 전에 돌아섰다. 그리고 벽을 향해 달려갔다.

다들 저게 무슨 짓인가 멍하니 쳐다봤다. 하지만 이어지는 광경에 다들 경악했다.

꽈앙!

한쪽 벽이 사라져 버렸다. 벽돌을 쌓아 만든 벽이었는데 마나가 가득 담긴 제론의 손바닥을 버티지 못하고 넘어진 것이다.

제론은 유유히 사라진 벽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움직임이 어찌나 표홀한지 제론의 모습을 제대로 확인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뭣들 하느냐! 어서 잡아라! 저놈이 범인이 분명하다!"

기사의 명령에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 나갔다. 하지만 제론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그 틈을 타고 여관 안에 있던 용병들이 몽땅 밖으로 도망쳐 버렸다.

여관 주인만 울상을 짓고 사라진 벽을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제론은 빠르게 모습을 감췄다. 기사나 병사들의 눈을 피해 도망치는 건 아주 간단했다. 자신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할 만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점원이 얼굴을 기억할 수도 있지만 걱정할 건 없었다. 사람 얼굴을 기억하는 데에는 한계가 분명했다. 제론 폰 에어스트 백작이 그곳에 있었을 거라고 믿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제론은 즉시 프렉타를 벗어났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무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모처럼 여유를 가지고 쉬려고 했는데, 다 틀렸군."

제론은 아쉬워하며 다른 도시로 향하려 했다. 한데 막 떠나려는 순간 프렉타를 도망치듯 나오는 일단의 무리가 보였다. 제론처럼 성벽을 넘어서 나온 자들이었다.

그 높은 성벽을 무리 없이 기어 내려오는 것을 보면 실력들이 상당한 모양이었다. 물론 제론은 단번에 뛰어내려 왔지만 말이다.

"빨리빨리 움직여! 잡히면 끝장이다."

"젠장! 이게 무슨 꼴이야!"

"떠들 힘 있으면 빨리 내려가기나 해!"

"펠젠만 만나면 돼. 그러니 서두르라고!"

제론은 흥미로운 눈으로 그들을 살폈다. 보아하니 용병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방금 소동의 원인이 이들인 듯했다. 제론은 강한 흥미를 느꼈다. 펠젠이라는 이름이 묘하게 끌렸다.

용병들은 10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성벽을 넘자마자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달렸다.

잠시 후, 성문이 열리고 말을 탄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무조건 찾아!"

"놓치면 다 죽는다!"

제론은 푸르투나를 불러 하늘로 훌쩍 떠올랐다. 그리고 기사들을 뒤쫓았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면 기사들을 살피는 것이 더 좋다.

기사들은 해가 지고 밤이 늦을 때까지 돌아다니며 용병들을 찾았다. 하지만 약삭빠른 용병들을 잡을 수는 없었다. 결국 기사들은 노숙을 준비했다. 프렉타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모닥불을 피우고 말을 근처 나무에 묶은 뒤 대충 식사를 한 다음 모여 앉았다.

"후우. 큰일이군."

"그러게. 이래서야 어떻게 찾지?"

"영주님, 화 많이 나셨지?"

"화가 난 게 아니라 사색이 되셨네. 당연하지. 슈린 공작가의 심기를 거스른 셈이 되었으니."

슈린 공작가라는 말에 근처에 숨어서 이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제론의 눈이 빛났다. 역시 느낌이 맞았다.

'프렉타 남작가가 슈린 공작가의 라인이었군.'

프렉타 시는 프렉타 남작가의 영지였다. 레늄 왕국에는 영지가 도시 하나인 경우가 많았다. 프렉타도 그런 경우였다.

"하여튼 간도 큰 용병들이야. 감히 슈린 공작가의 병사들을 습격하다니."

"그놈들이 그걸 알았겠나? 그냥 습격하고 보니 슈린 공작가였겠지."

"어쨌든 우리만 고달프게 됐어."

"그러게 말이야. 그걸 어떻게 되찾지?"

제론은 기사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대체 뭘 잃어버렸는지 너무나 궁금했다. 그걸 자신이 가로챈다면 얼마나 통쾌하겠는가.

더구나 제론에게는 아공간이 있다. 거기에 보관하면 슈린 공작가는 절대 그것을 되찾지 못할 것이다.

"젠장. 대체 그런 중요한 걸 그렇게 허술하게 나른 이유가 뭐야?"

"허술한 게 아니야. 익스퍼트가 둘이나 포함된 일행이었다고."

"뭐? 그런데 당한 거야?"

"용병들을 우습게 본 거지. 멍청하게 트랩에 당했어."

"트랩?"

기사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무리 교묘하고 위험한 트랩이라 하더라도 익스퍼트급 기사가 거기에 당했다면 지나치게 방심했다는 뜻이었다.

"그나저나 테페룸을 그렇게 많이 잃어버렸으니, 만일 못 찾으면 아무리 슈린 공작가라도 휘정거리겠어."

"그래도 슈린 공작가야. 그렇게 쉽게 흔들릴 것 같아?"

"하긴."

"그래도 좀 흔들리긴 할걸? 테페룸이 무려 100킬로그램이야. 돈으로 환산해도 어마어마하다고."

모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런 손해를 입었는데 슈린 공작가가 프렉타를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후우. 일단 다들 자자고. 내일 어떻게든 찾아야지."

기사들이 하나둘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를 모두 들은 제론이 조용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제론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슈린 공작가에게 피해를 주고, 공작가 라인의 귀족을 하나 떨어뜨릴 기회였다. 그리고 테페룸을 100킬로그램이나 얻을 기회이기도 했다. 물론 당장은 제론에게 아무런 쓸모없는 물건이었지만 말이다.

제론의 모습이 어두운 하늘에 녹아들었다.

10명이나 되는 용병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커다란 상자 하나를 가운데 놓고 서로를 견제하며 눈을 번득였다.

"10킬로그램씩 나누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누가 제일 애썼는지 알아야지. 이 무거운 걸 들고 여기까지 뛰어온 건 나야!"

가장 덩치가 큰 용병이 인상을 쓰며 협박하듯 말했다. 하지만 나머지 용병들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그들도 산전수전 다 겪으며 바닥까지 떨어진 용병들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트랩을 설치한 게 나니까 내가 제일 많이 받아야지. 안 그래? 내 트랩이 아니었으면 익스퍼트들을 해치울 수 있었을 것 같아?"

"아니지. 그 트랩을 만든 내가 제일 중요하지."

"트랩에 걸린 기사들을 죽인 게 누군데? 트랩만으로 익스퍼트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병사들은 잠자고 있었던 거 같아? 병사들을 죽인 게 누군데?"

다들 한마디씩 거드니 금세 시끌시끌해졌다. 그리고 서로를 바라보는 눈에 흐르는 살기가 짙어졌다.

"그러지들 마. 이 보물이 뭔지 몰라서 이러는 거야? 다들 돕지 않으면 처분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지금껏 잠자코 있던 용병이 입을 열자 다들 말을 끊었다. 그리고 그 용병을 바라봤다. 어쨌든 오늘의 일을 계획한 것도, 또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것도 모두 이 펠젠이라는 용병이었다.

"그런데 펠젠, 너 진짜 이 테페룸을 처분할 수 있긴 한 거야?"

"할 수 있으니까 일을 저질렀지. 이걸 처분해서 돈을 받은 다음 벨룸 왕국으로 넘어가 버리면 그만이야."

펠젠의 자신만만한 말에 모두 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희망이 싹텄다. 또한 욕망이 들끓었다. 무려 100킬로그램의 테페룸이었다.

"이걸 다 팔면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기간트 하나 만드는 데 테페룸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알아?"

"그, 글쎄?"

"고작 2킬로그램이야."

"겨우? 겨우 그걸로 기간트를 만든다고?"

"물론 성능이 좋은 기간트를 만들려면 조금 더 들겠지. 하지만 대충 그쯤이면 기간트 하나를 만들 수 있어."

"그, 그럼……."

펠젠의 말에 모든 용병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테페룸 100킬로그램은 무려 기간트 50대를 만들 수 있는 양이다. 실로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기, 기간트 50대면 돈이 얼마야……."

"기간트 한 대에 한 2만 골드 하나?"

"중고 실바가 그쯤 한다고 들었어. 신형 카타락타쯤 되면 아마 4만 골드가 넘어."

용병들의 눈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테페룸 100킬로그램이 얼마나 큰돈이 되는지 그제야 조금씩 감이 왔다. 상상도 못할 거금이 생긴 것이다.

"그러니 누가 더 갖고, 덜 갖고, 이따위 사소한 걸로 싸우지 말라고. 최소한 1인당 5만 골드씩은 돌아가게 될 테니까."

"5, 5만 골드?"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거액이었다. 평생 흥청망청 써도 다 쓰지 못할 정도로 막대한 돈이었다. 용병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펠젠을 바라봤다.

"그, 그럼 이제 어쩌지?"

"어쩌긴. 암시장에 내다 팔아야지."

"암시장? 거긴 아무나 못 갈 텐데?"

펠젠이 자신의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나만 믿어. 거기서 조심할 건 뒤통수 맞고 물건을 빼앗기는 것뿐이야. 다들 힘을 모아야 하는 이유, 이제 알겠지?"

용병들이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눈에 독기가 자르르 흘렀다. 누군가 이 물건을 강탈해 간다고 생각하니 살기가 치밀었다.

"어쨌든 서두르자. 우릴 쫓아오는 프렉타의 기사들을 따돌리려면 더 부지런히 움직여야지."

펠젠의 말에 용병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테페룸이 든 상자를 2명이 함께 들었다.

그렇게 막 이동하려는 찰나,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쉭!

서걱!

툭!

용병들의 움직임이 일제히 멈췄다. 그리고 방금 전 목이 떨어진 동료를 멍하니 바라봤다. 테페룸을 들던 용병의 목이 잘렸다. 상자를 함께 쥔 동료 용병이 조심하라고 외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쉭!

서걱!

툭!

"으, 으아아!"

용병들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도 도망가지 못했다.

쉬쉬쉬쉭!

칼바람 소리와 함께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용병의 목이 잘렸다. 진득한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살아남은 유일한 용병인 펠젠은 의외로 침착했다. 그는 한껏 가라앉은 눈으로 사방을 주시했다. 상대가 너무 빨라 모습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이 정도 위력을 내려면 최소한 익스퍼트는 되어야 했다.

'아니, 익스퍼트도 이 정도는 불가능해.'

익스퍼트를 몇 번이나 겪어 봤기에 펠젠은 비교적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기억에 있는 익스퍼트들은 강하긴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날 살렸다는 건 얻을 게 있다는 뜻이겠지. 누군지 모르지만 슬슬 나오는 게 어떻소?"

펠젠이 여유롭게 말하자, 그의 앞에 제론이 유령처럼 솟아났다. 펠젠은 깜짝 놀랐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속으로 가슴을 진정시켰다.

"신비로운 분이로군. 그래, 내게 뭘 원하오?"

제론은 펠젠의 강단에 피식 웃고는 테페룸 상자로 다가가 그 위에 걸터앉았다. 후드를 썼기에 얼굴이 드러나지 않았다. 펠젠을 죽이지 않게 될 수도 있기에 일부러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암시장에 대해 궁금해서 말이야."

"암시장이라……."

펠젠이 말을 최대한 길게 늘였다. 거기에 자신이 살아날 길이 있었다. 그는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하면 살아날 수 있을지 말이다.

"수수료로 5퍼센트만 주시오. 그럼 내가 책임지고 처분해 드리리다."

펠젠은 돈에 욕심을 내는 게 아니었다. 수수료라는 돈으로 자신의 진짜 의도, 목숨을 구하려는 사실을 감춘 것이다.

제론은 펠젠을 가만히 쳐다봤다. 펠젠은 긴장으로 목이 타들어 갔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이런 일에 표정을 드러내는 건 애송이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제론이 암시장에 대해 알려는 이유는 아공간에 보관된 동전들 때문이었다. 순수 테페룸으로 이루어진 동전들이 잔뜩 있는데, 그걸 처분할 길을 마련해 보기 위함이었다.

아공간에 보관된 동전의 수는 엄청났다. 실제로 모두 꺼내 무게를 달아 보면 수십 킬로그램이 넘을 것이다.

테페룸을 정상적으로 구매한다면 1킬로그램에 8천에서 9천 골드 정도 한다. 하지만 암시장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5천 골드 정도에 팔 수 있을 것이다.

100킬로그램이면 무려 50만 골드에 달하는 막대한 금액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제론에게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주시겠소?"

펠젠이 다시 한 번 물었다. 제론은 상자에서 일어나며 검을 뽑았다.

스릉.

펠젠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제론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분위기를 보면 자신이 살기는 틀린 것 같았다.

'그래도 그냥 맥없이 죽어 줄 수는 없지.'

펠젠은 나름의 한 수를 준비했다. 치졸한 수였지만 상대가 지저분한 실전을 겪지 않은 경우 잘 통하는 수법이었다. 펠젠의 소매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가 툭 떨어져 손아귀로 빨려 들어갔다.

"암시장에서 처분하면 뒤를 추적당할 염려가 없나?"

펠젠은 지옥 문턱에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역시 내색하지 않고 피식 웃었다.

"그런 걸 걱정하면서 암시장을 쓸 생각하면 안 되지 않겠소? 추적의 위험이야 언제든 있소. 그러니 딴 나라로 도망가려는 것 아니겠소?"

제론은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겨눴다. 유적에서 기본 물품으로 지급받은 검이었다.

"죽이려면 대체 그딴 건 왜 물어본 거요?"

펠젠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제론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나직이 정령을 불렀다.

"아네모스."

바람이 한데 뭉치며 정령이 나타났다. 정령은 제론의 눈에만 보인다. 펠젠은 그저 바람이 한 차례 부는구나 생각했을 뿐이었다.

제론이 정령을 검에 밀어 넣었다. 최근 알아낸 검의 기능을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정령을 받아들인 검이 은은히 빛났다. 그리고 빛 덩어리 하나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펠젠의 가슴으로 쭉 날아갔다.

퍽!

펠젠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너무나 당황했다. 자신의 가슴을 파고든 뜨거운 열기에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이, 이게 대체 뭐요?"

제론은 묵묵히 검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아공간을 열어 동전 10개를 꺼냈다. 동전 하나에 50그램 정도의 무게이니, 총 500그램 정도의 무게였다. 암시장에 팔면 2,500골드 정도를 벌 수 있는 양이었다.

제론은 그것을 펠젠에게 휙 던졌다. 펠젠의 발치에 테페룸 동전이 후두둑 떨어졌다.

"이게 뭐요?"

"테페룸이다."

펠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일반적으로 테페룸은 괴로 만들어 보관한다. 그게 가장 만들기 편하고, 보관도 편하기 때문이다.

"특이한 모양인데, 이게 정말 테페룸이오?"

펠젠은 바닥에 떨어진 동전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주웠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동전에는 상당히 정교한 세공이 들어가 있었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의 얼굴과 숫자가 보였는데, 뭔가 의미가 있어 보이면서도 제법 아름다웠다.

"테, 테페룸으로 이런 세공이 가능하다니! 대체 누가 이런 걸 만든 거요!"

"얼마쯤 받을 수 있지?"

"그, 글쎄 잘 모르겠소. 이런 건 차라리 경매를 통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이거 혹시 유물이오?"

펠젠도 유적이나 유물에 대해서는 제법 알고 있었다. 암시장에서 활동하려면 그 정도 지식과 정보는 필수였다. 하지만 그런 펠젠도 이 동전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잘됐군. 차라리 그게 추적이 더 어렵겠지? 이 테페룸괴보다는 말이야."

펠젠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오.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슈린 공작가에서 테페룸을 그냥 아무렇게나 방치했을 리 없소. 아마 기본적인 추적 마법은 걸려 있을 거요. 그러니 빨리 처분해 버리는 게 좋을 거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한다. 넌 그거나 처분하면 돼. 수수료는 3퍼센트다."

"그건 너무 짜지 않소!"

"싫으면 그만둬도 좋다."

제론의 스산한 눈빛이 후드 속에서 번득였다. 펠젠은 투덜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어쩔 수 없지. 그럼 2퍼센트는 목숨 값이라고 생각하겠소."

제론은 펠젠의 속셈을 대충 간파하고는 피식 웃었다. 도와줄 테니 살려 달라는 것이었다.

"좋아. 먼저 가서 준비하고 있어라. 곧 찾아갈 테니까."

펠젠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렇게 순순히 놓아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이 동전들을 들고 그냥 도망치면 어쩌려고 그냥 놔준단 말인가.

"어디에 숨든 찾아갈 수 있다. 그리고 죽일 수도 있지. 조금 전 네 심장에 마법 인장을 새겼다. 그게 뭔지 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알겠지?"

펠젠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표정을 감추고 자시고 할 생각도 안 들었다. 완전히 당한 셈 아닌가. 이제 앞으로 계속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이런 젠장! 대체 저놈은 뭐야?'

펠젠은 잠시 고민했다. 과연 심장에 정말로 마법 인장인지 뭔지가 새겨졌는지 믿어도 되는지 말이다. 그런 마법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안 가고 뭐하는 거지?"

제론의 말에 펠젠이 황급히 자리를 떴다. 생각해 보니 복잡하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제론을 따돌리고 암시장이 있는 도시에 도착해서 꽁꽁 숨어 있어 보면 된다. 만일 자신을 정확히 찾아오면 그 말을 믿고, 아니면 이 동전만 들고튀면 된다.

제론은 펠젠이 완전히 사라진 뒤, 아공간을 열었다. 그리고 바닥에 놓인 상자를 아공간에 넣었다. 아공간에는 여전히 많은 공간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테페룸괴에 걸린 추적 마법도 완벽히 차단되었다.

제론은 씨익 웃으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제 조금 전 펠젠의 심장에 새긴 마법 인장을 천천히 쫓아가면 된다. 시간은 아직 충분했다. 펠젠이 너무 멀리 떠나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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