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유적 왕복
이튿날부터 제론은 충실히 수업을 들었다. 기간트 학부 졸업반이었기에 대부분이 기간트 실습이었고, 또 유사시를 대비한 엔지니어링 수업과 이론 수업이 있었다.
검술이나 마법의 기초 같은 수업은 4년 차까지만 있었다. 수업 계획 자체가 오로지 기간트에 맞춰져 있었다.
졸업과 동시에 군대에 가야 하기에 곧바로 전력에 투입이 가능할 정도로 훈련을 시키는 목적도 분명히 있었다.
이는 마법이나 검술 학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거기에서 벗어난 건 유일하게 행정 학부밖에 없었다.
엔니지어링이나 이론 수업에서도 제론은 상당한 실력을 발휘했다. 태블릿의 힘이었다. 또한 마나 로드 확장과 마나 호흡법으로 인해 뇌가 더욱 활성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제론은 차근차근 실력을 쌓아 갔다. 그리고 기간트 실습의 대결을 통해 꾸준히 자유 시간을 만들어 갔다.
짧은 자유 시간은 기숙사에서 마나 호흡법과 검술 수련을 통해 보냈고, 조금 긴 자유 시간은 유적에서 2층의 클리어에 노력을 쏟았다.
그렇게 몇 달의 시간이 흘러갔다.
☆ ☆ ☆
파인트는 이를 갈며 눈앞에 서서 고개를 푹 숙인 남자 학생 하나를 노려봤다.
"아직도 아무 시도조차 안 하다니, 내 밑에 있기가 싫은 모양이야?"
"그, 그렇지 않습니다! 며, 며칠만, 며칠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번에는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그래? 뭐 계획하는 일이라도 있나? 내가 좀 도와줄까?"
파인트의 말에 바이넨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파인트 님께서 도와주신다면 무조건 성공해 보이겠습니다."
"그래, 그 방법이 뭔데?"
"내일 기간트 실습이 있지 않습니까?"
파인트가 고개를 끄덕이자, 바이넨이 눈을 번득이며 말을 이었다.
"그놈이 탈 기간트를 미리 손봐 놓겠습니다."
파인트가 눈을 크게 뜨고 바이넨을 바라봤다. 만일 그 일이 들키면 그냥 퇴학만으로 끝나기 어렵다. 아카데미의 기간트는 왕국 소유다. 함부로 손대다 걸리면 왕국법에 의거해 처벌받는다.
"들키면 어찌 되는지 알고 있겠지?"
"염려 마십시오. 그저 괜찮은 실력의 엔지니어 2명만 빌려 주시면 됩니다."
파인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잘해 봐라. 이번 일에 성공하면 향후 널 내 오른팔로 삼겠다."
"감사합니다!"
바이넨이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파인트는 그 모습을 보며 눈을 빛냈다.
"드디어 그놈에게 복수를 할 수 있겠군.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게 될 거야."
파인트가 키득거리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내일이 너무나 기다려졌다.
☆ ☆ ☆
제론은 가만히 앉아서 손가락에 낀 반지를 살폈다. 드디어 2층 수련이 다 끝났다. 그리고 2층 수련을 마무리하고 선물까지 얻었다.
2층의 선물은 놀랍게도 새로운 검술이었다. 제국 기사 검술이라는 이름을 확인하고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지 모른다. 드디어 고급 검술을 익히게 된 것이다.
카드를 통해 배웠기에 형이나 마나의 흐름은 모두 외웠다. 기초 검술보다 훨씬 복잡하고 길었다. 수련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무조건 해내야만 했다. 이 검술이 3층 수련의 열쇠가 될 테니까 말이다.
제론은 손가락에 낀 반지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드는 마나를 느끼며 미소 지었다. 반지는 여전히 마나의 양을 늘리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좋아. 그럼 가 볼까?"
오늘도 기간트 실습이 있는 날이었다. 제론은 지금까지 한 번도 기간트 대결에서 진 적이 없었다. 아카데미 학생의 수준으로 제론을 이기는 건 불가능했다.
그것은 교관들도 인정한 사실이었다. 교관들이 판단하기에 제론은 지금 당장 군대에 가도 베테랑 라이더와 비슷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제론은 항상 불리한 대결을 펼쳐야 했다. 최소 3기에서 많게는 5기의 상대와 동시에 대결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론은 언제나 승리했다.
제론은 곧장 기간트 실습장으로 향했다.
실습장에는 수많은 학생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또한 교관도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 교관은 제론을 보자마자 눈을 빛냈다.
제론은 그것을 확인하고는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히 뭔가가 있었다. 교관이 저런 눈빛을 할 때는 항상 슈린 공작가가 뒤에서 뭔가 더러운 지시를 내릴 때뿐이라는 걸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우리 아카데미의 에이스가 돌아왔군. 기념으로 대결 한번 하지?"
"하겠습니다."
제론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제론은 어제 유적에서 돌아왔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얻은 게 많았다. 그리고 지금 또 자유를 얻어 유적에 가면 3층을 공략할 수 있었다.
"오늘은 일대일로 한다. 괜찮겠지?"
교관의 말에 제론은 직감적으로 누가 자신과 싸우려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제론의 시선이 슬쩍 옆으로 돌아갔다. 파인트가 입가에 비웃음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순간 제론의 뇌리에 비상등이 하나 켜졌다. 파인트의 실력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파인트는 절대 자신을 이길 수 없었다. 한데도 저런 표정을 지었다는 건 뭔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설마?'
제론은 눈살을 찌푸렸다. 만일 자신의 예상이 맞다면 파인트는 정말로 구제 불능의 쓰레기였다.
"개인 기체가 없으니 저기 있는 실바를 타도록."
교관이 손가락으로 실바 하나를 가리켰다. 제론이 얼른 움직이지 않자, 불안해진 교관이 다시 재촉했다.
"어서 안 타고 뭐하나?"
"상대가 누굽니까?"
그제야 교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너무 급한 나머지 상대도 제대로 지정하지 않고 기간트에 제론을 밀어 넣은 꼴이 되었다. 멀찍이서 파인트의 얼굴이 구겨지는 모습에 화들짝 놀란 교관이 얼른 말을 이었다.
"오늘 네 상대는 파인트다. 그러니 어서 저 실바에 타거라. 그리고 너, 너, 너."
교관은 몇몇 학생을 지목한 다음 각자 한 대씩 실바에 탑승시켰다. 다음 대결을 준비한다는 명목이었는데, 그 수작이 너무 눈에 빤히 보여 제론은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좋아. 다 뛰어넘어 주지. 얼마든지 덤벼라.'
제론은 자신에게 배당된 실바로 다가가 훌쩍 뛰어올랐다.
탁탁탁!
무릎과 허리를 밟고 조종석에 탑승한 제론은 차분히 앉아 마나를 돌렸다.
'어떤 식으로 장난을 쳤는지 먼저 알아야 해.'
제론은 해치를 닫지 않은 채 지그시 눈을 감고 감각의 날을 세웠다. 마나 로드를 통해 힘차게 휘도는 마나가 제론의 감각을 크게 확장시켰다.
솔직히 2층 수련을 클리어하지 못했다면 이런 시도를 할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확장된 마나 로드의 힘은 엄청났다.
제론이 한 일은 마나 코어를 통해 자신의 마나를 흘려 막힌 부분이 없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기간트 역시 마나 코어에서 마법진을 통해 마나를 온몸에 흘려 작동시키기 때문에 그 방식이 이상한 점을 알아내기가 가장 쉬웠다.
물론 이 방법은 제론이 아니면 아무도 쓸 수 없는 방법이었다. 실제로는 엔지니어들이 마나 로드 테스터를 통해 마법을 써야만 알아낼 수 있었다.
'거기로군.'
제론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어렸다.
해치가 닫히고 제론의 실바가 작동했다.
파인트는 그 모습을 보고는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나와 자신의 베르를 소환했다.
"내 선더볼트로 네놈을 박살 내 주마."
베르와 실바가 마주 섰다. 먼저 움직인 건 당연히 베르였다. 파인트는 제론의 약점을 잘 알고 있기에 망설임이 없었다.
제론은 움직이지 않고 파인트가 달려오는 모습을 살폈다. 제론이 탄 실바의 발목에 문제가 있었기에 함부로 움직여선 안 된다. 지금 움직이다가는 혼자 비틀거리다가 무너지고 말 것이다.
'기회는 단 한 번!'
제론의 감각이 점점 예민해졌다. 그렇게 최고조에 달했을 때, 파인트가 몸통 박치기를 해 왔다. 피하기 어렵게 만들 속셈이었다.
'한 번만 움직여라.'
파인트는 당황할 제론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후웅!
제론이 파인트의 몸통 박치기를 가볍게 피했다. 워낙 타이밍이 좋아 파인트가 어떻게 손을 쓸 수도 없었다.
텅! 꽈앙!
파인트는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른 채 세상이 빙글 도는 걸 느꼈다.
'뭐, 뭐지?'
쿠우우우웅!
파인트의 베르가 바닥에 뻗었다. 허공에서 한 바퀴 돌며 바닥에 떨어졌기에 그 충격이 엄청났다. 베르의 탑승자 보호 시스템으로도 그 충격을 모두 해소시키지 못할 정도였다.
파인트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거대한 검이 그의 목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안 돼!"
콰득!
파인트의 외침이 무색하게 실바의 검이 그의 목을 파고들었다. 베르가 기동을 멈췄다. 또 패배한 것이다.
'이건 말도 안 돼! 바이넨 이 멍청한 놈!'
이는 필시 바이넨이 제대로 일 처리를 못 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발목이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는 실바 따위에게 자신이 이런 꼴을 당했을 리가 없었다.
실바는 베르의 가슴에 거의 주저앉다시피 해서 목을 찌른 검에 의지해 균형을 잡고 있었다.
푸쉭!
그대로 해치가 열리며 안에서 제론이 뛰어내렸다.
그 모습을 본 파인트가 당황해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냐! 어서 비키지 못해!"
실바가 베르의 해치를 다리로 누르고 있었기에 파인트가 베르에서 내릴 수 없었다.
제론의 말도 안 되는 행동에 구경하던 모든 학생이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봤다. 그리고 교관이 눈살을 한껏 찌푸리며 제론에게 다가갔다.
"이게 무슨 짓이냐! 대결하는 상대를 저런 식으로 대하다니!"
제론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실바가 고장 났습니다. 발목이 움직이지 않아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발목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제론의 말에 교관의 머릿속으로 오만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제야 오늘 자신에게 파인트가 요구한 그 말도 안 되는 것들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파악했다.
'설마설마했는데!'
이건 문제가 심각하다. 그리고 그 심각한 문제에 자신도 연루가 되었다. 이쯤에서 그냥 덮는 것이 신상에 이로웠다.
"그, 그렇군. 다들 뭐 하나! 어서 저 위에 있는 실바를 치우지 않고!"
교관의 당황한 외침에 미리 실바에 탑승해서 대기하던 학생들이 베르의 해치를 무릎으로 디딘 채 간신히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실바를 옆으로 들어 옮겼다.
"그럼 고장 난 실바로 베르를 이긴 거야?"
누군가의 놀란 외침이 그제야 실습장에 울렸다. 다들 그 말에 정신을 차리고 제론을 바라봤다.
제론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교관에게 오늘 대결에 걸린 자유 시간을 확인하고는 실습장을 떠나고 있었다. 오늘 대결로 보름의 자유 시간을 얻었다. 교관이 미리 행정부에 걸어 놓은 자유 시간이었다.
물론 그 자유 시간은 파인트에게 주기 위해 설정한 선물이었다. 이제는 제론의 것이 되었지만 말이다.
학생들은 선망이 가득한 눈으로 제론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몇몇 학생이 조용히 실습장을 빠져나갔다.
실습장을 떠나는 제론의 뒤를 다급히 따르는 사람이 있었다. 바이스였다. 바이스는 빠르게 달려 제론을 따라잡았다. 경험상, 제론을 아무리 불러 봐야 대답도 듣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거의 제론이 나가자마자 쫓아갔기에 바이스는 금세 제론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선배님, 저랑 정보를 교환하죠."
제론이 고개를 돌려 바이스를 쳐다봤다.
바이스는 그제야 자신을 돌아본 제론의 모습에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난번 함께 발견한 마법진, 거의 분석이 끝났습니다. 그걸 몽땅 알려 드리죠."
지난번 함께 발견한 마법진이라면 베르의 강판 내부에 새겨진 마법진을 뜻한다. 아마 상당한 비밀일 텐데 그걸 알려 주겠다는 걸 보면 그 이상을 뜯어낼 자신이 있다는 뜻이리라.
제론도 그걸 짐작하기에 대꾸하지 않고 그저 바이스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물론 걸음은 멈추지 않은 채로 말이다.
"좀 멈춰서 얘기하면 안 되겠습니까?"
바이스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능글능글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하지만 제론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쓴웃음을 지었다.
"어쩔 수 없지요. 전, 아니, 우리 가문은 선배님의 능력을 사고 싶습니다."
"능력?"
"예. 라이더로서의 능력 말입니다."
제론이 피식 웃었다. 가당치 않은 말이었다. 고작 아카데미 5년 차 학생의 능력을 사겠다는 말을 누가 믿겠는가. 그것도 레늄 왕국 최고의 마법사들을 보유한 말레피 후작가에서 말이다.
"장난에 장단 맞춰 줄 시간 없다."
제론은 바이스의 말을 냉정히 자르고는 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바이스는 당황하며 제론의 뒤를 따라갔다.
"서, 선배님! 잠시만 멈춰 보시죠! 절대 장난 아닙니다! 제가 왜 선배님께 장난을 하겠습니까!"
바이스의 외침에는 진심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제론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거대한 권력을 가진 자들은 이런 식으로 유희 거리를 찾곤 한다.
제론도 백작이다. 또한 에어스트 가문은 예전에 레늄 왕국에서도 제법 잘 나가는 축에 속했다. 그런 걸 좋아하지 않아 해 본 적은 없지만 다들 그런 식으로 논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저 진심조차 거짓으로 만들 수 있는 자들이라는 걸 이젠 너무나 잘 알지.'
권력을 가진 자들은 정치를 한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정치가들은 자신의 감정을 자유자재로 속일 수 있어야 한다.
"선배님! 너무 스스로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시는 것 아닙니까?"
제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이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카데미 교관들이 하는 말이나 정보 계통에서 돌아다니는 선배님에 대한 평가를 아직 모르십니까?"
제론은 그제야 걸음을 멈췄다. 확실히 그건 궁금했다.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알아야 앞으로 어떤 식으로 계획을 세울지 정하기가 편할 테니까 말이다.
"이제야 좀 관심을 보여 주시는군요."
바이스가 빙긋 웃었다.
"100년 만에 나타난 천재라고 불립니다."
바이스는 제론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한데 오늘 보니 그 평가가 아마 수정될 것 같군요. 아마 기간트 역사상 최고의 천재라고 바뀔 것 같습니다."
제론은 무심하게 돌아섰다. 하지만 속으로는 그 일이 자신에게 어떤 작용을 할지 맹렬히 생각했다.
'나쁘지 않을 수도 있어.'
지금 제론은 슈린 공작가의 암수를 피해야 할 입장이었다. 지금이야 아카데미 안에 있으니 비교적 안전하지만 이대로라면 근처에 외출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놈들이 날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아카데미에 들어오면서 본 익스퍼트들이 떠올랐다. 아마 아무런 준비 없이 아카데미를 벗어나면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
"선배님! 그냥 가시면 어떻게 하십니까?"
바이스가 다급히 따라붙었다. 하지만 제론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거절이다."
"예?"
바이스는 이렇게 단호한 대답을 들을 줄은 몰랐기에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시 제론을 따라갔다.
"선배님!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가문은 그 어떤 지원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발굴형 기간트도 내 드리겠습니다! 그저 재능을 나눠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발굴형 기간트라는 말에 잠시 멈칫했지만 제론은 결국 대답 없이 걸음을 옮겼다.
말레피 후작가에 잠시 몸을 의탁하는 것도 방법이다. 하지만 그래선 계속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내가 주도해야 돼.'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 유적의 힘을 모두 얻을 수 있다. 극히 일부만 확인했음에도 유적은 정말로 대단했다. 만일 그 유적의 힘을 모두 얻는다면 어떤 일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확실해. 그 안에 기간트도 있다.'
제론은 기간트의 존재에 대해 확신했다. 아마 일반적인 발굴형 기간트보다도 훨씬 더 대단한 기체일 것이다.
"선배님! 정말로 거절하시는 겁니까? 정말로요? 이거 흔치 않은 기회라는 거 잘 아시잖습니까! 선배님!"
바이스가 아무리 외쳐도 제론은 걸음을 멈추지도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기숙사로 쑥 들어가 버렸다.
바이스는 멍하니 서서 제론이 사라진 기숙사 입구를 바라봤다. 설마 이렇게 매몰차게 거절당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바이스는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뭐, 어쩔 수 없지."
이번에 강판 속에 새겨진 마법진을 발견하는 바람에 가문에 큰 공헌을 했다. 제론을 포섭하려던 건 그 보상의 일환이었다.
결과적으로 강판 속의 마법진은 베르의 모든 강판을 뜯어 조사한 결과 목에 하나, 마나 코어를 보호하는 장갑에 하나, 그리고 조종석을 덮는 해치에 하나, 이렇게 총 3개가 있었다.
그것도 크기가 작아 찾기도 쉽지 않은 마법진이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운이 좋았다. 하필이면 딱 마법진이 있는 위치를 가르는 바람에 드러났으니 말이다.
어쨌든 그로 인해 말레피 후작가에서는 새로운 마법진을 3개나 얻을 수 있었고, 그 마법진들을 연구하면서 상당한 마법 이론을 재정립하는 중이었다.
바이스는 그 공으로 후계자의 자리에 한 걸음 다가갔다. 물론 아직도 진짜 후계자가 되려면 갈 길이 멀었지만 지금은 확실히 다른 후보들에 비해 한 계단 위에 올라선 건 확실했다.
'함께 가면 좋다고 생각했는데 아쉽군.'
제론에 대한 평가는 진짜였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100년 만에 나타난 천재건 역사상 처음 나타난 천재건 그게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전쟁은 라이더 혼자서 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천재 마법사나 전략가가 훨씬 더 가치 있지. 아니면 엔지니어라든가.'
하지만 미련이 남았다.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는 건 정말로 쉽지 않다. 바이스는 제론이 들어간 기숙사의 문을 바라보며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이것 참 곤란하네."
바이스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오늘의 일로 제론에게 밉보이지 않기를 바랐다. 아직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언젠가 또 기회가 올 테니까.
☆ ☆ ☆
"으아아아아!"
콰앙! 와장창!
파인트는 있는 대로 성질을 부리며 방 안의 모든 집기를 닥치는 대로 부쉈다.
"허억! 허억! 이 버러지 같은 놈! 감히, 감히!"
파인트는 치미는 분노에 얼굴이 시뻘게졌다. 남아 있는 집기가 없어서 더 부수지 못하니 화가 더 치밀었다.
이번에 벌어진 일로 인해 후계자의 자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냥 실바도 아니고 고장 난 실바에 패배했으니 입이 10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크윽! 젠장!"
다들 얼마나 자신을 우습게 여기겠는가. 파인트가 아카데미에 온 것은 기간트 조종 실력을 키우기 위함도, 또 뭔가를 공부하기 위함도 아니었다.
사람을 얻기 위해서 왔다. 한데 그 일조차 흔들리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제론 때문이었다.
게다가 제론에게 접근하는 바이스와 세나도 눈에 거슬렸다. 둘 모두 함부로 건드리기 껄끄러운 가문의 일원이라 더 짜증이 났다.
"내가 얻어야 할 자들인데!"
세나 폰 벨루스와 바이스 폰 말레피. 향후 파인트가 슈린 공작가를 이어받았을 때 가장 필요한 인물들이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세나를 아내로 맞아 벨루스 백작가를 아우르고, 바이스를 측근으로 받아들여 말레피 후작가의 힘을 얻는 것이었다.
한데 그 원대한 목표가 고작 제론 때문에 흔들리고 있으니 너무나 화가 치밀었다.
"뭔가 수를 내야 해. 뭔가……."
파인트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 ☆ ☆
제론은 자유 시간을 얻는 대련 덕분에 보름의 시간을 더 벌었다. 그리고 이번 보름 동안 어떻게든 최대한 3층에 대해 파악할 계획이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기숙사 안에서 유적 안으로 이동한 제론은 곧장 유적 3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새로운 수련을 시작했다.
☆ ☆ ☆
"송구스럽습니다."
샤텐의 말에 슈린 공작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샤텐의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사텐은 그저 그런 익스퍼트와는 달랐다.
"또 아카데미에서 사라졌단 말이지?"
샤텐은 고개만 푹 숙인 채 대답하지 못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이런 일이 벌어지니 정말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슈린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들어라. 아무래도 뭔가가 좀 이상하다."
샤텐은 슈린 공작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사실 그 역시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미스트 드래곤의 능력은 레늄 왕국의 그 어떤 비밀 조직보다 뛰어났다. 샤텐은 그렇게 자부했다.
한데 그런 미스트 드래곤을 두 번이나 엿 먹였다. 이는 그냥 단순히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놈에게 조력자가 붙은 게 틀림없다."
샤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도 그렇게 생각했기에 나름대로 조사를 했다. 하지만 여전히 조력자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최근 그놈에게 접근한 게 말레피 후작가의 자식이라고 했지? 벨루스 백작가의 여식도 꾸준히 접근했고."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두 가문은 아닙니다."
"아니라고?"
"이미 조사를 마쳤습니다. 하지만 아카데미 쪽에 개입한 정황이 전혀 없습니다."
슈린 공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눈을 빛내며 말했다.
"왕궁 쪽을 감시해라."
샤텐이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어 슈린 공작을 바라봤다.
"뭘 그리 놀라느냐. 우리 가문의 힘이 커지는 걸 가장 꺼려하는 곳이 어디겠느냐?"
공작의 말에 샤텐은 수긍했다는 듯 다시 고개를 숙였다.
확실히 슈린 공작가의 힘이 너무 커지는 바람에 왕궁 쪽에서도 은밀한 압력과 감시가 들어오고 있었다. 이는 당연한 정치적 행보였다.
그런 왕궁이니 슈린 공작가와 악감정을 가진 제론의 배후가 되어 슈린 공작가를 견제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힘은 적게 들이면서 큰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작전 아닌가.
'실제로 우리 가문에 악감정이 남은 자들을 비밀스러운 세력이 끌어들이고 있다는 정보도 있으니까.'
그 비밀스러운 집단 뒤에 왕궁이 있을 거라는 사실은 쉽게 유추가 가능했다. 슈린 공작은 벌써 그들의 존재를 파악했다. 지금은 열매가 영글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가장 큰 타격을 줄 수 있어야 돼.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그리고 왕궁이 알아서 그런 놈들을 찾아주면 오히려 일이 수월해져서 좋지.'
슈린 공작의 입가에 미소가 맴돌았다.
"가 봐라. 그리고 그놈의 종적도 계속 추적해 봐라."
"예. 명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슈린 공작은 샤텐이 사라지자, 자리에 앉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노크 소리와 함께 한 사내가 들어왔다.
"왔나? 거기 앉게."
슈린 공작의 집무실로 들어선 사내는 슈린 공작 일파의 인물인 깁스 남작이었다.
"어떻게 됐나?"
"라쿠스의 설계도를 구했습니다."
깁스 남작의 말에 슈린 공작이 크게 기뻐하며 벌떡 일어났다.
"그게 정말인가!"
"예. 성공했습니다."
깁스 남작은 품에서 두꺼운 책 1권을 꺼냈다. 그것이 바로 크라테르의 발전형, 라쿠스의 설계도였다.
"용케 구했군. 정말 고생 많았네."
슈린 공작은 책을 받아 한 장 한 장 찬찬히 살펴봤다. 과연 기간트의 설계도답게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출력이 1.9라니 대단하군."
"세부적인 부분도 많이 바뀌어서 움직임도 매끄럽고 속도도 개선한 모델입니다."
"대단하군. 훌륭해!"
사실 설계도를 본다고 슈린 공작이 뭘 알겠는가. 그저 추진한 일이 제대로 성공해 기쁠 따름이었다. 슈린 공작은 설계도를 다시 깁스 남작에게 내밀었다.
"자네가 한번 추진해 보게. 우리도 드디어 기간트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군. 그것도 최신형 기간트를 말이야."
깁스 남작은 공손히 설계도를 받았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깁스 남작은 설계도를 품에 갈무리한 다음 슈린 공작의 안색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공작님, 걱정거리라도 있으십니까?"
"그렇게 보였나? 요즘 좀 신경 쓰이는 놈이 있어서."
"공작님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다니 나름대로 대단한 놈이로군요.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한번 나서 보겠습니다."
"자네가?"
슈린 공작은 눈을 빛내며 깁스 남작을 바라봤다. 깁스 남작은 확실히 유능했다. 추진력도 대단했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과를 만들어 내는 능력도 굉장했다.
'이 사람이라면 뭔가 다른 수를 만들어 낼지도…….'
슈린 공작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는 입을 열었다.
"에어스트 가문에 대해서 좀 아나?"
"얼마 전 망한 가문 아닙니까. 예전에 그렇게 잘 나가던 가문이었는데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또한 깁스 남작은 에어스트 가문이 왜 망했는지도 알고 있다. 물론 슈린 공작이 얘기해 주지는 않았지만 그쯤이야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는 딱 거기까지 듣고 슈린 공작의 고민이 뭔지 알아차렸다. 하지만 여전히 모르는 척 귀를 기울였다.
"에어스트 백작의 아들이 지금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는데, 나한테 가당치 않은 복수심을 불태우고 있는 모양일세."
"안타깝군요. 뭔가를 오해한 모양입니다."
슈린 공작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어스트 가문과 합작으로 유적 하나를 발굴했는데, 에어스트 백작이 거기서 죽었네. 그놈은 내가 백작을 죽였다고 믿는 모양이더군."
"저런. 공작님께서 왜 이렇게 상심이 크신지 충분히 알겠습니다. 한데 고작 그런 아이 하나 때문에 근심하시는 건 아닐 듯합니다만……."
"맞네. 문제는……."
슈린 공작은 잠시 뜸을 들였다. 지금 이 얘기를 해도 될지 고민하는 것이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깁스 남작은 끝까지 함께 가야 할 사람이었다. 하니 감추는 부분이 적을수록 좋다.
"그놈을 처리할 수가 없다는 점일세."
"아카데미에서 나오게 한 다음 처리하면 간단하지 않습니까?"
아카데미에서 일을 벌이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깁스 남작도 잘 알고 있다. 레늄 왕국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곳이 바로 켄트 아카데미였다.
아카데미가 왕국의 근간이 된다고 국왕이 직접 천명할 정도였다. 그러니 그곳에서 처리했다간 일이 커진다. 쥐새끼 한 마리 잡자고 성을 불태울 수는 없지 않은가.
"그게 내 고민일세."
슈린 공작은 제론의 행적을 제대로 추적하지 못한 사실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했다. 깁스 남작의 눈이 번득였다.
"이상한 일이군요. 그 정도로 철저히 행적을 감추려면 최소한 왕궁 정도는 배경으로 두고 있어야 하는데, 왕궁에서는 전혀 그런 기미가 없거든요."
"없다고? 확신하나?"
"예. 요즘 왕궁은 그런 곳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습니다."
깁스 남작은 그렇게 말하며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슈린 공작은 그제야 상황을 이해하고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하면 대체 뭐란 말인가?"
깁스 남작은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공작님, 아직 아카데미도 졸업하지 못한 애송이일 뿐입니다."
"하지만 왠지 신경이 쓰인다네. 그냥 둘 수가 없어."
"하면 조금 위험한 지역으로 그냥 보내 버리고 잊으시는 건 어떻습니까?"
"위험한 지역?"
"조만간 전쟁이 조금 확대될 것 같습니다."
슈린 공작이 눈을 번득였다.
"전쟁이 확대된다고? 한데 내가 왜 그걸 모르고 있지?"
"벨룸 왕국으로부터 나온 정보이기 때문입니다."
슈린 공작의 눈이 커다래졌다.
"벨룸 왕국이 뭔가를 꾸미고 있군?"
"체른산을 노리고 있습니다."
"체른산?"
"그곳에 유적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물론 정확한 정보는 아닙니다만, 그들은 확신하고 있습니다."
슈린 공작은 깁스 남작의 입가에 매달린 위험한 미소를 발견하고는 표정을 굳혔다.
"설마 자네?"
"아무튼 벨룸 왕국이 대대적인 공세를 펼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전에 격전지로 보내 버리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놈은 아직 아카데미에……."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습니다. 허락만 해 주시면 제가 나서 보겠습니다."
깁스 남작의 자신만만한 말과 표정에 슈린 공작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그런 애송이 하나에 집착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긴 했다.
"좋네. 한번 추진해 보게. 이번에도 좋은 결과 기대하겠네."
"맡겨 주십시오."
깁스 남작이 공손히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슈린 공작은 의자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으며 등을 기댔다.
생각해 보면 아카데미에서 나오기만 하면 나중에라도 처리할 수 있다. 아카데미는 지금 제론의 가장 큰 울타리였다.
'그래. 울타리를 먼저 없애야 하는 거였어.'
슈린 공작은 그렇게 미련을 털어 냈다. 군대에 가서 죽으면 잘 된 일이고, 설사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그 뒤에는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다.
"깁스 남작, 눈여겨봐야겠어."
슈린 공작은 의미심장한 말을 중얼거리며 더욱 깊이 의자에 기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