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217)

Chapter 4 수련의 시작

제론은 두근두근 뛰는 심장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유적을 둘러봤다.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동공 벽에 기묘한 문양이 가득했고, 천장은 투명했다.

"당장 시작하고 싶지만 일단 참아야겠지."

제론은 휴식부터 취했다. 단숨에 이동했기에 피곤할 건 없었지만 그래도 지하 1층으로 가기 위해선 몸을 최상의 상태로 만들어야만 했다.

쉬면서 제론은 마나 호흡법을 했다. 이곳에서 하는 마나 호흡법은 그 효율이 최고조에 달한다. 마나가 온몸을 샤워하듯 쓰다듬어 주는 느낌은 그야말로 끝내줬다.

"후우우."

제론은 숨을 길게 토해 내며 눈을 빛냈다. 그리고 아공간에서 검을 꺼냈다. 유적에서 지급한 수련검이었다. 여기서야 수련검이지만 만일 이걸 가지고 밖에 내보이면 한바탕 난리가 날 것이다.

"이런 좋은 검이 고작 수련검이라니."

테페룸이 50퍼센트는 함유된 검이었다. 밖에서는 이런 검을 아예 만들지도 못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익스퍼트들이 마나를 담기 위해 쓰는 검에 테페룸이 0.1퍼센트 들어간다. 만일 이 검의 존재가 대장장이나 마법사에게 알려진다면 세상이 발칵 뒤집힐 것이다.

제론은 기대감 어린 눈으로 숨을 골랐다. 이 유적이 몇 층으로 이루어졌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각 층에서의 수련을 마무리하면 한 가지씩 선물을 받을 수 있다는 건 안다.

과연 그 선물이 무엇일지 너무나 궁금하고 기대됐다. 기본적으로 지급되는 물품이 이럴진대 선물이라고 칭해지는 것들은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자. 시작해 볼까? 내려간다!"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미리 소환한 아네모스를 팔찌에 넣었다.

지잉!

제론의 머리 위에서 강한 빛이 쏟아졌다. 그리고 제론의 모습이 그대로 사라졌다.

빛도 제론도 사라진 유적 안에 나직한 음성이 맴돌았다.

―제1단계 감각 수련 시작합니다.

제론은 텅 빈 공간 안에 서서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손에 든 검을 언제라도 휘두를 수 있도록 준비를 했다.

새하얀 공간이었다. 끝도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저 사방이 지독할 정도로 새하얀 색으로 칠해져 있는 것뿐이었다. 온통 하얗기만 해서 벽, 바닥, 천장이 아예 구분 가지 않았다.

퍽!

제론은 뒤통수에 강렬한 통증을 느꼈다. 고개가 휘청 꺾일 정도로 강력한 충격이었다.

다급히 몸을 돌려 검을 겨눴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제론의 눈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퍽!

이번에는 옆구리였다. 지독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제론은 이를 악물고 그것을 참아 냈다. 분명히 뭔가가 날아와 자신을 때렸다. 한데 그것이 보이지 않았다.

'이게 수련인가?'

무슨 수련인지는 명백했다. 어딘가에서 날아오는 보이지 않는 걸 피하거나 막으면 되는 것이다.

"좋아. 해 보자!"

제론은 이를 악물고 사방을 주시했다. 그리고 이마에 화끈한 통증을 받았다.

"크윽!"

그렇게 눈을 크게 뜨고 있었는데 아예 날아오는 게 보이지도 않았다. 순간 어이가 없었다.

'이걸 대체 어떻게 막으라는 거지?'

하지만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퍽! 퍽! 퍽!

옆구리, 가슴, 허벅지에 격통이 일었다.

제론은 곧장 한 바퀴 구르며 벌떡 튀어 오르며 사방으로 검을 휘둘렀다. 강력한 마나를 머금은 검이 사방을 휘저었다.

하지만 그런 제론의 행동을 비웃기라도 하듯 복부에서 강렬한 충격이 밀려왔다.

"쿨럭!"

호흡하는 와중에 얻어맞아 기침이 일었다. 그리고 그렇게 잠시 주저앉은 순간 5대를 더 맞았다.

제론은 식은땀을 흘렸다. 하지만 결코 기가 죽지는 않았다. 수련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상, 돌파구가 있을 것이다. 또한 이걸 해결하고 나면 능력이 얼마나 상승하겠는가.

제론은 결연한 눈으로 사방을 주시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의 싸움이 점점 길어져 갔다.

"허억! 허억!"

제론은 양팔을 벌리고 바닥에 누워 숨을 헐떡였다. 지하 1층의 수련은 지독했다. 그리고 어떤 수련인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감각 수련이라니."

아직 수련을 완벽히 끝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 추세대로라면 기한 내에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을 듯했다.

제론은 마나 호흡법을 통해 몸과 마음을 추슬렀다. 그리고 다시 지하로 내려갔다.

"내려간다!"

순식간에 새하얀 공간에 도착한 제론은 즉시 옆으로 한 걸음 움직였다. 제론이 서 있던 곳에 무언가가 지나갔다.

이제는 제론도 그 무언가에 대한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새하얀 공이었다. 주변과 완벽히 똑같은 색이라서 움직여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감각 수련의 정체는 그것이었다. 제론은 이제 어느 곳에서 공이 오더라도 그것을 쳐 내거나 피할 수 있었다. 물론 100퍼센트는 아니었다. 한꺼번에 여러 개의 공이 쏟아지면 그걸 모두 피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지금!'

제론의 감각에 5개의 공이 느껴졌다. 제론은 검을 휘둘러 3개의 공을 쳐 냈다. 그리고 앞으로 한 걸음 움직여 2개의 공을 피해 냈다.

퍽!

"큭! 6개였군."

5개인 줄 알았는데 6개였다. 이렇게 수가 늘어나면 완벽히 파악할 수가 없었다. 꼭 놓치는 것이 생겨났다. 그래도 5개까지는 그럭저럭 파악이 가능했다.

'좋아. 수련에 흠뻑 빠져 보자.'

제론은 이제 이 감각 수련을 즐기고 있었다. 처음에는 공에 맞으면 고통스럽고 화가 났지만 이젠 그 고통조차 즐거웠다. 하루하루 강해지는 게 몸으로 느껴졌다.

이 모든 것이 마나 호흡법 덕분이었다. 그로 인해 감각이 예민해졌고, 몸놀림이 민첩해졌으며, 머리도 좋아졌고, 힘도 세졌다.

마나 호흡법이 아니었다면 이 감각 수련에 이렇게 빨리 적응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즐기다 보니 집중도 잘됐다. 제론은 사방에서 날아오는 공을 막고 피하며 수련을 즐겼다. 제론의 집중력이 점점 높아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제론은 갑자기 날아오는 새하얀 공들이 똑똑히 보이기 시작했다. 주변 색과 똑같아서 알아볼 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였다.

눈에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뒤통수로 날아오는 공도 보였다. 제론은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감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

커다란 희열이 물밀 듯 밀려왔다. 수십 개의 공이 제론을 향해 날아왔다. 제론은 공들이 자신의 감각권 안에 들어오는 것을 명확히 느꼈다.

텅! 텅! 텅! 텅!

한 발도 움직이지 않고 검을 휘둘러 그 공을 모조리 쳐 냈다. 공들은 미묘한 속도 차이가 있었기에 완전히 동시에 도착하지는 않았다.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순서가 정해진 것이다.

한데 제론은 그 순서를 아주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감각 수련의 목표로구나!'

제론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또다시 공이 날아왔다. 눈을 감고 있음에도 그것들을 정확히 쳐 낼 수가 있었다. 어마어마한 성취감이 제론의 온몸을 휘감았다.

―제1단계 감각 수련을 종료합니다.

갑자기 들려온 말에 제론이 눈을 떴다. 그러자 눈앞에 가느다란 반지 하나가 떠 있었다. 푸른색 반지였는데, 워낙 가늘어 마치 실로 만든 것 같았다.

제론은 반지를 쥐었다. 이게 바로 이번 층에서 받을 수 있는 선물인 모양이었다.

실인 줄 알았는데 막상 쥐어 보니 단단했다. 제론은 망설임 없이 반지를 손가락에 끼었다. 반지는 제론의 손가락에 들어간 순간 모습을 감췄다. 마치 살 속으로 스며든 것 같았다.

―로비로 이동합니다.

순식간에 눈앞 광경이 달라졌다. 어느새 제론은 로비 한가운데 서 있었다. 진짜 수련이 끝난 것이다.

제론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오늘 갑자기 수련이 끝나는 바람에 시간이 많이 남았다.

"2층 수련도 조금 해 볼 수 있겠군."

제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이리저리 살폈다. 오른손 새끼손가락에 반지를 끼었는데 보이지도 않았다. 반지를 낀 느낌도 없었다.

"밑도 끝도 없이 반지만 달랑 주면 어쩌자는 거야? 쓰임새를 알려 줘야지."

제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태블릿을 꺼냈다.

이번에 유적에 와서 새로 얻은 지식 하나가 바로 검색이었다. 태블릿의 그 수많은 서적을 몽땅 읽을 필요가 없었다. 태블릿에는 검색 기능이 있었다.

뭐든 알고 싶은 키워드를 입력하면 그에 관한 정보를 알아서 뽑아 준다.

제론은 일단 반지에 대해 검색을 해 봤다. 하지만 검색이 쉽지 않았다. 반지만으로 검색을 했더니 결과가 수천 가지나 떠올랐다. 그걸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지 않은가.

몇 가지 방법을 달리해서 알아봤지만 찾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제론은 포기했다. 어차피 끼고 있으면 결국 알게 될 것이다. 쓸모없는 물건을 선물이랍시고 주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제론은 일단 마나 호흡법을 통해 몸을 한 번 점검했다. 몸 상태는 더할 나위 없이 최고였다.

"좋아. 그럼 2층으로 가 볼까? 다음 단계로!"

아네모스가 나타나 제론의 팔찌로 스며들었고, 제론의 몸이 그대로 사라졌다. 그리고 예의 목소리가 울렸다.

―제2단계 마나 로드 확장 수련 시작합니다.

제론은 한 바퀴 돌며 2층을 자세히 살폈다. 1층과는 많이 달랐다. 공간 자체가 훨씬 좁았다.

"그냥 작은 방이네?"

아무것도 없이 사방은 물론 천장과 바닥에도 빽빽하게 마법진이 새겨져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참으로 작은 방이었다.

"여기서 대체 뭘 하라는 걸까?"

제론이 중얼거리기 무섭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중앙에 편히 앉으십시오.

제론은 시키는 대로 했다. 어차피 자신에게 해가 될 일은 시키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유적의 목소리를 완전히 신뢰했다.

―마나 호흡법을 시작하십시오.

제론은 즉시 마나 호흡법을 시작했다. 방에 꽉 들어찬 마나가 제론의 몸으로 급격히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제론의 새끼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은은히 빛났다.

"크윽!"

제론은 이제야 자신이 선물로 받은 반지가 어떤 힘을 가졌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반지는 마나의 보고였다.

어마어마한 마나가 제론의 몸을 중심으로 회오리쳤다. 그리고 그 대부분이 제론의 모공을 통해 몸으로 스며들었다.

제론은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마치 누군가 강제로 입을 꽉 틀어막은 것 같았다.

방 안의 마법진이 모두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마법의 작용이 분명했다.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고, 입을 열 수도 없었다. 제론은 필사적으로 마나 호흡법에 매달렸다. 그것만이 살 길이었다.

온몸의 혈관을 갈기갈기 찢는 듯했다. 너무 많은 마나가 유입되는 바람에 마나 로드가 상처를 입은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법진의 빛이 꺼졌다. 그리고 제론이 바닥에 털썩 누웠다.

"허억! 허억! 크으으윽!"

힘들었다. 그리고 지독하게 아팠다. 온몸 아프지 않은 곳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정수리 끝에서 발끝까지 아팠다.

화아악!

천장의 마법진이 빛났다. 그리고 그 빛이 고스란히 제론의 온몸으로 쏟아졌다.

"크윽!"

제론은 마치 온몸에 개미가 기어가는 듯한 간지러움에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건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했다. 그 찰나의 순간이 지나자 온몸이 편해졌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제론이 눈을 크게 떴다. 통증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설마 치료된 건가? 믿을 수가 없군."

―로비로 이동합니다.

제론은 멍한 표정으로 유적 한가운데 섰다. 그렇게 서서 마나 호흡법을 통해 몸을 점검했다.

"헉!"

제론은 하마터면 마나 폭주에 빠질 뻔했다. 물론 유적에 있는 마스터 보호 시스템이 그렇게 놔두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뭐, 뭐지?"

마나가 너무 거침없이 흘렀다. 게다가 몸에 내재된 마나도 엄청나게 늘었다. 제론은 이번 수련의 의미를 깨달았다.

"이거 정말 기대되는데?"

제론은 눈을 빛내며 잠잘 준비를 했다. 어느새 로비 한쪽에 침대가 나타났다. 그 푹신함과 아늑함을 아는 제론은 빙긋 웃었다. 하루가 끝났다. 더없이 소중한 하루였다.

그리고 내일도 계속될 하루였다.

☆ ☆ ☆

"자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언제부터 우리 미스트 드래곤이 이렇게 허술해졌지?"

슈린 공작은 눈앞에 엎드린 사내를 노려봤다. 온통 검은 옷과 복면으로 도배를 하다시피 한 사내였는데, 그 존재감이 워낙 흐릿해 똑바로 보지 않으면 없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송구스럽습니다."

사내는 미스트 드래곤의 수장이었다. 미스트 드래곤은 슈린 공작가가 비밀리에 키운 조직이었다.

요인 암살이나 감시, 그리고 정보 수집을 위해 만든 조직으로 그 어떤 조직보다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곳이었다.

한데 그런 조직이 고작 아카데미 학생 하나를 제대로 감시하지 못해 놓쳤다고 하니 짜증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뭐가 문젠가?"

"아카데미에 숨어 들어가 직접 감시할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슈린 공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확실히 그건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었다.

아카데미는 레늄 왕국의 역대 국왕들이 상당히 신경 쓰는 곳이었다. 당연히 경비도 남달랐고, 곳곳에 깔린 마법도 상당했다.

그리고 아카데미의 교사들이나 경비들의 실력도 뛰어났다. 아무리 미스트 드래곤이라 하더라도 그런 아카데미에 숨어 들어가 지속적으로 감시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저희의 존재를 드러내도 좋다고 하시면 어떻게든 해 보겠습니다만……."

"그건 안 된다."

슈린 공작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쥐새끼 하나 잡자고 성을 불태울 수는 없지 않은가. 미스트 드래곤은 그렇게 쉽게 정체를 드러내선 안 되는 조직이었다.

"하면 아카데미 밖에서 그놈을 감시했나?"

"예. 설사 아카데미의 담을 넘어서 빠져나갔더라도 확인할 수 있다고 자신했습니다."

슈린 공작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한데 대체 왜 그놈이 감쪽같이 사라졌단 말인가. 그놈이 그 정도로 뛰어난 놈인가? 켈리온도 그러더니……."

켈리온이 실패한 거야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미스트 드래곤이 실패한 건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어쩌면 아카데미 안에 숨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카데미 안에?"

왠지 그럴듯했다. 아카데미에서 아직 나오지 않았다면 밖에서 아무리 감시한다 하더라도 발견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일단 좀 더 지켜보지. 물러가도록."

사내는 고개를 푹 숙인 후 연기처럼 흩어졌다.

슈린 공작은 그 모습을 보며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미스트 드래곤의 능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내가 그놈에게 너무 집착하는 건가?"

슈린 공작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티끌만 한 빈틈도 남겨선 안 돼. 물론 그놈이 무슨 짓을 하건 다 막아 낼 수 있지만, 그게 빈틈이 되면 곤란하지. 처리하는 게 맞아."

슈린 공작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한 달의 자유 시간이 이렇게 단호히 손을 쓸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아마 제론은 더 이상 아카데미를 나서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졸업과 동시에 군부로 간다. 일단 그곳에 가면 슈린 공작가의 영향력이 급격히 약해진다. 간접적인 방법밖에 쓸 수 없는 것이다.

"이번에 처리해야 돼. 무슨 일이 있어도."

슈린 공작은 그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파인트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이번에 기간트의 수리비 때문에 용돈이 대폭 삭감된 것이다.

게다가 아버지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았다.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생기면 가문의 후계자 자리에서 내치겠다는 말까지 듣는 치욕을 겪었다.

"이게 다 그놈 때문이야."

제론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베르의 수리가 완벽하게 되지 않았다. 부서진 부위가 너무 치명적이었다.

아직 파인트의 몸이 채 회복되지 않았기에 테스트를 해 보진 않았지만 동화율이 좀 낮아질 거라는 보고를 이미 받았다.

"안 그래도 조종이 힘든데 동화율까지 낮아지면 어쩌란 거야!"

동화율은 당연히 타고나는 센스가 가장 중요했다. 하지만 훈련을 통해서도 충분히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기체의 성능이 따르지 않으면 분명한 한계가 존재했다.

파인트는 센스가 부족했고, 훈련도 등한시하는 편이었다. 당연히 동화율이 낮았다. 그 낮은 동화율을 기체의 성능으로 커버했는데, 이제 그걸 바랄 수 없게 된 것이다.

"젠장. 이게 다 제론 그놈 때문이야."

베르는 실바에 비해 기체 자체가 가지는 동화율이 뛰어났다. 그런데도 제론의 실바에 패배했으니 얼마나 치욕스러운가.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놈을 어떻게 하지?"

파인트는 이를 갈며 제론을 떠올렸다. 자신을 이긴 대가로 한 달간의 자유를 얻어 아카데미를 떠났다고 했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났다.

아직 시간은 많았다. 한 달이 되려면 보름이나 더 남았다. 그동안 열심히 몸을 회복시키고 복수할 방법을 찾으면 된다.

새삼 몸이 엉망인 사실이 떠올라 또 짜증이 났다. 이것도 다 제론 때문이다.

파인트는 그렇게 복수심을 다지고 또 다졌다.

☆ ☆ ☆

제론은 2층의 마나 로드 확장 수련을 돌파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결국 시간 안에 그것을 모두 끝마칠 수 없었다.

마나 로드 확장 수련은 재능이 있다고 더 잘 되고 그런 게 아니라 오로지 시간이 답이었다. 제론은 먹고 자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수련에 시간을 쏟았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하루빨리 작위를 받고 싶구나."

비록 황무지였지만 제론에게 있어서는 그 어떤 영지보다 소중한 장소였다. 그리고 초고대 문명의 지식을 얻으면 이런 황무지라도 쓸 만하게 만들 방법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제론의 근거지가 될 것이다. 그리고 에어스트 가문이 새로이 비상할 바탕이 될 것이다. 그런 소중한 땅을 허무하게 빼앗길 수는 없었다.

그러기 위해선 아카데미에 복귀해야만 한다.

"오늘 가지 않으면 늦겠지?"

제론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유적에서 나갔다. 그리고 푸르투나를 불러 하늘을 날아 멀리 떨어진 도시로 향했다.

그곳에서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해 아카데미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아마 자신이 어디서 뭘 했는지 누구도 모를 것이다.

☆ ☆ ☆

대로를 당당히 걸어 켄트 아카데미의 정문으로 향하는 제론의 모습을 멀리 떨어진 곳에서 황당한 눈으로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제론이 워낙 연달아 텔레포트를 이용했기에 그 행적이 미처 드러나기도 전에 아카데미에 도착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미스트 드래곤의 수장인 샤텐은 결국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어떤 방법으로 우리 눈을 피해 아카데미 밖으로 나간 거지?'

샤텐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미스트 드래곤의 감시망은 철저했다. 설사 소드 마스터라도 감시망을 뚫을 수는 있을지언정 들키지 않고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했다.

한데 그 불가능한 일을 고작 아카데미의 학생이 해냈다. 아직 익스퍼트조차 되지 못한 애송이가 말이다.

'익스퍼트는 절대 아니야.'

익스퍼트가 되면 알아볼 수 있다. 온몸에 꽉 찬 마나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같은 익스퍼트 이상이라야 한다.

샤텐은 심각하게 고민했다. 지금 이 순간 달려들어서 제론을 죽여 버리는 일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결국 포기했다.

'여기서 죽여 버리면 일이 커져.'

수도의 한복판, 그것도 아카데미 앞에서 백작이 살해당하는 사건이다. 그 파장이 얼마나 크겠는가.

슈린 공작가의 힘으로 무마시키는 데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유적지에서 죽었다면 다양한 방식으로 증거를 조작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영악한 놈.'

제론도 그것을 알기에 이렇게 대로를 활보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은 환한 대낮이었다. 보는 사람도 많았다. 일을 당할 확률이 현저히 낮은 것이다.

아카데미 정문에 도착한 제론은 슬쩍 고개를 돌려 샤텐을 쳐다봤다.

샤텐은 제론과 눈이 마주친 순간 깜짝 놀랐다.

'설마!'

설마 자신의 정체를 들킨 건 아닌가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지 않은가.

'아무튼 골치 아픈 놈인 건 확실하군.'

샤텐은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제론을 감시하고 또 제거할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 ☆ ☆

정문으로 들어서는 제론은 살짝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번 한 달간의 수련으로 얼마나 큰 발전을 했는지 조금 전 확실히 느꼈다.

"아마 꽤 오래전부터 이 근방에서 날 감시하고 있었겠지? 익스퍼트가 할 일 없이 저렇게 숨어 있을 리 없으니까."

예전에는 아예 있는지조차 몰랐다. 아마 그냥 정문을 통해 나갔다면 분명히 봉변을 당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그들의 경지가 어렴풋이 보였다. 감각 수련의 성과이리라. 그들의 몸에서 미약하게 흘러나오는 마나를 확실히 감지했다.

아마 샤텐이 이 사실을 알면 기겁을 할 것이다.

미스트 드래곤은 외부로 흘러나가는 마나를 차단하는 수련을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상대가 익스퍼트를 넘어서는 경지에 올랐다 하더라도 샤텐이 익스퍼트라는 사실을 결코 알 수 없었다.

한데 제론은 그것을 명확히 감지한 것이다.

"더 조심해야겠어."

제대로 된 기반을 다지기 전까지, 또 슈린 공작가에 확실한 복수를 하기 전까지는 무조건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만 한다. 지금 제론은 살얼음판에 서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표정이 살짝 굳어진 제론은 서둘러 행정부로 향했다. 자신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야만 한다. 아카데미의 모든 일은 서류로 처리되기에 제대로 증거를 남기지 않으면 나중에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었다.

아카데미를 관통해 걸어가니 수많은 학생의 눈에 띄었다. 그리고 제론을 발견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수군거렸다.

"제론 선배다."

"실바로 베르를 이겼다며?"

"나, 그거 봤어."

"정말? 어땠어? 그렇게 굉장했어?"

"글쎄. 잘 모르겠어. 꼭 제론 선배가 잘했다기보다는……."

"파인트 선배가 너무 엉망이었나 보지?"

"혼자 비틀거리다가 뒤로 자빠졌으니까."

"하하하. 볼만했겠네."

"그보다 제론 선배가 진짜 제대로 대련하는 모습을 한 번 봤으면 좋겠어."

"나도 꼭 보고 싶어."

"조만간 분명히 기회가 있을 테니까 기다려 봐."

"그래?"

"당연하지. 요즘 제론 선배 덕분에 기간트 학부에 대결 열풍이 불고 있잖아."

"대결 열풍?"

"짧게는 하루, 길게는 열흘의 자유 시간을 보상으로 대결을 하는 거지."

"정말? 그거 굉장한데?"

"그렇지? 그러니 기대하라고. 제론 선배가 그런 보상을 놓칠 리 없으니까. 솔직히 제론 선배는 기간트 조종에 관해서는 더 이상 배울 것도 없잖아?"

"그야 그렇지. 솔직히 교관도 실바로 베르를 이길 수는 없을 테니까."

"뭐, 상대가 파인트 선배라면 얘기가 좀 달라질지도 모르지."

"큭큭큭큭. 맞아."

제론은 다른 학생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빛냈다.

'그렇단 말이지?'

이건 정말로 굉장한 기회였다. 이런 대결 열풍이 언제 가라앉을지 모르지만 할 수 있을 때 어떻게든 자유 시간을 얻어야만 한다.

'솔직히 아카데미에서는 더 이상 배울 게 없는 건 맞지.'

제론에게는 태블릿이 있다. 제론이 보기에는 세상 모든 지식이 그 안에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실제로는 그렇지 않겠지만, 최소한 아카데미에서 배울 수 있는 양보다는 많을 것이다.

게다가 라이더로서의 실력도 아카데미에서는 더 이상 키우기 어렵다. 이젠 실전을 통해 실력을 쌓아 가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군대에 가게 되면 얼마든지 실전을 경험할 수 있겠지.'

아마 가장 위험한 곳으로 가게 될 확률이 높다. 슈린 공작가가 제법 신경을 쓸 테니 말이다.

제론은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의 머릿속에서 앞으로 어떤 식으로 할지 계획이 차곡차곡 세워졌다.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제론은 일단 문을 잠그고 마나 호흡법을 시작했다.

텔레포트를 연달아 이용하는 건 상당히 피곤한 일이었다. 그래서 보통은 한두 번 이용한 다음 하루를 쉬는 방식으로 여정을 계획한다. 한데 제론은 시간이 모자라 하루 만에 모든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했다.

피로를 푸는 데에는 마나 호흡법이 최고였다. 심지어는 잠을 자는 것보다도 훨씬 효과적이었다.

제론은 마나 호흡법을 하며 새끼손가락에 낀 반지가 여전히 도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에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유적에 있을 때처럼 마나 로드 확장 수련을 할 수는 없겠지만 아랫배와 심장에 더욱 많은 마나를 모을 수 있으니 예전보다 더 빨리 강해지지 않겠는가.

'물론 아직 시작도 못했지만.'

유적이 요구하는 진짜 수련의 시작은 일단 제론이 소드 마스터가 되어야만 한다. 초고대 문명의 기준으로 보면 익스퍼트가 되어야 하고 말이다.

태블릿을 통해 알아본 초고대 문명의 기사들은 정말로 강했다. 소드 마스터를 뛰어넘은 강자들까지 있고, 그 강자들마저 넘어선 기사가 있다고 하니 얼마나 대단한 경지인지 솔직히 상상도 가지 않았다.

제론은 유적에서 꾸준히 수련하면 자신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물론 죽음을 각오하고 지옥 같은 수련을 참아내야 하지만 말이다.

'난 할 수 있다. 분명히 그렇게 되고 말 것이다.'

제론은 이를 악물고 의지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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