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217)

Chapter 3 베르급 기간트

쿵! 쿵! 쿵!

지축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9미터짜리 거인이 검을 든 채로 빠르게 걸어갔다.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쓰는 범용 기간트 실바였다.

그 앞에 기간트 한 기가 오연하게 서 있었다. 모양부터 아카데미의 범용 기간트와는 완전히 달랐고, 크기도 13미터에 달했다. 파인트의 새 기체인 베르였다.

후웅!

실바의 검이 베르를 향해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하지만 베르는 전혀 피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손 하나를 들어 올렸을 뿐이었다.

콰앙!

엄청난 소리와 함께 거검이 베르의 손에 박혔다. 놀랍게도 베르의 손은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고대의 기술이 집약되어 만들어진 기간트다웠다.

베르의 발이 가볍게 움직였다. 무거운 기간트의 다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빨랐다.

꽈앙!

실바의 배가 움푹 들어갔다. 그리고 실바는 뒤로 그대로 날아가더니 바닥에 널브러졌다.

쿠구궁!

베르가 오만한 자세로 주변을 슥 둘러봤다. 라이더와 일체화되었기에 높은 시선으로 구경하는 학생들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제론은 그 모습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저래서야 검을 쓸 줄도 모르는 아이에게 전설의 명검을 쥐어 준 꼴이다. 제론이 보기에는 기체의 힘에 휘둘려 제대로 컨트롤도 못하고 있었다.

"베르는 베르네요. 저렇게 부드러운 움직임이라니."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세나가 지저귀듯 말을 걸었다. 제론 주변에 있던 남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향했다. 그들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물론 제론은 그런 상황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아카데미의 다른 학생들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이 없었고, 지금의 수업에도 큰 관심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제론은 더 이상 기간트 수업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이미 가르치는 교관들을 넘어서는 실력을 가졌기에 배울 것도 없었다.

사실 제론은 이미 아카데미에 들어오기 전부터 교관을 능가하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아카데미에서 4년을 보내며 더욱 완숙해져 이젠 그의 실력을 제대로 파악하는 교관들조차 없을 정도였다.

제론은 갑자기 시선이 지나치게 많이 쏟아지는 걸 느끼고는 고개를 들었다. 베르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손을 들고 손가락을 까딱였다. 나오라는 도발이었다.

제론은 또 한 번 피식 웃었다. 이런 바보 같은 도발에 응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물론 교관의 지시가 떨어지면 얘기가 달라진다. 지금처럼 말이다.

"제론이 한번 해 보겠느냐?"

제론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교관의 말에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승자에게는 향후 한 달간 모든 수업에서 빠질 수 있는 특권을 주지."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말도 안 되는 조건이었다. 수업을 빠지면 나중에 시험에서 불이익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수업 시간에 배우는 내용은 대충 혼자서 공부한다고 쉽게 따라갈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기간트 운용에 관한 실기는 실력이 있으면 어떻게든 되겠지만 아카데미에서 배우는 과목은 그걸 제외하고도 6개나 된다.

하지만 교관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제론에게 시선을 주며 말을 이었다.

"한 달 동안 마음껏 외출도 가능하게 해 주마."

그제야 제론은 교관이 모종의 압력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다른 학생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현재 제론이 상대해야 할 사람은 파인트 폰 슈린, 슈린 공작가의 후계자였다. 그라면 한 달의 난데없는 방학을 정말로 알차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다들 결코 제론이 파인트를 이길 수 없을 거라고 믿었다. 제론이 새로운 기체를 꺼내지 않는 한 말이다.

제론은 잠시 고민했다. 만일 자신이 이기더라도 아카데미를 나가서 다른 일을 하는 건 쉽지 않았다. 아마 아카데미라는 보호막이 없으면 슈린 공작이 기다렸다는 듯이 일을 저지를 게 분명했다.

아마 슈린 공작은 그 모든 상황을 다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물론 가장 큰 비중을 둔 것은 파인트가 제론을 무참히 밟아 버리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충분한 가치가 있어.'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교관은 환하게 웃었다. 이로써 슈린 공작가로부터 적지 않은 보상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개인 기간트를 쓸 건가?"

의례적인 질문에 제론이 고개를 저었다.

"없다는 거 잘 아시잖습니까. 그리고……."

제론은 슬쩍 고개를 돌려 여전히 오연한 자세로 서서 이쪽을 바라보는 베르를 쳐다봤다.

"실바로 충분합니다."

제론의 말은 나직했지만 다들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더구나 베르에 타고 있는 파인트는 누구보다 더 선명히 들었다.

"흥! 내 선더볼트가 방금 싸우는 모습을 보고도 그따위 소리가 나온다 이거지? 아마 각오 단단히 해야 할 거다."

파인트의 목소리는 베르 특유의 음성 전달 시스템에 의해 제론 근방에만 울렸다. 그 소리를 들은 건 제론과 교관, 그리고 세나 정도가 전부였다.

제론은 베르를 똑바로 보며 피식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벌써 이름까지 지었나? 실력에 비해 이름이 너무 거창한 거 아냐?"

파인트는 분통이 터졌다. 당장이라도 제론을 밟아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꾹 참았다. 아무리 슈린 공작가의 영향력이 커졌다 해도 아카데미 안에서 살인을 하는 것은, 그것도 이름뿐이긴 하지만 백작을 죽인다는 건 돌이키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사고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목격자도 많다. 이런 대결을 통해 실수를 가장하면 얼마든지 상대를 죽일 수도 있었다. 보통은 어렵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실바로 베르를 상대하는데 충분하다고? 아직 매운맛을 못 본 거지. 고작 출력 0.8짜리로 2.8의 출력을 가진 베르를 이기겠다고? 미친놈!'

출력이 3배 차이 난다는 것은 한 번에 낼 수 있는 힘과 속도 모두 그 정도 차이가 난다는 뜻이다.

기체의 무게나 다른 몇 가지 조건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긴 하겠지만, 출력의 차이만큼 불리해진다고 보면 딱 맞다.

파인트는 그렇기에 승리를 자신했다. 자신이 무조건 이기는 싸움이었다. 문제는 얼마나 상대를 처참하게 깨부수느냐, 또 얼마나 치욕적인 상황을 만들어 주느냐, 그리고 어떻게 사고를 위장해 죽이느냐 하는 것뿐이었다.

"시작하죠. 저걸 타면 됩니까?"

제론은 한쪽에 서 있는 실바를 향해 걸어갔다. 아카데미의 기간트들은 아공간 마법을 완전히 없앤 기체들이다. 굳이 아공간을 쓸 필요가 없기에 아공간에 소모되는 마나 스톤을 제거한 기체였다.

그로 인해 미세하게 출력이 떨어졌다. 하지만 그것의 차이를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론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제론은 실바에 올라탔다. 훌쩍 뛰어 무릎을 디디고, 다시 허리를 밟고 점프해 가슴의 조종석에 탑승했다. 그 날렵한 모습에 다들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우와! 선배님! 대단해요!"

세나가 가장 열광적인 반응을 보여 줬다. 그녀는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제론의 모습을 바라봤다.

보통은 탑승 지지대가 있어 그것을 타고 탑승하게 되어 있다. 당연히 아카데미에서만 가능한 방법이었다. 실제로는 기간트가 주인이 타기 쉽도록 알아서 몸을 낮춰 준다. 다만 그것은 주인이 정해져야만 가능한 방법이었다.

파인트는 해치를 닫으며 자신을 향해 또 피식 웃은 제론을 보며 이를 갈았다.

'단숨에 뭉개 주마.'

파인트는 교관을 쳐다봤다. 얼른 시작 신호를 보내라는 압박이었다. 제론이 채 준비가 끝나기 전에 달려들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어차피 승리가 확정된 거라면 정정당당히 싸워야 한다. 그래야 뒷말이 나오지 않는다. 더구나 여기서 제론이 죽는다면 더더욱 빈틈이 없어야만 한다.

"준비는 끝났나?"

교관의 질문에 제론이 탄 실바가 고개를 끄덕였다. 교관은 즉시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시작!"

그와 동시에 베르가 달려들었다.

쿵쿵쿵쿵!

기간트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돌진이었다. 물론 아카데미 내에서의 일이었다. 구경하던 학생들 모두가 입을 벌렸다. 그들은 모두 베르의 위용에 압도되었다.

부웅!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베르의 거검이 실바의 정수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엄청나게 빨랐다.

꽈앙!

흙먼지가 비산했다. 베르의 거검이 바닥을 친 것이다.

파인트는 당황했다. 설마 그 일격을 이렇게 간단히 피할 줄은 몰랐다.

제론의 실바는 그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몸을 옆으로 빙글 돌린 것뿐이었다. 실바의 눈앞으로 베르의 거검이 닿을 듯 말 듯 지나갔다.

파인트는 당황했지만 그래도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다. 베르는 빠르다. 이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은 운이 좋아 피했지만 그 운이 2번, 3번 반복될 수는 없을 것이다.

베르가 빠르게 검을 회수했다. 그리고 그 순간 실바의 손끝이 베르의 옆구리를 찔렀다.

콰직!

"헉!"

파인트는 당황했다. 검을 회수하다가 옆구리를 찔리는 바람에 균형이 흐트러졌다. 고작 0.8짜리 출력으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균형이 흐트러진 순간, 이미 결과는 나온 거나 다름없었다.

실바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한 발을 앞으로 쭉 뻗었다. 그 발은 베르의 다리 아래를 단단히 받쳤다. 실바의 손바닥이 균형을 잃은 베르의 가슴을 툭 밀었다.

꽈앙!

베르가 허무할 정도로 간단히 바닥에 쓰러졌다. 무게가 무게인 만큼 그 충격이 상당했다. 물론 라이더는 전혀 충격을 받지 않았다. 베르 특유의 충격 완화 시스템 덕분이었다.

그것을 아는 제론이 바닥에 쓰러진 베르를 가만둘 리 없었다.

실바가 처음으로 검을 휘둘렀다.

꽈드득!

실바의 검이 베르의 목을 찔렀다. 검은 너무나 간단히 목의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곳을 파고들었다.

빠지직!

검이 파고든 부위에서 뇌전이 뱀처럼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대로 베르의 움직임이 멈췄다.

다들 멍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너무나 현실감 없는 모습이었다. 어떻게 실바가 베르를 이길 수 있단 말인가. 아니, 그냥 이긴 게 아니었다. 제론의 실바는 파인트의 베르를 완전히 가지고 놀다시피 했다.

다들 놀라거나 말거나 제론은 실바를 움직여 검을 거칠게 뽑았다.

콰창!

검이 뽑히며 목에 난 실금들이 부서져 나갔다.

실바는 몇 발 걸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처음 시작한 자리에서 채 세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베르를 처리한 것이다.

푸쉭!

해치가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제론이 훌쩍 뛰어나왔다.

탁탁탁!

실바의 허리와 무릎을 밟고 올라갈 때의 역순으로 바닥에 착지한 제론은 무심한 표정으로 교관에게 걸어갔다.

"정확한 시간을 정해 주십시오."

"응? 그, 그래. 알겠다. 내, 내가 행정부를 통해 처리를 하지."

"오늘 수업은 어떻게 합니까?"

"아, 그…… 돌아가도 좋다."

교관의 말에 제론은 꾸벅 인사를 하고는 연무장을 나갔다.

그 뒷모습을 다들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어찌나 충격이 컸던지 그들은 목의 마나 로드가 부서지는 바람에 해치가 자동으로 열리지 않아 아직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파인트의 존재를 까맣게 잊었다.

파인트는 정신을 잃은 채 조종석에 널브러졌다. 그 충격으로 사흘 동안 꼼짝도 못하고 의무실에 누워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파인트의 베르는 목 부위를 지나는 중요한 마나 로드와 마법진이 철저히 파괴되는 바람에 어마어마한 수리비가 들어갔다.

"조금 아쉽군."

사실 아예 마나 코어를 박살 내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실력 차이가 난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기체의 성능이 너무 달랐다. 아마 다른 학생들이었다면 같은 상황에 베르의 목을 그렇게 뚫어 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나마 수리가 쉽지 않은 부위를 날려 버렸으니 그걸로 위안을 삼아야지."

발굴형 기간트는 그렇지 않아도 수리가 쉽지 않다. 고대의 기술이 잔뜩 들어가 있기 때문에 완벽히 이해하고 수리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목은 마나 코어 다음으로 어려운 부위였다.

마나 코어의 경우 부서지면 수리가 아예 불가능했다. 그 정도로 고대와 현대의 기술적, 마법적 격차가 컸다.

그리고 일반 양산형 기간트의 경우와 달리 고대 유적에서 찾아낸 발굴형의 경우, 가장 분석이 안 된 부위가 바로 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뭐든 어려웠다. 하다못해 목의 강판 하나를 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워낙 많은 마법진이 뒤엉켜 있기에 그걸 복원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웠다.

"일단 한 달의 시간을 벌었으니 정말로 큰 도움이 되겠어."

한 달의 시간을 어떻게 쓸 건지는 이미 정했다. 한 달 동안 유적에 가 있을 생각이었다. 이번에는 올 때 날아오지 않고 적당한 곳에서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할 계획이었다.

"최소 3주는 수련할 수 있겠군."

제론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드디어 본격적으로 유적이 제공하는 수련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도 유적에서 뭘 더 받을 수 있을지 모두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나오기 전, 딱 하나 알아낸 사실이 있었다.

유적은 단층이 아니었다. 지하로 훨씬 더 많은 층이 존재하고, 제론은 지하 1층으로 내려갈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이번에 유적으로 가면 얼마나 더 성장할 수 있을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었다.

"일단 행정부에 가서 확인을 한 다음 곧장 움직여야지."

사실 이런 식으로 학생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도 아카데미 교육의 일환이었다. 아주 드물게 뛰어난 학생이나 배경이 훌륭한 학생에게 이런 식으로 새로운 경험을 할 기회를 줘 왔다.

하지만 한 달은 처음이었다. 파인트에게 갈 기회를 제론이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제론이 나가도 상관은 없었다. 슈린 공작가 입장에서는 제론을 해치울 두 번째 기회를 만든 셈이었으니까.

제론은 그 모든 것을 대충 꿰고 있었기에 담담했다. 어차피 슈린 공작가는 자신에게 그 어떤 위해도 가하지 못한다. 설마 이곳에서 유적까지 단번에 텔레포트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할 테니까.

차분히 머릿속으로 상황을 하나하나 짚으며 기숙사를 나선 제론은 행정부를 향해 걸어갔다.

반쯤 갔을 때, 누군가 제론을 부르며 달려왔다.

"선배님!"

제론은 돌아보지 않았다.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세나였다. 예전보다 더 관심을 가지고 다가오는 것 같아서 조금 귀찮았다.

"선배님! 같이 가요!"

제론은 그래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세나는 달려서 제론 옆에 따라붙었다.

"하악! 하악! 정말 너무해요. 어떻게 제가 그리도 애타게 부르는데 대꾸도 안 하실 수 있어요?"

제론은 그런 세나를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앞을 보고 걸음을 조금 더 서둘렀다.

세나는 황당한 눈으로 그런 제론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빙긋 웃으며 눈을 빛냈다.

"선배님! 같이 가자니까요?"

사실 세나가 이렇게까지 다가가려 애썼던 남자는 한 명도 없었다. 또한 이 정도로 그녀를 대수롭지 않게 대한 남자도 없었다.

세나의 미모는 그 자체로 강력한 무기였다. 더구나 세나는 어떻게 하면 남자들이 좋아하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선배니임! 같이 가요!"

세나의 목소리에 약간의 애교가 더 담겼다. 하지만 제론에게 그 어떤 반응도 끌어내지 못했다.

세나도 사실 제론의 반응을 끌어내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또한 호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언제까지 이럴 생각이지?"

제론의 물음에 세나가 환한 표정을 지었다. 제론의 표정이나 말투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반응을 해 주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좋았다.

"선배님이 절 봐 주실 때까지요."

제론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내겐 그럴 여유가 없다."

제론의 차가운 말에도 세나는 전혀 물러나지 않았다.

"그럼 여유가 있으시면 절 봐 주신다는 뜻인가요?"

제론은 세나의 당돌한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고개만 끄덕이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세나는 제론의 옆에 있을 자격이 충분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제론만을 바라봤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 더 힘들었다. 자칫 세나의 앞길을 제론이 막아 버릴 수도 있었다.

제론은 말없이 돌아섰다. 그리고 서둘러 행정부로 향했다.

세나는 그런 제론의 뒷모습을 가만히 서서 바라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제론을 만난 이후 처음으로 가능성을 확인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제론의 표정은 굳은 채로 펴지지 않았다. 세나는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신경 쓰였다.

"후우."

제론은 심호흡을 통해 마음을 정리하고 머리를 비웠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다. 오직 졸업과 유적에 모든 힘을 쏟아야 할 때였다.

아카데미는 그저 거쳐 가는 길목에 불과했다. 이곳을 졸업하지 않으면 순조롭게 백작 위를 받을 수 없기에 참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아카데미를 졸업하지 않아도 작위를 물려받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슈린 공작가가 문제였다.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든 그 작은 흠집을 크게 비틀어 벌릴 것이다.

그렇기에 이렇게 합법적으로 생겨난 한 달의 휴가는 꿀물처럼 달콤했다. 제론은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한창 행정부로 가는 도중, 제론은 의외의 광경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이지?'

기간트 연습장 한가운데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복장만으로 단숨에 알 수 있었다. 기간트 엔지지어들과 마법사들이었다.

"거기! 조심해! 그렇지! 부서진 강판을 뜯어내다가 다른 마법진을 손상시키면 곤란해!"

"그쪽! 마법진을 준비해!"

기술자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였고, 마법사들이 저마다 마법을 발휘해 강판에 마법진을 새기고 있었다. 조금의 흐트러짐도 용납이 안 되는 것이 마법진이기에 그들은 온 신경을 집중했다.

제론은 그 광경을 보며 피식 웃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조금 커졌군."

연무장에는 파인트의 기간트인 베르가 누워 있었고, 베르의 부서진 목을 수리하기 위한 인력들이 그곳에 모여 정신없이 움직이는 중이었다.

제론은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굳이 저기서 수리를 한다는 건 아공간 마법이 망가졌다는 뜻인데…… 그럼 목에 있는 마법진들 중 하나가 아공간 마법과 연결된 건가?"

"아니죠, 선배님. 오너 각인에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죠."

제론은 힐끗 고개를 돌려 옆에 선 사내를 쳐다봤다. 옷차림을 보니 3년 차 학생이었다. 그리고 기간트 학부생이었다. 하지만 기간트 라이더가 되기에는 몸이 너무 허약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제론 선배님. 전 바이스 폰 말레피라고 합니다. 기간트 학부 3년 차 학생입니다. 참고로 전 라이더를 목표로 하지 않고 엔지니어를 목표로 합니다."

안경 속에서 바이스의 눈이 반짝였다. 제론은 그 눈빛을 무심한 눈으로 쳐다보고는 다시 시선을 기간트에게로 돌렸다.

"제 말에 동의하시는 겁니까?"

바이스는 집요하게 물었다. 하지만 제론은 더 이상 그와 대화나 나누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한번 가서 직접 보시겠습니까?"

제론은 다시 행정부로 가려다가 그 말에 멈칫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바이스를 쳐다봤다.

바이스가 씨익 웃으며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이래 봬도 배경이 제법 튼튼합니다. 저만 따라오시죠."

바이스는 당당하게 베르를 향해 걸어갔다. 제론은 잠시 그 모습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따라갔다. 이런 기회를 굳이 놓칠 필요가 없었다.

'태블릿을 꺼내야 하나?'

만일 태블릿을 쓸 수 있다면 눈에 보이는 모든 마법진을 복사할 수 있을 것이다.

태블릿 안에는 마법 이론에 관한 서적이 상당히 많으니 그것들을 이용하면 분석도 가능하리라. 초고대 문명의 마도 지식은 그 이후 어떤 시대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방대하고 깊었다. 또 상당히 대중적이었다.

'검술이나 마나 호흡법은 폐쇄적인데 마법은 다 공개했다니 특이하기도 하지.'

하지만 그랬기에 그런 고도의 문명을 이뤘는지도 모른다. 제론은 그런 생각을 하며 걸어갔다. 태블릿을 꺼내는 건 일단 포기했다. 지금 쓰기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태블릿 말고 마법진을 복사해 두는 방법은 없나?'

태블릿이 가장 간편한 방법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아네모스."

휘류루루루룽.

제론은 일단 바람의 정령을 불렀다. 뭘 하든 아네모스가 필요했다. 이건 마도 물품에 초기 에너지를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일종의 스위치였다.

혹시라도 정령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유적의 마법진을 통해 계약을 마쳐 코드를 부여받은 정령은 오로지 계약자의 눈에만 보인다.

아네모스가 팔찌로 스며들었다. 제론은 팔찌의 아공간을 열었다. 투명한 물건들이 허공에 휙휙 떠올랐다.

예전에는 이것들이 진짜 허공에 떠 있는 줄 알았지만 이젠 그저 망막에 비치는 현상이라는 걸 안다. 즉, 이것 역시 누구도 볼 수 없는 것이다.

제론은 그중에서 은색 카드 뭉치를 꺼냈다. 순수한 마나의 결정으로 만든 카드였다. 당연히 특별한 마법적 처리를 거쳤기에 허무하게 흩어지지는 않는다.

제론은 아공간을 연 채로 걸어갔다. 주변에 있던 엔지니어들과 마법사들이 못마땅한 눈으로 노려봤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다시 일에 열중했다.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것이다.

제론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이스를 쳐다봤다. 배경이 있다고 하더니 확실히 대단한 배경을 가진 모양이었다.

'가만, 말레피라고 했지?'

제론은 그제야 말레피가 어떤 가문인지 떠올랐다. 권력을 위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문이 아니었기에 금방 떠오르지 않은 것이다. 말레피 가문은 레늄 왕국의 마법사들 위에 군림하는 가문이었다.

'그러니 이런 일이 가능하지.'

말레피 가문에서는 지금 신형 기간트를 연구 중이었다. 그리고 그 연구에 어떻게든 참여해 보고자 하는 마법사와 엔지니어가 줄을 이었다.

이곳에 있는 마법사와 엔지니어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무조건 말레피 가문의 일원인 바이스에게 잘 보여야 하는 입장이었다.

덕분에 바이스는 아주 자세히 베르를 살펴볼 수 있었다. 바이스가 보고 싶은 것은 부서진 베르의 목 부위였다. 이런 건 쉽게 구경할 기회가 없었다.

"호오. 이렇게 강판 속에도 마법진이 숨겨져 있었군. 이러니 제대로 비밀을 밝혀내지 못했지."

부서진 강판 틈으로 망가진 마법진이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이번에 여기 온 목적은 충분히 달성했으리라. 베르가 비록 귀중한 기체이긴 하지만 말레피 가문이 힘을 쓰면 못 구할 것도 없었다.

아마 조만간 베르 한 기가 조각조각 해체될 것이다. 강판까지도 말이다.

제론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깨닫고 서둘러 말레피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카드를 들어 올렸다. 어느새 카드는 투명해져서 아무도 볼 수 없는 상태로 변해 있었다.

카드의 용도는 원하는 곳을 그대로 그림처럼 복사하는 것이었다. 사실 제론은 이것이 거의 쓸모없다고 여겼다. 태블릿에도 그런 기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카드를 써 보니 그게 아니라는 걸 금세 깨달았다.

투명한 카드에 마법진이 새겨졌다. 그 큰 마법진이 축소되어 카드 1장에 담겼다. 제론은 카드에 마법진이 새겨지는 족족 아공간에 넣었다.

아무도 제론이 마법진을 복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제론은 그렇게 카드 한 뭉치를 다 써서 마법진을 복사했다.

놀라운 건 겉으로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마법진들도 완벽하게 복사를 했다는 점이었다. 몰랐던 카드의 효능이었다.

"선배님, 슬슬 가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어느새 바이스가 다가와 제론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바이스는 마치 제론에게 지금 뭘 하고 있느냐고 묻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눈은 호기심으로 강하게 빛났다.

"가자."

제론은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런 제론의 뒷모습을 바이스가 뚫어져라 쳐다봤다. 바이스는 잠시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제론의 뒤를 따라갔다.

"선배님,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제론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말해 주지 않아도 곧 알게 된다. 행정부에 거의 도착했으니까.

"행정부? 여긴 무슨 일로…… 설마 자퇴라도 하실 생각이십니까?"

바이스가 깜짝 놀라 물었다. 그도 나름 정보력을 갖추고 있기에 제론이 처한 상황을 제법 자세히 알고 있었다.

최근 영지를 팔았다는 것도, 또 돈만 먹는 땅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만 바로 어제 일로 한 달간의 자유 시간을 받았다는 건 미처 몰랐다.

그렇기에 전혀 다른 쪽으로 생각이 흘러갔다.

'돈이 그렇게 부담되는 건가? 아카데미 학비가 좀 비싼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영지를 판 돈이라면…….'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바이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해 보니 졸업을 하면 군대에 가서 3년을 복무해야만 한다. 기본적인 급여는 지급되겠지만 그걸로 그 넓은 땅에 매겨지는 세금을 내는 건 불가능했다.

"돈 때문이라면 제가 도와 드릴 수도 있습니다!"

거기까지 생각을 한 바이스는 즉시 외쳤다. 그 말에 제론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눈살을 찌푸리고 돌아서서 바이스를 노려봤다.

바이스는 무시무시한 제론의 눈빛에 압도되어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마른침만 꿀꺽 삼켰다.

제론은 그렇게 잠시 노려보다가 다시 돌아서서 행정부 건물 안으로 훌쩍 들어가 버렸다. 바이스는 차마 그 뒤를 쫓아가지 못했다.

이내 제론이 다시 나와 기숙사로 돌아갔다. 제론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바이스는 그 모습에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는 서둘러 행정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경악 어린 외침을 토해 냈다.

"자유 시간? 그것도 한 달? 그게 말이 돼?"

제론은 내일부터 정확히 30일간의 자유를 허락받았다. 어디를 가건 무슨 짓을 하건 상관없었다. 아카데미의 명성에 먹칠을 하지만 않으면 된다.

"준비할 건 거의 없군."

보통 한 달 정도 여행을 하려면 준비할 게 엄청나게 많다. 하지만 제론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필요한 건 유적에 모두 있을 것이다.

"돌아올 시간만 잘 계산하면 되지."

아마 누구도 제론의 행적을 캐지 못할 것이다. 초장거리 텔레포트가 가능한 이동 마법진은 왕국의 수도에 딱 하나가 존재할 뿐이었다. 게다가 그 마법진으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도 지금 이곳 아카데미에서 유적까지의 거리보다 짧았다.

제론은 눈을 빛내며 조용히 정령을 불렀다.

"아네모스."

휘류루루루룽.

지금은 밤이다. 누군가에게 보고할 필요도 없으니 굳이 아침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들키지만 않으면 말이다.

아네모스가 제론의 팔찌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한순간 제론의 몸이 빛에 휩싸이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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