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217)

Chapter 2 복귀

켈리온은 짜증을 내며 검을 휘둘렀다.

퍼억!

돌벽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벌써 열흘째 이러고 있었다. 분명히 이곳으로 향했는데, 찾을 수가 없으니 짜증이 있는 대로 났다.

지난 열흘 동안 유적을 정말 구석구석 살폈다.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부분은 검을 찌르고 파내고 별 난리를 다 쳤다. 그런데도 제론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이대로 빈손으로 돌아가면 공작님께서 노발대발하실 텐데."

그냥 화만 내면 다행이다. 괜히 징계라도 받으면 정말로 곤란하다. 슈린 공작가의 징계는 돈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봉급이 여기서 더 깎이면 앞으로는 술도 마음껏 못 마실 것이다.

"그건 사양이지."

켈리온은 눈을 번득이며 주위를 둘러봤다. 하지만 지금까지 찾아도 못 찾았는데 다시 본다고 뭐가 달라질 리 없었다.

"유적 안에는 없는 게 확실해. 하면 대체 어디로 갔을까?"

켈리온은 그렇게 미련을 못 버리고 사흘을 더 그곳에서 지냈다. 유적은 물론이고 그 주변까지 샅샅이 파헤쳤다.

이곳에서 해치워야 명분을 만들기도, 사건을 조작하기도 쉽고 편하다. 만일 제론이 이곳을 빠져나가 아카데미로 돌아간다면 당분간 건드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켈리온이 이렇게 신경을 쓰는 것이다. 여기서 실패하면 슈린 공작으로서도 제론을 해치우기 위해 위험부담을 안아야만 한다.

하지만 그렇게 애썼음에도 결국 제론을 찾지 못했다.

슈린 공작가의 사람들이 모두 돌아갔다. 물론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었다. 켈리온은 집요하고 끈질겼다. 그는 병사 몇 명을 유적에 남겨 두었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연락을 하도록 명령했다.

그렇게 모두가 돌아간 유적에 제론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론의 모습은 처음 유적으로 들어설 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일단 체격이 훨씬 당당해졌다. 몸이 탄탄해졌으며, 키도 약간 자랐다.

고작 보름만의 변화치고는 상당했다.

하지만 그런 외적인 변화보다는 내적 변화가 훨씬 더 컸다.

몸속의 마나가 대부분 아랫배와 심장에 모여 뭉쳤다. 그리고 제론이 원할 때마다 움직여 힘을 발휘했다.

제론은 이미 익스퍼트의 실력을 넘어섰다. 제론에게 있어서 진짜 시작은 소드 마스터야만 하기에 그 정도로는 아직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게다가 진짜 소드 마스터는 그런 게 아니었다.

제론은 태블릿을 통해 고대의 지식을 잔뜩 받아들였다. 놀랍게도 고대에도 소드 마스터라는 것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 의미는 지금의 소드 마스터와는 하늘과 땅 차이었다.

현재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소드 마스터는 세상을 통틀어 3명뿐이었다.

정확히 어떤 기준으로 소드 마스터를 정하는지 알 수 없지만, 자신이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면 확실히 알 수 있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할 뿐이었다.

그들이 어떤 힘을 가졌는지는 간접적인 사건을 통해 알려졌다. 소드 마스터는 혼자서 3백의 익스퍼트를 압도할 정도로 강했다.

하지만 지금의 소드 마스터는 고대의 하급 기사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즉, 고대에는 익스퍼트 초급이 지금의 소드 마스터와 같은 실력을 가졌다는 뜻이다.

놀랍게도 지금의 기사들은 고대에 가면 견습 기사조차 되지 못할 실력이었다. 검에 마나를 담을 수 있어야 간신히 견습 기사가 될 수 있었다.

"지금의 내가 바로 견습 기사라는 뜻이지."

제론은 이를 악물었다. 고대의 지식은 알면 알수록 놀라웠다. 그런 고대의 지식을 가득 담고 있는 태블릿은 제론에게 있어서 최고의 보물이었다.

태블릿에는 제론이 익힌 검술에 대해서도 자세히 나와 있었다. 제론은 그 검술의 이름이 제국 기초 검술이라는 걸 알고 경악했다. 이보다 더 상위의 검술이 존재한다는 뜻 아닌가.

하지만 아쉽게도 태블릿에는 더 이상의 검술이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높은 경지로 좀 더 손쉽게 갈 수 있는 방법이나 다름없는데 그것이 아무렇게나 방치될 리 없었다.

제론은 천천히 유적에서 걸어 나갔다. 마나가 하나로 뭉친 이후로 감각도 예민해졌기에 유적지 근처에 자리를 잡고 감시하는 자들도 확인이 가능했다.

'5명.'

그들이 어디쯤 있는지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제론은 그들의 처리에 대해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굳이 그들을 건드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내가 갑자기 수도에서 모습을 드러내면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하겠지.'

게다가 여기서 굳이 사람들을 죽이면 슈린 공작이 이곳에 더 신경을 쓸 확률이 높았다. 그냥 수도로 가는 편이 이곳 유적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없애는 가장 좋은 방편이었다.

이곳은 수도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말을 타고 이동을 해도 보름은 족히 걸리는 곳이었다. 물론 이동 마법진을 이용하면 단숨에 오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제론은 그것을 쓸 생각이 없었다.

'이동 마법진을 쓰면 행적이 너무 쉽게 노출되지.'

이동 마법진은 도시마다 설치되어 있었지만, 이용하는 사람의 행적을 철저히 기록하기 때문에 은밀히 이동하기 위해선 다른 방법을 써야만 한다.

제론은 굳이 그것을 써서 슈린 공작에게 자신의 행적을 낱낱이 밝힐 생각은 없었다.

잠시 주위 분위기를 살피던 제론이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아랫배에 있던 마나가 자연스럽게 다리로 흘러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를 만들어 냈다.

쉬익!

제론은 감시자들의 사각으로 빠르게 이동한 뒤, 하늘로 풀쩍 뛰어올랐다.

"푸르투나."

제론의 중얼거림에 강력한 바람이 만들어져 제론을 높이 띄웠다. 푸르투나는 새로운 정령의 코드였다.

아네모스보다 수십 배 더 강력한 힘을 가진 새로운 바람의 정령이었다. 또한 아네모스의 진화체이기도 했다.

푸르투나는 제론의 몸을 아주 간단히 구름이 있는 곳까지 올렸다. 공기가 희박해졌지만 제론에게 그것은 아무런 장애도 되지 못했다.

다만, 푸르투나는 유지시간이 상당히 짧았다.

수도까지 날아갈 생각이 아니었기에 유지시간이 짧아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감시자들의 시선에서만 벗어나면 그만이었다.

제론은 하늘을 크게 날아 유적이 있는 지역을 벗어났다. 풀 한 포기 없는 허허벌판이었지만 곳곳에 커다란 바위가 있어 몸을 숨기는 데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유적지를 벗어난 제론은 인적이 드문 곳을 지나 수도로 향했다. 제론이 이동 마법진을 쓰지 않고 수도까지 달려가기로 한 것은 슈린 공작의 감시를 잠시나마 벗어나기 위함도 있었지만 수련의 일환이기도 했다.

제론이 익힌 마나 호흡법은 초기에 몸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면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다만 너무나 힘들기에 그것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게 문제였다. 물론 그나마도 고대의 일이었다. 지금은 마나 호흡법 자체를 아는 사람도 없었으니까.

제론은 전력으로 달렸다. 달리면서 마나 호흡도 함께하려니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했다.

달려서 수도까지 가려면 최소 보름은 걸린다. 그 보름 동안 제론은 스스로를 지옥에 떨어뜨릴 작정이었다.

켄트 아카데미.

레늄 왕국 유일의 아카데미이자, 대륙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아카데미이기도 했다.

아카데미 정문에 도착한 제론은 잠시 숨을 골랐다. 수도에 들어서기 직전에 한계를 한 번 더 넘었기에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제론은 호흡을 차분하게 가라앉힌 뒤, 당당하게 아카데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일단 제론은 기숙사로 향했다. 자신의 방으로 가서 샤워부터 한 다음 조금 쉴 생각이었다. 물론 가는 동안에도 마나 호흡법은 잊지 않았다.

기숙사에 도착한 제론은 샤워 후, 침대에 쓰러져 그대로 잠들었다. 보름 동안 어찌나 지독하게 마나 호흡법에 매달렸는지, 잠을 자면서도 마나 호흡법을 멈추지 않았다.

제론은 꼬박 하루 밤낮을 잤다.

☆ ☆ ☆

쾅!

거센 소리와 함께 탁자가 부서질 듯 흔들렸다.

슈린 공작은 잡아먹을 것처럼 켈리온을 노려봤다. 켈리온은 고개를 푹 숙였다. 차마 공작을 바라볼 수도 없었다.

"이렇게 허술해서야 어디 믿고 일을 맡길 수 있겠나?"

"죄송합니다."

슈린 공작은 이를 갈았다. 가장 쉽고 간단히 처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다. 아마 제론은 다시 유적에 가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 땅을 넘겨서 손해를 강제로 안겼으니 어쨌든 파산을 면치는 못하겠군."

아직도 에어스트 가문은 완전히 몰락하지 않았다. 손바닥만 하긴 해도 영지가 남아 있었다. 슈린 공작은 그 작은 영지조차 몽땅 얻기를 원했다.

만일 제론이 죽으면 아주 자연스럽게 그 영지를 얻을 생각이었다. 벌써 그 일을 위해 왕국의 행정 관리들을 다 구워삶았다. 한데 그 모든 일들이 쓸모없어진 것이다.

"그만 나가 봐."

슈린 공작의 명에 켈리온이 급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며 어금니가 부서질 정도로 이를 꽉 물었다.

'제대로 감시하라고 했더니, 멍청한 놈들.'

켈리온은 유적을 감시하던 자들에게 모든 과를 돌렸다. 그놈들을 결코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사실 애초에 유적에 아무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켈리온은 그런 것을 고려할 생각이 없었다. 이 분노를 어떻게든 풀어야만 했다.

그날 유적을 감시하던 자들이 몽땅 슈린 공작가로 불려 갔다. 그리고 그 뒤로 아무도 그들을 보지 못했다.

슈린 공작가는 완벽히 유적에 대한 관심을 접었다. 쓸모없는 땅에 폐허가 된 유적을 누가 찾겠는가. 슈린 공작가의 모든 사람은 제론이 다시 그곳을 방문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 ☆ ☆

제론은 깔끔한 제복을 입고 기숙사를 나섰다. 아카데미 측에 복귀 신고를 하기 위함이었다. 켄트 아카데미는 레늄 왕국에서도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기에 건물도 많았고, 시설도 뛰어났다.

행정 업무만 전담하는 건물이 따로 있을 정도였다. 제론이 향한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어차피 아버지의 장례 때문에 잠깐 아카데미를 쉰 것이기 때문에 복귀도 간단했다. 신고와 동시에 복귀 절차가 끝났다.

복귀를 마무리한 제론은 건물에서 나왔다. 그러자 어딘가로 우르르 몰려가는 학생들이 보였다.

뭔가 재미있는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보이는 광경이었다. 제론은 오랜만에 보는 익숙한 모습에 슬쩍 웃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이제 세상에 홀로 남았지만 어쨌든 살아야 한다.

'기회도 얻었으니까.'

유적을 떠올린 제론은 더욱 짙은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비밀 유적을 발견한 건 정말로 행운이었다. 그곳에서 정말로 많은 걸 얻었다. 또 앞으로 훨씬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이다.

'유적지 주변 땅이 내 소유라서 정말 다행이야.'

슈린 공작의 수작이었지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문제는 그 넓은 땅에 대한 세금이었다. 돈이 될 만한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당장 그것을 세상에 내보일 수는 없었다.

'영지를 정리해야겠군.'

아직 작은 영지가 남아 있다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영지에 대한 미련은 없었다. 남은 영지는 에어스트 가문에서 거의 방치하다시피 한 곳이었다.

아마 그곳을 알아서 팔면 슈린 공작가의 견제가 조금 줄어들지도 모른다. 제론은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찌 되었건 에어스트 백작가는 몰락했다. 영지도 없고, 돈도 없었다. 그 모든 재화가 슈린 공작가로 갔다.

제론은 주먹을 꽉 쥐었다.

'언젠가는 이 모든 걸 몇 배로 되돌려 주고야 만다.'

제론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잔뜩 모인 곳에 도착한 제론은 무슨 일인지 살폈다. 제론 역시 아카데미에서는 제법 유명했기에 그곳에 있던 일부 학생의 시선을 받았다.

"어? 제론 선배다."

"정말이네? 언제 오신 거지?"

"아카데미에서 졸업은 해야 하니 서둘렀겠지. 이제 가문도 끝장난 거나 다름없잖아? 군대라도 가야지."

"하긴, 군대에 기간트 라이더로 3년이나 있다 보면 뭔가 방법이 생길 수도 있지."

"아예 군대에 뼈를 묻을 수도 있고. 생각보다 군부의 힘이 제법 대단하잖아."

"그야 그렇지. 그래도 좀 아깝긴 하네."

"아깝지. 그래도 아카데미 최고의 기간트 라이더잖아. 어쩌면 군부가 더 적성에 맞을 수도 있지."

"전쟁이 끝나지 않는 한, 공을 세울 기회도 많을 테고."

제론은 자신을 화제로 열심히 입을 놀리는 후배들을 슬쩍 쳐다봤다. 아마 자신이 못 들었으리라고 여기겠지만, 모든 대화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확실히 마나 호흡법이 대단하긴 해.'

신체 능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감각이 예민해진다. 이렇게 청각이 예민해진 것도 모두 마나 호흡법 덕분이었다.

그곳에서 제론을 확인한 대부분의 사람은 제론을 찧고 빻기에 바빴다.

예전에는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다. 제론의 가문이 망했다는 소식이 아카데미를 휩쓴 뒤부터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뭐, 어차피 상관없지.'

예전에도 그들은 제론의 안중에 없었다. 그런 자들이 지금 자신을 무시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는가.

"오오, 이게 누구야? 장차 백작이 되실 에어스트 가문의 후계자 아니신가."

제론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누군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파인트 폰 슈린.'

아카데미에서 제론과 가장 사이가 나쁜 놈이었다. 사사건건 제론을 걸고 넘어가며 언제나 시비를 걸어왔다. 그러면서도 단 한 번도 제론을 이긴 적이 없었다.

파인트는 제론 앞으로 가서 섰다. 그리고 비웃음 가득한 눈으로 제론을 쳐다봤다.

"아카데미에 낼 학비는 있나? 없으면 내가 좀 빌려 줄까?"

파인트가 느물느물한 태도로 이죽거렸다. 제론은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파인트를 쳐다봤다. 무심한 눈이었다. 파인트는 그 눈빛에 발끈했지만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렇게 둘 사이에 잠깐 대치가 일어났다. 그러자 파인트 뒤에 서 있던 학생 하나가 나섰다.

"파인트 님이 말씀하시는데, 대답도 안 하다니. 정말 버릇없는 놈이로군. 안 그렇습니까? 파인트 님. 이번에 유적으로 큰돈을 버셨으니 저런 놈에게 적선을 좀 하시는 것도 슈린 공작가의 위엄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제론의 눈에서 순간 불똥이 튀었다. 제론은 방금 말한 학생을 노려봤다.

그는 기간트 학부 3년 차 학생이었는데, 제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더니 꼼짝도 못하고 식은땀만 줄줄 흘렸다.

"이제 이런 유치한 짓도 슬슬 졸업할 때가 되지 않았나? 몸만 졸업한다고 다가 아니야."

제론은 파인트를 똑바로 노려보며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머리도 졸업을 해야지."

제론은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섰다.

파인트는 멀어져 가는 제론의 등을 노려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어찌나 분노했는지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의 분노는 고스란히 옆에 있는 놈에게 떨어졌다.

퍼억!

"컥!"

조금 전 파인트를 위해 나섰던 학생이 허리를 구부리며 고통을 토해 냈다. 파인트의 주먹이 그의 복부에 깊이 박혀 있었다.

"네놈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냐."

"파, 파인트 님, 죄, 죄송……."

퍽!

그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파인트의 발이 그의 허벅지를 때렸기 때문이다.

파인트는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학생을 쳐다보며 말했다.

"시작도 네놈이 했으니 마무리도 네놈이 해라."

바닥을 구르던 학생은 억울했지만 한마디도 반박하지 못했다. 그는 끙끙대며 일어나 멀어져 가는 파인트 일행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이를 갈고 싶었지만 그러지도 못했다. 이곳에는 사람이 많다. 자신이 그런 행동을 했다는 사실이 파인트의 귀에 안 들어갈 리 없었다.

그의 분노 역시 풀어낼 곳은 정해져 있었다.

제론은 기숙사로 돌아갔다. 그리고 테이블에 앉아 조용히 차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돈 문제부터 해결해야겠어."

켄트 아카데미의 학비는 어마어마하다. 에어스트 가문이 건재할 때야 신경을 쓸 필요도 없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제론은 서둘러 영지를 정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일단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군 복무를 끝내면 바로 백작이 된다. 현재는 작위가 보류된 상태였다. 의무를 다하지 않는 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것이 왕국의 법이었다.

그리고 군대를 제대한 이후도 생각해야만 한다. 제론에게는 기반이 될 만한 영지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럼에도 제론은 지금 가진 영지를 팔아치우는 것에 대해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제론에게는 그 영지 말고도 영지로 쓸 만한 땅이 있었다.

"앞으로 그 유적지 근방의 땅이 내 영지가 될 것이다."

영지민이 1명도 없지만 전혀 상관없었다. 그곳이 에어스트 가문의 영지라는 것이 중요했다. 그곳이 제론의 기반이 된다는 점이 중요했다.

굳이 시간을 끌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서두를 필요도 없었다. 최대한 비싼 가격에 팔 것이다. 비록 작은 영지지만, 그래도 영지였다.

"세수가 좀 적은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높은 영지니까."

그 영지에 눈독을 들이는 귀족들이 제법 많았다. 작위만 있고 영지가 없는 귀족들은 쌔고 쌨다. 그들에게 적당히 말을 흘리면 알아서 찾아올 것이다.

제론은 그 이후의 일을 계획하며 더욱 깊은 사색에 빠져들었다.

영지를 파는 일은 순식간에 끝났다. 가격을 너무 잘 쳐주는 바람에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슈린 공작가에 판 것이 아니라면 장사 잘한 건데 말이야."

제론이 판 영지는 슈린 공작가에서 상당히 가까웠다. 그 사이에 자작령 하나가 있었는데, 제론은 직감적으로 슈린 공작이 그 영지를 노린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그렇게 비싼 가격에 영지를 살 이유가 없었다. 아마 제론이 판 영지는 군사훈련을 위해 쓰일 것이다.

영지가 팔리는 바람에 대부분의 문제가 싹 해결되었다. 일단 졸업할 때까지 학비 걱정을 할 일은 없었다. 또한 군대에 있는 동안 유적이 있는 땅에 대한 세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럼 이제 대충 모든 일이 정리된 건가?"

자잘하게 걸리는 일은 다 해결되었다. 하지만 아직 진짜 문제가 남아 있었다.

"유적은 어떻게 하지?"

아직 유적에서 얻을 것이 많았다. 또한 수련도 필요하다. 이곳에서 하는 수련과 유적에서 하는 수련은 하늘과 땅 차이었다.

"아직 본격적인 수련은 시작도 안 했는데……."

제론이 익힌 것은 기초 중의 기초뿐이었다.

물론 그 기초 중의 기초라는 것들로 고작 보름 동안 이룬 성과가 그동안 제론이 22년 동안 살면서 얻은 것보다 훨씬 많았다. 아니, 손꼽히는 기사들만큼이나 강해졌다.

어쨌든 제론은 익스퍼트가 되었으니까.

사실 익스퍼트나 소드 마스터는 상징적인 의미가 훨씬 강했다.

익스퍼트가 되려면 가혹할 정도로 스스로를 몰아붙여야 한다. 혹사에 혹사를 거듭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근육과 뼈에 마나가 쌓이고, 그것이 흘러넘쳐 무기에 스며든다.

그것이 바로 익스퍼트였다.

즉, 익스퍼트는 인내와 극기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소드 마스터는 그조차 넘어선 뭔가를 가진 사람이었다.

소드 마스터나 익스퍼트가 그렇게 실제 의미를 잃은 데에는 사실 기간트의 역할이 가장 컸다.

인간이 아무리 강해도 기간트를 이길 수는 없었다. 기간트는 크고 무거우며, 또 빠르고 강했다. 그야말로 일인 군단에 걸맞은 위용을 보여 주는 것이 바로 기간트였다.

문제는 아무리 소드 마스터가 된다고 해도 기간트를 조종하는 데에는 거의 도움이 안 된다는 점이었다.

기간트를 조종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마나만 있으면 된다. 그다음부터는 오로지 운용이었다. 그 최소한의 마나란, 기간트의 심장부에 위치한 마나 코어를 구동시키기 위한 마나였다.

일단 구동이 되면 기간트는 마나 코어에 내장된 마나 스톤에 의해 움직인다. 더 이상 라이더의 마나가 필요치 않은 것이다.

그러니 소드 마스터건 그냥 기사이건 아무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기간트 운용 기술과 센스가 훨씬 더 중요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기간트를 효과적으로 운용하기 위해선 뛰어난 검술이 필요했다. 또한 체력과 동체 시력, 감각도 중요했다. 그래야 상대 기간트를 상대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어쨌든 기간트에는 소드 마스터나 익스퍼트보다는 센스가 뛰어난 라이더가 더 중요했다. 그리고 전략적으로 가장 가치 있는 사람은 바로 센스가 뛰어난 익스퍼트였다.

그리고 그런 특별한 익스퍼트를 일컬어 기간틱 나이트라 불렀다. 또한 특별한 소드 마스터를 기간틱 마스터라 불렀다.

제론은 이제 기간틱 나이트가 되었다. 제론은 아카데미 최고의 라이더였다. 기간트 운용에 대한 센스는 누구보다 뛰어났다. 그런데다가 이제 익스퍼트가 되었다.

하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태블릿을 통해 진짜 익스퍼트와 소드 마스터에 대해 알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인간으로서 그게 가능하긴 한 건가?"

고대에도 기간트가 있었다. 그건 당연했다. 유적을 통해 얻는 보물 중 최고가 바로 기간트였으니까.

고대에 만들어진 기간트는 그 상징성만으로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 게다가 엄청난 성능을 자랑했다.

고대 유적에서 발굴된 기간트는 현재 쓰이는 모든 기간트의 원형이었다. 고대 기간트를 분해하고 분석해 얻은 기술로 현재 쓰이는 범용 기간트를 만들어 낸 것이다.

성능은 하늘과 땅 차이었지만, 대량생산이 가능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전쟁의 양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 기간트를 인간이 상대할 수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그 어설픈 기간트가 아니라 뛰어난 성능을 가진 고대의 기간트를 상대로 말이다.

'게다가…… 그 고대는 진짜 고대가 아니란 말이지.'

태블릿이 만들어진 시대는 사람들이 발굴한 고대 유적보다 훨씬 더 오래전이었다. 그리고 그때의 기간트는 고대 유적에서 발굴된 기간트보다 훨씬 더 뛰어났다.

그런 기간트를 인간이 상대했다니 그 말을 어찌 쉽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게 진짜 소드 마스터라 이거지?"

제론은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이제야 간신히 걸음마를 뗐다. 하지만 노력 여하에 따라서 맨몸으로 검 한 자루 들고 기간트를 상대할 수 있는 힘을 키울 가능성이 생겼다.

"아니, 무조건 한다. 진짜 소드 마스터가 되겠어."

제론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었다. 자신에게는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진짜 고대 유적이 있었다. 그 굉장한 곳의 주인이 바로 자신이었다.

"잡생각은 여기까지만 하고, 당면한 문제를 생각해 보자."

가장 큰 문제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유적에서 수련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큰 문제가 동반된다.

"일단 유적까지 가는 건 아무 문제가 없어."

유적에는 놀랍게도 언제 어디에서건 유적에 들어올 수 있는 수단이 존재했다. 제론이 팔에 찬 팔찌가 바로 그 물건이었다. 단번에 유적 입구로 이동시켜 주는 아티팩트였다.

고대의 마법 기술은 정말로 대단했다. 그 작은 팔찌 하나에 대체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 마법을 모아 뒀단 말인가.

아공간 마법 하나만 해도 놀라운데, 비록 단방향이지만 초장거리 텔레포트 마법까지 새겨져 있었다. 더구나 주인을 인식하기 위한 귀속 마법과 도난 방지 마법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 하나하나가 결코 쉽지 않은 마법이었다. 일단 초장거리 텔레포트는 아직도 구현이 불가능했고, 아공간 마법을 새기기 위해선 최소한 흉갑 정도 되는 크기가 필요했다. 그것도 기간트의 마나 코어를 이용하지 않으면 생성이나 유지가 불가능했다.

즉, 아공간 마법을 쓰기 위해선 흉갑 정도 크기의 물건과 기간트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 일상에서 아공간을 이용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 대단한 마법을 고작 팔찌 하나에 다 담았다니 이 말을 마법사들에게 했다간 미친놈 취급을 받을 것이다. 그동안 발견된 수많은 고대의 아티팩트 중에서도 이런 대단한 물건은 없었다.

아무튼 팔찌를 이용하면 유적 입구까지는 단숨에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뒤가 문제였다.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방법이 없었다.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하면 며칠이면 올 수 있지만 흔적이 남는다. 자신을 주시하는 슈린 공작에게 혹시라도 이런 사실이 들어가면 상당한 곤란을 겪을 수도 있었다.

유적까지 간 흔적은 없는데 온 흔적만 남으면 그게 뭘 의미하겠는가. 아마 슈린 공작은 그런 점들을 결코 간과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일단 몸을 사리는 수밖에 없는데…….'

제론은 자연스럽게 아공간에서 태블릿을 꺼냈다. 아직 태블릿에 있는 그 많은 서적을 티끌만큼도 확인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 안에 답이 있을지도 모르니 일단 지금은 끊임없이 지식을 섭렵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론은 조급한 마음을 접고 차분히 태블릿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이렇게 쉽게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는 건 새로 익힌 마나 호흡법 때문이었다.

마나 호흡법을 시작한 이후로 마음을 냉정하게 유지하는 게 쉬워졌다. 또한 주변의 마나가 마치 친구가 된 것처럼 친숙해졌다.

제론은 무의식중에 마나 호흡법을 하며 정신없이 태블릿을 살폈다.

제론은 기숙사 밖으로 나와 연무장으로 향했다. 졸업반인 5년 차 학생들은 철저하게 실전 위주로 수업을 진행한다.

제론이 속한 기간트 학부는 당연히 대부분의 수업을 연무장에서 진행했다. 그곳에서 실제 기간트를 조종하며 각종 동작과 전투 기술을 익힌다.

기간트 학부는 아카데미의 꽃이었다. 그리고 그 기간트 학부에서 최고의 실력을 가진 제론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가문이 몰락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제론 선배님!"

제론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누군지 확인했다.

"수업 들어가시는 건가요?"

기간트 학부 3년 차인 세나 폰 벨루스였다. 벨루스 백작가의 여식으로, 켄트 아카데미에서 미모로 가장 유명한 여인이었다.

제론은 세나를 힐끗 쳐다보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걸음을 조금 더 빨리했다.

그 무심함에 세나가 입술을 삐죽였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이 켄트 아카데미에서 자신에게 이렇게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사람은 제론이 유일했다.

'아우, 정말 너무해!'

세나는 제론의 걸음에 맞추려고 더 열심히 걸었다. 그녀 역시 연무장으로 가고 있었기에 중간에 따로 갈 일도 없었다.

"선배님, 파인트 선배를 조심하세요."

세나의 말에 제론은 하마터면 피식 웃을 뻔했다. 파인트가 자신에게 라이벌 의식을 불태운다는 사실은 유명했다. 하지만 제론은 한 번도 그를 신경 쓴 적이 없었다.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파인트가 일방적으로 설정한 라이벌 관계를 스스럼없이 받아들였다. 그들이 보기에는 파인트도 엄청나게 대단했다. 그 유명한 슈린 공작가의 후계자 아닌가.

제론이 너무 대수롭지 않게 여기자, 세나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더 열심히 말했다.

"이번에 개인 기간트를 새로 구입했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아카데미에서는 개인 기간트를 쓰는 일이 종종 있었다. 막대한 수리비를 개인이 지불해야 하지만, 그 정도 액수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학생들이 부지기수였다.

"아우, 정말. 이번에 바꾼 기간트가 무려 베르급이라고요!"

제론의 눈이 한 차례 번득였다. 그 스산하고 위험한 느낌에 세나가 순간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서, 선배님?"

제론은 그런 세나를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세나는 당황해서 제론을 쫓아갔다.

"서, 선배님! 같이 가요!"

베르는 고대 유적에서 발견되는 기간트 중 가장 출력이 떨어진다. 하지만 일반적인 양산형 기간트에 비하면 2―3배나 더 높은 출력을 자랑한다.

제론의 표정이 굳은 이유는 그 베르의 출처가 어디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바로 유적이다. 이번에 제론의 가문과 함께 발굴한 그 유적 말이다.

그곳에서 얻은 기간트 중 하나가 파인트에게 간 것이다.

'다 부숴 버리고 싶다.'

상대가 파인트라면 설사 그가 베르가 아닌 그보다 더 대단한 기간트를 타더라도 전혀 두렵지 않았다. 얼마든지 이길 자신이 있었다.

"선배님! 처, 천천히 좀 가세요! 하악, 하악."

세나가 거의 달리다시피 해서 제론을 따라잡았다. 그녀는 끈질기게 제론을 따라다녔다.

"파인트 선배가 선배님을 노리고 있어요. 그러니 정말로 조심하셔야 해요."

그제야 제론이 걸음을 멈추고 세나를 쳐다봤다. 세나는 얼굴을 붉히며 제론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봤다.

제론은 잠시 세나를 쳐다보다가 이내 몸을 돌려 다시 기간트 훈련장으로 향했다.

세나는 아쉬운 눈으로 그런 제론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생긋 웃으며 다시 그 뒤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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