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2/217)

Chapter 1 유적

제론은 신기한 눈으로 유적 내부를 둘러봤다. 그리 넓은 공간은 아니었다. 딱 유적지 내부의 동공 정도였다. 하지만 정말로 신비로웠다.

벽면을 가득 메운 문양이 때때로 번득였는데,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한데 대체 뭐 하는 곳이지?"

벽면에 아름답고 기묘한 문양이 가득했지만 그뿐이었다. 이곳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튜토리얼 모드를 진행하시겠습니까?

또다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제론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튜토리얼이라는 말은 대충 알아들었다.

"한다!"

늦기 전에 얼른 대답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마치 제론을 놀리기라도 하듯 더 이상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제론은 아무리 기다려도 변화가 없자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뭐지?"

제론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또 여기가 무얼 하는 곳인지 파악하는 게 먼저였다.

"일단 유적지 아래라는 건 명백하고……."

여전히 투명한 천장을 통해 유적지 내부가 보이고 있었다. 즉, 저 천장이 유적지 바닥이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대체 왜 갑자기 이렇게 투명해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음은 어떻게 여기 오게 되었느냐는 건데……."

이곳에 오기 전 상황을 떠올리면 지금 차고 있는 팔찌 때문인 것이 확실했다. 또한 그때 자신과 놀아 주던 바람의 정령도 관계가 있음이 분명했다.

"어떻게 확인한다……."

바람의 정령과는 친구가 되었지만 아직 확실히 계약한 게 아니기 때문에 맘대로 팔찌에 집어넣거나 할 수는 없었다.

"넣어 봐야 확실히 알 수 있을 텐데……."

제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강하게 바람의 정령을 염원했다. 처음 정령을 만나게 되었을 때를 떠올리니 금세 정령이 나타났다.

휘류루루루룽!

정령은 나타나자마자 제론을 한 번 휘돌고는 제론의 손가락에서 놀았다. 일부러 팔찌를 정령에 가까이 가져갔지만, 정령은 그저 놀기만 할 뿐 아까처럼 팔찌에 들어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제론은 답답했다. 하지만 계약을 하지 못하는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물론 계약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가능할지도 확신하지 못했다. 세상에 정령사가 사라진 지 벌써 1,000년이 넘었기 때문이다.

정령사에 대해 알려진 건 고대 유적을 발굴하면서 나온 몇 가지 기록 때문이었다. 즉, 그 외에는 정령에 대해 알려진 바가 전혀 없었다.

제론이 정령을 그렇게 가만히 보고 있을 때, 벽면의 문양이 물결치듯 번쩍였다.

―정령 확인. 계약을 진행합니다.

제론은 갑자기 들려오는 말에 당황했다. 하지만 그 내용에 설렜다.

"설마 유적이 정령 계약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건가?"

바닥이 은은히 빛났다. 번쩍번쩍 빛이 날 정도로 매끄러운 바닥이었는데, 그 재질을 알 수 없었다. 한데 그것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빛은 이내 거대한 마법진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 마법진 한가운데 제론이 소환한 바람의 정령이 갇혔다.

마법진이 한순간 강렬하게 빛났다. 그리고 빛과 함께 정령도 사라져 버렸다.

―계약 완료. 소환 명령 코드는 아네모스입니다.

"아네모스?"

휘류루루루룽!

제론이 의문을 갖고 중얼거리자마자 사방에서 바람이 몰려들어 뭉치더니 순식간에 바람의 정령이 나타났다.

제론은 깜짝 놀라 나타난 정령을 바라봤다. 정령의 느낌이 평소와 완전히 달랐다. 한 자리에 맴도는 것이 마치 다음 명령을 기다리는 듯했다.

"이 팔찌에 들어가."

제론은 반신반의하며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정령은 즉시 날아 팔찌로 스며들었다.

정령을 받아들인 팔찌가 은은한 빛을 내뿜었다.

제론은 팔찌 찬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리저리 손목을 돌리며 팔찌를 살폈다.

그러자 사방에서 팔찌를 향해 빛줄기가 쏘아졌다.

징! 징! 징!

팔찌가 은은히 진동했다. 그리고 바닥도 진동을 시작했다.

―기본 물품 지급합니다.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고, 벽에 가까운 바닥 한 부분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마치 기둥이 솟아나는 듯했다.

제론은 그곳을 향해 긴장한 얼굴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자 그 옆으로 연달아 기둥들이 불쑥불쑥 솟아났다. 똑같은 모양의 기둥들이었다.

기둥은 제론의 가슴 정도 높이였다. 제론은 일단 기둥으로 다가갔다. 모든 기둥이 같은 구조였다, 한가운데 빈 공간이 있었고, 그 공간 안에 몇 가지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첫 번째 기둥 안에는 얇은 카드 한 장과 푸른빛이 감도는 작은 병 하나가 있었다.

"이걸 내게 준다는 뜻인가?"

제론은 일단 옆에서 함께 솟아난 다른 기둥도 확인했다. 두 번째 기둥에는 역시 얇은 카드 한 장과 검 한 자루가 들어 있었다. 척 보기에도 상당히 좋은 검이었다.

그 옆의 기둥에는 팔찌 하나와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고, 그 옆에는 카드만 달랑 한 장 들어 있었다. 마지막 기둥에는 작은 알약이 잔뜩 들어 있었다.

기둥은 그렇게 5개였다.

―코르를 마시고 첫 번째 카드에 에너지를 공급하십시오.

기둥을 모두 살폈을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론은 반사적으로 첫 번째 기둥을 쳐다봤다.

"코르?"

낯선 단어였다. 하지만 코르가 무엇인지는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작은 병 안에 든 액체가 아마 코르일 것이다. 제론은 코르와 카드를 들었다.

"코르야 그렇다 치고, 에너지를 어떻게 공급하는 거지?"

제론은 잠시 궁리했다. 의외로 답은 쉽게 나왔다.

"아네모스."

휘류루루룽!

정령이 나타났다. 제론은 정령을 카드에 넣었다. 그러자 카드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역시."

제론이 씨익 웃었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아직 코르를 마시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는 서둘러 병에 든 액체를 꿀꺽꿀꺽 마셨다.

화아아악!

카드에서 나오는 빛이 점점 강해졌다. 이내 카드가 완전히 빛으로 변해 흩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흩어진 빛 가루가 순식간에 제론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어?"

제론은 깜짝 놀랐다. 설마 카드가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게다가 빛이 몽땅 몸으로 스며들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더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크윽! 이게 뭐지?"

제론은 자신의 몸속에서 움직이는 뜨거운 기운에 화들짝 놀랐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 기운은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지며 일정한 흐름을 갖고 움직였다.

―안정 작업 시작합니다.

제론의 모습이 불안정해 보였는지 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사방에서 초록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조금씩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일단 제정신을 차리니 몸속을 휘도는 뜨거운 기운에 대해서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

'이건…… 마나?'

몸속을 도는 기운은 마나가 분명했다. 제론도 제법 열심히 검을 수련했다. 그렇기에 몸속에 상당한 마나를 품고 있었다.

아직 마나가 자연스럽게 움직여 검에 스며들 정도는 아니었지만 체력이나 힘, 속도가 꽤 늘었다.

'마나가 몸속에서 이렇게 자유롭게 흐를 수 있다니!'

이건 상식의 파괴였다.

마나를 쓰려면 밖으로 흘러넘칠 정도로 몸에 꽉 채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면 마나를 잘 받아들이는 금속으로 만든 무기에 마나를 흘려 넣을 수 있었다.

한데 이건 대체 뭔가. 몸속에서 마나가 이렇게 자유롭게 움직인다면 그걸 유도해 검으로 보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제론은 몸속 마나의 흐름을 한동안 살피다가 눈을 빛냈다.

'일정한 길을 따라 움직이고 있다!'

어쩌면 마나가 움직일 수 있는 특별한 경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론은 열심히 그 경로를 외웠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제론은 머릿속에 또렷이 남은 마나의 경로를 그리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더 이상 자동으로 마나가 흐르지 않았다. 이젠 제론이 그 흐름을 일으키고 있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마나가 제론의 의지하에 놓였다.

"후우우우우."

제론은 길게 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몸속을 휘돌던 마나는 어느새 아랫배와 심장에 나뉘어 단단히 뭉쳐 있었다.

몸속에 있던 마나가 몽땅 아랫배와 심장으로 모인 듯했다.

제론은 문득 이렇게 마나가 사라져 버리면 마나가 몸에 있을 때보다 힘이나 속도가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 걱정은 금세 사라졌다. 몸을 움직여 보니 오히려 마나가 있을 때보다 훨씬 더 가벼웠고, 힘도 훨씬 강해진 것 같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그럼 몸을 강하게 만든 것이 마나의 힘이 아니었단 말인가?"

제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답을 쉽게 얻을 수 없었다. 일단 모를 때는 넘어가는 것이 상책이다. 잊어버리지만 않으면 나중에 언젠가는 다 알게 되어 있다. 물론 노력이 수반되어야 하지만 말이다.

제론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다음 기둥에 있는 검과 카드를 들었다. 카드에 정령을 넣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헉!"

제론은 깜짝 놀랐다. 몸속의 마나가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눈앞에 환상이 나타났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내가 유령처럼 나타나 검을 들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휘둘렀다. 제론은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봤다. 몸속의 마나는 여전히 어떤 경로를 따라 일정하게 흐르고 있었다.

"아! 설마?"

제론은 눈앞의 환상을 따라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발을 내디디면 함께 발을 내딛고 검을 휘두르면 같은 동작으로 검을 휘둘렀다.

곧 놀라운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몸속에서 흐르는 마나는 지금 제론이 펼치는 검법과 딱 맞아떨어졌다.

제론이 검을 휘두르거나 발을 움직일 때마다 자연스럽게 마나가 흘러 그 움직임을 더 빠르게, 또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쉭! 쉭! 쉭!

어느 순간부터 환상이 사라졌다. 또한 마나도 더 이상 자동으로 흐르지 않았다.

하지만 제론은 눈을 감은 채 끊임없이 검을 휘두르고 몸을 움직였다. 또한 몸과 뇌리에 각인된 길을 따라 마나를 움직였다. 제론의 몸과 마나가 온전히 그의 의지 아래 놓였다.

후웅! 후웅! 후우웅!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유적지 가득 울렸다. 제론은 어느 순간 몸과 정신, 그리고 검과 마나가 일체화되는 것을 느꼈다.

휘이잉!

그렇게 일체화한 상태로 검을 휘둘렀다. 마치 모든 것이 갈라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제론은 그 상태 그대로 멈췄다. 그의 몸을 중심으로 거센 마나가 회오리치다가 사라졌다. 아니,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후우우욱!"

제론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날숨을 통해 몸에 약간 남았던 탁한 기운이 빠져나갔다.

"상쾌하군."

너무나 상쾌했다. 또 몸이 가벼웠다. 아랫배와 심장에 자리 잡은 묵직하고 단단한 마나의 느낌이 이렇게 기분 좋을 줄은 몰랐다.

제론은 아랫배에 뭉친 마나를 움직여 봤다. 그의 의지에 따라 마나가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일단 움직이기 시작한 마나는 거침없이 길을 따라 흘러갔다.

제론은 검을 휘둘렀다.

쉬익!

검에 마나가 담겨 푸른 궤적을 그렸다.

"굉장해."

검에 마나를 담으려면 일단 검이 뛰어나야만 한다. 테페룸을 섞지 않으면 결코 마나를 담을 수 없었다.

그리고 각고의 수련을 통해 몸에 마나를 꽉 채워야만 한다. 그렇게 마나가 몸을 꽉 채우고도 모자라 밖으로 흘러넘칠 정도가 되어야 그 여분의 마나가 검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다.

일단 검에 마나를 담을 수 있게 되면 그때부터는 아예 차원이 다른 실력을 가지게 된다. 각고의 수련을 통해 온몸에 마나를 꽉 채웠으니 육체적 능력이야 너무나 당연했고, 마나가 스며든 검은 무엇이든 자를 수 있었다.

검에 마나를 담을 수 있는 경지를 익스퍼트라고 부른다. 마나가 검에 스며들었다는 자체가 보통 기사를 월등히 뛰어넘는 힘을 가지기에 그리 부르는 것이다.

레늄 왕국에 익스퍼트가 총 7백 명 정도가 존재한다. 왕국의 인구가 1천만을 훌쩍 넘어가니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경지인지 알 수 있다.

그런 익스퍼트가 되었다는 뜻이니 믿기지 않는 게 너무나 당연했다.

하지만 제론을 더 놀라게 한 것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제론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이상의 경지가 까마득하게 남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러니 내가 무슨 검술의 천재라도 된 것 같네."

제론은 문득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검술 실력은 아카데미 내에서도 중상위권에 불과했다. 그보다 강한 자들이 수두룩했다.

하지만 기간트로 가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제론은 그 누구보다 뛰어난 기간트 라이더였다. 물론 아직 정식으로 기사 작위를 받은 건 아니었지만 곧 그렇게 될 것이다. 죽은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을 테니 말이다.

제론은 다음 기둥으로 가서 망설임 없이 그곳에 있는 팔찌를 찼다. 그리고 카드에 정령을 넣었다.

이번 카드는 팔찌의 사용법에 대한 설명이었다.

제론을 꼭 닮은 사내가 나타나 팔찌 쓰는 모습을 보여줬다. 너무나 알기 쉽게 내용을 받아들인 제논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런 팔찌에 아공간 마법을 담을 수 있단 말이야?"

기간트가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함께 발전해 온 것이 바로 아공간 마법이었다.

하지만 최신 아공간 마법이라 하더라도 팔찌에 담는 것은 불가능했다. 가장 잘 만든 것이 검이었다. 그것도 무식하게 큰 양손검과 검집에 안팎으로 빽빽하게 마법진을 새기고 나서야 간신히 만들 수 있었다.

"그나마도 크란 제국에 하나밖에 없지, 아마?"

제론은 손목에 찬 팔찌를 이리저리 돌려 보며 중얼거렸다. 크란 제국에 단 하나 존재하는 아공간보다 훨씬 대단한 아공간이 자신의 팔에 채워져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팔찌는 보석 하나 박히지 않아 얼핏 보면 밋밋했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련미가 넘쳤다. 그리고 팔찌에서는 그 어떤 마법적인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보면 아티팩트인지 아닌지도 모르겠군. 대단해."

보통 작은 아티팩트는 그 기능이 약한 법이다. 아공간을 만드는 아티팩트가 고작 이 정도 크기이리라고 누가 예상하겠는가. 이런 아티팩트는 사실 그동안 유적지의 유물들 중에서도 없었다.

"아네모스."

휘류루루룽!

이 아공간 팔찌는 현재 제론만이 쓸 수 있었다. 팔찌를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정령이 필요했으니까.

정령이 아공간 팔찌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눈앞에 아공간 안에 든 물품들이 일목요연하게 나타났다.

정말로 놀라운 마법이었다. 이렇게 안에 든 내용물을 보여 줄 수 있다는 것도 지금까지의 상식으로는 불가능했다.

안에는 신기한 물건투성이었다. 사실 어떻게 쓰는 건지 아예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알 수 있는 거라고는 단검이나 활, 화살 정도였다. 거기에 동전들이 있었는데, 문양이 지금 쓰는 금화나 은화와는 확연히 달랐다.

물건을 꺼내는 건 아주 간단했다. 눈앞에 환상처럼 나타난 것들을 그저 집으면 그만이었다.

제론은 어린아이 손바닥만 한 동전 몇 개를 꺼냈다. 그리고 정말로 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판 하나를 꺼냈다.

동전을 만지는 순간, 제론은 깜짝 놀랐다. 만져 보기 전에는 그저 금인 줄 알았다. 한데 그게 아니었다. 손가락 끝으로 느껴지는 진득한 마나가 그것에 다량의 테페룸이 섞여 있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순수한 테페룸일 수도 있었다.

"테, 테페룸으로 돈을 만든 거야?"

얼마나 테페룸이 남아돌면 그걸로 돈을 만든단 말인가.

"어쩌면 고대에 지나치게 테페룸을 낭비해서 지금 이렇게 모자라는 걸 수도 있겠어."

아무튼 이건 그냥 쓸 수가 없었다. 처분하는 것도 문제다. 테페룸은 전략물자로 취급되기에 함부로 유통이 불가능했다. 물론 암암리에 거래가 되긴 하지만 지금 제론의 입장에서 그걸 파는 건 문제가 있었다.

"이건 나중에 좀 더 힘이 생기면 처리하기로 하고……."

제론은 다시 아공간에 동전을 넣었다. 그리고 손바닥 2개만 한 판을 살폈다.

말 그대로 그냥 판때기였다. 재질은 유리에 가까웠는데, 도저히 뭐에 쓰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모를 때는 정령이지. 아네모스."

정령이 스며들자, 판에 글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제론은 읽을 수도 없는 고대 문자였다.

"일단 고대 문자부터 익혀야겠군."

문제는 고대 문자에 대해 아주 해박한 사람들조차 이 글을 다 해석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점이었다. 고대 문자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도 기껏 단어 몇 개를 가지고 내용을 유추하는 정도였다.

"그래도 해낸다."

제론은 주먹을 꽉 쥐었다. 고대 문명을 이해하지 않으면 이 유적의 힘을 제대로 쓸 수 없을 것이다. 제론에게는 유적의 힘이 꼭 필요했다.

힘을 얻어야 슈린 공작에게 복수를 할 수 있을 테니까.

사실 제론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곧 아카데미로 돌아가야 한다. 현재가 마지막인 5년 차였으니 채 1년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에는 의무적으로 3년 이상 군대에 가야 한다. 아카데미 졸업자들에게 왕국이 지우는 의무였다.

그러려면 일단 고대어를 익혀야 한다. 제론은 분명히 유적 안에 글을 배울 방법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제론은 다음 기둥에 있는 카드를 들었다. 카드만 달랑 1장 들어 있었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이 카드에 분명히 뭔가 자신에게 필요한 지식이나 기술이 담겨 있으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제론은 카드에 정령을 넣었다. 빛 가루가 되어 흩어진 카드가 제론의 몸에 흡수되었다.

그 순간, 제론은 너무나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뇌리로 흘러들어 오는 수많은 언어의 향연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놀랍게도 이 카드는 언어를 담고 있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5개의 언어였다. 그것을 기본적인 어떤 언어로 설명하고 있었는데, 제론은 대번에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나머지 다섯 언어는 고대의 왕국들이 쓰는 언어였다. 그리고 그 언어들을 설명하는 언어가 바로 이곳 유적이 있는 고대 왕국의 언어였다.

제론은 필사적으로 그 언어들을 머리에 새기고 이해하려 애썼다. 만일 제론이 유적을 세운 왕국 사람이었다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언어들을 익힐 수 있었겠지만, 그게 아니니 어쩔 수 없었다.

"크윽."

제론은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서 인상을 찡그렸다. 갑자기 막대한 지식이 머리로 주입되니 뇌에 부하가 걸린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론은 빠르게 언어를 익혀 나갔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제론은 그 짧은 시간 동안 무려 6가지 언어를 익혀 버렸다. 물론 완벽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시간을 들여 공부하면 언젠가는 완벽히 익힐 수 있을 것이다.

제론은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차렸다. 뜻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해도 이제 읽고 쓰는 정도는 얼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할수록 신기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큰 행운을 잡았는지 다시 한 번 곱씹었다.

"대체 여기에 얼마나 더 비밀이 숨어 있을까?"

제론은 기대감 어린 눈으로 판에 다시 정령을 넣었다. 이번에는 나타나는 글자를 대충이나마 읽을 수 있었다.

[태블릿 가동]

가장 위에 나타난 글이었다.

"이 판의 이름인가?"

일단 언어를 익히고 나니, 태블릿의 사용은 상당히 쉬웠다. 어떤 경우든 설명을 자세히 볼 수 있었기에 모르는 건 언제든 확인이 가능했다.

물론 언어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기에 군데군데 모르는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대충 문맥을 유추해서 뜻을 파악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또한 그러는 와중에 점점 언어의 이해도가 높아졌다. 기본 언어의 이해가 높아질수록 나머지 다섯 언어의 이해도 덩달아 높아졌다.

제론은 태블릿의 위력에 흠뻑 젖었다. 이건 혁명이었다.

태블릿으로는 무엇이든 가능했다. 또한 태블릿 안에는 어마어마한 지식이 쌓여 있었다. 마치 책 수만 권을 통째로 안에 넣어 둔 것 같았다.

제론은 떨리는 손으로 태블릿을 다시 아공간에 넣었다.

이제 마지막 기둥만 남았다. 제론은 그 기둥 안에 있는 수많은 알약을 확인했다. 하지만 대체 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별다른 설명도 없었다. 즉, 설명이 필요 없다는 뜻이었다.

"난감하군."

고대에는 아주 익숙하게 사람들이 이용하던 것이 분명했다. 제론은 잠시 고민하다가 알약 하나를 집었다. 그리고 그것을 입에 털어 넣었다.

알약 형태로 되어 있으니 먹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먹으면 뭔가 반응을 볼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알약은 입에 들어간 순간 그대로 녹아 식도로 흘러갔다. 그리고 제론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배가……."

배고픔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놀랍게도 알약은 밥이었다. 한 알에 한 끼 혹은 그 이상의 영양을 품고 있는 듯했다.

어쩌면 이곳은 고대인들이 수련을 위해 만들어 놓은 장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거의 확실할 것이다. 지금까지 제론이 겪은 일을 차근차근 생각하면 분명했다.

마나와 검술을 알려 주고, 언어를 주입시켰다. 그리고 오랫동안 지낼 수 있도록 식사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수련에 필요한 모든 것이 있지 않은가.

제론은 자신에게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나중에 다시 이곳을 찾아 수련하면 된다고 생각하니 그 아쉬움이 조금 가셨다.

"자, 이제 여기서 나가는 일이 문제인데……."

별로 걱정은 되지 않았다. 대충 자신이 이곳의 주인이 되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유적은 주인에게는 한없이 자비로웠다.

제론은 고개를 들어 다시 유적지 쪽을 올려다봤다. 유적지 내부가 투명한 천장을 통해 보였다.

"음?"

제론은 순간, 깜짝 놀랐다. 누군가 유적지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만일 그가 바닥을 본다면 그야말로 낭패였다. 지금이야 자신이 이곳의 주인이지만, 누군가 그 권리를 빼앗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이곳으로 들어온 게 확실한가?"

"감시하던 바에 따르면 분명히 유적지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젠장. 그럼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여기라면 처리하기가 딱 좋은데……."

유적지 안에 들어온 사람들의 대화가 고스란히 들렸다. 내용이 너무나 섬뜩했다. 저들은 제론을 죽이러 온 것이다.

'슈린 공작이 아주 작정을 했군.'

슈린 공작이 보낸 자들이 확실했다. 그중 하나는 제론도 아는 얼굴이었다. 그는 슈린 공작가의 기사였다.

"어쩔까요?"

"어쩌긴 뭘 어째? 더 뒤져 봐! 그놈 죽이기 전에는 돌아갈 생각도 하지 마! 가서 밖에 있는 놈들에게 주변 감시 확실히 하고 노숙 준비하라고 지시해!"

"예!"

상황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제론은 눈살을 찌푸리며 계속 위를 올려다봤다. 어차피 숨을 곳도 없었다.

슈린 공작가의 기사가 갑자기 아래를 내려다봤다. 제론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이를 악물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음? 뭐지?'

제론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슈린 공작가의 기사는 마치 자신을 못 본 것처럼 행동했다. 아니, 이 유적지 자체를 못 본 것처럼 행동했다.

처음에는 자신을 놀리는 건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좀 더 지나자, 제론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저들은 이곳을 볼 수 없었다. 또한 이곳의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후우. 깜짝 놀랐네."

제론은 자리에 주저앉아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아직 나가는 법은 모르지만 이대로 나갈 수도 없었다. 그냥 나가는 건 날 죽여 달라고 가슴을 내미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여기서 좀 더 버티지 뭐."

어차피 새로 익힌 검술을 수련해야 한다. 이제 시작이니 더 갈고닦으면 정말 상상할 수 없는 경지에 오를 수도 있었다. 음식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검을 수련하다 보면 시간이야 금방 갈 것이다.

"저놈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버틸지가 관건이군."

한 달 내에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가야 한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아카데미를 쉴 수 있었지만, 그것도 한없이 기간을 늘릴 수 없었다. 최소한 한 달 안에는 돌아가야 금년을 마지막으로 졸업이 가능하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되는데 잘리면 곤란하지."

아카데미에서 잘려도 군대는 가야 한다. 오히려 더 힘들다.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기간트 라이더로 복무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일반 병사로 들어가야 한다. 그건 귀족 가문에게 어마어마한 치욕이었다.

제론은 그 뒤로 새로 익힌 검을 수련하고 고대어를 익혔다. 그리고 태블릿 사용법을 더 자세히 익히고, 그 안에 담긴 수많은 지식을 살펴봤다.

그 보름의 시간은 제론에게 있어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귀중했다. 제론은 그동안 자신이 찾은 유적에 대해 아주 조금씩 알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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