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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신 1-12(완) [김강현]

1권

프롤로그

유적은 텅 비어 있었다. 제론은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정말 싹 긁어 갔군."

알뜰하게도 쓸어 갔다. 유적 안에는 돌멩이 하나 남아 있는 게 없었다. 심지어는 벽에 그려진 문양이나 그림까지 몽땅 뜯어가 버렸다.

그래서 유적 곳곳에 뜯어 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지독한 놈들."

유적 내부는 다른 유적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보통 유적은 던전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중간 중간 침입자를 처리하기 위한 각종 트랩이 즐비했다. 그것을 모두 뚫고 들어가면 고대의 비밀을 엿볼 수 있었다. 더불어 고대에서부터 내려오는 보물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 유적은 그런 트랩들도 남아 있는 게 없었다. 그조차 싹 해체해서 통째로 뜯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제론은 황량한 유적 내부를 둘러보며 이를 갈았다.

"슈린 공작……!"

이곳의 유적을 몽땅 뜯어 간 자가 바로 슈린 공작이었다.

유적 발굴에는 많은 돈과 인력이 들어간다. 그래서 보통 여러 가문이 힘을 모아 발굴하고 이득을 나눈다.

이 유적은 슈린 공작가와 제론의 가문인 에어스트 백작가가 힘을 합쳐 발굴했다. 대부분의 일은 슈린 공작가에서 했고, 에어스트 백작가에서는 상당한 자금을 투자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에어스트 백작가는 몰락하기 시작했다. 유적으로 들어가는 자금이 지나치게 많아진 탓이었다. 결국 에어스트 백작은 유적 일부가 무너지는 바람에 그 안에서 죽고 말았다.

제론은 그 모든 상황이 다 의심스러웠다. 그리고 더 믿을 수 없는 건 계약서였다.

유적은 에어스트 가문이, 그리고 유적 안의 유물은 슈린 가문이 모두 가지기로 한 어이없는 계약이었다.

그 계약에도 뭔가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었지만 제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유적 근방의 땅이라도 가질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인가?"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없느니만 못한 땅이 바로 이 땅이었다. 너무나 척박해 쓰레기나 다름없는 땅이었는데, 세금은 세금대로 내야만 했으니 말이다.

슈린 공작은 이번 일로 어마어마한 이득을 얻었다.

그의 가문이 유일하게 긴장할 만한 상대인 에어스트 백작가를 무너뜨렸으며, 유적 발굴로 인해 헤아릴 수 없는 보물과 돈을 얻었다.

거기에 쓸모도 없고 세금만 나가는 땅도 남에게 던져 버렸다. 뿐이랴. 유적 발굴에 가문의 병사와 기사, 마법사를 썼기에 그들 역시 한층 성장했다.

그야말로 이득만 가득하고 손해는 전혀 없는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제론은 그것을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가문에 남은 핏줄이라고는 이제 자신뿐이었다.

"후우우."

숨을 길게 내쉰 제론은 고개를 저으며 유적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유적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었다. 보통은 이렇게까지 유적을 파헤치지 않는다. 유적은 발굴된 이후에는 관광 상품으로 써먹을 수 있다.

그렇기에 안에 있는 문양이나 벽화는 남겨 두는 것이 보통이었다. 한데 이곳은 그조차 불가능했다.

바닥 곳곳에 깊은 구덩이가 보였고, 벽 군데군데가 마치 폭탄이라도 맞은 듯 무너져 있었다.

제론은 그렇게 유적의 끝에 도착했다. 그곳은 원래대로라면 유물이 잔뜩 쌓여 있는 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텅 빈 것도 모자라 벽면 곳곳이 파헤쳐지고 무너져 있었다.

"폐허도 이런 폐허가 없네."

제론은 멍하니 내부를 둘러봤다. 거대한 동공이었는데, 천장까지 파헤쳐진 걸 보고는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 너무하는군."

그래도 이제 더 이상 가져갈 게 남지 않았으니 슈린 공작가도 관심을 끊을 것이다.

제론은 동공 한가운데 누웠다. 바닥이 깊게 파헤쳐져 있기에 구덩이 안에 누운 셈이 되었다.

"꼭 무덤에 들어간 것 같구나."

제론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휘류루루룽.

따스한 바람이 한차례 불어 제론의 몸을 감쌌다. 제론은 그제야 미약하게나마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제론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바람이 손가락에 머물렀다. 사실 그것은 바람이 아니라 바람의 정령이었다.

"세상에 이런 게 존재한다는 걸 과연 아는 사람이 있을까?"

제론은 손가락을 휘감고 노니는 정령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나마 요즘 자신에게 웃음을 주는 유일한 존재였다.

정령은 제론의 손가락을 빙빙 돌다가 손등을 타고 손목으로 올라갔다. 제론의 손목에는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무언가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과 함께 전해지는 팔찌였다. 물론 아무도 그 비밀을 알아낸 사람이 없었다.

정령이 팔찌를 몇 바퀴 돌더니 갑자기 팔찌 안으로 스며들어 갔다.

제론은 그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뭐지?"

팔찌가 갑자기 빛나기 시작했다.

화아아아악!

눈이 멀어 버릴 정도로 강렬한 빛이었다. 그리고 유적지 전체가 미약하게 흔들렸다.

우르르르릉.

제론은 갑자기 자신이 아래로 쑥 내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리고 다시 환해졌을 때, 제론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대체 여기가 어디지?"

사방이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기묘한 문양이 가득 찬 공간이었다. 문양들을 휘돌던 빛이 이내 하나로 모이더니 그대로 제론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지잉!

제론은 너무나 갑작스런 상황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고 이마에 그 빛을 그대로 맞고 말았다. 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광선이 제론의 이마에 있다가 양쪽 눈으로 한 번씩 자리를 이동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오 마스터 인식. 홍채 등록. 초기 권한을 설정합니다.

제론은 멍하니 그 모든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문양에서는 더 이상 빛이 나지 않았다. 제론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쳐다봤다.

"아……!"

투명한 천장을 통해 보이는 것은 유적지 내부의 광경이었다. 어떻게 온 건지 모르지만 이곳은 유적지의 지하였다. 제론의 가슴이 거세게 뛰었다.

숨겨진 유적을 찾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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