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화. 전설의 용병 - (12)
“셰퍼드, 옛 동료와 조만간 얼굴을 마주하실 텐데 지금 기분이 어떻습니까?”
“한 대 맞질 않기만 바랄 뿐입니다.”
명예의 전당 입회식을 앞두고 데이브 셰퍼드는 기자들 앞에서 덤덤히 소감을 밝혔다.
셰퍼드는 통산 586홈런을 친 거물, 지명타자라는 편견을 걷어내도 이 정도면 첫 턴에 명예의 전당 입성이 가능한 성적이다.
하지만 좋지 않았던 말년 때문에 평가가 깎인 게 사실, 팬과 주먹다짐을 벌이고 심지어 시즌 중에 은퇴를 발표하면서 아주 불성실한 선수라는 낙인을 자초했다.
“이제 와서 복귀하고 싶다고?”
“웃기시네.”
뒤늦게 잘못을 뉘우치고 복귀를 추진했지만 보스턴은 셰퍼드를 받아주지 않았다.
특히 당시 팀 내 에이스였던 다카기는 셰퍼드의 돌발행동에 매우 분개했다.
다시 내 눈앞에 띄면 처맞을 각오를 하라며 반발했고, 당시 팬들 분위기도 고압적이라 셰퍼드는 끝내 그라운드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렇게 흘러간 세월, 셰퍼드는 은퇴 후 5년 만에 명예의 전당 입성 자격을 얻었지만 첫 투표에서 66.8%에 그쳤다.
평소 기자들에게 불친절했던 것도 있고, 업적에 비해 책임감이 없는 선수라는 대중의 인식도 변하지 않았다.
다음에는 들어가겠지 내년에는 들어가겠지 했는데 어느덧 7수까지 이어진 도전,
보다 못한 칼 에스페로자 - 울프 비더만 등이 지원사격에 나섰다.
“셰퍼드는 지난 일을 후회하고 반성하고 있습니다. 약물을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냉정한 평가를 하느냐, 이런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셰퍼드는 MLB에서 지울 수 없는 업적을 세운 선수입니다. 그에 걸맞은 지지와 명예를 누리길 희망합니다. 지지를 부탁드립니다.”
그때부터 서서히 오르기 시작한 투표율, 그리고 7수만에 셰퍼드는 88%지지를 받아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기자들은 용서했지만 다카기는 날 용서했을까. 셰퍼드는 솔직히 두렵다는 소감을 남겼다.
“그래도 12년 만에 만나는 건데, 악수는 나눠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겠죠. 일단 가드부터 올리겠습니다. 언제 주먹이 날아올지 모르니까요.”
셰퍼드는 현역시절과 달리 기자들의 인터뷰에 친절히 응했다.
유쾌한 농담을 나눌 정도의 발전, 이렇게 쉬운 일이었는데 현역 시절 때는 왜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했던 걸까. 돌이켜보면 후회뿐, 뭣보다 옛 친구가 날 웃으면서 맞이해줄지 확신이 없었다.
* * *
“단장님, 입회 식 연설은 생각해두셨습니까?”
“가면서 생각해두죠 뭐”
한편, 다카기 단장은 뉴욕 쿠퍼스 타운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헌액이 확정된 선수들은 명예의 전당 관계자와 동판을 새길 팀 로고를 정하거나, 자신의 동판이 걸릴 자리를 미리 살펴본다.
하지만 그건 은퇴하고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일,
단장으로서 새 삶을 시작한 다카기는 원정경기를 관람하고 헌액식 시간에 딱 맞춰 비행기에 올랐다.
[오빠, 출발했어?]
[아들, 왜 대답이 없어. 바쁘니?]
[아빠, 얼른 오세요. 저희도 스케줄 바쁜데 시간 내서 온 거예요.]
이런 사정도 모르고 문자 메시지를 연달아 보내는 가족들, 하지만 날 축하해주기 위해 모인 거 아닌가.
쓸데없는 말은 생략했고, 단장 전용비행기는 뉴욕 공항에 무사히 발을 들였다.
“와아아아 ~ !!”
행사장에 들어서자 붉은 물결이 휘몰아쳤다.
그 정체는 보스턴 팬들, 얼마 전 다카기 단장은 수더랜드 단장과 협의해 보스턴 로고 모자를 쓰고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등번호도 영구결번 될 예정, 왜 보스턴 품으로 돌아오지 않은 건지 원망했던 팬들도 있었지만, 이 조치로 다카기는 다시 보스턴의 영웅으로 추대됐다.
“서로 인사라도 하라고, 부탁인데 주먹은 뻗지 말고”
행사장에 나온 수더랜드 단장은 셰퍼드를 다카기 옆으로 이끌었다.
한때 정말 죽이고 싶었던 얼굴, 하지만 셰퍼드는 이제 50이 훌쩍 넘은 중년이 됐다.
셰퍼드도 보스턴 모자를 쓰고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몸, 내가 저 면상에 주먹을 날려봤자 무슨 이득이 있겠나.
다카기 단장은 말없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솔직히 네 얼굴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어.”
“역시 날 용서 못하는 거야?”
“그래, 네가 첫 턴에 명예의 전당 들어갔으면 이렇게 서로 얼굴 볼 일도 없었을 거야.”
셰퍼드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첫 턴에 명예의 전당 들어갔으면 이런 일도 없었다니, 7번째 투표까지 끌고 간 게 이상한 일이라는 거 아닌가. 어쨌든 내 실력은 인정해 준 친구, 그때 일은 정말 미안하다며 거듭 사과했다.
“됐어. 나중에 같이 사진 찍어야 되니까 그 굳은 얼굴이나 잘 펴두라고”
“알았어.”
옛 동료와 화해한 다카기 단장은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날 위해 이곳까지 달려와 준 가족들, 나 혼자만의 힘으로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을까.
입회식 연설 때 가족들에 대한 감사도 빼놓을 수 없겠지, 이때 여동생 코하루가 옆구리를 찔렀다.
“오빠, 연설 생각해 뒀어?”
“뭐 … 그냥 대충은 … ”
“내가 연설문 써왔는데 한 번 읽어 볼래?”
“그런 건 남이 짜주는 거 아니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로 해야지”
“그럼 내 얘기도 꼭 넣어줘야 돼. 알았지?”
다카기는 피식 웃고 말았다.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는 건 난데, 왜 본인이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하는 건가. 일단 알았다고 다독였고, 그렇게 행사가 시작됐다.
먼저 단상에 오른 헌액자는 데이브 셰퍼드, 셰퍼드는 쏟아지는 관객의 환호에 눈물을 삼켰다.
팬 폭행 사건과 책임감 없는 은퇴로 마음고생을 한 12년의 세월, 이 자리에 서기까지 너무 많은 후회와 반성이 있었기에 입을 떼기 어려웠다.
“어 … 저는 어린 시절부터 승부욕이 아주 강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보시다시피 저는 체격이 그리 크지 않죠. 그래서 제 친형제들에게 많은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셰퍼드의 가족들은 당황했다.
이미 지난 일이고 형제들 사이도 문제없는데 저런 말을 하다니, 하지만 뒷이야기가 더 중요했다.
“저는 형들과 싸우며 경쟁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사소한 일로 매일 싸웠고, 어머니가 매를 드셔야 끝이 났죠. 그런데 제가 메이저리그 드래프트를 신청했을 때 누구보다 많은 응원을 해줬던 게 제 형제들과 가족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셰퍼드는 생각보다 낮은 순위 드래프트를 받았다.
계약금도 겨우 250만 달러, 구단이 내게 거는 기대가 겨우 이 정도였나? 셰퍼드는 야구가 하기 싫다며 가족들에게 푸념을 늘어놨고, 바로 형들의 막말이 날아들었다.
“그때 형들이 그랬습니다. 야, 이 젖먹이 같은 자식아, 네가 야구 말고 뭘 할 수 있는데? 헛소리 집어치우고 가서 연습이나 하라고 말이죠. 제가 군말 없이 형의 조언을 받아들인 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명예의 전당에 서게 됐죠. 그때 제가 형에게 반항했다면 이 자리에 서지 못했을 겁니다. 다시 한 번 제 형제들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박수와 환호, 그 사이 마음을 정리한 셰퍼드는 못다 한 말을 이어갔다.
“저는 감독이나 동료들에게 사랑받지 못한 존재였습니다. 클리블랜드 시절이었나요? 그날 제가 역전타를 쳐서 팀이 승리를 거뒀습니다. 동료들은 더그아웃에서 뛰쳐나와 승리를 축하했죠. 하지만 라커룸에 들어가니 상황이 완전 달라졌습니다. 누구도 절 축하해주지 않더군요.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팀이 아닌 내가 위대하다고 생각했죠. 엄청난 착각이었습니다. 야구는 저에게 피난처이자 천국이었습니다. 저처럼 제멋대로에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머저리가 어떻게 성공을 하고 대우를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그걸 깨닫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절 다시 받아주신 팬 여러분들과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다시는 천국에서 도망치는 바보가 되진 않겠습니다.”
셰퍼드는 팬들에게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반성, 그제야 다카기도 마음속에 남아 있던 약간의 서운함을 지워냈다.
“여러분,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투수를 큰 박수로 맞이해주십시오.”
“와아아아 ~ !!”
이제는 또 다른 영웅이 등장할 차례, 행사 진행을 맡은 칼 에스페로자는 다카기 단장과 포옹을 나눴다. 올스타전에서 처음 붙었던 그 루키를 이렇게 다시 마주하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이제 이 단상의 주인공은 나, 다카기는 자신에게 집중되는 5만 명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제가 미국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가 생각나는군요. 당시 저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유망주였습니다. 이런 제가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준 보스턴 구단에 먼저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와아아아아 ~ ”
“King!! King!! King!!”
사방에서 쏟아지는 보스턴 팬들의 함성, 주위가 조금 잠잠해지자 다카기 단장은 속마음을 쏟아냈다.
“셰퍼드가 방금 전 이런 말을 했더군요. 팀이 아닌 선수가 위대하다고 생각한 건 엄청난 착각이라고요. 하지만 제가 보스턴에 있는 동안 팀은 제 중심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거기에 토를 달지 않았죠. 수더랜드 단장도 중요한 일은 제게 동의를 구했습니다. 가끔은 팀보다 위대한 선수도 있죠. 제가 바로 그런 선수였습니다.”
팬들은 폭소했다.
셰퍼드와는 너무 다른 연설, 이렇게까지 자기 자랑을 할 줄이야. 하지만 다카기 단장이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하지만 짚고 넘어갈 건 넘어가야죠. 저는 메이저리거가 되기 전까지 고영길 회장의 손자로 살았습니다. 제게 할아버지는 너무 거대한 존재였고 저도 한 때는 그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죠.”
다카기 하루요시라는 이름이 아니라 고영길 회장의 손자로 살아왔던 학창시절, 다카기는 어떻게든 그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할아버지가 싫어서 그랬던 게 아니라, 할아버지의 명성이 아닌 내 실력으로 사회에서 인정을 받고 싶었다.
그래서 메이저리거 시절, 리더십이라는 명분 아래 필요 이상으로 전권을 휘둘렀고, 나는 이렇게 위대하고 쓸모 있는 사람이니 인정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자아도취에 빠졌다.
그리고 그게 몇 몇 팀원과의 충돌로 이어진 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나는 팀보다 위대한 선수가 아니었다.
그저 사회에서 인정을 받기 위해 발버둥 쳤던 애송이였을 뿐, 은퇴를 하고 시간을 보내다 보니 내가 얼마나 유치한 짓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저는 사실 위대한 사람이 아닙니다. 언제나 주위의 도움을 받았고, 지금도 도움을 받고 살고 있죠. 저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사람을 만나고 지금도 남부러울 것 없는 생활을 하고 있죠. 내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람이 주위에 있다는 건 정말 기쁜 일입니다. 제멋대로였던 제가 이 자리까지 설 수 있었던 건 주위의 보살핌 덕분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쏟아지는 박수갈채, 전설의 시선은 의자에 앉은 가족들을 향했다.
“그리고 제 사랑스러운 아이들에게도 한마디 하고 싶습니다. 지금 너희들은 엄마와 아빠의 보살핌을 받고 있지만 그걸 간섭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건 정말 기쁜 일이니까, 그리고 너희들이 어른으로 성장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되길 바란다. 내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다. 그리고 제 아내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녀는 저와 20년을 함께 했고 훌륭한 엄마이자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이기도 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동생, 친구들 모두 사랑합니다. 여러분들이 있었기에 이곳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카기 단장은 아랫입술을 꾹 깨문 채 고개를 숙였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 휘몰아쳤지만 나는 이제 막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몸,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고, 날 도와줄 친구가 옆에 있다면 뭐든 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살아온 인생, 앞으로 걷게 될 길도 두렵지 않았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