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360화 (360/361)

360화. 전설의 용병 - (11)

‘몸 풀기는 이 정도면 됐고, 본 게임으로 들어가 볼까.’

3회부터 다카기 단장은 피칭 스타일을 단조롭게 바꿨다.

7년 전 은퇴 기준으로, 다카기 단장은 통산 슬라이더 피안타율 0.115를 기록했다.

빠른 볼 구위가 좋은 만큼 체인지업을 주무기로 쓰던 시절도 있었지만, 29 ~ 30세 시즌에는 다시 슬라이더 위주로 돌아왔다.

경기 초반 체인지업과 투심을 섞어준 건 다양한 구종을 시험하기 위한 몸 풀기, 7년만의 등판이라 슬라이더가 통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이제 확신이 생겼으니 실천으로 옮길 뿐, 93 ~ 5마일 사이를 오가던 빠른 볼 구속도 높였다.

[딱 ~ !]

“파울, 이번에도 빠른 볼입니다. 다카기 단장이 점 점 구속을 끌어올리고 있는데요.”

“구속뿐만 아니라 빠른 볼 비율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1회에 빠른 볼 3개 - 슬라이더 2개 - 체인지업과 투심을 3개 던졌고, 2회에도 비슷했거든요. 그런데 3회 들어서는 전부 빠른 볼만 던지고 있습니다.”

더 경악스러운 건 빠른 볼이 가운데로 형성되고 있다는 것,

메이저리그 평균 구속인 93마일이 포수 미트에 도달하는 시간은 대략 0.44초지만 이건 투수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특히 다카기 단장처럼 팔다리가 긴 선수라면 공을 더 앞으로 끌고 오는데, 현역 시절 다카기 단장이 던진 98마일 공은 약 0.3초 만에 포수미트에 도달했다.

타자가 스트라이드를 하면서 스윙을 임팩트 지점으로 끌고 오는 시간이 대략 0.5초(오차 범위 0.14초), 이론상으로 다카기 단장의 빠른 볼은 공략이 불가능했고, 실제로 결과로 증명됐다.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답이 없네.’

다른 투수들보다 길쭉한 팔다리에, 쓰리쿼터 폼에서 나오는 릴리스 포인트는 타자들에게 악몽을 선사했다.

빠른 볼에 타이밍을 맞춰도 타격이 된다는 보장이 없고, 그 타이밍에 슬라이더나 체인지업이 들어오면 속수무책

타격 자체가 안 되니 통산 BABIP도 0.241에 머물렀다.

투수 평균 BABIP이 0.300으로 알려져 있는데, 주자가 루상으로 나가는 변수를 차단해 버린 것, 가운데로 던져도 치지 못하는 장면이 반복되면서 홈팬들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스윙!! 삼진입니다!! 98마일!! 여러분!!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건 비디오 게임이 아닙니다!! 현실입니다!!”

“37살에 98마일을 던지고 있네요. 도대체 왜 은퇴 한 겁니까?”

쌩쌩하다 못해 봉인에서 깨어난 대마왕의 포스,

사방에서 환호가 쏟아졌지만 다카기 단장은 캡을 꾹 눌러썼다.

그늘 아래로 보이는 건 오뚝한 콧날과 굳게 다문 입술 뿐, 숨을 헐떡이거나 혀를 날름거리며 긴장을 다스리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깨어난 악마의 전격은 언제까지 계속되는 건가.

누구도 멈출 수 없던 악의 진격을 어빈 말로니가 가로막았다.

‘이제는 조금 감이 잡힌 것 같은데’

타석에 들어서기 전, 말로니는 앞선 타석을 차분히 정리했다.

타이밍을 넉넉히 잡고 때리긴 어려운 공, 그래도 다른 타자들과 달리 어떻게든 따라가고 있다.

첫 타석에서도 땅볼은 됐지만 타격이 됐고, 두 번째 타석도 6구까지 가는 승부 끝에 삼진으로 물러났지만 좌익수 쪽으로 타구를 보냈다.

빠른 볼에 타이밍만 맞는다면 어떻게든 되겠지, 초구부터 달려들었다.

‘아차, 이게 아닌데’

생각보다 높게 들어오면서 허공을 가른 배트, 몸이 기우뚱할 정도로 큰 스윙을 돌린 말로니는 타석 주변을 맴돌았다.

민망함보다는 내가 저 공을 칠 수 있을까라는 자신감이 꺾이는 게 더 두려운 일,

다음 공도 빠른 볼을 노렸다.

[따악 ~ !]

“다시 파울입니다. 카운트는 노 볼 투 스트라이크”

“컨택은 되고 있는데 밀어내는 게 버거워 보이네요. 이쯤에서 슬라이더를 던지겠죠?”

“제가 볼 땐 빠른 볼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다카기 단장의 빠른 볼은 누구도 쳐내기 어려워 보이니까요.”

볼 배합을 두고 벌어진 중계석의 토론, 다카기는 빠른 볼을 택했지만 말로니는 또 커트해 냈다.

생각보다 잘 따라오는 타자, 고집을 꺾고 슬라이더를 택할까. 하지만 백전노장은 힘과 힘의 맞대결을 택했다.

[따아악 ~ !!]

“어?!! 이 타구는!! 좌측으로!! 빠르게!! 담장 너머로 사라지는 군요 … 어빈 말로니의 솔로 홈런, 피츠버그가 2대 1로 따라붙습니다.”

“지금은 빠른 볼, 가운데였거든요. 그래도 다른 타자들은 치지도 못했는데, 말로니가 한 건 해냈습니다.”

홈런을 내준 다카기 단장은 입을 비쭉 내밀며 돌아섰다.

현역 시절 때도 가끔 이렇게 홈런을 맞았는데 그 버릇은 아직도 고쳐지지 않은 건가. 혈기를 앞세우는 건 7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었다.

‘이제 나도 다 됐군.’

다카기 단장은 이번 이닝이 마지막이라는 걸 깨달았다.

투구 수는 어느덧 102개, 시카고의 데이비드 왓 감독도 이번 이닝은 지켜보기로 마음을 정했다.

‘나는 도저히 안 되겠다.’

4번 타자 잭 라스무스는 시원하게 3번 돌리고 더그아웃으로 돌아갔다.

아무리 애를 써도 따라갈 수가 없는 속도, 말로니는 이걸 어떻게 때려낸 건가. 3연 타석 삼진이라는 초라한 성적에 자존심은 걸레가 됐다.

“야, 도대체 넌 어떻게 때린 거냐?”

“운이 좋았어. 솔직히 빠른 볼만 계속 던질 줄 몰랐거든”

말로니는 라스무스의 질문에 나름대로 친절한 설명을 했다.

솔직히 다카기 단장이 체인지업이나 슬라이더를 섞어 줬다면 헛스윙을 돌렸을 거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너무 강했던 전설, 그 허점 덕분에 홈런을 칠 수 있었다.

“야, 그렇게 말하면 내 꼴이 뭐가 되냐?”

“뭐가?”

“분명히 말하는데 나는 전력을 다했고, 아 ~ 자존심 상해”

라스무스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친구의 말이 옳다면, 난 다카기 단장에게 빠른 볼만 던져도 잡아낼 수 있는 3류 선수라는 거 아닌가.

그것도 3타석 모두 삼진, 초반에는 변화구도 보여주더니 2번째 타석부터는 대놓고 빠른 볼만 던져댔다.

그냥 완패, 하지만 빠른 볼을 못 치는 건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와아아아 ~ !!”

그 사이, 다카기 단장은 후속 타자 앨런 스미스를 삼진 처리했다.

오늘 경기 13번째 삼진, 다음 타자가 마지막이라는 걸 예감한 시카고 팬들은 일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수를 받아 마땅한 활약, 양 팀 더그아웃도 경의를 표했다. 마지막은 삼진이 좋겠지, 그렇게 살아있는 전설은 마지막 힘을 쥐어 짜냈다.

‘아차’

하지만 1루로 향한 타구, 1루수가 자리를 비운 사이 백업을 들어갔다.

전력을 다해 뛰어오는 타자, 아직 젊은 것들에게 지지 않는 전설은 한 걸음 앞서 1루를 터치했다.

홈런을 내줬지만 나름 깔끔하게 막은 7이닝, 제 몫을 다 한 다카기 단장은 깊숙이 눌러쓴 캡을 벗어 관중들의 환호에 답했다.

이벤트라고 하기엔 너무 대단했던 활약, 그러나 관중석의 열기도 오래가지 못했다.

“이 멍청이들아!!”

“맙소사!! 완벽한 하루를 이렇게 망칠 줄이야!!”

7회까지 2대 1로 앞서 가던 시카고는 8회에 9회, 불펜이 연달아 실점을 하면서 거짓말 같은 4대 2패배를 당했다.

단장이 그렇게 도와줬는데 패배라니, 아니, 그것보다 7년 만에 그라운드에 복귀한 전설의 경기를 망쳤다는 점에서 시카고 선수들은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단장님, 아쉽게 복귀전 승리를 놓치셨는데, 지금 기분이 어떠십니까?”

“승패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말씀드리는데 저는 그라운드에 복귀한 게 아닙니다.”

다카기 단장은 기자회견에서 덤덤히 소감을 밝혔다.

내가 젊은 선수들 기죽이겠다고 여기로 돌아온 건가. 약간의 엄살도 피우며 무거운 분위기를 풀었다.

“솔직히 이렇게 많은 공을 던질 생각은 없었습니다. 이벤트로 시작한 게임이었는데, 공을 던지다보니 저도 모르게 욕심을 부리고 말았습니다.”

“혹시 몸에 무슨 이상이라도?”

“예, 허리가 조금 욱신거립니다.”

어울리지 않는 엄살에 기자들은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오늘 투구만 보면 전성기와 비교해도 뒤질 게 없는데, 역시 나이는 속일 수 없는 건가.

혹시 다음 경기도 등판할 생각이 없느냐는 질문에 다카기 단장은 고개를 저었다.

“명예의 전당 헌액식이 4월 22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날 제 커리어는 완전히 막을 내리겠죠.”

“5월에 보스턴과 맞대결이 있잖습니까. 그때 등판하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말씀드렸다시피 허리가 약간 안 좋습니다. 시구라면 해줄 수 있겠지만 등판은 어렵겠네요.”

물론 허리가 아프다는 건 엄살이었다.

생각보다 너무 거하게 달려버린 이벤트 게임, 거기다 불펜이 방화를 저지른 사건 때문에 시카고 선수단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처져 있다.

내가 젊은 선수들보다 낫다는 걸 증명하러 온 것도 아니고, 일러 거면 뭐하러 단장으로 복귀했겠나.

즐거운 일탈은 여기까지, 선수들 기죽이는 짓은 더 이상하지 않았다.

“저는 인정 못 합니다. 시즌 끝나고 나서라도 찾아갈 겁니다.”

하지만 피츠버그의 잭 라스무스는 다카기 단장의 은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늘 경기는 메이저리그가 문을 닫는 날까지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텐데, 나는 7년 만에 복귀한 선수에게 삼진 3개를 헌납한 선수로 기억돼야 하는 건가.

자존심이 상해서 견딜 수 없었다.

“다카기 단장은 저와의 승부에서 이기고 도망친 것뿐입니다. 이대로 은퇴한다면 제 승리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이기고 도망쳐도 승리는 승리 아닙니까?”

자비 없는 기자의 발언, 무안해진 라스무스는 먼 곳을 바라보며 웃음을 유도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다카기 단장을 상대로 판정승을 거뒀다고 생각하나요?”

“뭐 … 글쎄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마이크는 전설과 선발 맞대결을 펼친 클리포드 후토에게 돌아갔다.

클리포드는 오늘 7이닝을 6피안타 2실점, 8삼진으로 버텨냈고 타선이 극적인 역전타를 날려주며 개막전 승리 투수가 됐다.

이겼다면 이긴 건데, 솔직히 말하면 7이닝 1실점 13탈삼진 게임을 벌인 전설의 투구가 더 뛰어났다.

“다카기 단장이 경기 전, 당신을 250승 더 나아가 300승 투수가 될 재목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아니요. 처음 듣는 말입니다.”

빈말이라도 그런 말을 해줬다는데, 내가 이 자리에서 전설을 이겼다고 으스대봤자 무슨 이득이겠나.

잠시 생각을 정리한 클리포드는 덤덤한 목소리로 소감을 전했다.

“아직 40승도 못 거둔 제가 300승까지 갈 수 있을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다카기 단장께서 오늘 제게 1승을 선물해 주셨으니, 목표를 더욱 높게 잡으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럼 올해는 20승 거두는 겁니까?”

“20승보다는 월드시리즈 우승이 우선이죠. 다카기 단장은 현역 시절 무려 8번이나 월드시리즈 우승을 했습니다. 제가 300승을 채워도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을 넘어섰다고는 할 수 없죠.”

다카기는 이 소식을 듣고 크로포드를 해줬다.

누군가의 목표가 된다는 건 그만큼 위대한 선수생활을 했다는 것,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이벤트는 끝났고 이제는 단장의 직무로 돌아갈 시간,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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