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9화. 전설의 용병 - (10)
“전설의 투수와 맞대결을 하게 됐는데 소감 한 말씀 해주시죠.”
개막전을 앞두고 기자들은 피츠버그의 에이스 클리포드 후토에게 마이크를 내밀었다.
클리포드는 작년 시즌 15승 7패, 평균자책점 3.28, 214와 1/3이닝동안 삼진을 269개나 잡아내며 만테냐 어워드 2위에 올랐다.
겨우 23살에 이뤄낸 업적, 인터벌이 짧고 공격적인 투구로 스트라이크 존 좌우를 찌르는 커맨드까지 갖췄지만 이런 스타일 때문에 피홈런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Clifford are compatible to legendary pitcher Takagi but he may not be forward compatible]
=클리포드는 다카기에 비견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상위호환은 될 수 없다.
여론은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다카기도 현역시절 클리포드와 비슷한 투구를 했다. 스트라이크존 좌우를 찌르면서 타자의 타이밍을 뺏고 볼넷을 거의 주지 않는 공격적인 투구, 하지만 클리포드처럼 홈런은 많이 맞지 않았다.
스타일은 비슷해도 분명했던 실력 차이, 클리포드는 평가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물론 저는 그 선수에 비해 훨씬 부족합니다. 만테냐 어워드 수상도 하지 못했고, 월드시리즈에서 팀을 승리로 이끌지 못했으니까요. 따라잡기 위해 노력할 뿐입니다.”
하지만 다카기는 이런 전개를 기뻐하지 않았다.
은퇴한지 7년이나 지난 내가 어린 선수 앞에서 거들먹거려봤자 누가 박수를 쳐주겠는가.
여전히 비교하고 따지기 좋아하는 기자들, 그 앞에서 덤덤히 소감을 밝혔다.
“클리포드가 저와 비슷한 스타일의 투수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미 모험을 끝낸 탐험가죠. 그 선수는 가야할 길이 멉니다. 제가 갔던 길을 따라갈 이유도 없고 저와 비교될 입장도 아니죠. 저는 10년 동안 선수생활을 하면서 답을 찾았고 이렇게 단장으로서 새 삶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 선수가 모험을 하며 찾은 답이 저와 같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30살에 멈췄던 것과 달리 그 선수는 250승, 더 나아가 300승까지 달성할지도 모르죠.”
“클리포드가 당신의 기록을 넘어설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물론이죠. 재능이 있는 선수입니다.”
다카기는 현역시절, 누군가와 비교되는 걸 극도로 꺼려했다.
내가 최강인데 어떤 선수가 나와 비교된다는 건가. 보란 듯이 밟아줬고 10년 동안 메이저리그에서 최강자로 군림했다.
하지만 이젠 입장이 달라졌다.
최강을 추구하는 모험도 막을 내렸고 이제는 선수단을 다독여 팀을 우승에 올려야 하는 단장이 됐다. 최강논쟁은 과거의 일일 뿐, 지나간 영광에 얽매이지 않았다.
“다카기 단장은 몇 이닝을 던지는 겁니까?”
“그건 저도 모릅니다.”
마이크를 넘겨받은 사람은 시카고의 감독 데이비드 왓,
이벤트로 하는 등판이라 길게 던질 이유는 없지만, 상황에 따라 어떻게 바뀔지 누가 아나. 모든 가능성을 열어뒀고 그렇게 떠들썩한 분위기에서 축제의 막이 올랐다.
“와아아 ~ !!”
“모두 일어나 전설을 맞이하라!!”
이날 시카고의 홈구장 웨스트사이드 파크는 일일 관중 기록을 경신, 무려 47744명이 들어섰다.
좌석은 42059석 뿐이지만 부족한 좌석도 전설의 보러 온 팬들의 열기를 막을 순 없었다.
“자!! 여러분!! 모두 전설의 투수를 맞이하십시오!!”
“다른 설명이 필요 없죠. 이 단장의 위상은 사진 한 장으로 요약이 가능합니다.”
시카고 지역방송국은 사진 한 장을 내보냈다.
다카기의 저택 벽면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영광의 흔적,
메이저리그 신인왕 트로피, AL MVP 트로피 2개, ALCS MVP 트로피 3개, 월드시리즈 MVP 트로피 3개, 골드 글러브 9개, 만테냐 어워드 트로피 9개,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 8개, 세계 어느 종목을 따져 봐도 단기간에 이렇게 많은 상을 쓸어 담은 선수는 없다.
말 그대로 MLB 무대 위에 군림했던 폭군이자 전설,
그 살아있는 전설이 7년 만에 마운드에 복귀했으니, 이벤트 경기라도 세간의 관심이 쏟아진 건 당연했다.
‘나는 미국인이기도 하지’
쏟아지는 환호 속에서 다카기 단장은 평온한 얼굴을 유지했다.
은퇴 후 6년 동안 일본에서 지냈지만,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엄연한 미국인, 흘러나오는 애국가에 경건히 예의를 갖췄다.
내가 발을 붙이고, 날 필요로 하는 곳이 내 고향이자 조국 아니겠는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팬들도 환호를 멈추고 애국가에 예를 표했다.
“자!! 1회 초 피츠버그의 공격으로 새로운 시즌이 막을 올립니다!! 선두 타자는 에버렛 칼멘, 작년 시즌 타율 0.274, 홈런 9개, 45타점을 기록했습니다.”
“솔직히 칼멘은 관심 밖입니다. 다카기 단장이 과연 어떤 공을 던질지, 다들 주목해주십시오.”
초구부터 94마일,
현장에 있는 팬들은 물론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세계 야구팬들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7년 전과 비교해 거의 다를 게 없는 투구, 약간 방심하고 있던 에버렛 칼멘은 혀를 비쭉 내밀었다.
37세 노장이 던져봤자 얼마나 하겠나. 시범경기에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단장,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구속을 끌어올린 건가. 하지만 돌아온 전설은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스윙!! 헛칩니다!! 카운트는 노 볼 투 스트라이크!!”
“현역시절 악마로 불렸던 바로 그 슬라이더죠. 오늘 피츠버그 타자들은 지옥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악몽을 체험하게 될 겁니다!!”
해설위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에버렛의 방망이가 헛돌았다.
헛스윙을 이끌었던 2구보다 더 느리고 훨씬 많이 꺾이는 슬라이더, 에버렛은 고개를 저으며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어때?”
“아무것도 안 보여.”
대기 타석에 서 있던 마크 핵먼은 어버렛의 증언에 귀를 기울였다.
빠른 볼과 전혀 구별이 안 되는 슬라이더, 그것도 종류가 2가지라 어떤 타이밍에 배트를 내야 할지 감이 안 잡힌다.
눈이 있어도 장님이 되는 타자들, 좌우를 찌르는 제구도 현역시절과 다르지 않았다.
‘이게 말이 돼?’
불펜에서 몸을 풀던 클리포드는 할 말을 잃었다.
피츠버그가 동네북인 것도 이제는 옛말, 작년 시즌 17년 만에 90승을 거두며 와일드카드로 NL 챔피언십 시리즈까지 올라갔다.
그 역전의 용사들을 장난감처럼 다루는 전설의 투구,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하하 ~ 나도 아직 쓸 만한데?’
다카기는 옅은 미소를 머금고 포수와 사인을 주고받았다.
바짝 말라있던 몸에 단비가 내린 기분이랄까. 가끔 이 환호가 그리웠던 것도 사실, 원래는 1이닝 정도만 던질 예정이었지만 좀 더 멀리 가고 싶다는 욕심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들어옵니다!! 이번에도 초구를 잡고 시작하는군요.”
“지금은 체인지업인지 투심인지 구별이 안 되는데요. 어쨌든 가라앉는 궤적만 보면 체인지업입니다.”
체인지업은 투심 그립과 포심 그립으로 나뉜다.
투심 그립 체인지업은 중지와 약지를 살짝 돌려줘 공이 옆으로 휘는 움직임을 살려낸다.
다카기 단장이 현역시절 자주 애용했던 궤적, 물론 괴물 투수는 한 가지 투심만 던지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공을 눌러서 인위적으로 가라앉는 궤적도 살려주는데, 이것 때문에 투심이 스플리터처럼 가라앉아 체인지업으로 오인당하기도 했다.
어쨌든 참 타자입장에선 상대하기 괴이한 변종괴물들, 마크 핵먼도 눈뜬장님 신세를 면치 못했다.
‘이게 도대체 뭐야?’
2구는 95마일 바깥쪽 높게 들어오는 빠른 볼, 좌우상하를 흔드는 궤적에 끌려 다닌 핵먼은 떨어지는 체인지업에 헛방망이를 돌렸다.
슬라이더 위주로 상대했던 에버렛과는 전혀 다른 볼 배합, 아직 건재한 전설 앞에서 피그버그 타선은 꼬리를 내렸다.
3번 타자 어빈 말로니는 투수 앞 땅볼 아웃, 3타자를 8구만에 처리한 전설은 홈팬들의 환호를 받으며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전설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우리 앞에서 잠시 모습을 감췄을 뿐입니다!!”
시카고 지역방송 멜빈 맥팔렌드 위원은 거듭 경의를 표했다.
말 그대로 온몸이 저릿해지는 투구, 보스턴은 이 투구를 10년 동안 독점했단 말인가.
이런 투수를 두고도 월드시리즈 우승을 못하는 게 바보,
맥팔렌드는 다카기 단장이 현역으로 돌아온다면 시카고의 우승도 꿈이 아니라며 현역복귀를 부추겼다.
그건 팬들도 마찬가지, 단장이 아니라 현역으로 복귀하는 게 옳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거 일이 너무 커졌는데’
더그아웃에 앉아 있던 다카기 단장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망신만 안 당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쓸데없이 화려한 투구로 팬들의 기대감만 높여버렸다.
이렇게 되면 내 뒤로 나올 투수들의 부담이 심해질 텐데, 더 달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지만 팬들의 환호를 외면하기도 애매했다.
‘장난이 아니구나. 그래도 질 수 없지.’
이어지는 시카고의 1회 말 공격, 피츠버그의 에이스 클리포드 후토가 마운드에 올랐다.
다카기 단장의 하위호환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당했는데, 여기서 물러설 순 없지 않은가.
37세 노장에게 패배할 실력이라면 은퇴를 하고 말지, 이를 악물고 투구에 임했다.
좌우를 찌르는 평균 94마일 빠른 볼과 예리하게 꺾이는 슬라이더, 클리포드는 전설의 투구를 거울처럼 재현해 냈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 나도 할 맛이 나지.’
그 모습에 다카기 단장도 살짝 몸이 달아올랐다.
아직 젊지만 간만에 현역시절로 돌아간 기분, 끝장을 보자는 각오로 다음 이닝을 맞이했다.
* * *
“엄마, 오빠 엄청 잘 하는데요?”
“얘가 쓸데없는 소리를 … 어휴 ~ 저러다 다치면 어쩌려고 … ”
이곳은 일본 하마마츠 현에 있는 다카기의 친가, 어머니는 불안한 눈으로 아들의 객기를 지켜봤다.
마흔이 다 되가는 아들이 젊은 놈을 이기겠다고 힘을 쓰고 있으니, 자식이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부모 눈엔 어린아이일 뿐, 어머니는 초조한 눈으로 경기를 지켜봤다.
[따악 ~ !!]
“자!! 이 타구는 좌익수 앞에 떨어집니다!! 다카기 단장이 타석에서 안타까지 뽑아내는군요!! 오늘 시카고의 두 번째 안타입니다!!”
“이렇게 되면 통산 타율이 0.320으로 올라가네요. 뭐 이런 단장이 다 있습니까?”
“그냥 선수 복귀하세요!! 뭐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염려와 달리 아들은 젊은 친구를 착실하게 밀어붙였다.
쟤는 도대체 나이를 어디로 먹는 건지, 60이 다된 어머니는 아들의 젊음과 혈기에 약간 부러움을 느꼈다.
‘어머 ~ 어머 ~ 쟤가 왜 저래’
이어지는 유격수 땅볼, 어머니는 2루를 향해 몸을 날리는 아들을 보고 경악했다.
백업을 들어온 2루수가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격렬한 슬라이딩, 약간 충돌이 있었지만 젊은 아들은 2루수에게 인사를 건네는 여유를 부렸다.
“적당히 하시죠. 그러다 다칠 수도 있습니다.”
“천만의 말씀, 아직 멀었지.”
아웃은 됐지만 다카기는 미소를 머금고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어머니가 이 모습을 보면 미쳤냐고 난리를 치고 있겠지, 하지만 오늘만큼은 일탈한 소년처럼 마음껏 날뛰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