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6화. 전설의 용병 - (7)
‘이거 생각보다 더 안 좋은데’
하지만 자신감도 잠시, 김인호는 첫 타석에서 일본 1군의 실력을 실감했다.
오늘 라이노스가 상대하는 니시테츠의 선발 후지이 테츠히사는 팀에서 5선발을 책임진다.
190cm의 장신에 폼은 쓰리 쿼터, 특유의 길쭉한 팔다리를 이용해 공을 최대한 끌고 나오는 투구를 한다.
평군 구속은 146km 정도지만 실제로 보면 더 빠른 편, 슬라이더가 주무기지만 커브와 체인지업도 가끔 섞어주며 패턴에 변화를 준다.
이 정도 투수가 5선발이라니, 상위 투수들은 도대체 어느 정도인가.
국가 대표 경기에서 일본 투수들을 만나 본 경험이 있지만 그건 벌써 8년 전, 그것도 아시안 게임에서 사회인 야구 선수들과 붙어본 게 전부다.
최근 국제대회에서 힘을 못 쓰고 있는 한국 대표팀, 그에 비해 일본은 매년 WBC에서 4강 이상의 성적을 거두고 있다.
명백히 벌어진 격차, 38살에 접어든 노장은 현실을 인정했다. 그렇다고 물러날 순 없는 승부, 차분하게 다음 공을 기다렸다.
“이번엔 볼이군요. 카운트는 투 볼 원 스트라이크 됩니다.”
“구속이나 구위는 괜찮은데 역시 제구가 문제죠. 이런 노장 선수를 상대로도 승부를 들어가지 못한다는 건 문제가 있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몸 쪽 깊숙한 공이 날아들었다.
투구를 할 때 투수의 팔이 타자를 향했다면 고의가 담긴 빈볼이지만, 후지이는 아니다.
몸이 먼저 움직이고 그 다음에 팔이 끌려나오는 투구 폼, 적당한 릴리스 포인트에서 공을 놓는다면 위력적인 투구가 되겠지만, 그게 안 되면 지금처럼 타자 몸 쪽으로 공이 날아온다.
본인의 긴 팔을 이용해 구위를 끌어올리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되는 게 투구, 스트라이크와 볼의 경계는 명확했다.
‘고르는 건 어떻게든 되겠는데 … ’
한편, 타석에서 잠시 물러난 김인호는 생각을 정리했다.
적극적인 타격을 하는 게 내 스타일인데, 솔직히 지금 공은 외야로 밀어내긴 어렵다. 그렇다고 볼넷으로 나가는 것도 선호하지 않는 편, 내일이 없는 입장이라 어떻게든 치고 싶었다.
따악 ~ !!
“아!!”
잘 쳤지만 3루수 정면, 김인호는 죽을 힘을 다해 1루로 뛰었지만 송구가 더 빨랐다.
“나쁘진 않았어요.”
미노 히사시는 돌아온 노장에게 오른손을 건넸다.
병살타를 친 애송이에게 권했던 위로를 내가 그대로 돌려받을 줄이야, 김인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를 쳐줬다.
‘이거 왜 이래?’
하지만 단장이 앉아 있는 특별석의 분위기는 냉랭했다.
아브레우의 실책이 빌미가 돼 선취점을 내준 라이노스, 그런데 3회에 또 실책이 나오고 말았다.
타구를 막아낸 1루수 프리젤이 커버를 들어오는 투수에게 공을 던져주다 실책이 나온 것, 한눈에 봐도 선수들의 집중력은 평소 같지 않았다.
2년 전, 교류전에서 7연패를 당할 때 분위기가 딱 이랬다.
하지만 이제 라이노스는 패배를 용납하지 않는 팀이 됐고, 팬들은 답답한 경기력에 불만을 터뜨렸다.
어쨌든 라이노스는 4회 초에 실책으로 다시 한 점을 내줬고, 2대 0으로 뒤진 상황에서 4회 말 반격에 나섰다.
“자, 이제 타석에는 오기 나가야스가 들어섭니다. 오늘 첫 타석은 땅볼, 시즌 타율은 0.267까지 내려왔습니다.”
“오늘까지 합해서 최근 13타수 연속 무안타입니다. 더 멀리 보면 최근 10경기에서 39타수 4안타 … 부진이 길어지면서 타순도 7번까지 내려왔는데 뭔가 보여줘야 합니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어요.”
[따악 ~ !!]
“말씀드리는 사이!! 우중간에 떨어지는 안타!! 오기 나가야스가 드디어 긴 부진에서 벗어납니다!!”
“아 … 그런데 이 선수를 잊고 있었군요. 여기서 안타가 나올까요?”
8번 타자 김인호의 등장에 해설위원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여기서 안타가 나온다고 해도 다음 타석은 투수, 라이노스 입장에선 득점을 내기 어려운 상황이다.
팬들도 별 기대 안 하는 분위기, 그래도 김인호는 당당한 발걸음으로 타석에 들어섰다.
‘번트는 필요 없다.’
라이노스의 오가야 감독은 강공을 지시했다.
2대 0으로 뒤지고 있으니 주자를 2루고 보내고 투수 타석에 대타를 기용해야 하나. 정말 바보 같은 작전, 예전이라면 그렇게 했겠지만 라이노스는 이제 퀵 후크나 번트를 잘 대지 않는 쪽으로 바뀌었다.
강한 야구를 하는 게 우리의 스타일, 번트를 대더라도 투수에게 시키는 게 나았다.
‘빠른 볼만 던지자’
한편, 니시테츠의 포수 유우키 히데모리는 철저한 파워 피칭을 유도했다.
38살이나 된 노장이 150km에 육박하는 공을 제대로 밀어내겠나. 첫 타석에서 3루 쪽으로 타구를 보냈지만 그렇게 강한 편도 아니었고, 빠른 볼이면 충분했다.
‘이것들이 날 우습게 보네.’
2구를 지켜본 김인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대놓고 빠른 볼 빠른 볼, 보란 듯이 3구를 받아쳤다.
[따악 ~ !!]
“아!! 이 타구는 유격수 정면!! 2루에 송구!! 다시 1루에서 아웃입니다!! 또 이렇게 기회가 무산되는군요.”
“오늘 패배한다면 다카기 단장도 책임이 있는 겁니다. 무슨 생각으로 이 선수를 선발 출장시켰는지 이해가 안 되네요.”
사방에서 쏟아지는 팬들의 야유, 다카기 단장은 머리를 긁적였다.
친척 형이 첫 타석에서 날린 타구는 안타를 기대하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나름 괜찮았다.
배트 볼 히터처럼 공을 쫓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나름대로 힘 있는 스윙을 했는데, 결과가 안 좋으니 어쩌겠는가.
선수를 기용했으면 책임을 져야 하는 법, 최근 팀 성적도 안 좋고 어떤 비난이든 감수하기로 했다.
‘그럼 그렇지, 해봤자 얼마나 하겠어?’
한편, 토니 아브레우는 곁눈질로 일그러진 노장을 살폈다.
2군에서도(30경기) 홈런 2개 친 선수가 저런 스윙을 해도 되는 건가. 차라리 2루 방향으로 타구를 굴려 주자를 진루시킬 것이지, 그렇게도 영웅이 되고 싶은 건가.
하지만 김인호는 자신의 방식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괜찮아. 난 할 일을 했어.’
하위타선이면 주자를 득점권에 보내는 데 초점을 둬야 하나,
무사 주자 1루에서 최선의 선택은 번트가 아니다. 바로 안타, 욕을 먹어도 내 스윙을 하겠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렇게 답답한 경기가 진행되면서 라이노스는 8회까지 2대 0으로 끌려갔고, 승기를 잡은 니시테츠는 필승조 호조 다이스케를 마운드에 올렸다.
빠른 볼 비율이 70%가 넘는 투수, 완급조절을 위해 포크볼과 커브를 섞어주지만 역시 주무기는 높게 던지는 빠른 볼, 거기다 볼넷도 적고 삼진이 많은 스타일이라 메이저리그에서도 주목하고 있다.
일본 내에서만큼은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는 투수, 다이스케의 등장에 몇몇 라이노스 팬들은 백기를 들었다.
“뭐야?!! 또 나오는 거야?!!”
“대타 보내 대타!!”
“그렇게 쓸 선수가 없는 거야?!!”
대기 타석에 선 김인호를 보고 라이노스 팬들은 경악했다.
지금 타석에 들어선 오기 나가야스는 오늘 경기 멀티 히트를 적립했다. 그런데 그 뒤를 받쳐줘야 할 선수가 저 쓸모없는 노장이라니, 얼른 대타를 내보내라며 야유를 퍼부었지만 오가야 감독은 팔짱을 낀 채 그라운드를 예의주시했다.
[따악 ~ !!]
“이 타구는 이번에는 중견수 앞에 떨어집니다!! 나가야스는 오늘 3안타!! 완전히 부진에서 벗어납니다!!”
“이제 여기부터가 문제네요. 김인호 선수가 오늘 3타수 무안타에 병살타도 하나 있거든요. 다이스케의 공을 밀어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다이스케는 149km 빠른 볼로 카운트를 잡아냈다.
타격은 됐지만 타이밍이 밀리면서 파울, 김인호는 입맛을 다시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타이밍만 맞으면 어떻게든 될 것 같은데’
마음을 다잡았지만 바깥쪽 높은 150km 빠른 볼에 헛스윙을 돌렸다.
이제 카운트는 원 볼 투 스트라이크, 역시 또 빠른 볼이 들어오지 않을까. 하지만 배터리의 생각은 달랐다.
빠른 볼을 던져도 못 치겠지만, 이쯤에서 변화구로 타이밍을 뺏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포크볼을 택했고 이게 가운데로 몰리고 말았다.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고’
빠른 볼을 기다리고 있던 김인호는 당황하지 않고 배트를 돌렸다.
포크볼은 이제 한국에서도 흔한 구질, 이런 상황은 몇 번이나 겪었고 대응책도 알고 있었다.
따아악 ~ !!
“어?!!”
“이건 간다!! 간다고!!”
타격이 되는 순간, 라이노스 선수단은 일시에 벤치에서 일어났다.
낮고 빠른 포물선을 그리며 좌중간을 넘어가는 동점 투런 홈런, 믿기 힘든 기적에 라이노스 팬들은 옆 사람을 격하게 끌어안았다.
중심타자들도 뚫지 못한 득점 길을 40이 다 된 노장이 뚫어낼 줄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평소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던 다카기 단장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자네 봤나?!! 봤냐고?!!”
“예, 보고 있습니다.”
“그럼 그렇지!! 내가 틀린 선택을 할 리가 없어!!”
저렇게까지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하고 싶을까, 측근들은 기가 막혔지만 어쨌든 동점 홈런이 나왔는데 찬물을 끼얹을 이유는 없었다.
“내가 해냈어!! 내가 해냈다고!!”
그 사이, 오늘의 역적에서 영웅으로 승격된 김인호는 선행주자 오기 나가야스와 격한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동료들의 축하 인사, 내심 노장을 얕잡아 보고 있던 토니 아브레우도 그 대열에 끼었다.
“너 좀 웃어라!! 내가 홈런 친 게 그렇게 기분 나쁘냐?!!”
“아닙니다.”
호통에 움찔하는 애송이, 홈런 한 방에 기분이 풀린 김인호는 지나간 일은 다 잊어버렸다.
이날 사카이 라이노스는 9회 말, 4번 타자 마크 프리젤의 끝내기 홈런으로 4경기 만에 승리를 추가, 2경기 차로 따라붙은 나고야 파이터스를 따돌리고 지구 1위 자리를 지켰다.
오늘의 영웅은 누가 붜라 해도 한국에서 넘어온 역전의 용사,
데뷔전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 김인호는 팬들의 환호를 받으며 단상에 섰다.
“김 선수, 동점 홈런을 치기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병살타도 나왔고 팬들의 인내심도 한계에 이른 상황이었는데, 마지막까지 풀스윙을 하셨네요?”
“다들 아시겠지만 저는 내일이 없는 입장입니다. 어설픈 스윙을 하고 후회를 남길 바엔, 삼진을 당하더라도 풀스윙을 하고 싶었습니다.”
김인호는 오늘이 자신의 은퇴식이라는 걸 받아들였다.
솔직히 섭섭했지만 마지막 타석에서 동점 홈런을 날렸으니 나름 멋있는 퇴장 아니겠나.
멋진 추억을 만들 기회를 준 단장과 선수들, 그리고 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은퇴하지 말고 몇 경기 더 뛰어요.”
“왜?”
“형, 아직 안 죽었잖아요. 오늘 스윙 나름 괜찮던데?”
“아니야, 사실 반은 죽었어. 오늘 깨달았다.”
경기가 끝난 후, 다카기 단장은 친척 형에게 은퇴는 조금 뒤로 미루라고 권했다.
나름 나쁘지 않았던 타구 질, 하위 타선이라면 어느 정도 활약은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인호는 이날 내가 1군에서 통할 실력이 아니라는 확실히 깨달았다.
운 좋게 들어온 실투를 보기 좋게 걷어 올렸을 뿐, 이 이상 뛰면 망신을 당할 뿐이라며 선을 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