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5화. 전설의 용병 - (6)
“자네들, 내가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알 것 같나?”
“ …… ”
이곳은 라이노스 구단 사무실, 측근들은 다카기 단장의 낮은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선수들이 소란을 일으킨 게 우리 잘못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웃어넘길 수도 없는 일,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데 어느 정도 선에서 해결을 해야 하나.
단장의 심기를 살피며 수위를 조절했다.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말 해봤자 의미 없지만 그때 보스턴에서 아브레우를 팔라고 했을 때 왜 팔지 않았나 … 이런 생각이 들더군.”
좀 키웠다가 팔려고 했는데 이렇게 주가가 폭락할 줄이야.
하지만 사람이 그 정도 앞날까지 내다볼 순 없는 법, 투자가 언제나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마냥 비관적으로 생각할 것도 아니다.
어쨌든 라이노스는 작년에 아브레우를 잘 써먹어 재팬 시리즈 우승까지 차지했다.
단물은 빨아 먹었으니 손해 볼 것도 없는 장사, 문제는 뒤처리였다.
“그럼, 단장님은 아브레우를 트레이드하길 원하십니까?”
“그렇게는 못 하죠.”
고사카 총무의 노골적인 답에 다카기 단장은 태세를 전환했다.
누가 지금 당장 판다고 했나. 지금 팔면 우리만 손해,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지만 아브레우의 타격 재능은 라이노스에 필요하다.
2군에 박아 놓은 것도 불성실한 태도를 고치라는 것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그런데 거기서도 동료들과 충돌을 일으켰을 줄이야.
듣자 하니, 먼저 싸움을 건 쪽은 김인호 선수지만 원인을 제공한 건 아브레우다. 이미 2군으로 내려보냈는데 여기서 또 충격요법을 쓰는 게 효과가 있을까.
고사카 총무는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놨다.
“앞으로도 아브레우는 2군에 두는 좋을 것 같습니다.”
“빈자리는요? 사실 올릴 때가 되긴 했습니다.”
물론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아브레우가 작년에 비해 부진한 건 사실이지만 2군으로 강등될 때까지 타율 0.272, 홈런 9개를 기록하며 나름대로 활약을 해줬다.
계속 2군에 둔다고 해도 그 자리를 대체할 선수를 구하는 게 쉽지 않은 상황, 고사카 총무는 독을 독으로 다스리는 제안을 했다.
“김인호 선수와 아브레우를 동시에 1군으로 올리는 건 어떻습니까?”
“뭐라고요? 자세히 설명 좀 해보세요.”
“김인호 선수가 옆에 있다면 아브레우도 함부로 날뛰진 못할 겁니다. 이미 한 번 붙어봤으니까요.”
다카기 단장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애송이를 제어하라고 친척 형을 1군으로 올리라는 건가.
솔직히 라이노스 내부에서 다카기 단장 외에 아브레우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걸 믿고 더욱 오만하게 구는 애송이, 그런데 또 다른 천적이 나타나지 않았나.
하지만 그렇게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그럼 김인호 선수를 올리고 누굴 2군으로 내려보내실 겁니까?”
“맞습니다. 지금 라인업에서 2명을 내려보낸 건 무리입니다.”
“그럼 선수 겸 코치는 어떻습니까? 그거라면 가능하지 않나요?”
이때 한 직원이 아이디어를 냈다.
지난 2023년, 니시테츠 아톰즈의 선수로 뛰던 구루지마 야스오가 플레잉 코치를 선언했다.
대체로 팀 사정 때문에 감독이나 코치 자리가 비어있거나, 외부에서 감독을 영입할 사정이 안 될 때, 선수단 사이에서 인망이 높은 선수를 감독이나 코치로 영입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플레잉 코치라고 무조건 경기에 뛸 수 있는 건 아니다.
경기 전, 반드시 25인 로스터에 포함돼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 플레잉 코치를 선언하면 경기에 출전할 수 있는 기회는 없다고 봐도 좋다.
사실상 프로경력 막바지에 접어든 선수들이 하는 명예직, 2군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노장이 은퇴나 다름없는 이 조건을 받아들일까.
하지만 현재 라이노스 사정에서 두 선수를 모두 1군에 올리려면 이 방법 밖에는 없었다.
“플레잉 코치라고요?”
“예, 받아들이시겠다면 저희도 그만한 대우를 해드리겠습니다.”
라이노스는 김인호에게 정식으로 코치제안을 했다.
아브레우와 충돌하긴 했지만, 그전까지 김인호는 2군에서 선수들을 포용할 줄 아는 리더십을 보여줬다.
어쩌면 지금 팀에서 가장 필요한 능력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김인호는 대답을 망설였다.
“말씀은 감사한데 저는 아직 선수로 뛰고 싶습니다.”
“그래서 플레잉코치 제안을 드리는 거 아닙니까.”
“사실상 은퇴 아닙니까. 제가 가끔 타석에 설 기회를 준다면 받아들이겠습니다.”
물론 김인호는 현실을 인정했다.
올해 내가 1군으로 올라갈 가능성이 있을까? 주전 중 한 명이 부상으로 이탈해도 승격을 하는 건 젊은 선수지 나 같은 노장이 아니다.
그래도 늦은 나이에 해외진출을 했으니 1군에서 한 타석이라도 치르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이다.
그 한 타석도 허락할 수 없다면 2군에 머무는 게 나았다.
‘그래, 한 경기 정도는 기회를 줘도 되겠지.’
다카기 단장은 고민 끝에 결단을 내렸다.
한두 타석 기회 준다고 팀에 그렇게 큰 민폐가 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1군 수준이 이 정도라는 걸 깨닫는다면 형도 미련 없이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겠지.
1군에 설 기회를 주는 조건으로 계약이 성사됐다.
[다카기 단장도 역시 사람이었나?]
[38살 노장, 파격적인 1군 승격]
물론 오사카 여론은 다카기 단장의 행보를 곱게 보지 않았다.
어떤 일이든 냉정하고 치밀하게 처리하는 게 단장의 스타일 아니었나. 어쩌자고 혈육의 정을 앞세운 건지, 하지만 다카기 단장은 처음부터 친척 형을 1군 무대에 세울 생각이 없었다.
제멋대로 날뛰는 아브레우를 제어하기 위해 코치로 영입한 것,
1경기 쓰고 끝낼 사람이라 여론의 반응에 큰 의의는 두지 않았다.
* * *
“자, 오늘 사카이 라이노스의 출전 명단을 보시죠. 1루수 마크 프리젤, 2루수 마츠다 코사쿠, 3루수 토니 아브레우 … (중략) … 좌익수에는 김인호 선수가 출전합니다.”
“기어이 나오네요. 다카기 단장이 아직도 이렇다 할 입장 발표를 하지 않고 있는데 … 어쨌든 결과는 본인이 책임을 지겠죠.”
드디어 찾아온 그날, 다카기는 평소처럼 특별석에 자리를 잡았다.
38살 노장의 승격을 두고 발칵 뒤집힌 여론, 하지만 다카기는 아직까지 입장 발표를 하지 않았다.
아브레우가 2군에서 소란을 일으킨 건 여론에 알려져 있지 않았다.
알려 봤자 팀에 무슨 이득이 있나. 김인호 선수를 1군에 올린 것만으로도 아브레우는 이미 심리적 압박을 받고 있다.
지금은 내가 욕을 먹는 게 최선, 이렇게까지 호의를 베풀었는데도 아브레우가 또 실망을 안겨준다면 그땐 정말 칼을 빼들기로 했다.
“내가 자네에게 주는 기회는 이게 마지막이야. 내가 뭐가 좋아서 자네가 먹을 욕을 대신 먹어주겠어? 명심하라고, 이게 마지막이야.”
한편, 3루수로 출전한 아브레우는 단장의 충고를 되새겼다.
불성실한 태도와 부진 때문에 2군으로 내려갔는데 거기서도 태업을 하다 제대로 피를 봤다.
이번에도 소란을 일으키면 정말 끝장, 일본에서 쫓겨난 유망주에게 어떤 메이저리그 구단이 관심을 주겠나.
관심을 준다고 해도 좋은 대우를 받긴 어렵겠지. 정신을 차리고 경기에 집중했다.
[따악 ~ !]
“3루수 정면!! 잡아서 1루에 송구하지만 공이 뒤로 빠집니다!! 그사이 주자는 1루를 지나 2루!! 3루까지는 가지 못하는군요. 아 ~ 아브레우가 1군 복귀 첫 경기부터 실책을 저지르는군요.”
“이건 집중력의 문제가 아니라 기술의 문제네요. 2군에서 도대체 뭘 가다듬고 온 겁니까?”
해설위원은 아브레우의 송구에 비난을 퍼부었다.
공을 잡기도 전에 머리를 1루 쪽으로 돌리는 3루수들이 있는데 이건 최악이다.
공을 완전히 포구하기 전까지 공이 날아오는 방향과 머리는 일치하는 게 정석, 본인의 어깨를 믿고 대충 잡아 던지는 바보들은 꼭 이런 플레이를 한다.
‘저런 멍청이가 … ’
좌익수로 나선 김인호도 혀를 끌끌 찼다.
지금이야 나이가 들어 좌익수로 뛰고 있지만, 전성기 시절에는 유격수와 3루수도 봤기 때문에 내야 수비의 기본은 잘 알고 있다.
김인호는 해설위원과 달리 다리의 아브레우의 스텝에 주목했다.
송구를 할 때 다리를 펴는 선수가 있는데, 이렇게 되면 상체가 꼿꼿하게 서면서 공이 위로 뜨게 된다.
지금이 바로 딱 그런 경우, 송구를 할 때는 어지간하면 다리는 펴지 않는 게 좋다. 공격은 쓸 만하지만 한눈에 봐도 수비는 갈 길이 먼 애송이,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이런 건 실력 발휘할 거리도 안 돼.’
마침 좌익수 쪽으로 날아오는 타구, 잠깐 멈칫했지만 김인호는 낙구지점으로 이동해 타구를 처리했다.
화려하진 않아도 안정적인 수비, 하지만 그 가치를 알지 못하는 홈 팬들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어쨌든 토니 아브레우의 송구 실책 때문에 선취점을 내준 라이노스는 1회 말 반격에 나섰고, 마츠다 코사쿠가 타석에 들어섰다.
“자, 마츠다가 첫 타석을 맞이합니다. 올 시즌 타율 0.294, 홈런 없이 9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통산 타율이 2할 5푼이 안 되는 선수거든요. 작년에도 2할 6푼을 겨우 넘겼는데, 올 시즌은 기대 이상의 행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출루율이 높아지면서 도루도 늘고 있죠. 이제는 NPB를 대표하는 리드오프로 성장했습니다.”
마츠다는 2구를 받아쳐 좌익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를 만들어 냈다.
캡틴으로서의 위엄은 떨어지지만 실력만큼은 팀에 반드시 필요한 선수, 홈팬들은 마츠다의 이름을 연호하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조금 일찍 왔다면 좋았을 텐데’
한편 더그아웃에서 앉아있던 김인호는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KBO보다 인프라가 훨씬 더 잘 갖춰진 NPB, 조금 이른 나이에 왔다면 이곳에서 실력을 마음껏 발휘할 기회가 있지 않았을까.
코치보다는 선수로 뛰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 하지만 흘러간 세월을 어떻게 되돌리겠나.
거기다 오늘 잡은 출전 기회도 동생이 욕을 먹어가며 겨우 마련해 준 거다. 동생의 체면을 봐서라도 어설픈 플레이는 용납하지 않았다.
따악 ~ !!
“아악 ~ !!”
“그걸 왜 치는 건데?!!”
라이노스는 선두 타자 출루로 기회를 잡았지만 후속타자 미노 히사시의 병살타가 나오면서 기회가 날아갔다.
마츠다가 1루로 나가면 일단 도루로 시작하는 거 아닌가? 팬들은 미노 히사시의 도루 방해에 야유를 퍼부었다.
‘괜찮아, 나쁘지 않았어.’
하지만 김인호의 생각은 달랐다.
플레잉코치로 1군에 올라왔으니 조언을 해줘도 되겠지, 지난 두 달 동안 일본어도 많이 늘었고 바로 행동에 나섰다.
“괜찮아. 잘 쳤어.”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럼, 원래 안타는 운이 따라줘야 되는 거야. 특히 우리 같은 스타일이라면 더욱 그렇고.”
전성기 시절, 김인호는 20홈런 이상을 쳐줬지만 전형적인 거포는 아니었다.
수준급의 컨택 능력으로 찬스를 살리는 스타일, 덕분에 결정적인 상황에서 결승타도 많이 때려냈다.
하지만 아무리 잘 쳐도 안타가 안 될 때가 더 많은 법, 못 친다고 열 번 욕하는 팬들도 결승타 하나에 열광한다.
타자가 찬스에서 병살을 두려워하면 어떻게 영웅이 되겠나.
몇 번 죽어도 팬들의 쌍욕을 들어도 적극적으로 쳐야 한다는 게 김인호의 타격론, 미노 히사시도 그 의견에 동조했다.
“뭘 아는 분이군요?”
“당연하지. 다카기 단장이 날 괜히 선택한 게 아니라고, 실은 선수로 뛸 수도 있었는데, 코치로 뛰어달라고 애걸하기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거야.”
김인호는 한껏 허세를 부렸다.
한국에 있을 때도 이런 식으로 분위기를 끌어올렸는데, 다행히 여기서도 그럭저럭 먹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