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5화. 잠깐의 휴식 - (4)
“일단 기초적인 것부터 시작하자.”
다카기는 보스턴이 아닌 도쿄 자이언츠의 고문 겸 스카우터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현장에서 선수들과 부딪치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고메즈를 잃은 일 때문에 새로운 인연을 맺는 건 조금 두려웠다.
먼발치에서 선수들을 지켜보고 쓸 만한 재원을 발견하면 구단에 보고하는 일, 간단하지 않은가.
팀을 위한 거시적인 전략은 못 짜겠지만 이 정도라면 나도 할 수 있겠지, 완성된 요리를 평가하는 평론가처럼 유망주들을 세워 놓고 하나하나 음미했다.
‘이 두 선수는 아주 극과 극이군.’
다카기는 이하라 아츠히로, 토리자와 야스오를 눈여겨봤다.
상체가 극단적으로 기울었는데 이런 투구 폼을 지닌 선수는 보통 공은 빠른데 제구가 안 되는 편, 그런데 이하라는 전형적인 기교파 투수의 모습을 보였다.
투구 시 글러브를 거의 머리 위까지 들어 올리는 괴이한 폼, 이런 폼으로도 제구가 된 공을 던진다는 게 신기했다.
정석과는 거리가 멀지만 특유의 투구 폼에서 나오는 디셉션과 커브가 좋은 선수, 그래도 선발로 쓰기엔 약간 한계가 있다는 평가를 내렸다.
‘이 선수는 또 정반대군.’
토리자와 야스오는 이하라와 달리 글러브를 낀 팔이 아니라 공을 잡은 팔을 상체보다 높게 들어올렸다.
거기다 이제 막 데뷔한 신인배우처럼 불안한 시선 처리, 보통 투구를 할 땐 마지막까지 포수 미트에 시선을 두는 게 정석이다.
그런데 토리자와는 고개를 홱 돌려버리는 편,
이걸 마냥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야구의 본고장 메이저리그에서도 포수 미트를 끝까지 보지 않는 투수들이 있기 때문이다.
투구 시 밸런스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건 머리, 상체가 꼿꼿이 세워져 있어야 한다는 말은 머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하라는 말과 비슷하다.
하지만 스트라이드가 넓은 투수는 상체를 꼿꼿이 유지하기 어렵다.
발을 멀리 뻗은 만큼 머리 높이가 낮아지고 팔각도는 더 높아지기 때문, 이런 문제점을 보완하려면 허리와 하체 힘을 키워줘야 하는데, 한눈에 봐도 토리자와는 단단한 체격과 거리가 멀었다.
저런 선수에게 스트라이드를 줄이고 상체를 세우라고 조언하는 게 맞는 행동인가.
자기 특징을 죽이라는 뜻과 마찬가지, 본인이 체격을 키울 생각이 없다면 지금 폼을 유지하는 게 나았다.
“이 두 선수는 쓸 만한 것 같습니다.”
보고를 받은 도쿄 자이언츠의 단장 후카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하라와 토리자와는 아직 고칠 점이 많다는 게 감독과 코치진의 평가, 그런데 다카기는 지금 당장 실전에 써도 괜찮다고 하니, 어느 쪽 의견을 따라야 하는 건가.
단장은 필요한 선수를 구단에 수급할 뿐, 선수 개인 기량을 평가하는 눈은 부족했다.
“다카기 고문은 전혀 다른 입장인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단장의 질문에 하세지마 감독은 이해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분명 구위는 괜찮은 투수들, 하지만 조금 더 가다듬으면 지금보다 좋은 선수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욕심을 부리고 있다.
하지만 다카기는 지금 상황에서 두 선수의 기량을 더 끌어올리는 방법은 없다고 단언, 물론 이 말에 구속력은 없다.
고문은 어디까지나 조언을 해 줄 뿐, 그걸 결정하는 건 단장과 감독의 몫이었다.
‘주인을 잘못 만났구나.’
결국 이하라와 토리자와는 팀에서 중용 받지 못했다.
아무리 뛰어난 신하라도 제대로 써 줄 주인을 찾지 못하면 빛을 보지 못하는 법, 구단 회의는 참석하지 않고 2군 팀을 따라다니며 분석을 계속했다.
‘날 어떻게 보고 있을까?’
토리자와는 관중석에 앉은 고문을 의식했다.
저 사람 눈에 띄어야 1군으로 올라가는 길이 조금은 더 넓어지겠지, 그리고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투수로 불렸던 선수라 날 어떻게 보고 있는지 신경이 쓰였다.
다만 따로 만날 기회가 없다는 게 문제, 그렇게 실력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다 5월 즈음 1군 승격 통보를 받았다.
이하라 역시 1군 승격, 도쿄 자이언츠는 최근 불펜이 붕괴되면서 승리적립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물갈이는 당연했던 일, 도쿄 자이언츠의 주력 타키야마 요이치는 새로운 얼굴을 반갑게 맞이했다.
“난 너희들이 올 줄 알았다.”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내 귀는 야구의 신하고 연결 돼 있거든. 하늘의 계시를 받았지”
뒷배경은 이랬다.
투수진 붕괴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이언츠, 다카기 선배라면 2군에서 쓸 만한 선수를 찾아내지 않았을까?
눈이 워낙 까다로운 분이니 선택을 받은 선수라면 평균 이상은 해주겠지, 그새를 못 참고 선배에게 정보를 요구했다.
그게 바로 이 녀석들, 너희들이라면 분명 괜찮을 거라며 용기를 줬다.
“정말 저희들을 눈여겨 보고 계셨나요?”
“그래, 그 선배의 인정을 받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거든, 내가 겪어봐서 알아. 괜찮을 거야.”
그렇게 시작된 경기, 이날 도쿄 자이언츠는 특별한 손님을 팬들 앞에 소개했다.
최근 연패에서 빠진 자이언츠, 그렇다면 승리를 부르는 사람을 초대해야 하지 않겠나.
월드시리즈 우승 8회, 통산 승률 82%를 기록한 다카기가 시구를 위해 마운드에 올랐다.
‘어디까지나 이벤트다.’
다카기는 양복차림으로 마운드에 올랐다.
이미 은퇴한 내가 진심을 발휘해서 뭘 할 건가. 목 단추를 풀고 가볍게 공을 던졌다.
“오 ~ 이게 뭔가요?!! 지금 구속이 어떻게 됩니까? 측정을 한번 해 봤으면 좋겠는데요.”
“오늘 자이언츠는 다카기 고문을 선발로 내세우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요시카와도 지금 깜짝 놀랐습니다.”
타석에 서 있던 요시카와(미요시 호크스)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실전에서 이 정도 구속이라면 따라갔겠지만, 양복을 입은 사람이 대충 던진 공이 이렇게 빨리 날아올 거라곤 예상도 못했다.
거기다 바깥쪽 꽉 차는 코스로 정확히 들어온 공, 관중석은 물론 양 팀 더그아웃도 발칵 뒤집혔다.
‘너무 눈에 띄었군.’
다카기는 관중석을 향해 손을 흔들며 마운드를 내려갔다.
그냥 가볍게 던진 건데 필요 이상으로 나온 구속, 너무 호기를 부린 것 같아 괜히 민망했다.
현역 선수들 기 죽이는 구위, 마운드에 오른 토리자와는 심호흡으로 뛰는 심장을 다독였다.
“자, 오늘 도쿄 자이언츠는 토리자와 야스오를 선발로 내세웁니다. 1군 경기 기록은 제로, 오늘이 프로 데뷔 경기입니다.”
“최고 155km의 빠른 볼에 슬라이더, 슈트, 체인지업을 던지죠. 2군 기록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타석에 선 요시카와는 자세를 잡았다.
괴물의 공을 먼저 본 탓인지 상대적으로 귀엽게 보이는 토리자와의 구위, 하지만 이것도 만만치는 않았다.
일단 상대에 대한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는 게 문제, 빠른 공을 던진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타석에서 느끼는 구속은 스피드 건에 찍힌 구속을 능가했다.
‘저 부분은 조금 개선해야겠군. 정말 약간만 수정하면 된다.’
한편, 다카기는 토리자와의 투구를 찬찬히 뜯어봤다.
너무 닫혀 있는 앞발, 힘을 좀 더 실어주겠다는 뜻은 이해했지만 무릎이 너무 굽혀지면서 스트라이드로 끌어올린 힘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상체를 무리하게 세울 필요는 없지만 무릎을 세우는 건 가능하겠지, 당장 고쳐질 일도 아니라 일단 지켜봤다.
‘뭐지? 지금 뭔가 엄청난 공을 던진 것 같은데’
투구를 거듭하던 토리자와는 뭔가를 깨달았다.
5번 타자 카미야에게 던진 148km 빠른 볼, 최고 속력도 아닌데 평소보다 훨씬 더 묵직하게 날아갔다.
그 짜릿한 느낌을 다시 경험할 순 없을까. 노력해 봤지만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다.
‘생각보다 훨씬 잘 던지는데’
한편, 자이언츠의 하세지마 감독은 기대 이상의 활약에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유망주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1군에서 이런 활약을 할 줄이야, 나는 저 선수의 가능성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던 건가.
토리자와는 이날 5와 1/3이닝 동안 4안타 2실점을 내줬지만 탈삼진을 8개나 잡아내며 가능성을 보여줬다.
하세지마는 내친김에 이하라까지 투입, 이하라는 높은 타점에서 나오는 빠른 볼과 커브를 앞세웠다.
커브는 보통 빠른 볼과 구별하기가 쉬운 편이지만 이하라는 특유의 투구 폼으로 그 단점을 지워버렸다.
‘뭐가 이렇게 높아?’
헛스윙을 돌린 키타지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릴리스 포인트가 일반적인 투수들과 달라 더 보기 힘든 공, 계속 보면 익숙해지겠지만, 처음부터 불펜 투수로 기용된 선수라 그런 약점은 큰 의미가 없었다.
“해냈다!!”
키타지마를 삼진으로 돌려세운 이하라는 괴성을 지르며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명백한 약점이 있다고 지적받은 투구 폼, 그래도 나만의 방식을 밀고 나갔다.
평소 과묵한데다 자기주장이 확실한 탓에 2군에서 코치진과 충돌이 잦았고 이런 태도가 1군 승격의 발목을 잡은 것도 사실,
그런데 이렇게 기회를 잡고 호투를 할 날이 올 줄이야. 보는 눈만 없다면 마음껏 울고 싶었다.
‘역시 선배는 보는 눈이 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타키야마는 후배들의 활약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도 다카기 선배처럼 후배들을 이끌어 주는 선수가 되고 싶은데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사실, 솔직히 내가 할 일만 하는 것도 벅찼다.
“자, 자이언츠의 6회 말 공격이 시작됩니다. 타석에는 타키야마, 오늘 첫 두 타석에선 안타가 없었습니다.”
“타키야마 선수가 살아나야 공격도 뭔가 실마리가 풀릴 텐데요. 최근엔 다소 잠잠합니다.”
다카기는 고교시절 그렇게 괴롭혔던 후배를 가만히 지켜봤다.
저 녀석도 어느덧 올해 31살, 커리어 12년 차에 접어들었다.
이제는 코흘리개가 아니라 자이언츠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캡틴, 올스타도 10번이나 선정됐다.
말 그대로 자이언츠를 상징하는 선수, 그래서 다카기는 자이언츠 더그아웃은 얼씬도 안 했다.
괜히 옛날 버릇이 나와서 캡틴의 위엄에 손상을 입히면 어쩌나. 나는 지금 팀의 고문, 이제는 대접을 받을 입장이 아니라 선수의 입장을 우선했다.
[따악 ~ !!]
“당긴 타구가!! 유격수 옆을 빠져나가는군요!! 타키야마 선수가 통산 1673번째 안타를 기록합니다!!”
“아, 그리고 지금 안타로 자이언츠 역대 최다 안타 8위로 올라서네요. 이제 이 선수를 제외하고 자이언츠의 역사를 논할 수는 없습니다.”
유격수로 포지션을 한정하면 자이언츠 역대 최다 안타 1위,
나한테 매일 혼나면서 야구를 했던 녀석이 일본 프로야구의 상징이 됐다니, 들리진 않겠지만 다카기는 박수를 보냈다.
나의 도전은 끝났지만 후배의 도전은 현재 진행 중, 30을 넘긴 나이에 아직도 유격수 자리를 지킨다는 건 대단한 일 아닌가.
이젠 내가 가르칠 것도 없고 주제넘게 간섭하는 것도 실례되는 일, 그저 말없이 지켜봤다.
[따악 ~ !!]
“다시 당긴 타구가!! 이번에는 좌중간에 떨어집니다!! 2루 주자는 홈으로!! 타자 주자는 2루까지 들어갑니다!! 스코어 3대 2!! 자이언츠가 경기를 뒤집습니다!!”
“역시 해결사는 이 선수였네요. 팬들의 사랑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타키야마는 8회 말 공격에서도 안타를 때려냈다.
앞 선 두 타석의 부진은 깔끔하게 지워버린 활약, 신구의 조화를 앞세운 자이언츠는 간만에 승리를 거두며 연패에서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