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334화 (334/361)

334화. 잠깐의 휴식 - (3)

‘여긴 변한 게 없네. 아니, 조금은 변했나.’

다카기는 간만에 다이이치 고교를 방문했다.

학창시절의 열정을 모두 쏟았던 곳, 눈에 익은 건물 외형은 이런저런 추억과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야구부를 이끌었던 후루타 오기야스 감독은 이제 이곳에 없다.

정들었던 동료들의 소식도 대부분 끊겼고 그 빈자리를 채운 건 새로운 얼굴들, 그래도 다나카 코치만은 그곳에 있었다.

아니, 이제는 감독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맞잡은 손을 사이에 두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지금은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이는 후배들이 먼저, 업적이 확실한 다카기는 당당히 가슴을 폈다.

“내가 누군지 알 테니까 소개는 생략한다. 너희들 요즘 별 볼 일 없다며?”

초면부터 배려가 없는 대선배, 면목이 없는지 후배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라. 난 그저 사실을 말한 것뿐이지, 너희들을 책망할 생각은 없으니까. 야구도 다 즐기자고 하는 거 아니냐. 그런데 이겨야 더 즐겁겠지? 그렇지 않겠냐?”

후배들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하긴, 너무 승리 승리해도 좋지 않지만 어쨌든 이겨야 즐거운 세상 아닌가. 다카기는 평생 쌓은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전수했다.

“공이 잘 안 맞는다고?”

“네,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그럼 일단 쳐 봐. 보고 판단해 줄 게”

일단 다이이치 고교의 최대 문제점인 타격 해결에 나섰다.

어느 정도 레벨이 올라온 프로 선수들은 투구 궤적을 읽고 타격을 하지만, 이건 어린 선수들이 쓸 수 없는 기술이다.

변화구는 궤적을 확실히 읽고 쳐야 하지만 빠른 볼은 타이밍만 맞추면 어떻게든 된다. 그리고 고교야구는 빠른 볼만 잘 쳐도 괜찮은 수준, 타이밍을 잡는 비법을 전수했다.

“투수의 왼발이 땅에 닿았을 때 너희들도 같이 땅을 짚어.”

“네?”

학생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이 손을 떠나기도 전에 땅을 짚으라니, 너무 이른 준비자세 아닌가? 거기다 이러면 변화구에 대처할 수가 없다고 배웠다.

지금까지 배운 이론과 너무 다른 의견, 하지만 다카기는 그런 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조언했다.

“너희들이 지금 하는 말은 선수들에게 통용되는 말이야. 설마 스윙이 너무 빨리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니?”

“네”

“걱정하지 마. 너희들 스윙은 생각보다 훨씬 느리니까.”

배려 없는 말에 학생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우리의 스윙이 그렇게 느려 터졌단 말인가. 일단 시키는 대로 준비자세를 조금 일찍 하고 타이밍을 맞췄다.

‘그래, 지금은 이 정도면 된 거야.’

잘 되고 못 되고를 떠나서 스윙이 늦는 경우는 없어졌다.

메이저리그 선수들도 빠른 볼에 대응하기 위해 준비자세를 조금 일찍 잡지 않나.

이건 아마추어에서도 통용되는 방식, 직구에 타이밍을 잡으면 변화구를 못 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건 타격을 잘못 이해한 거다.

“너희들 잘 생각해 봐. 타이밍만 맞으면 어쨌든 빠른 볼은 그럭저럭 때릴 수 있잖아?”

“네”

“그런데 궤적에 신경 쓰면 빠른 볼도 변화구도 다 못 쳐. 적어도 너희들 레벨에서는 말이지”

타격은 일단 타이밍을 잡는 게 기본이다.

궤적을 읽고 스윙을 선택하는 건 그 다음 레벨, 그런데 변화구를 못 칠 걸 걱정해서 어쭙잖은 선구안을 발휘하면 이것도 저것도 안 된다.

빠른 볼에 타이밍을 잡는 게 우선, 너희들은 그 다음 레벨을 논할 단계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그럼 선배님은 고교 시절에도 그렇게 훈련하셨나요?”

“당연하지. 자, 얼른 연습 계속해. 다음 대회 얼마 안 남았잖아.”

선배의 독촉에 어린 선수들은 분주히 몸을 움직였다.

대선배가 와서 오늘 훈련은 적당히 하고 끝날 줄 알았는데 평소보다 강도가 높아진 훈련, 다카기는 글러브를 끼고 수비 연습까지 지도했다.

‘저 녀석은 변한 게 없구나.’

다나카 감독은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언제나 진지한 녀석, 곁에 있기만 해도 열기가 느껴질 정도다. 저런 모습에 자극을 받고 성장한 학생들이 몇 명인가.

아직 젊고 몇 년 더 뛸 열정과 재능이 있는데 왜 은퇴를 택한 건지, 솔직히 이해가 안 됐다.

“너 정말 은퇴한 거냐? 복귀할 생각은 없고?”

“그 얘기는 꺼내지 마세요. 이미 지난 일이니까.”

“아까워서 그래, 기왕 시작한 거 300승 채우고 은퇴하지 그랬어?”

“제가 보기보다 몸이 많이 상했어요. 겉만 괜찮아 보이는 거예요.”

다카기는 그동안 여론에도 공개하지 않았던 부상을 털어놨다.

일반적으로 투수는 어깨, 타자는 발목을 많이 다친다. 베이스를 밟다 부상을 당하는 경우는 빈번하고, 자신이 친 타구에 정강이를 맞거나 뛰면서 야수들과 충돌하는 것도 발목 부상을 야기하는 원인이다.

하지만 투수라고 발목 부상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투수가 공을 던질 때 발끝에서 시작된 힘이 발목으로 전달되기 때문, 그 힘이 상체로 올라오면서 투구가 이뤄지는 거다.

특히 메이저리그 마운드는 단단하기 때문에 마운드를 긁으면서 끌려 나오는 투수의 발목에 무리가 가는 건 당연하다.

그래도 이건 어깨 부상의 위험에 비하면 소소한 문제다.

일반적인 투수라면 어깨부상을 당했겠지만, 다카기는 특이하게도 발목에 무리가 온 편, 10년 동안 그렇게 무식한 공을 던져댔는데 어깨는 멀쩡하고 발목에 부상이 왔다?

다나카 코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는 역시 특이한 녀석이다. 어떻게 투수가 발목을 다치냐?”

“어쨌든 그렇다니까요. 그러니까 더는 묻지 마세요.”

그렇게 반복된 평온한 나날, 하지만 그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보스턴에서 안타까운 소식이 날아온 것, 다카기는 기사를 보고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거 거짓말이지? 나는 안 믿어’

보스턴의 주전 유격수 주앙 고메즈의 사망 소식, 작년까지 같은 팀에서 뛰었던 선수 아닌가.

보스턴과 장기계약을 맺은 돈으로 부모님께 집을 사드렸다며 좋아하던 그 어린 선수가 죽었다니, 뭣보다 다카기는 고메즈의 성장을 곁에서 지켜봤기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고메즈는 클럽에서 술을 마시다 한 일행과 시비가 붙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 자리에서는 별일이 없었지만 클럽을 나가 차에 오르는 순간 괴한들이 나타나 칼을 휘두르는 장면이 CCTV에 포착됐다. 고메즈는 얼굴, 목, 폐를 12군데나 찔렸고 급히 병원으로 후송됐지만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기사 내용은 대략 이랬다.

뜬소문이라고 하기엔 너무 구체적인 기사, 인연이 있는 미국 현지 기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사실 확인에 나섰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사실입니다.]

“누가 장난치는 거 아닙니까? 아니 어떻게 … ”

안타깝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 다카기는 비행기를 잡아 급히 미국으로 향했다.

시즌은 이미 끝났지만 보스턴 구단은 고메즈를 추모하기 위해 브라민 파크를 개장했고, 5만 명이나 되는 팬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이런 식으로 돌아오고 싶진 않았어.’

다카기는 추도식이 진행되는 동안 말없이 고개만 숙였다.

당분간 돌아올 일 없을 거라고 단언했지만, 때가 되면 구단 초청을 받아 시구도 하고 기념행사에 참석해야 했겠지.

가능하면 그런 기쁜 날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었는데 그 꿈을 완전히 짓밟은 녀석, 솔직히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추도사를 해야 할 때, 하지만 다카기는 단상 앞에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마음을 알고 있는지 옆에서 어깨를 다독여 주는 존 포르투나, 다카기는 끝내 얼굴을 돌려 버렸다.

도대체 여기서 무슨 말을 해야 되는 건가. 흘러나오는 눈물만 계속 닦아내다 겨우 마음을 다잡았다.

“고메즈와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오르는군요. 당시 그 녀석은 마이너리그도 거치지 않은 16살의 어린 선수였습니다. 타격을 할 때 어떻게 힘을 실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수비를 잘 할 수 있는지, 계속 저를 귀찮게 했죠. 그때마다 저는 귀찮다며 밀어냈지만 사실은 그 고메즈의 열정에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잠시 끊긴 추도사, 감정을 다스린 다카기는 못다 한 말을 이어갔다.

“고메즈는 뛰어난 선수였지만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칭찬보다는 언제나 질책을 많이 받았던 선수죠. 1억 달러는 너무 과분하다, 그 선수가 한 게 뭐가 있느냐, 실책이 너무 많다 … 하지만 그 친구는 절대 기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난 월드시리즈에서 저는 고메즈의 호수비 덕분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팀을 승리로 이끄는 역전 홈런까지 쳐냈죠. 제가 앞으로 기억하는 고메즈의 모습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겁니다.”

칼에 찔려 죽는 모습이 팬들이 기억해야 할 고메즈의 마지막 모습인가.

그런데 그 장면을 계속 부각해서 내보내는 기자들,

다카기는 우리가 앞으로 기억하는 고메즈의 모습은 야구에 열정을 바치던 그 모습이 되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고메즈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기어이 절 이곳으로 돌아오게 했으니까요. 평생 남들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도 없는데 … 정말 짜증 나는 녀석입니다.”

은퇴 후 당분간 돌아올 생각 없다고 분명히 밝혔는데 날 기어이 이곳으로 끌고 온 녀석, 사람 불러 놓고 본인은 어디로 가 버린 건가.

원망 섞인 말투였지만 팬들은 박수를 치며 위로를 표했다.

“고메즈는 앞으로도 제 기억 속에 있을 겁니다. 그건 팬 여러분들도 마찬가지고요.”

마지막으로 고메즈의 가족과 뜨거운 포옹을 나눴다.

아들을 먼저 떠나보냈으니 상심이 얼마나 크겠나. 그렇게 추도식은 끝났지만 다카기는 보스턴을 떠나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서프라이즈 ~ 하며 나타날 것 같은데 역시 흔적도 보이지 않는 녀석, 마땅히 할 일도 없고 수더랜드 단장을 만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나?”

“그냥 할 일 없이 평온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저기 … 이런 말 하면 너무 속 보이는 것 같지만 … 구단에서 일 해보는 게 어떻겠나?”

수더랜드 단장은 조심스레 입을 뗐다.

고메즈의 성장에 다카기가 많은 조언을 줬다는 건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본인도 어린 선수들의 성장에 관심이 있으니 그동안 이런저런 조언을 준 거겠지. 선수로 뛰는 건 무리겠지만, 인스트럭터로 어린 선수들을 지도하는 일은 할 수 있지 않을까.

다카기도 생각은 없지 않았지만 취직하러 여기 온 게 아니다.

다들 고메즈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구단과 계약을 맺다니, 모양새도 별로 안 좋았다.

“죄송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렇게 할 생각이 없습니다.”

“지금 답을 달라는 게 아니네. 그리고 자네가 돌아오면 팬들도 조금이나마 슬픔을 잊을 수 있을 거야.”

“조금 더 슬퍼해도 나쁘진 않겠죠.”

뭐가 급하다고 고메즈를 일찍 보내야 하나.

보스턴에게 고메즈는 겨우 그 정도의 선수였나.

그런 끔찍한 사건을 당하지 않았다면 좀 더 많은 환호를 받았을 선수, 그렇다고 너무 슬퍼해서도 안 되겠지만, 지금은 조금 더 슬퍼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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