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8화. 아낌없이 주는 선수 - (14)
“스윙!! 헛칩니다.”
“올 시즌 콜드웰이 빠른 볼 상대 타율이 0.353로 아메리칸 리그 전체 6위였거든요. 그런데도 다카기의 빠른 볼에는 헛스윙을 하네요.”
“다카기는 올 시즌 헛스윙을 462번 유도한 선수입니다. 그리고 콜드웰은 올 시즌 헛스윙을 354번이나 했던 선수죠. 어떤 결과가 나올지 지켜보시죠.”
피트 오어는 이번에는 다카기의 승리를 예상했다.
올 시즌 콜드웰은 타율 0.294를 기록했지만 볼넷을 46개밖에 얻어내지 못했고 반면 삼진은 124개를 당했다.
36홈런을 기록할 정도로 스윙은 호쾌하지만 허점이 있는 선수, 그래서 빠른 볼은 밀어치고 변화구는 잡아당기는 특유의 스윙이 완성된 거다.
신인이 첫 시즌에 이 정도 성적을 거뒀다는 건 대단한 일이지만 약점을 극복하지 못하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메이저리그, 다카기는 약점을 철저하게 파고들었다.
‘때려 봐라.’
2구도 바깥쪽, 콜드웰은 이번에도 밀어치려는 모습을 보였다.
결과는 파울, 선구안이 아직 미숙하기 때문에 밀어치겠다는 자세는 나쁘지 않다.
그리고 메이저리거라면 이런 기술은 있어야 하는 법, 바깥쪽에 신경을 돌려놓고 몸 쪽으로 떨어지는 느린 슬라이더를 던졌다.
‘이건 반칙이지.’
체크 스윙을 돌린 콜드웰은 주심의 판정에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슬라이더가 들어올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했다.
들어와도 커트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결정구는 82마일에 발등으로 떨어지는 궤적을 그렸다. 머릿속에 그리던 공이 아니었고, 3구만에 삼진을 내주고 말았다.
‘벌써 끝이야?’
다카기도 약간 아쉬운 미소를 지었다.
앞선 타석에서 보여줬던 끈질긴 모습과는 조금 다른 결과, 이기긴 했지만 격투기 메인 경기가 10초 만에 끝나버린 기분이랄까.
순간 긴장했던 어깨가 탁 풀어져 버렸다.
다카기는 이날 6이닝을 4피안타 1볼넷, 무실점으로 막고 마운드를 내려왔고, 타선이 4점을 내면서 보스턴은 ALCS 첫 게임을 잡아냈다.
경기는 끝났지만 뒤풀이가 남은 하루, 포스트 시즌 통산 28승을 거둔 다카기는 기자들 앞에 섰다.
“통산 8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에 도전하고 계신데, 올해도 우승 자신하십니까?”
“아직 시리즈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경솔한 발언은 입에 담고 싶지 않군요.”
첫 질문을 던진 기자는 무안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고 다음 기자가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경기 초반에 잠깐 위기가 왔었는데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저는 메이저리그에서 2만 5천 개가 넘는 공을 던졌습니다. 포스트 시즌까지 포함하면 훨씬 많겠죠. 저 같은 선수에게 어떻게 위기를 극복했냐고 묻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다카기는 그저 평소처럼 공을 던졌을 뿐이다.
주자가 있든 없든 투수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다. 내가 던질 공을 던지는 것, 그런데 위기관리 비결을 묻는 게 웃기지 않은가.
오늘따라 약간 톡톡 튀는 인터뷰, 다른 기자가 약간 민감한 질문을 던졌다.
“1회에 콜드웰이 볼넷으로 걸어 나갔는데요. 평소의 당신이라면 한가운데 공을 밀어 넣었을 겁니다. 혹시 부담을 느끼셨나요?”
“예, 맞습니다. 저도 심장이 있는 한 명의 인간일 뿐이죠. 가끔은 승부에 부담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때는 도망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자들은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언제나 강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여줬던 선수가 이런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다니, 다카기는 콜드웰에 대한 칭찬도 덧붙였다.
“콜드웰은 올 시즌 선구안에서 약점을 보였지만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습니다. 다른 선수도 아닌 절 도망치게 만들었으니까요. 앞으로 지켜볼 가치가 있는 선수라고 생각합니다.”
“시리즈가 한창인데 상대 선수를 칭찬해도 되는 건가요?”
“저는 칭찬에 인색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이번 시리즈에서 보스턴은 그 선수를 조심해야 합니다.”
다카기의 예상은 무섭게 들어맞았다.
1차전에서 1안타 1볼넷으로 숨을 고른 콜드웰은 다음 날 경기에서 4타수 1안타에 그쳤지만 그 한 방이 승리를 결정짓는 쓰리 런이었다.
이어지는 3차전에서도 2안타 1홈런 2타점으로 맹활약, 4차전 활약은 더 대단했다.
[따아악 ~ !!]
“밀어낸 타구가!! 센터 쪽으로 멀리!! 그대로 담장을 넘어갑니다!!!! 콜드웰의 역전 투런 홈런!! 3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합니다!!”
“ALCS 역대 최연소 3경기 연속 홈런이죠. 누구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1차전을 잡고 기뻐했던 보스턴 선수단은 예상 밖의 전개에 당황했다.
잠잠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터져 나오는 한 방, 4차전까지 내주면서 보스턴은 리버스 스윕 위기에 몰렸다.
이제 믿을 수 있는 선수는 다카기 뿐,
커리어 마지막 경기가 될지도 모르는데 경기를 준비하는 에이스의 모습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1회 초 보스턴의 선공은 득점 없이 끝났고, 불펜에서 몸을 풀던 다카기는 천천히 마운드로 향했다.
“우우 ~ 우 ~ ”
사방에서 쏟아지는 뉴욕 팬들의 견제와 야유, 이런 게 은퇴 경기가 된다면 조금 서운하지 않을까. 하지만 다카기는 이 분위기를 즐겼다.
아군의 환호보다는 적군의 야유가 더 즐거운 법, 정말 형편없는 선수였다면 이런 대우를 받지 않았을 거다.
실점을 하고 약한 모습을 보였다면 조금 더 머물다 가라며 환대를 받았겠지, 뭣보다 뉴욕에겐 받아 갈 게 있었다.
‘은퇴선물은 받아간다.’
뉴욕으로부터 은퇴선물을 못 받았으니 내 손으로 직접 갈취할 뿐, 목표는 월드시리즈 직행, 다른 건 생각하지 않았다.
“스윙!! 삼진입니다!! 모리슨은 오늘도 다카기에게 삼진을 헌납하는군요.”
“10년 동안 한결같은 모습이네요. 이 정도면 지주와 소작농 관계 아닙니까?”
피트 오어는 삼진을 당하고 돌아가는 모리슨을 비웃었다.
포스트 시즌까지 합치면 모리슨이 다카기에게 내 준 삼진은 무려 44개, 매년 고정으로 삼진을 헌납하는데 이 정도면 예속된 관계 아닌가.
마땅히 받아 가야 했던 삼진이라 다카기는 덤덤한 표정을 유지했다.
‘진짜 문제는 너지, 받아 간다.’
모리슨은 내놓으라면 내놓는 녀석이지만 콜드웰은 아니다.
내놓지 않겠다면 강탈할 뿐, 초구부터 위협구를 던져 기선을 제압했다.
‘우리 정정당당하게 승부하자고.’
콜드웰은 옅은 미소로 맞받아쳤다.
이렇게 멋진 무대에서 맞붙은 것도 인연, 저 선수는 날 병원으로 보내놓고 웃을 수 있을까. 후회 없는 승부를 하고 싶겠지, 그건 콜드웰도 마찬가지였다.
“바깥쪽으로 떨어집니다!! 카운트는 원 볼 원 스트라이크, 지금은 체인지업이죠?”
“그렇습니다. 다카기가 체인지업을 던지는 건 정말 오랜만에 보네요.”
“그만큼 이 승부에 집중하고 있다는 뜻이겠죠.
콜드웰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일반적인 투수라면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을 던질 때 투구 폼이 약간 차이가 나는 편이다.
예를 들면 돌아 나오는 팔의 각도나 상체의 기울기, 하지만 다카기는 그런 게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건 수많은 문제의 하나뿐, 오늘은 빠른 볼과 슬라이더도 구별이 안 됐다.
사실 다카기는 슬라이더를 던질 때 패스트볼과 약간 다르게 그립을 잡았다.
집게손가락이 엄지 쪽에서 약간 떨어진 그립, 패스트 볼을 던질 때는 조금 더 붙어 있다. 하지만 이걸 눈으로 구별하는 건 절대 불가능, 그나마 타자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건 상체의 기울기나 팔 각도다.
지난 1차전에서는 슬라이더를 구별해 내고 안타를 쳐냈지만, 오늘은 완전히 탈출구가 막혀버렸다.
“스윙!! 삼진입니다!! 콜드웰이 첫 타석부터 혼쭐이 나는군요!!”
“아직 다카기를 넘어서기엔 부족한 선수죠. 바로 증명되지 않습니까?”
“1차전도 잘 던졌지만 오늘은 구위가 더 좋아 보이네요. 기대해도 될 것 같습니다.”
다카기는 패스트볼과 구별이 불가능한 두 개의 변화구에 공격적인 투구를 앞세워 뉴욕 타선을 잠재웠다.
1차전에서 다카기를 괴롭혔던 콜드웰은 삼진만 3개를 헌납, 뉴욕에서 가장 뜨거운 타자도 이 정도니 다른 선수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7회까지 무려 14탈삼진, 단 한 명만 짧은 안타로 1루를 밟았다.
야유를 퍼부었던 뉴욕 팬들은 다들 공손해졌고, 다카기는 그 앞에서 에이스의 품격을 마음껏 발휘했다.
“자, 다카기 선수가 8회에도 마운드에 올라옵니다. 지금까지 1피안타 무실점, 볼넷도 없이 탈삼진을 쓸어 담고 있습니다.”
“앞 선 경기에서 보스턴이 불펜 소모가 워낙 많았죠. 오늘은 좀 길게 던져줘야 합니다. 2대 0이면 아직 불안하거든요.”
스코어는 불안했지만 보스턴의 다니엘 감독은 편안한 얼굴로 경기를 지켜봤다.
다카기는 평소에도 잘 던지는 선수지만 역시 사람이라 유독 컨디션이 좋은 날이 있다. 오늘은 구위는 물론 밸런스도 완벽, 실점이 나오는 게 이상했다.
8회에도 삼진 1개를 곁들이며 무실점, 보스턴은 이어지는 9회 초 공격에서 주앙 고메즈가 쓰리 런 홈런을 날리며 완벽히 게임을 지배했다.
스코어는 5대 0, 다카기는 이 경기를 자기 손으로 끝내기 위해 9회에도 마운드에 올랐다.
‘제발 한 번만 더 붙어보자.’
콜드웰은 더그아웃에서 복수의 칼을 갈았다.
8번 타자부터 시작되는 타선, 한 명이라도 나가줘야 4번째 맞대결이 성사된다.
프로가 삼진만 3개를 당했는데 이가 갈리는 건 당연, 거기다 다카기는 올해를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한 선수다.
이렇게 승부가 끝난다면 너무 억울한 일, 하지만 8 - 9 번 타자는 모두 범타로 물러났고 잭 모리슨이 타석에 들어섰다.
오늘도 성실하게 삼진을 납부한 소작농, 그런데 다카기는 여기서 의외의 선택을 했다.
“오?!! 이게 뭔가요?!! 포르투나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콜드웰을 상대하겠다는 건가요? 하하 ~ 역시 대단한 선수입니다. 여유가 있어요.”
“은퇴하기 전에 싹을 완전히 밟아놓겠다는 거겠죠. 이거 흥미롭습니다.”
모리슨은 고개를 저으며 1루로 걸어 나갔다.
누가 봐도 이건 뉴욕의 치욕, 물론 콜드웰은 기꺼이 도전을 받아들였다. 팀의 승리를 떠나 선수 개인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 헬멧을 눌러쓰며 자세를 잡았다.
‘진짜 구별이 안 된다.’
하지만 흐름은 앞선 세 타석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과 몸 쪽으로 파고드는 빠른 볼의 조합, 평소 빠른 볼을 밀어치고 변화구를 잡아당기는 콜드웰의 패턴을 완전히 뒤섞어 버렸다.
물론 다카기도 홈런을 맞을 각오로 택한 볼배합이다.
몸 쪽 공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장타, 내가 타자를 상대로 이렇게까지 집중했던 적이 있었나.
이 순간만큼은 정말 기계가 된 것 같았다.
[딱 ~ !]
“다시 몸 쪽!! 파울입니다. 카운트는 원 볼 투 스트라이크!!”
“이러다 바깥쪽으로 떨어뜨리면 또 삼진 아닌가요?”
“아닙니다. 의외로 빠른 볼을 던질 수도 있어요. 지금 콜드웰이 빠른 볼에 타이밍을 못 잡고 있거든요.”
곁눈질로 타자를 살피던 포르투나는 바깥쪽에 미트를 벌렸다.
결정구는 빠른 볼, 고개를 끄덕인 다카기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