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화. 아낌없이 주는 선수 - (13)
[뉴욕, 마지막까지 외면할 건가?]
시즌 최종전을 앞두고 여론은 뉴욕을 압박했다.
얼마 전 보스턴은 다카기에게 200승을 축하하는 액자와 구단주의 서명이 적힌 계약서를 은퇴 선물로 제공했다.
지금 은퇴하더라도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보스턴으로 돌아오라는 뜻으로 건넨 선물, 하지만 다카기는 계약서를 받지 않았다.
그만큼 확고한 은퇴 의지, 다른 구단들도 그라운드를 떠나는 대투수에게 소소한 선물을 제공했다. 그런데 뉴욕만 잠잠한 상황, 여론의 압박이 거세지자 로버트 단장은 정식으로 입장을 표했다.
“우리는 그 선수에게 너무 많은 것을 빼앗겼다. 그런데 선물까지 주라는 건 너무 가혹하다.”
속 좁은 발언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보스턴 여론은 이해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뉴욕은 통산 17승을 다카기에게 헌납했고, 디비전 시리즈와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도 4승을 추가로 내줬다. 이렇게 우리를 괴롭혔는데 마지막 가는 길까지 선물을 받겠다는 건가.
거기다 조만간 포스트 시즌에서 또 만날 사이, 로버트 단장은 적군끼리 선물을 주고받는 건 불필요 하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선물은 제가 받아 가겠습니다.”
다카기는 인터뷰에서 선물은 직접 받아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월드시리즈 우승을 위해선 밟고 넘어가야 하는 뉴욕, 승리만큼 기분 좋은 선물이 어디에 있겠나.
받아 갈 건 확실히 받아 가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 1위를 차지한 보스턴은 디비전 시리즈에서 와일드카드로 올라온 휴스턴과 충돌, 나름 긴장감 있는 접전이 펼쳐졌지만 보스턴은 3대 1로 휴스턴을 꺾고 ALCS에 진출했다.
그 다음 상대는 뉴욕, 보스턴의 홈구장 브라민 파크에서 챔피언십 시리즈 1차전이 열렸다.
‘정말 안 보길 바랐다. 진심이다.’
경기를 앞둔 뉴욕 벤치엔 긴장감이 맴돌았다.
지겹도록 맞붙었지만 넘어뜨리지 못했던 선수가 지금 마운드에 올랐다. 마지막엔 이기겠다는 생각이 들어야 하는데, 그동안 당한 기억은 선수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그렇다고 패배감에 젖어있을 순 없는 법, 캡틴 잭 모리슨은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오늘 내가 몇 안타 때리는지 기록해 둬.”
“그게 무슨 소리야?”
“오늘은 내가 저 자식을 때려눕힐 거야. 너무 많은 안타를 쳐서 기록원이 못 셀 수도 있으니까 당신이 대신 체크해.”
허세 작렬에 빌 제임스 코치는 코웃음을 쳤다.
통산 다카기에게 삼진만 37개를 헌납한 선수가 이런 말을 하고 있으니, 일단 첫 안타부터 치고 그런 말을 해야 하지 않겠나.
그렇게 모리슨은 팀원들의 조롱과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타석에 섰다.
“자, 뉴욕의 1회 초 공격으로 ALCS 1차전의 막이 오릅니다. 선두 타자는 잭 모리슨, 올 시즌 타율 0.292, 홈런 19개, 62타점을 기록했습니다.”
“뉴욕의 상징과도 같은 선수죠. 이 선수의 기세를 꺾어놔야 합니다.”
다카기는 철저하게 몸 쪽 빠른 볼로 승부했다.
홈 플레이트에 붙어있는 모리슨,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지만 저렇게 홈 플레이트에 바짝 붙으면 몸 쪽 공이 들어왔을 때, 스윙을 할 공간이 없어 파울이나 범타가 나올 확률이 높다.
모리슨은 올 시즌 19홈런을 쳤지만 매 시즌 홈런 기복이 있는 편, 작년 시즌엔 7홈런에 그쳤다.
중장거리형 타자라고 평가하기도 애매한 선수, 워낙 많이 붙어봤기 때문에 다카기는 상대의 특징을 정확히 파악했다.
‘저 자식한테는 안 통하네.’
초구를 때렸지만 파울, 모리슨은 올 시즌 홈 플레이트에 바짝 붙는 방법으로 많은 실투를 유도했다.
덕분에 몸에 맞는 볼도 많이 맞았지만 효과는 분명했던 접근법, 하지만 다카기 앞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워낙 공이 빠른 데다 구위가 좋으니 간결하게 쳐도 타구가 안 뻗는다.
우중간으로 밀어치는 게 최선이지만 저 자식도 그걸 알고 있으니 몸 쪽으로 던지는 거겠지. 홈에서 약간 멀어졌다.
‘다 봤다.’
곁눈질로 모리슨을 살핀 존 포르투나는 바깥쪽에 미트를 벌렸다.
마운드에서는 타자의 스탠스가 어떻게 변하는지 보이지 않는다. 이런 건 내가 체크해야 할 일, 다카기는 그 지시에 따랐다.
[따악 ~ !]
“배트 부러졌고!! 2루수가 잡아 1루에 송구합니다!! 원 아웃!! 다카기가 첫 타자를 공 2개로 처리합니다.”
“지금은 배트 끝에 걸렸죠. 투수들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역시 다카기는 몸 쪽 보다 바깥쪽 볼을 던졌을 때 배트가 부러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만큼 타자 입장에선 거리감이 잡히질 않는다는 거죠. 궤적이 스트라이크 존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지 않습니까. 치는 건 둘째 치고 일단 공을 제대로 봐야겠죠.”
이제 타석에는 대니 콜드웰, 올 시즌 36홈런을 때린 뉴욕의 히트 상품이다.
특히 보스턴에게 강했던 편, 올 시즌 레이븐을 상대로 홈런을 쳤다가 벤치 클리어링이 벌어진 적도 있다.
콜드웰은 앞으로 보스턴의 앞길을 막아설 젊은 거포, 반면 그동안 팀의 버팀목이 됐던 다카기는 은퇴를 앞두고 있다.
지켜보는 보스턴 팬들에겐 다소 복잡한 감정이 드는 승부, 그래도 많은 팬들은 렛츠 고 보스턴을 연호하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엇!!’
초구는 몸 쪽 깊숙한 볼, 콜드웰은 서둘러 타석에서 벗어났다.
대각선으로 들어오는 우완 투수의 빠른 볼은 좌타자에게 취약한 편, 바깥쪽으로 들어올 줄 알았는데 이렇게 치고 들어올 줄이야.
역시 여느 투수들과는 다르다는 걸 느꼈다.
[딱 ~ !]
“이번에는 배트 끝에 걸립니다. 카운트는 원 볼 원 스트라이크”
“역시 노련하죠. 콜드웰이 올 시즌 우완투수에게 타율 0.315, 홈런도 30개를 때려내며 강점을 보이지 않았습니까. 보스턴 투수들에게도 홈런 4개를 뺏어 냈는데,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전부다 바깥쪽 볼을 던지다 홈런을 맞았거든요. 지금은 몸 쪽 공으로 시선을 한 번 흔들고 바깥쪽으로 던졌어요. 어지간한 배짱 없이는 할 수 없는 투구입니다.”
다카기는 3구를 바깥쪽 높은 쪽으로 던져 스윙을 유도했다.
하지만 따라 나오지 않는 방망이, 어지간하면 상대를 인정하지 않지만 저 선수는 귀찮은 상대라는 걸 인정했다.
4구는 몸 쪽으로 붙였지만 볼 판정을 받으면서 카운트는 쓰리 볼 원 스트라이크, 철벽의 에이스가 승부에 애를 먹자 관중석엔 묘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아 ~ 이게 빠지는군요. 콜드웰이 볼넷으로 출루를 합니다.”
“글쎄요. 지금은 들어가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바깥쪽 승부를 택했거든요. 다카기 선수가 이런 상황에선 승부를 들어갔는데 … 설마 꼬리를 내린 건가요?”
“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 선수가 홈런을 두려워하는 성격입니까?”
다카기의 열성 팬 피트 오어는 발끈했다.
저 위대한 투수가 승부를 피했다니, 자기 일도 아닌데 핏대를 세웠다.
“다카기도 사람입니다. 지금은 약간 부담감을 느낀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경기가 끝나고 물어보죠. 절대 도망칠 선수가 아닙니다.”
중계석에서 해설위원들이 신경전을 벌이는 동안, 다카기는 마음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이 내가 도망을 택하다니, 자존심이 상했지만 지금은 피해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도망은 한 번이면 충분해.’
생전 처음 겪는 굴욕, 다카기는 다음 타자 숀 스팸과의 승부에 집중했다.
콜드웰 - 스팸으로 이어지는 좌타 거포 라인은 투수들에게 공포의 대상, 하지만 이미 굴욕을 맛본 다카기에게 도망칠 곳은 없었다.
“스윙!! 헛칩니다. 지금은 슬라이더죠?”
“다카기가 위기감을 느낀 것 같네요. 보통 1회는 빠른 볼로 승부를 하는 편인데, 고속 슬라이더를 생각보다 일찍 꺼내 들었습니다.”
“원래 다카기는 1회부터 슬라이더 던졌습니다. 특별한 일 아니죠.”
계속되는 피트 오어와 존 올러우의 신경전,
존 올러우는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경기를 보지만 피트 오어는 가끔 감정에 치우치는 발언을 한다.
하지만 그게 또 팬들에겐 재미를 주는 요소, 다카기는 슬라이더만 3개를 던져 숀 스팸을 삼진 처리했다.
다음 타자는 땅볼 처리하며 1회 종료, 볼넷이 한 개 나왔지만 그럭저럭 괜찮았던 투구에 팬들은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본인은 절대 만족할 수 없었던 투구, 콜드웰과의 재대결에 집중했다.
양 팀 모두 3회까지 득점 제로, 뉴욕의 4회 초 공격이 시작됐다.
선두 타자는 대니 콜드웰, 뉴욕 선수들은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저 자식은 너한테 겁먹었다고!!”
“한 방 날려버려!!”
선수의 마음은 선수가 아는 법, 1회 승부를 지켜본 선수들은 다카기가 콜드웰을 부담스럽게 여긴다는 걸 간파했다.
다카기는 그걸 보란 듯이 짓밟아줘야 하는 입장, 초구부터 격한 불꽃이 튀었다.
“스윙!! 헛칩니다. 지금은 마음먹고 돌려본 것 같은데요.”
“콜드웰은 전형적인 풀 히터는 아닙니다. 빠른 공은 밀어치고 몸 쪽으로 들어오는 변화구는 잡아당기는데, 지금은 빠른 볼이었거든요. 콜드웰도 다카기를 의식하는 것 같네요.”
올러우는 투수와 타자가 서로를 인정한다는 걸 간파했다.
힘이 좋아 빠른 볼도 밀어치는 콜드웰이 바깥쪽 공을 저렇게 풀 스윙으로 당길 줄이야.
어지간해서는 보기 힘든 장면, 다카기도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포수와 사인을 주고받았다.
“악!!”
다음 공은 몸 쪽으로 빠르게 들어오며 옆으로 살짝 휘는 슬라이더, 콜드웰을 힘껏 잡아당겼지만 자기 발등을 찍었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데 마지막에 예리하게 휘다니, 숀 스팸이 왜 슬라이더에 세 번 휘두르고 삼진을 당했는지 이해가 됐다.
카운트는 이제 노 볼 투 스트라이크, 보스턴 팬들은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한 번 더 가자.’
포르투나 포수는 다시 한 번 슬라이더를 요구했다.
이번에는 바깥쪽에 걸치는 백 도어, 다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 !!]
“이 타구는!! 유격수 옆을 빠져 나갑니다!! 콜드웰이 불리한 카운트에서 안타를 쳐내는군요.”
“역시 타격에 재능이 있네요. 단, 다카기도 못 던진 공은 아니었습니다. 이건 타자가 잘 친 거예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올러우의 발언에 피트 오어는 침묵을 유지했다.
다카기 광팬이라고 해도 지금 공은 타자가 잘 때렸다고 밖엔 할 말이 없다. 다카기의 공도 때려내는데 다른 투수들이 콜드웰을 어떻게 상대할지, 약간 걱정이 앞섰다.
‘진 건 진 거다. 어쩔 수 없지.’
다카기는 표정 없는 얼굴로 포수가 던져준 공을 받아들었다.
조만간 떠나는 몸, 내가 앉았던 왕좌를 누군가는 차지할 거 아닌가.
그게 보스턴 선수라면 더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지금 팀에 그만한 역량을 지닌 선수는 없다.
그런데 오늘 계승자를 찾은 기분이랄까. 뒷세대를 이끌어 주는 것도 선구자의 역할, 저 선수가 날 밟고 더 높은 곳으로 가겠다면 등을 내줄 생각도 있었다.
‘그래도 한 번 더 붙어보자. 네게 정말 그만한 자격이 있는지 시험해보겠어.”
세 번째 승부를 가로막는 방해물들은 바로바로 치워냈다.
길게 끌 것 없이 스트라이크 존을 적극 공략, 6회 초에 다시 얼굴을 마주했다.
‘이렇게 긴장하는 건 처음이다. 스트레스야.’
콜드웰도 나름 각오를 다지고 타석에 섰다.
아차 하면 스윙 궤적에서 이탈하는 공, 밀어치는 타격을 할 줄 알기 때문에 공을 끝까지 볼 수 있지만 다카기의 구위는 그 기준을 넘어섰다.
앞선 타석에서도 밀어쳐서 안타를 만들어 냈지만 만족할만한 타구는 아니었다.
정타가 나오기 전엔 우쭐할 필요 없겠지,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