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화. 아낌없이 주는 선수 - (8)
“자, 신승우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오늘 6회에 대타로 나와서 땅볼 - 유격수 플라이 - 아직 안타를 기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출루만 하면 얼마든지 팀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선수입니다. 집중해야 돼요.”
10회 말 한국의 공격, 신승우는 바뀐 투수 에드마르 버헬스트의 초구를 공략해 안타를 만들어 냈다.
작년 시즌 KBO에서 11홈런 19도루를 기록한 선수, 주루가 나쁘지 않은 선수라 김준호 감독은 대주자를 기용하지 않았다.
한 점만 내면 되는 게임, 보내기 번트가 나오면서 1사 주자 2루가 됐고, 타석에는 김인호가 들어섰다.
따악 ~ !!
2구를 때린 타구, 안타가 나오자 한국 벤치는 들썩였지만 포수의 위치를 확인한 다카기는 홈으로 뛰어드는 주자를 말렸다.
“안 돼!! 안 돼!! 오지 마!!”
홈으로 뛰어들기엔 조금 얕은 타구, 거기다 홈 플레이트 앞으로 마중을 나가던 포수는 홈 플레이트 왼쪽으로 들어섰다.
송구가 홈 플레이트 왼쪽으로 오면 태그 플레이가 자연스럽게 이뤄지기 때문에 저런 상황에서 홈으로 뛰어드는 건 곤란하다.
주자를 속이기 위한 포수의 잔재주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다카기는 메이저리그에서 이런 상황은 수도 없이 겪었다.
포수가 홈 플레이트 왼쪽으로 이동했다면 자연스럽게 주자의 진로를 막아서게 되는데, 공이 없는 상황에서 이러면 주자는 자동득점이다.
하지만 포수의 위치가 송구 방향과 일치한다면 예외,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아웃!!”
정확한 송구에 자연스러운 태그 플레이, 한국 벤치는 끝내기 분위기에서 초상집으로 바뀌었다.
왜 3루 코치는 대책 없이 팔을 돌려버린 걸까.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는 지시, 1사 주자 1 - 3루 기회가 2사 주자 1루가 되자 다카기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우리만 무안해졌네.’
끝내기를 확신하고 보호 펜스 앞으로 뛰쳐나간 한국 선수들도 하나둘 벤치로 돌아왔다.
다카기가 소리를 쳤을 땐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는데, 뭐가 잘못됐던 걸까. 방금 전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는 선수는 몇 명 없었다.
주자가 포수의 위치까지 신경 쓰고 달리겠나. 당연히 코치는 지금이 뛰어야 할 상황인지 아닌지 정확히 판단을 내려줘야 한다.
코치의 뜻에 따른 주자는 죄가 없을 뿐, 안타에 무작정 팔을 돌린 3루 코치에게 책임을 물어야 했다.
“형, 이럴 땐 뛰면 안 되는 거죠?”
“ …… ”
파트너 김재성이 질문을 던졌지만 다카기는 침묵을 유지했다.
다른 포지션의 선수들은 몰라도 김재성은 포수 아닌가. 뻔히 아는 질문을 나한테 하는 이유가 뭔지, 정말 몰라서 묻는다면 그것도 문제였다.
‘기본이 안 됐다 기본이’
다카기는 끓어오르는 화를 겨우 억눌렀다.
선수들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많이 부족한 한국 선수들, 이제 그러려니 할 때도 됐는데 경기를 거듭할수록 실망감만 높아졌다.
어쨌든 한국의 10회 말 공격은 득점 없이 종료, 11회부터 양 팀은 승부치기에 돌입했다.
1, 2번 타자를 루상에 세워두고 3번 제임스 에체바리아부터 시작되는 네덜란드의 공격, 마운드의 이상호는 볼넷을 내주며 만루 위기에 몰렸다.
[따악 ~ !!]
“아 … 이 타구가 중견수 앞에 떨어지는군요. 3루 주자 … 그리고 2루 주자가 모두 홈으로 들어옵니다. 네덜란드가 6대 4로 앞서가는군요.”
“뭐, 괜찮습니다. 우리도 다음부터 똑같은 기회가 주어지니까요.”
신정철 위원은 애써 괜찮은 척했지만 허무하게 끝난 10회 말 공격이 마음에 걸렸다.
중견수의 송구가 좋았던 걸까, 아니면 우리가 너무 무모했던 걸까. 하지만 후회해 봤자 지나간 기회는 돌아오지 않았다.
네덜란드는 11회 공격에서 대거 4점을 뽑아내며 앞서나갔고, 한국은 부랴부랴 추격에 나섰다.
하지만 2점에 그친 공격, 3전 전승을 기록하며 2라운드에 진출한 네덜란드 선수들이 격한 포옹을 나누는 사이, 다카기는 조용히 캡을 벗었다. 그다음은 유니폼, 중계카메라는 그 모습을 집중 조명했다.
“왜 유니폼을 벗으신 겁니까?”
“이제 몸에 걸칠 이유가 없으니까요.”
경기가 끝난 후, 구름처럼 몰려온 기자들 앞에서 다카기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한국 대표 팀의 용병으로 출전한 몸, 그 한국이 패배했는데 태극 마크가 달린 유니폼이 내게 무슨 소용인가.
이제는 다시 보스턴 소속으로 돌아갈 때, 이 와중에도 다카기는 내일 저녁은 집에서 먹게 됐다며 농담을 건넸다.
그래도 지금까지 한국 선수로 뛰었는데 팀에 대한 애정이 없는 건가. 다카기는 기자의 질문에 단호한 입장을 표했다.
“오늘 한국은 이길 수 없는 경기를 했습니다. 정말 이 팀에 애정이 있다면 잘 싸웠다는 박수보다 뭘 잘못했는지 따지는 게 우선일 겁니다.”
다카기는 10회 말에 있었던 상황을 지적했다.
메이저리그도 홈 충돌 방지법을 시행하고 있지만, 예전의 풍습이 남아 있어 주자가 포수를 들이받는 걸 일정 상황에서 허용하고 있다.
하지만 WBC는 아니다.
선수를 보호하기 위해 고의든 아니든 충돌을 피하는 게 룰, 그런데 10회 말 당시, 포수는 홈 플레이트 왼쪽에 자리를 잡았다. 주자의 진로가 막혔고 거기다 얕았던 타구, 절대 홈으로 들어와선 안 될 상황이었다.
그런데 돌려버린 코치, 누굴 탓하겠는가.
패배의 책임은 함께 짊어져야 하는 법, 한국은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패배한 것뿐이다.
앞으로 한국 야구가 발전하려면 그런 사소한 부분도 신경 써야겠지, 지금 대표 팀에게 필요한 건 잘 싸웠다는 박수보다 질책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다카기, 모두가 환호하는 와중에도 주자의 쇄도 말렸다]
여론도 문제의 상황을 재조명했다.
모두가 끝내기를 확신했을 때 그런 냉정한 판단을 내렸다니, 정말 그랬을까? 믿기지 않았지만 김재성과 몇몇 선수들이 그 사실을 인정했다.
덕분에 팬들의 관심이 쏟아졌지만 다카기는 조용히 미국으로 향하는 짐을 꾸렸다.
패배한 선수가 박수를 받아 뭘 어쩔 건가. 속만 뒤집힐 뿐, 다 잊어버리고 플로리다 스프링캠프에 짐을 풀었다.
올해가 내 마지막 커리어, 패배감에 젖어 있을 여유도 없었다.
“야, 그러니까 내가 미국 대표 팀으로 뛰라고 했잖아.”
“너만 있었어도 가볍게 우승했을 텐데”
WBC 일정을 마친 선수들도 하나둘 팀에 복귀했다.
미국은 이번 대회에서 결승까지 진출, 통산 3번째 우승을 달성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던 일정, 예선전에선 멕시코에게 일격을 당하는 망신을 당했다.
이후에도 3점 차 이상으로 이긴 경기가 없을 정도로 치열했던 게임, 하지만 다카기는 한국을 선택한 건 후회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래도 이번 대회에서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어.”
“뭐가?”
“너희들은 생각보다 소중했다는 거”
한국 대표 팀의 플레이를 보다 보니, 보스턴 선수들이 얼마나 야구를 잘하는지 알게 됐다.
평소에는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이제는 하나하나가 소중한 녀석들, 이때 다니엘 감독이 다카기의 속을 뒤집어 놨다.
“난 솔직히 한국 대표 팀에 너무 감사하고 있어.”
“그게 무슨 소리예요?”
“자네를 이렇게 빨리 우리 품에 보내줬으니까”
아껴 써야 할 에이스를 WBC에 보내다니 누가 좋아하겠나, 다카기가 미국 대표 팀으로 출전해 많은 이닝을 소화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차라리 일찍 떨어진 게 다행, 한소리하고 싶었지만 마침 암 투병을 마치고 돌아온 존 포르투나가 눈에 띄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나, 두 선수는 가볍게 포옹을 나눴다.
“너 이제부터 긴장해야 된다.”
“알고 있어.”
프로투나는 올 시즌 2가지 목표를 세웠다.
일단 건강하게 시즌을 완주하는 것, 개리 우드라는 경쟁자가 나타나면서 주전 포수 자리도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보스턴 구단에서 우승반지를 제작해줬지만 내가 팀의 16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에 공헌한 건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올해만큼은 내 손으로 대업을 이루겠다는 각오를 세웠다.
* * *
[다카기, 올해가 마지막 시즌]
[은퇴 번복 없다]
시간은 흘러 3월 27일, 다카기는 홈에서 열리는 개막전 선발로 나섰다.
9년 연속 개막전 출전은 팀 역사상 최다 기록, 지난 1974년, 마이클 윈터스는 보스턴 유니폼을 입고 8년 연속 개막전 선발을 달성해 냈다.
50년 넘게 이어진 대기록을 깨버린 철벽의 에이스, 팬들은 천천히 마운드로 향하는 다카기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올해가 마지막이라니, 아직도 믿기지 않았지만 위대한 여정을 마무리하는 대선수 앞에서 슬픔 따윈 드러내지 않았다.
‘올해가 진짜 마지막이다. 내 모든 것을 쏟아붓겠어.’
1회 초 인디애나의 공격, 다카기는 초구부터 97마일 빠른 볼을 몸 쪽에 집어넣었다.
WBC 덕분에 몸은 일찍 만들어진 편, 다음 공은 바깥쪽으로 던져 파울을 유도했다.
“다시 바깥쪽!! 돌아 나옵니다!! 삼진!! 첫 타자부터 삼구삼진을 잡아내는군요.”
“높은 곳으로 던졌어요. 지금 상황이라면 타자는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슬라이더를 예상했을 텐데, 빠른 볼이 눈높이로 들어오니까 배트가 돌아간 거죠.”
“놀라운 건 개리우드의 포구도 마찬가지죠. 저런 공을 이렇게 안정적으로 잡을 수 있는 선수는 많지 않습니다.”
높고 빠른 공을 잡을 때 자세를 약간 높게 잡는 포수가 있다.
이런 사소한 움직임도 놓치지 않는 게 메이저리그, 하지만 개리 우드의 자세는 한결같았다.
이러다 포수 주전 경쟁에서 밀리는 거 아닌가, 오늘 지명타자로 출전하게 된 존 포르투나는 긴장감을 바짝 끌어올렸다.
“와아아 ~ !!”
“돌아온 걸 환영해요!! 존!!”
1회는 양 팀 모두 별일 없이 종료, 보스턴 팬들은 2회 말 타석에 들어서는 포르투나에게 박수를 보냈다.
어린 선수가 암이라는 큰 병에 걸렸는데 얼마나 상심이 컸을까.
그래도 씩씩하게 이겨내고 돌아온 선수, 포르투나는 타석에 들어서기 전 헬멧을 벗어 관중들의 환호에 예의를 표했다.
꿈에서도 잊지 못한 그라운드, 새 삶을 시작한 기분이랄까. 순간 눈물이 찔끔 새어 나왔지만 눈에 뭐가 들어간 척했다.
“자, 존 프로투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작년 시즌은 한 경기도 출장하지 못했지만 데뷔 시즌에서 12홈런을 때려내며 가능성을 보여줬습니다.”
“콜 업 후 두 달 만에 때려낸 홈런이죠. 이번 시범경기에서도 홈런 6개를 때려내며 장타력을 과시했는데, 첫 경기에서 어떤 모습을 보일지 기대가 됩니다.”
[따아악 ~ !!]
“초구 타격!! 계속 날아가는 이 타구는!! 담장 너머로 ~ 사라집니다!!!! 돌아온 걸 환영합니다!!!! 존!!!! 보스턴에 선취점을 안겨줍니다!!”
“역시 파워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죠!! 올 시즌 기대가 정말 큽니다!!”
홈을 밟은 포르투나는 타석에 들어서는 개리 우드와 포옹을 나눴다.
시즌 내내 경쟁해야 될 상대인데 왜 나는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걸까, 그래도 개리 우드는 말없이 안아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사방에서 쏟아지는 박수갈채, 불펜에서 몸을 풀고 있던 다카기도 그 행렬에 동참했다.
올해는 내게 커리어를 끝내는 마침표가 되겠지만, 저 선수에겐 쉼표를 찍고 역사를 써내려가는 한 해가 되겠지, 먼 길을 돌아온 만큼 응원해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