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화. 아낌없이 주는 선수 - (6)
“1차전에서는 등판시키지 않을 겁니다.”
WBC 예선을 앞두고 한국 대표 팀의 김준호 감독은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다.
최근 국제대회에서 기선을 잡지 못하며 예선전 문턱도 넘기 어려웠던 한국, 다카기라는 지구 최강 투수를 보유했으니 첫 경기에 활용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김준호 감독은 좀 더 중요한 경기에서 다카기를 쓰고 싶다는 입장을 밝혔다.
“혹시 한일전이나 … 그런 경기를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한국과 일본은 같은 조가 아니다.
예선전은 통과해야 만날 수 있는 상대, 이렇게 여유를 부려도 되는 건가. 팬들은 시작부터 불안하다는 반응, 뭣보다 다카기는 한일전에 등판하겠다고 감독과 합의한 적이 없다.
한국 대표 팀 유니폼을 입었으니 팀이 원하는 상황에서 등판해야겠지만, 일단 선수와 논의는 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마치 선수가 동의한 것처럼 말하는 감독,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있는데 괜히 한 마디 일어났다가 잡음 일어날 것 같고, 그러려니 넘어갔다.
“선글라스 어디서 났어?”
[내가 씌워줬지 ~ ♡ 어때? 예쁘지?]
예선전 첫 경기를 앞두고, 다카기는 일본에 있는 가족들과 영상통화를 했다.
두 살도 안 된 막내딸에 선글라스를 씌워 준 아내,
엄마 품에 안긴 아기는 꾹 닫은 입술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디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는데 앞이 보이질 않으니, 선글라스를 스스로 벗길 만큼 머리가 큰 녀석이 아니라 고개만 움직였다.
“애기가 아빠를 못 보잖아. 얼른 벗겨.”
[알았어요 ~ ♡]
그제야 아빠 얼굴을 확인한 아기는 환하게 웃었다.
손을 마구 흔들며 꺅 ~ 꺅 ~ 거리는데, 아빠 입장에선 얼른 가서 안아주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여보”
[왜?]
“나 여기에 괜히 온 거 같아”
다카기는 아내 앞에서 솔직한 심정을 털어놨다.
형제가 같이 뛰는 모습을 할아버지가 보신다면 기뻐하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현실과 이상은 다른 법, 이 팀 선수들은 이길 생각이 있는 건가.
너무 방만한 데다 승부에 대한 의욕도 없고, 난 여기서 무슨 주접을 떨고 있는 건지, 후회 없는 인생을 살자고 결심했는데 이번 선택은 후회됐다.
[벌써 집이 그리워졌어?]
“응”
[그럼 얼른 여기로 와.]
“그래, 통과 하든 못 하든 가긴 가겠지.”
한국이 예선에서 탈락해도 일본으로 돌아가는 길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꼴사납게 패배자의 몰골로 돌아오느냐, 당당하게 승자로 입성하느냐의 문제, 기왕 선택한 팀이니 승자로 돌아오는 게 낫지 않겠나.
하지만 팀이 돌아가는 꼴을 보니 큰 기대는 안 됐다.
“아빠가 집에 가서 많이 놀아줄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
[꺄아 ~ ]
그래도 딸의 웃는 모습을 보고 힘을 얻었다.
주변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실어주는 게 내 최대장점 아닌가. 그런데 나도 모르게 뿜어져 나온 마이너스 에너지, 정신 바짝 차리고 1차전을 맞이했다.
한국의 예선 1차전 상대는 호주, 한국 여론은 상대가 우리보다 한 수 아래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건 착각이다.
호주는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야구시장 확대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나라, 일부 구단은 호주 프로팀을 마이너리그 구단처럼 부리고 있다.
뭣보다 호주야구연맹의 운영비 80%를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지원하고 있고, 뉴질랜드까지 합류하면서 호주야구 리그는 10개 팀으로 늘어난 상황, 팀당 10만 달러를 넘지 못했던 샐러리 캡도 10배 이상 늘어나면서 야구에만 집중하는 선수들도 늘었다.
그런데 무슨 자신감으로 호주는 밑으로 깔고 가는 건지, 이건 자신감이 아니라 오만함이었다.
“자, 오늘 호주 대표 팀은 올리버 앤드류를 선발로 내세웁니다. 작년 시즌 호주리그 성적은 7승 3패, 평균자책점 2.83, 117이닝 동안 볼넷 58개, 탈삼진은 119개를 기록했습니다.”
“최고 158km의 빠른 볼을 던지는 선수죠. 다만 제구가 약간 불안하기 때문에 우리 선수들이 공략 못 할 수준은 아닙니다.”
올리버 앤드류는 미국에서도 눈길을 주고 있는 유망주, 다카기도 관심을 주고 지켜봤다.
‘누가 알려주는 사람 없나?’
앤드류는 분명 좋은 공을 던지고 있다.
문제는 전혀 길들여지지 않은 무브먼트, 투수는 자기 공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아야 한다.
그게 안 되는데 어떻게 공을 스트라이크 존에 넣을 수 있겠나.
너무 바깥쪽으로 휜다면 그걸 잡아주는 게 제구를 가다듬는 과정, 이런 건 투수가 스스로 깨닫긴 어렵다.
마운드에서 공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일까?
크게 꺾이는 변화구를 던져야 보이지 빠른 볼은 한순간에 슝 하고 날아가 버린다.
그래서 포수와 코치가 네 공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려줘야 하는데, 이 작업을 소홀히 하는 사람들이 있다.
조금만 가다듬으면 괜찮을 텐데 약간 아쉬운 기량, 물론 한국 타자들의 기량은 앤드류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섭섭했다.
‘볼이잖아. 내가 잘못 본 거야?’
앤드류가 던지는 공은 3개 중 1개만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고 있다.
투수가 던지는 공의 절반은 볼, 그걸 골라내는 게 타자의 역할 아닌가. 그런데 높은 빠른 볼과 떨어지는 변화구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타자들, 가끔 들어오는 스트라이크에 혹해 배트를 돌리는데 저런 식이라면 득점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공을 보라고!! 공을!!”
답답한지 벤치에서 목소리만 높이는 코치들,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나.
여기서는 통하지 않는 내 긍정파워, 말이 자유롭게 통하는 것도 아니고, 다카기는 보스턴에 있을 때와 달리 침묵을 유지했다.
결국 이날 경기는 3대 0, 호주의 완승으로 끝났고, 승리를 자신했던 김준호 감독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채 기자들의 질문을 받아야 했다.
“감독님, 1차전 승리 자신하셨는데 결과가 이렇게 됐네요.”
“ … 네 면목 없습니다.”
“2차전에서는 다카기 선수 등판시키실 겁니까?”
“음 … 일단 여기서 결정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좀 더 고려해보겠습니다.”
그날 저녁, 김준호 감독은 다카기와 면담을 했다.
상황이 급하게 됐으니 2차전에 등판해 달라는 것, 다카기는 그러려니 받아들였다.
내 동의도 없이 한일전을 운운하더니, 이제 와서 대화를 하는 이유가 뭔가. 이동인을 파트너로 삼으라는 권유를 물리쳤다고 한 번 튕겨본 건 아닌지, 그래도 이 길은 내가 선택한 길 아닌가.
조금 마음에 안 든다고 프로 정신을 뒤엎진 않았다.
“형, 저 떨려서 미칠 것 같아요.”
“뭐가? 너 한국에서 하루 이틀 경기한 것도 아니잖아.”
“모르겠어요. 이렇게 떨리는 건 생전 처음이에요.”
다음 날, 다카기는 통역을 끼고 파트너 김재성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이제는 서로 호형호제할 정도로 친해진 관계, 혹시 내 미숙한 리드가 대투수의 경기를 망치는 건 아닐까.
뭣보다 한국 여론은 왜 김재성이 다카기의 파트너가 됐는지 아직도 이해를 못하고 있다.
감독도 이동인 포수를 추천했고, 팬들도 그게 옳다고 하는데, 지금 나는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건가.
주위에서 계속 그런 시선을 보내다 보니 어깨가 위축되는 게 사실, 다카기는 아직 멘탈이 약한 후배를 다독였다.
“넌 나만 보면 돼.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신경 꺼. 투구는 우리가 하는 거야.”
주위에서 뭐라고 하건 그게 무슨 상관인가, 경기가 시작되면 투수와 대화를 나누는 건 포수의 몫이다.
너희들이 우리를 따돌리는 게 아니라, 우리 사이에 간섭하는 것뿐, 그렇게 생각하면 되는 거 아닌가.
김재성은 입꼬리를 슬쩍 들어올렸다.
“그럼 우리가 모든 사람을 따돌리는 거네요?”
“그래, 한눈팔지 말고 나만 봐, 넌 내가 선택한 파트너라고, 분명 괜찮을 거야.”
김재성은 미트에 주먹을 박아 넣으며 자신감을 끌어올렸다.
투수에게 집중하면 됐지 주변 시선은 뭐 하러 신경 쓰나, 모든 사람들을 철저히 따돌렸다.
[뭐야? 생각보다 괜찮잖아.]
[오히려 안정적인데? 괜한 걱정이었어]
-> 그러니까 내가 뭐라고 했냐. 김재성 수비 능력은 현장 사람들이 더 잘 안다. 괜히 국가대표에 뽑혔겠냐? 알아주지 않는 건 팬들이었지.
-> 그런데 왜 김준호 감독은 다카기한테 이동인 추천했냐? 앞뒤가 안 맞잖아.
-> 포수는 없는데 구색은 갖춰야 되니까 그런 거겠지.
-> 실력에 비해 눈에 안 띄는 선수라 안타까웠는데, 이번 경기 잘해서 인정받자.
그렇게 시작된 대만과의 2차전,
왕의 간택을 받은 신데렐라는 놀라울 정도로 안정적인 리드를 선보였다. 팬들의 반응은 놀랍다는 칭찬 일색, 워낙 투수력이 개판인 팀에서 뛰는 선수라 빠진 공을 막거나 쫓아다니는 이미지로 낙인이 찍혔다.
그런데 이게 웬일, 우리는 지금 메이저리그 경기를 보고 있는 건가.
다른 건 몰라도 배터리의 호흡만 따지면 그런 착각이 들 만했다.
“다시 바깥쪽!! 포수가 잡아서 1루로 송구합니다. 투 아웃!! 다카기 선수가 5타자를 연속해서 범타로 잡아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다카기 선수라고 불러야 합니까? 귀에 좀 거슬리는데요?”
“그렇습니다. 뭔가 저희들끼리 통하는 이름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한국 중계진은 다카기의 호칭을 두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한국 대표로 뛰고 있으니 한국 이름으로 불러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다카기는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을 등에 달고 있다.
한국 경기에서 일본식 이름을 언급하는 건 말하기도 듣기도 꺼림칙한 일, 하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오늘 져도 우리는 한국에게 진 게 아니다. 다카기라는 일본인에게 진 거지.]
[다카기 안 나왔으면 한국은 오늘 지고 끝났을 거다.]
[한국은 영원히 일본을 넘을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경기를 시청하고 있는 대만 팬들은 비아냥대는 태도를 보였다.
한국인들이 욱하기 딱 좋은 말만 추려낸 공격, 물론 다카기 - 김재성 배터리는 주위의 모든 것을 따돌리고 경기에만 집중했다.
“스윙!! 삼진입니다!! 오늘 경기 12번째 탈삼진!! 아직 6회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대만 타자들이 고등학생처럼 보이네요. 제가 메이저리그 경기를 많이 보진 못했지만 이 선수가 왜 역대 최고의 투수라 불리는지 알 것 같습니다. 대만 타자들 수준으로는 건드리지도 못하네요.”
다카기는 13번째 탈삼진을 잡아내고 마운드를 내려왔다.
대만 타자뿐만 아니라 한국 야수진을 병풍으로 만들어 버린 존재감, 다만 1라운드 투구 수가 75개로 제한됐다는 게 문제다.
WBC 규정상, 1라운드에서 75개를 넘기면 그 투수는 5경기 동안 출전할 수가 없다.
다카기를 보유한 보스턴도 절대 무리시키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허락한 WBC 출전, 더 쓰고 싶었지만 투구 수가 70개가 되자 김준호 감독은 마운드로 향했다.
“아직 75개 안 됐잖아요.”
“뒤는 다른 선수들에게 맡기게.”
“아니요. 공 4개로 처리할 테니까 그렇게 알아두세요.”
다카기는 강판을 거부했다.
완투를 매번 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올라온 이닝은 끝내고 내려간다. 최근 3년의 기록을 살펴보면 271이닝 - 234이닝 - 226이닝, 한눈에 봐도 도중에 강판 된 적이 없다.
나머지 두 타자는 공 4개로 끝날 수 있겠지.
치라고 대놓고 욱여넣었다.
‘치라니까 왜 못 치냐?’
하지만 대만 타자는 헛스윙을 돌렸다.
투구 수 75개 채우려고 일부러 헛스윙을 하는 건가. 아니면 정말 못 치는 건가. 시험 삼아 한 번 더 던져봤지만 건드리지도 못했다.
“스윙!! 삼진입니다!! 오늘 경기 15번째 삼진!! 다카기 선수가 위력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아 ~ 그런데 이거는 좀 의도가 보이는데요. 다카기 선수를 조금이라도 빨리 끌어내리겠다는 거 아닐까요?”
“글쎄요. 이제 남은 공은 하나밖에 없는데,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하나 더 던지면 무조건 강판,
다카기는 공 하나로 7회를 마무리하고 내려갈 것인가. 한국 팬들의 시선은 이번 투구에 집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