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318화 (318/361)

318화. 아낌없이 주는 선수 - (4)

“자, 이제 2대 0으로 앞선 보스턴의 4회 초 공격으로 시작됩니다. 선두 타자는 케빈 오크만, 오늘 첫 타석에서는 2루 땅볼로 물러났습니다.”

“스튜어트는 여기서 투 아웃을 잡고 고메즈를 상대할 생각이겠죠.”

“하지만 쉽지 않을 겁니다. 뒤에 누가 있는지 생각해야죠.”

오크만은 오늘 선발 우익수로 출장했지만 타격은 뛰어나지 않다.

통산 781경기에서 타율 0.241, 홈런 47개, 242타점, OPS도 0.7을 겨우 넘기는 선수, 그래도 지금까지 살아남은 건 다 이유가 있다.

수비 능력도 괜찮지만 보스턴에서 가장 많은 도루를 할 수 있는 선수, 출장기회가 적어서 그렇지 통산 82%의 높은 성공률을 기록하고 있다.

출루하면 골치 아픈 선수, 다음 타자가 투수 다카기라 여기서 출루가 되면 보내기 번트가 나올 수도 있다.

피츠버그 입장에선 반드시 막아야 하는 출루, 오크만은 그 점을 노리고 초구부터 배트를 돌렸다.

‘어떻게 할까.’

2루수 옆을 빠져나가는 안타, 다카기는 가벼운 스윙으로 몸을 풀며 타석에 들어섰다.

지금 상황에선 보내기 번트를 대는 게 정공법, 일단 벤치 사인을 확인했다.

‘여차하면 뛰어야지’

한편, 1루 주자 오크만은 단독 도루를 생각했다.

요즘 메이저리그는 도루를 안 하는 추세, 도루가 사라지자 피치아웃도 빠르게 감소하고 있다.

1990년대 만 하더라도 경기당 0.6회의 피치아웃이 나왔지만 올해 들어 경기당 0.1회로 줄었다. 피치아웃은 주자를 아웃시키기 위한 투구, 그 행위가 거의 사라졌다는 뜻이다.

피치아웃만 줄어들었을까?

희생번트와 고의사구 역시 감소하는 추세, 희성번트는 경기당 0.5회에서 0.3회로, 고의 사구 역시 경기당 0.2개로 확 줄어들었다.

그런 플레이는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게 통계의 주장, 하지만 그런 빈틈이 기회를 만드는 거 아닌가. 다카기가 번트를 대든 말든 오크만의 마음은 이미 도루로 기울었다.

‘저 자식, 너무 눈에 띄는데’

한편, 번트 사인을 확인한 다카기는 1루 주자를 살폈다.

같은 팀에서 오랫동안 뛰다 보니 동료의 버릇은 잘 알고 있다. 오크만은 루상에서 움직임이 큰 편, 딱히 배터리의 신경을 끌겠다고 하는 짓은 아니다.

사람은 조금만 가만히 있어도 반사 신경이 죽는 생물, 잔발을 잘 활용해야 폭투가 나왔을 때 바로 2루로 뛸 수 있다. 오크만의 문제는 루상에서 위치가 조금씩 바뀐다는 것, 좌우로 몸을 흔들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움직임이 커진다.

이런 행동은 투수의 신경을 건드릴 뿐, 도루 성공률은 높은 편이지만 솔직히 현명해 보이진 않았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설마 했던 피치아웃, 포수는 바로 2루 송구를 날렸다.

제대로만 갔다면 완벽한 아웃 타이밍, 하지만 송구가 약간 어긋나면서 오크만은 2루를 점거했다. 벤치 사인을 무시한 단독행위, 성공은 했지만 다니엘 감독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렇게 되면 번트 댈 이유 없지.’

다니엘 감독이 번트를 취소하면서 다카기는 일반적인 자세를 잡았다.

여기서 날 출루시켜봤자 좋을 게 있겠나. 다카기는 스튜어트가 승부를 할 거라고 생각했다. 투구 패턴은 경기 전에 분석했으니 낮은 공만 조심하면 되겠지, 시선을 약간 높게 유지했다.

“낮은 공, 골라냅니다. 카운트는 원 볼 노 스트라이크”

“이 선수의 타격에 대해 한 말씀 안 할 수가 없네요. 일본에서 고교 3년 동안 통산 6할에 홈런을 100개나 친 선수입니다. 메이저리그에서도 홈런 19개를 쳤고요. 일반적인 투수로 생각하면 큰코다칠 겁니다.”

[따악 ~ !!]

“밀어친 타구가 외야로 뻗어나갑니다!! 파울 라인 안 쪽!! 계속 굴러갑니다!! 펜스를 맞고 튀어나오는 타구!! 프랜시스가 따라가지만!! 다카기는 계속 질주합니다!! 2루 주자는 홈으로!! 다카기는 어디까지 갑니까?!! 2루를 지나 3루까지 들어가는군요!! 적시 3루타!! 몸을 아끼지 않는 슬라이딩을 선보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다. 일반적인 투수로 생각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제대로 걸렸네요.”

3루에 안착한 다카기는 베이스를 끌어안았다.

헬멧이 벗겨질 정도로 달린 혼신의 질주, 3루까지 갈 생각은 없었는데 코치가 달리라는 사인을 줘서 그대로 전진했다.

이게 얼마만의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인가. 고교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플레이, 추억에 잠긴 다카기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사람들은 지금 뭐 하고 있을까.’

지금까지 연락을 주고받는 학우는 4 ~ 5명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부원들을 챙겼던 사나에 선배, 너 같은 애송이에게 지기 싫다며 악착같이 노력하던 요시다 선배, 조용한 성격이지만 부 캡틴으로서 팀원들을 하나로 묶어준 쿠로다 선배,

생각해보면 그 사람들의 영향을 꽤 많이 받았다.

‘한 번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잡생각을 하는 사이 후속 타자 고메즈가 희생타를 기록하며 스코어는 4대 0으로 벌어졌다.

이제는 완전히 보스턴의 분위기, 원정경기에 동행한 수더랜드 단장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승리하면 단장으로서 통산 10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수확, 왜 승리는 하면 할수록 갈증을 느끼게 하는 걸까.

어제 맛 보고 오늘 맛 봐도 좋은 승리의 기쁨, 다카기도 같은 생각 아닐까? 내년에 은퇴한다고 한 선수지만 오늘 승리로 마음을 되돌리길 바랐다.

‘후회는 남기지 않는다.’

다카기는 남은 이닝에 모든 투지를 쏟아부었다.

험난한 전투를 거듭한 전사에게 필요한 건 휴식, 한때는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며 혈투를 즐겼지만 그것도 이젠 지쳤다.

꺼져가는 촛불은 마지막에 가장 밝게 타오르는 법, 3루에 몸을 던진 슬라이딩은 내 커리어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미련이 남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7회까지 이어진 무실점 투구, 피츠버그 타선은 끝내 다카기를 넘어서지 못했다.

다니엘 감독은 8회부터 스티븐 루카스를 투입, 임무를 완수한 에이스는 동료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누며 승리를 자축했다.

‘너한테 배운 커브, 오늘도 잘 쓸게.’

스티븐 루카스는 평균 95마일 빠른 볼과 커브를 앞세워 타자들을 요리했다.

루카스는 원래 보스턴이 선발로 육성했던 투수, 하지만 선발로 정착하지 못해 불펜에 정착했다.

다카기보다 1년 앞서 메이저리거가 됐지만 변화구 커맨드가 좋지 않아 고전했던 나날, 그런데 다카기가 던지는 슬라이더 그립을 배우면서 인생이 변했다.

루카스는 그전까진 커브와 슬라이더가 전혀 다른 구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카기는 커브와 그립은 똑같고 손목만 세워주는 슬라이더를 구사해 루카스를 충격에 빠트렸다.

그날부터 루카스는 다카기의 슬라이더를 연구, 일정 구간에서 급격히 떨어지는 고속 커브를 구사할 수 있게 됐다.

저 녀석을 만나지 못했다면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었을까.

물론 노력은 내가 한 거지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준 동료, 그 성의에 보답하는 길은 좋은 투구를 하는 것뿐이었다.

“떨어집니다!! 삼진!! 루카스가 첫 두 타자를 가볍게 처리합니다!!”

“피츠버그는 다카기가 내려가면 상황이 달라질 줄 알았겠죠? 그런데 보세요, 저 떨어지는 궤적을 … 빠른 볼이 받쳐주는 선수라 위력이 배가 됩니다.”

8회를 깔끔히 마무리한 루카스는 9회에도 마운드에 올랐다.

불펜에서 클로저 브랜든 바이어가 몸을 풀고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보험용, 루카스의 구위를 지켜본 다니엘 감독은 투수를 교체할 생각이 별로 없었다.

“우와아아 ~ !!!!”

마지막 아웃카운트가 올라가는 순간, 루카스는 하늘에 글러브를 투척하며 괴성을 내질렀다.

보스턴의 일원으로 맞이하는 통산 7번째 월드시리즈 우승, 더그아웃에서 튀어나온 보스턴 선수들은 적지에서 샴페인을 터뜨렸다.

반면 다카기는 벤치에서 코치들과 조용히 악수와 포옹을 나눌 뿐, 다카기의 손을 맞잡은 다니엘 감독은 감사를 표했다.

“올해도 정말 고생 많았네. 자네는 역시 최고야.”

“저는 예전부터 최고였어요. 언제는 아니었나요?”

이렇게 보스턴은 역대 16번째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월드시리즈 MVP는 2승 무패 평균자책점 제로(15이닝 무실점)를 기록한 다카기, 올 시즌 정규시즌 12승에 그쳤지만 최후의 승자가 되면서 메이저리그 최고 투수 타이틀을 지켜냈다.

이제는 마지막이 될 내년 시즌을 기약하며 휴식을 취할 때, 그런데 며칠 후 달갑지 않은 전화를 받았다.

[내 아들 좀 키워줄 수 있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전화의 범인은 앤디 프론스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야구 선수가 되겠다고 노력하고 있는데, 기왕이면 최고 선수의 가르침을 받는 게 좋지 않겠나.

앤디 프론스키는 보스턴에서 겨우 2년 뛰고 은퇴했지만, 다카기가 선수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네가 내 아들의 양아버지가 돼 줬으면 좋겠어.]

“야, 나 자식 세 명이나 있어. 누구 마음대로 양아버지야?”

[어쨌든 조만간 얼굴이나 한 번 보자고, 내가 거기로 갈게]

예고만 하고 막무가내로 쳐들어온 옛 동료, 못마땅했지만 다카기는 일단 문을 열어줬다.

못 본 사이 훌쩍 큰 프론스키의 주니어, 아들로 삼아주기엔 너무 끔찍했다.

“아니, 양아들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이 녀석한테 야구 좀 가르쳐 줘, 진짜 야구를 말이야.”

“너도 야구 선수잖아? 아니, 명예의 전당 입성자 아냐?”

앤디 프론스키는 1년 전 85% 투표를 받고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훌륭한 아버지를 뒀는데 왜 자기 아들을 남한테 맡기는 건지, 다카기는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너도 아버지한테 배우고 싶은데 … 그럴 수가 없어요.”

이때 카일 프론스키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버지는 프로에서 200승을 넘긴 대투수였지만 머리에 큰 부상을 입으면서 운동능력이 크게 떨어졌다.

아버지라고 날 가르치고 싶지 않겠나. 일상생활을 하는 것만 해도 기적, 얼마 전, 앤디 프론스키는 아들을 지도하기 위해 시범 투구를 하다가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했다.

약해진 아버지 옆에서 아들이 부정적인 영향을 받는 건 아닐지, 앤디 프론스키는 아들이 다카기 옆에서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길 원했다.

“너는 선수들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는 사람이잖아. 하지만 나는 할 수 없는 일이지, 네가 좀 도와줬으면 좋겠다.”

“약한 소리 하기는 … ”

평소 툴툴거려도 의외로 마음이 약한 다카기는 프론스키 주니어를 받아줬다.

다만 양아들은 사양, 궁금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조언을 구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그런데 정말 내년에 은퇴하는 거예요?”

“어, 왜?”

“저하고 전에 한 약속은 잊은 건가요?”

카일 프론스키는 언젠가 마운드에서 만나 한 판 붙어보자고 다카기에게 도전장을 건넨 적이 있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날 기다려 줄 줄 알았는데 갑자기 은퇴해버린다는 아저씨, 솔직히 서운했다.

“그런 약속을 했었나? 잊어버렸어.”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니에요? 어떻게 그렇게 약속을 쉽게 깰 수가 있어요?”

“난 원래 그런 인간이야. 불만 있으면 내 기록을 넘어서 보던가.”

다카기는 대안을 제시했다.

이 녀석은 지금 날 이기고 싶은 것 같은데, 그럼 내 기록을 넘으면 될 거 아닌가. 쉽진 않겠지만 어디 한 번 해보라며 승부욕을 자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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