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316화 (316/361)

316화. 아낌없이 주는 선수 - (2)

‘무슨 만화의 한 장면인가?’

이어지는 월드시리즈 2차전, 다카기는 피츠버그의 선발 그렉 밀턴의 투구를 지켜봤다.

올 시즌 9승 9패 평균자책점 4.27을 기록한 나름 준수한 투수, 그런데 이상한 공을 던졌다.

우완 투수가 던진 슬라이더는 우타자 기준으로 바깥쪽으로 흘러가기 마련, 그런데 저 선수가 던진 슬라이더는 오히려 몸 쪽으로 들어갔다.

혹시 내가 모르던 신 구종인가?

다카기는 나름대로 분석에 나섰다.

‘사이드스핀이 걸렸네.’

중지와 검지를 조금 넓게 벌리다 보면 힘이 강한 쪽 손가락이 공에 회전을 더 주게 된다. 당연히 공을 옆에서 채게 되는데 사이드 스핀이 되면서 역회전이 걸린 것, 이게 의도한 공이라면 마구라고 할 수 있을까.

겉보기엔 엄청 화려하다.

얼핏 보면 정말 슬라이더에 역회전이 걸리는 느낌, 처음 보는 타자들은 뭐지? 라고 고개를 갸웃거릴 수 있지만 슬라이더는 타자 몸 쪽으로 던지라고 탄생한 구질이 아니다.

확실하게 도망가기 위해 탄생한 구질,

왜 스트라이크 존은 위아래로 긴 모양을 하고 있을까.

타자가 그 구역은 칠 수 있다고 확인이 됐기 때문, 높거나 낮은 공은 스윙 궤적을 바꿔 대응할 수 있지만 바깥쪽으로 도망가는 공은 팔을 더 뻗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여느 변화구보다 빠르게 날아가면서 타자의 몸에서 멀어지는 슬라이더가 오랫동안 투수들에게 사랑을 받은 것,

저런 공은 의도하고 던지기도 어렵거니와 프로에서 통하지도 않는다.

“그냥 지켜보면 되겠네.”

“뭐가?”

“아니, 그냥 혼잣말이야.”

다카기의 말대로 알 디즌은 차분히 볼을 골라 1루로 걸어 나갔다.

길들이지도 못한 공을 던진다는 건 그 투수의 역량을 증명할 뿐, 이후에도 그렉 밀턴은 변화구가 제대로 떨어지지 않고 계속 옆으로 휘는 이상 징후를 보였다.

다카기의 예상대로 손가락 한쪽에 너무 힘이 들어가며 제구가 안 되고 있는 상황, 무더기 볼넷이 쏟아지면서 위기를 자초했다.

‘그냥 지켜보면 된다고?’

방금 전, 다카기의 혼잣말을 잡아낸 개리 우드는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정말 그대로 전개되고 있는 투구, 오늘은 다른 선수가 포수를 보는 날이라 여유 있게 보내려고 했는데, 다카기의 신통력을 분석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보면 뭐가 문제인지 다 알아?”

“내가 무슨 신이냐? 그냥 이럴 거라고 예상을 하는 거지.”

다카기도 신인 시절, 공에 역회전이 걸리는 문제로 애를 먹었다.

가끔 엄청난 궤적이 나오지만 그만큼 안정성은 폭락, 그래서 지금까지 꾸준하게 제구를 가다듬었다.

마구란 듣도 보도 못한 신구종이 아니다.

150년 역사 동안 많은 선수들이 공에 할 수 있는 짓은 다 해 봤겠지, 지금 선수들은 선배들이 닦아 놓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뿐이다.

그런데 늘 뭔가를 새로 창조하고 억지로 구종을 구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야구가 아니라 만화를 추구하고 있는 거다.

일본 야구도 약간 그런 기질이 있는데, 무슨 슈트가 일본에서 독자적으로 개발된 구종처럼 떠들어 댄다.

말이 좋아 슈트지 그냥 역회전이 걸린 공, 거기에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 마구처럼 찬양해주는 여론, 앞으로 개발되는 구종이 있다고 해도 그건 기존에 있던 구종을 약간 변화한 것에 불과하다.

야구는 정석대로 하는 게 최고, 저렇게 계속 역회전이 걸린 공을 던진다면 투구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다.

아직 갈 길이 먼 20대 초반의 선수인데, 어쩌자고 저런 짓을 반복하는 건지, 지켜보는 입장에선 안타까웠다.

결국 그렉 밀턴은 3과 1/3이닝 동안 볼넷 5개, 5실점이라는 끔찍한 결과를 안고 강판, 반면 보스턴 투수진은 정석대로 투구를 이어갔다.

‘내가 없어도 괜찮겠지.’

2년 사이 많이 개선된 투수진, 이 정도면 내가 없어도 잘 굴러가지 않을까.

조만간 떠날 몸이라며 어린 선수들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줬는데 사실 다 쓸데없는 참견이었다.

저 선수들은 아직 부족하니까 내가 챙겨줘야겠지?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정말 건방진 생각이었다.

다들 까다로운 조건을 거쳐 이 자리에 올라온 선수들, 알아서 잘 할 텐데 나는 왜 조언을 해주려고 했던 걸까. 내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일개 선수일 뿐, 그 점을 명심했다.

어쨌든 보스턴은 2차전까지 잡아내며 7대 1완승을 거뒀고, 오늘 선발로 나서 6이닝 1실점 투구를 한 댈러스 레이븐은 기자들의 질문에 응했다.

“후반기 들어 제구가 안정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그건 팀 기밀이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레이븐은 농담으로 딱딱한 분위기를 풀었다.

비결이라면 정석대로 하려고 한 것뿐, 내가 다카기에게 슬라이더 그립을 배운다고 똑같은 공을 던질 수 있을까.

같은 구질이라도 선수에 따라 바뀌는 궤적, 레이븐은 그동안 몸에 맞지도 않은 옷을 입으려고 했다.

다카기는 기본적으로 사이드 스핀을 걸어주는 투수, 심지어 빠른 볼을 던져도 옆으로 휜다.

레이븐도 팔이 쓰리 쿼터에 가깝지만 다카기보다는 타점이 높은 편, 이런 특징을 살려 주기 위해 커브, 스플리터를 던져보기도 했다.

하지만 슬라이더보다 느린 커브는 타자와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기 어려웠고, 스플리터도 제멋대로 옆으로 휘는 궤적 때문에 제구에 애를 먹었다.

결국 택한 건 슬라이더, 다카기처럼 완전히 옆으로 도망가진 못하지만 떨어지는 각을 나름 살려주면서 쓸 만한 공이 완성됐다.

3년의 시행착오를 거쳐 완성한 지금의 투구, 스스로 노력한 덕분이겠지만 여기까지 오면서 도움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자리를 빌려 몇몇 사람에게 감사함을 표했다.

“다카기에게도 감사함을 표하고 싶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저는 그동안 마구를 던지려고 노력했습니다. 타자가 절대 치지 못하는 구종 말이죠. 그런데 다카기는 그런 건 없다고 하더군요. 나도 10명 중 2명에게 안타를 맞는데 그런 공이 어디 있냐고 말이죠. 저는 그동안 야구가 아니라 게임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때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레이븐은 자신의 일화 외에도 다카기가 몇몇 선수들에게 꾸준히 가르침을 주고 있다는 걸 공개했다.

얼마 전 부진에서 탈출한 제임스 올슨의 홈런도 다카기의 조언이 큰 힘이 됐다며 대화를 이어갔다.

‘오호? 그런 일이 있었어?’

기자들은 전혀 몰랐던 사실, 다니엘 감독에게 질문이 쏟아졌다.

“지금 레이븐이 한 말이 사실입니까?”

“예, 조만간 은퇴하는 몸이니 본인이 알고 있는 노하우는 다 베풀고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스턴의 젊은 선수들은 행운아죠. 역대 최고의 선수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다카기는 지난 9년 동안 보스턴에 월드시리즈 6회 우승이라는 큰 선물을 안겨줬다.

물론 팬과 구단도 지금까지 많은 사랑과 그에 걸맞은 대접을 선수에게 해줬지만, 그래도 다카기 덕분에 보스턴이 더 수준 있는 구단으로 올라선 건 사실이다.

그 선수가 뿌리고 간 씨앗은 앞으로 보스턴에서 어떤 열매를 맺을까, 마치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분위기, 이때 한 기자가 농담을 전했다.

“저기 죄송한데, 다카기는 아직 은퇴하지 않았습니다. 관으로 들어갈 날도 아직 한참 남았죠.”

거짓말처럼 탁 풀려버린 분위기, 그런데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정말 내년 시즌이 끝나면 그 선수를 볼 수 없는 건가. 머리로 이해는 하고 있지만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팬이 많았다.

[올해 7번째 우승했으니, 10번 채우고 은퇴합시다]

피츠버그로 자리를 옮긴 3차전, 먼 길을 날아온 보스턴 팬은 호텔에서 출근하는 보스턴 선수단 앞에 피켓을 들었다.

7번째 우승은 확정도 안 됐는데, 저 사람은 우승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모양, 다카기는 씩 웃으며 그 옆을 지나갔다.

“말이라도 해주지 그랬어?”

“괜한 기대주기 싫어.”

몇몇 동료들은 가서 말이라도 건네주라고 했지만 다카기는 거부했다.

이미 떠나겠다고 분명히 밝혔는데 좀 조용히 보내주면 안 되나. 이건 다 네 탓이라며 레이븐을 나무랐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네가 쓸데없는 연출을 해서 일이 이렇게 됐잖아 인마”

그냥 가족들에게 감사를 표한다고 할 것이지, 인터뷰 자리에서 왜 내게 감사를 표한 건가.

다카기는 약간의 참견을 했을 뿐, 지금 활약은 선수들 개인의 노력으로 이뤄낸 것들이다.

그런데 내가 그저 그런 선수를 엘리트 급으로 만들어 낸 것처럼 선전하고 있는 여론,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마구를 개발한 만화 속 주인공과 다를 게 뭔가.

내가 무슨 마법사인가. 신비주의 전략으로 여론을 형성하는 기자들, 이러다 내가 은퇴하면 신으로 추앙할 건가?

다시는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며 충고했다.

“그러지 말고 오늘도 말 좀 많이 해 줘.”

“그래, 네 잔소리를 지금 아니면 언제 또 듣겠어?”

“됐거든? 앞으로 아무 말 안 할 거야.”

다카기는 이날부터 묵언 시위를 이어갔다.

내가 없어도 충분히 잘 굴러갈 팀, 보스턴은 3차전까지 잡아냈지만 4차전에서 불의의 반격을 허용하며 시리즈를 5차전까지 끌고 갔다.

“역시 마무리는 자네가 하는 게 좋겠지?”

“그래, 이것도 의도된 연출이라고”

4차전 패배 이후, 코치와 동료들은 다카기에게 농담을 던졌다.

통산 16번째 우승도 저 선수의 손을 거치는 게 좋지 않겠나? 이것도 다 극적인 드라마를 위한 연출, 하지만 다카기는 지금 장난하는 거냐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연출? 패배가 연출이냐? 너희들 이길 수 있는 경기 일부러 졌어?”

“아니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왜 그렇게 심각해?”

“내가 지금 원하는 연출은 이런 거야.”

다카기는 배트로 탁상을 힘껏 내리쳤다.

월드시리즈에서 3승 1패로 앞서나가고 있으니 여유를 부려야 하나. 적어도 4 ~ 5년 전의 보스턴은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1패에도 가슴을 치며 분노하고 어떻게 하면 다음 경기에서 이길 수 있을까, 열의를 불태우는 선수들이 이곳에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것들은 장난을 칠 여유가 있는 건가. 피츠버그는 강력한 우승후보 워싱턴을 격파하고 올라온 팀, 다카기는 이런 정신자세라면 스윕도 당할 수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너희들 지금 연출이라고 했지? 그래, 내일도 어디 연출 한 번 해 보자. 3연패 하고 극적으로 7차전에서 우승해 보자고, 그게 더 좋겠지?”

비꼬는 말투에 섞여 있는 노여움, 선수들은 입을 다물었다.

우리가 오늘 패배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

7대 2로 완패한 경기, 그런데 어디서 연출이라는 말이 입에서 나오나. 다카기는 절벽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며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너희들 잘 들어. 오늘 패배로 우리는 준우승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진 거야. 1패가 우스워? 여기서 한 걸음 더 물러서면 바로 절벽이야. 그리고 난 지금까지 월드시리즈 치르면서 6번 다 이겼어. 그 커리어에 오점 남기고 싶지 않아. 다들 알아들었지?”

간만에 제대로 폭발한 에이스,

내일 지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정신이 번쩍 든 선수들은 5차전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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