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화. 다시 용병으로 - (14)
‘저렇게까지 해야 되나’
1회 초 뉴욕의 공격, 뉴욕의 감독 코리 마틴은 뭔가 수상한 점을 눈치챘다.
처음에는 중심발이 투수판에 닿아 있지만 투구를 할 때 떨어지는 느낌,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코리 마틴은 현역 시절 저런 부정투구를 잘 활용했다.
본인이 직접 해 봤기에 더욱 의심이 되는 정황, 변명을 해보자면 떨어지는 구위를 보완하기 위해 나름대로 살아남는 길을 찾은 거다.
그런데 메이저리그 최고 투수라는 선수가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얼마나 잘해야 만족을 하는 건지, 있는 놈이 더한다고 솔직히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이상한데’
뉴욕의 선두 타자 모리슨도 수상한 점을 눈치챘다.
다카기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대결을 벌였나. 눈에 익었다는 표현은 과장이지만 저 녀석의 구위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예전보다 더 좋아진 공, 어떻게 공략을 해야 할지 답이 안 나왔다.
“스윙!! 삼진입니다!! 체인지 업, 모리슨은 통산 29번째 삼진을 다카기에게 헌납합니다.”
“최근 경기만 놓고 보면 7경기에서 탈삼진율이 13.2개거든요. 지금이라도 고개를 숙이는 게 어떨까요?”
피트 오어는 지금이라도 미국이 다카기에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WBC 최종명단은 내년 2월 13일에 확정된다.
다카기가 한국 대표 팀으로 뛴다고 선언하긴 했지만 1군 엔트리 명단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황, 이중국적을 보유한 선수들이 막판에 마음을 바꾸는 경우도 적지 않다.
만약이지만 미국이 결승전에서 다카기를 만난다면 승리할 수 있겠나.
지금 던지는 것만 보면 어떤 타자가 와도 공략하기 어렵다. 미국에 좋은 투수가 많다고 해도 저만한 투수가 어디에 있나, 지금이라도 미국 대표 팀으로 뛴다고 한다면 환영을 받겠지.
내심 그렇게 되길 바랐다.
‘역시 별거 아니네.’
1회를 무실점으로 마친 다카기는 당연하다는 얼굴로 더그아웃에 발을 들였다.
뉴욕은 아메리칸 리그 최강타선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통산 뉴욕에게 16승을 갈취한 다카기에겐 맛 좋은 먹잇감일 뿐, 원래 뛰어난 구위에 교묘한 반칙까지 섞어가며 농락해줬다.
“스트라이크!! 아웃!!”
“와아아아 ~ !!”
5회 초,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을 대기록이 수립됐다.
다카기는 101.7마일 빠른 볼로 제레미 브라운을 삼진 처리, 오늘 경기 10번째 삼진을 잡아냈다.
지난 8월 8일 볼티모어 전 13탈삼진을 시작으로 8경기 연속 두 자릿수 탈삼진 기록, 8경기 연속 두 자릿수 탈삼진은 메이저리그 150년 역사에서 단 3명만이 올라선 기록이다.
보스턴 선수로는 역대 최초, 이대로 저 선수에게 끌려가야 되는 건가.
코리 마틴 감독은 더그아웃에서 튀어나와 주심에게 항의했다.
“저 선수 투수판 제대로 안 밟고 던지고 있는 거 알고 있습니까?”
“뭐가 말입니까?”
“부정투구 하고 있습니다. 내가 현역시절에 해봐서 압니다.”
감독의 항의에 주심은 피식거렸다.
본인이 도둑놈이었다는 걸 인정하면서까지 다카기를 흔들고 싶은 건가. 하지만 주심은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고, 다만 투수판이 흙으로 더럽혀진 것 같으니 치우는 게 좋겠다며 합의를 봤다.
“자네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코리 마틴은 더그아웃으로 향하면서 다카기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기왕 올라왔으니 한 소리 던진 것, 물론 다카기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지금 마틴 감독이 뭘 지적하고 간 걸까요?”
“글쎄요. 제가 보기엔 트집 잡기로밖에 안 보이는데요.”
한편, 중계석에서는 이런저런 대화가 오갔다.
와인드업 포지션에서는 딱히 지적할 장면이 없었다. 문제는 세트 포지션, 중심발이 투수판에 놓여 있었지만 약간 옆으로 삐져나왔다.
다카기는 로우 쓰리 쿼터에 가까운 투구 폼, 이 각도에서 98마일 빠른 볼이 날아오면 우타자 입장에선 뒤통수에서 볼이 날아오는 느낌이다.
그런데 발이 투수판에서 한 발 더 3루 쪽으로 나갔다? 겨우 한 발이지만 타자 입장에선 정말 크게 느껴진다.
그러나 저 정도는 납득할 수 있는 수준, 슬라이더 각을 살려주기 위해 투수판 끝을 밟는 투수들에게도 자주 나타나는 일이다.
저런 걸 일일이 따지면 끝도 없는 일, 피트 오어는 코리 마틴이 필요 이상으로 민감하게 군다며 비판했다.
‘이건 나한테 안 맞는 것 같다.’
반면 다카기는 전략을 바로 수정했다.
원래는 투수판 정면을 밟고 던지는 편, 그런데 끝을 밟고 던지다보니 몸이 많이 뒤틀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만큼 옆으로 휘는 무브먼트는 살아났지만 저게 정말 내가 원하던 공이었나? 꼼수는 투수판 전진으로 충분, 옆으로 새진 않았다.
“초구, 들어왔습니다. 갈수록 볼이 더 좋아지는 것 같지 않습니까? 저만 그렇게 생각하나요?”
“착각이 아닙니다. 지금 눈으로 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더 올라갈 레벨이 있었나요? 저는 이해가 안 됩니다.”
계속되는 호투에 존 올러우는 의구심을 품었다.
다카기는 예전에도 메이저리그 최고의 빠른 볼을 던졌다. 저 공보다 더 뛰어난 볼은 앞으로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카기 본인이 그 레벨을 뛰어넘은 상황,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하지만 딱히 눈에 두드러지는 투구 폼 변화는 없었다.
그렇다면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없겠지, 경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준비시키게”
“알겠습니다.”
경기가 7회 초에 접어들자 다니엘 감독은 불펜에 지시를 내렸다.
오늘 이기더라도 뉴욕과의 시즌 1위 경쟁이 끝나는 건 아니다.
보스턴이 현재 97승, 뉴욕이 98승, 오늘 이겨도 동점이고 남은 2경기에서 승부가 갈린다. 뭣보다 포스트 시즌도 대비해야 하고, 4대 0으로 앞서고 있으니 에이스를 무리시킬 이유는 없겠지, 다니엘 감독은 7회를 마친 다카기에게 교체를 권했다.
“괜찮긴 한데, 좀 불안하지 않나요?”
“뭐가 말인가?”
“제 다음으로 등판하는 투수는 어떤 공을 던져도 타자들에게 귀엽게 보일 텐데요?”
다니엘 감독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맞는 말이긴 한데 구위가 뛰어난 투수는 불펜에 얼마든지 있다. 아마 내려가기 싫어서 이런 말을 하는 거겠지, 자네는 충분히 잘했다며 격려해줬다.
“알았어요.”
그렇게 다카기는 커리어 9번째 시즌을 마무리했다.
최종 성적은 32경기 222이닝 투구, 평균자책점 1.58, 탈삼진은 302개를 잡아냈다. 통산 6번째 200이닝 300탈삼진 시즌, 올해도 만테냐 어워드 수상은 확실했다.
불펜이 1점을 내줬지만 경기는 이변 없이 보스턴의 승리로 종료,
다니엘 감독은 경기 후 인터뷰에서 보스턴의 통산 16번째 월드시리즈 우승 도전을 선언했다.
“우리는 우승을 할 자격이 있는 팀입니다. 뉴욕은 지난 20년 동안 챔피언십 시리즈 문턱도 넘지 못했지만 보스턴은 지난 20년 동안 8번이나 우승을 차지했죠.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겁니다.”
뉴욕과 어깨를 나란히 한 다니엘 감독은 당당히 뉴욕을 도발했다.
뉴욕은 역대 최다 우승팀이지만 이건 드래프트 제도가 없었던 배경이 한몫했다.
1950 ~ 60년대에는 드래프트 제도라는 제도가 없었고 당연히 선수들은 자신이 원하는 팀과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오래 전부터 스타 선수를 배출하며 명문 구단으로 이름을 날린 뉴욕, 이때부터 스타 선수들을 사재기하며 독주 체제를 굳혔다.
월드시리즈 5연패도 달성하고 한창 잘나갔던 뉴욕, 하지만 드래프트 제도가 들어서며 모든 것이 바뀌었다.
한 팀이 2년 연속 우승을 하는 것도 어려워진 현대 야구, 보스턴은 그 어려운 3연패를 2번이나 해냈다.
선수싹쓸이로 우승을 하던 그 시절의 추억을 못 버리고 지금도 사재기로 전력을 유지하고 있는 뉴욕, 그에 반해 보스턴은 드래프트로 착실히 전력을 충원해 왔다.
드래프트 시대 이후로 따져보면 보스턴은 11번이나 우승을 차지했다. 반면 뉴욕은 7번, 누가 진짜 현대야구 최강자인가.
다니엘 감독은 우리가 최강이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강팀은 뉴욕만 있는 게 아닙니다. LA, 워싱턴, 휴스턴도 있죠. 그런 팀을 다 물리칠 자신이 있다는 겁니까?”
“네, 우리 팀에는 다카기가 있습니다. 1승을 하고 시작하는 것과 다름없죠. 아닙니까?”
“그렇게 따지면 위대한 건 보스턴이 아니라 다카기 아닙니까?”
날카로운 질문에 다니엘 감독은 할 말을 잃었다.
말 그대로 자가당착, 이때 다카기가 감독 귀에 귓속말을 흘렸다.
“시즌 1위에 올라선 건 오늘이 처음이라 흥분해서 말실수했다고 하세요. 그다음 씩 웃으면 됩니다.”
구체적인 지시에 회견장은 폭소에 휩싸였다.
이젠 감독 대변인 노릇까지 하는 건가. 어쨌든 다니엘 감독이 다카기의 지시대로 하면서 분위기는 더욱 훈훈해졌다.
“다카기 선수, 시즌 13승 달성 축하드립니다.”
“예, 감사합니다.”
“위대한 시즌을 보냈지만 승리가 다소 적었던 게 아쉽지 않으십니까?”
“팀이 승리한다면 별로 상관없습니다. 사실 그게 제일 중요한 거죠.”
기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 다니엘 감독에게 위대한 건 보스턴이 아니라 다카기 아니냐는 질문을 했는데, 그 답을 선수가 내린 것 아닌가.
화제는 이제 WBC 출전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정말 한국 대표 팀으로 출전하는 겁니까?”
“일단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굳이 한국 대표 팀으로 뛸 이유가 있을까요? 당신은 이미 위대한 선수입니다. 굳이 그런 팀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 ”
다카기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 팀이라니, 한국은 약팀이니 당신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가.
하지만 그것도 맞는 말, 미국 - 도미니카 - 일본 - 푸에르토리코 이런 팀들에 비하면 한국은 분명 객관적인 전력에서 밀리는 팀이다.
그렇다고 뛸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진 않는 편, 덤덤한 목소리로 속마음을 밝혔다.
“전에도 말했지만 저는 야구선수입니다. 절 필요로 하는 팀에서 뛰는 건 당연하죠. 그리고 제가 한국 대표 팀으로 뛴다고 해서 여론에서 말이 많은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상관없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죠.”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는 제게 일본인으로 살라고 하셨지만, 이미 그분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앞으로 어떤 길을 가든 제가 선택해야 한다는 뜻이죠. 누구든 자신의 삶을 택할 권리와 자유가 있습니다. 일본인이 되는 것도 미국인이 되는 것도 제가 정할 일이고, 일본 대표로 뛰든 미국 대표로 뛰든 한국 대표로 뛰든 그건 제가 선택한 길입니다. 여러분들이 거기에 간섭할 권리가 있습니까?”
기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그건 이 선수가 결정할 문제, 여론에서 뭐라고 하던 다카기는 내가 갈 길을 간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이자면 제가 한국 대표로 뛰는 건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오? 그런가요? 말씀해주시죠.”
“생전 할아버지는 한국의 친척들에게 많은 신경을 쓰셨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할아버지가 주신 재산을 두고 서로 싸우고 있었죠. 그때 그분이 얼마나 가슴앓이를 하셨는지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형제끼리 늘 친하게 지내라고 하셨는데, 결국 돌아가실 때까지 친척들과 화해하지 못하셨죠. 본인은 이 생에 미련은 없다고 하셨지만 내심 그게 마음에 걸리셨을 겁니다.”
다카기의 친척 형 김인호는 이번에도 한국 대표 팀 유니폼을 입고 WBC에 참여한다.
어깨를 나란히 한 두 형제,
이미 돌아가시고 이 세상에 없는 분이지만, 저승이라는 게 있다면 그 모습을 보고 기뻐하지 않으실까.
할아버지가 가슴에 품고 간 마지막 한, 그건 바로 친지 간의 불화였다.
이게 별 의미가 없는 짓일 수도 있겠지만, 다카기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WBC 참가를 친척 형과 함께 하기로 했다.
누가 뭐래도 되돌릴 수 없는 일, 한국에서도 적극적으로 구애를 했겠다. 그 일은 더는 묻지 말라며 선을 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