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화. 다시 용병으로 - (13)
“와아아 ~ !!”
어느덧 경기는 8회, 다카기는 관중의 환호를 받으며 마운드에 올랐다.
타석에 들어선 선수는 맥머레이, 오늘 다카기에게 철저히 농락당한 신세라 이번만큼은 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응?’
그런데 초구부터 의욕이 팍 꺾여버렸다.
98마일짜리 공이 갑자기 103마일로 바뀐 기분이랄까, 눈 깜짝 사이에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한 공, 8회에도 이런 공을 던질 줄이야. 말이 안 나왔다.
‘하고 싶은 말은 있지만 하지 않겠다.’
이때 해설위원 피트 오어는 뭔가를 눈치챘다.
투수는 투구를 할 때 투수판을 벗어나선 안 된다.
아니면 부정투구, 그런데 다카기는 투구 판이 흙으로 뒤덮인 것을 이용해 교묘한 반칙을 했다.
중심발이 투수판을 밟지도 않은 상황, 이렇게 홈 플레이트 쪽으로 1보 전진을 하면 타자 입장에선 공이 훨씬 빨라 보인다.
커리어가 쌓이면 이젠 반칙 기술까지 늘어난 건가. 하지만 이것도 경험자만이 할 수 있는 방법, 어린 선수는 따라 하지도 못한다.
투구판을 어설프게 밟았다간 중심발이 흔들리면서 제구가 흔들리고 잘못하면 부상을 당할 수도 있다.
저렇게 던지는 것도 기술이라면 기술, 피트 오어는 부정투구라는 걸 알고도 팬심에 눈을 감았다.
“이건 말도 안 돼!! 맙소사!!”
삼진을 당한 맥머레이는 불만을 중얼거리며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어떻게 투수가 8회에 구속이 더 빨라질 수가 있는가. 더그아웃에 들어선 뒤에도 불만은 가라앉지 않았다.
“야, 좀 조용히 있어. 너만 삼진당한 거 아니잖아.”
“아니 말이 안 돼서 그래!! XX 저런 투수가 세상에 어디 있어?!! 공이 무슨 110마일처럼 날아온다니까?!!”
계속되는 불만에 볼티모어의 감독 제프리 스미스도 눈에 불을 켰다.
뭔가 반칙인 듯 반칙 아닌 투구, 저걸 짚고 넘어가야 되나? 하지만 여기서는 투구 판을 제대로 밟았는지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경기도 크게 지고 있는데, 여기서 괜히 시비를 걸었다가 망신을 당하는 건 아닌지, 그렇게 부정투구는 계속됐다.
‘쓸 만하군.’
8회까지 마무리한 다카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의 공을 던진다는 평가를 받는 내가 이런 짓까지 해야 하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반칙도 잘 쓰면 유용한 거다.
손에 칼을 쥐고 있는데 총까지 들면 금상첨화, 9회에도 똑같은 짓을 반복했다.
‘나 집에 갈래.”
“이건 총알이야.”
상상을 초월하는 체감 구속에 볼티모어 타자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스피드 건에 찍히는 구속은 96마일, 그런데 왜 이따위로 들어오는 건가. 볼티모어는 아직도 그 이유를 눈치채지 못했다.
“스윙!! 삼진입니다!! 오늘 경기 15번째 삼진!! 이번에도 결정구는 빠른 볼이었습니다!!”
“빠른 볼만 던져도 공략을 못하네요. 무브먼트가 원래 대단하긴 한데, 지금 볼티모어 타자들은 눈뜬장님입니다.”
반칙투구라는 걸 알고도 태연하게 다카기의 투구를 찬양하는 보스턴 중계석, 그렇게 다카기는 시즌 3번째 완봉승을 달성해 냈다.
시즌 평균자책점은 1.70으로 하락, 그리고 8년 연속 200이닝까지 5이닝을 남겨두게 됐다.
작년 시즌, 메이저리그는 단 11명만이 200이닝 투구를 기록했다.
심지어 신시내티는 선발 투수 개인 최다 이닝이 겨우 122와 1/3이닝, 그만큼 선발투수가 200이닝을 넘기는 시즌은 보기 어려워졌다.
그런데 그 짓을 7년 연속해내고 있는 철벽의 에이스, 팀의 집중 관리를 받았던 첫 시즌을 제외하면 모두 200이닝을 넘겼다.
올 시즌도 220이닝은 무난히 달성할 페이스, 다카기는 기자들 앞에서 태연한 표정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시즌 11승 달성 축하드립니다.”
“예, 감사합니다.”
“오늘따라 구위가 아주 좋아 보였는데, 컨디션이 좋았던 건가요?”
“제 구위가 나빴던 적이 있었습니까? 어젯밤 예뻤던 여자는 다음 날 아침에도 예쁜 법이죠.”
능청스러운 연기로 불리한 질문을 넘기는 기술도 이제는 수준급,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인터뷰는 계속됐다.
화두는 WBC 참가, 다카기는 이제 미국 시민권자가 됐다.
미국 대표 팀으로 뛰어도 상관없는 몸, 이런 선수가 가슴에 성조기를 단다면 미국의 우승은 확실한 거 아닌가.
일본과 미국 중 어느 나라를 선택할 것인가, 다카기는 색다른 주장을 내놨다.
“제가 없으면 우승을 못하는 나라에서 뛰고 싶습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람들은 절 우승청부사라고 부르죠. 그게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다카기는 보스턴에서만 월드시리즈 우승 6회를 달성해 냈다.
그리고 포스트 시즌 역대 최다 승 투수라는 타이틀까지 달았는데, 이건 앞으로도 절대 깨질 수 없는 기록으로 평가받고 있다.
보스턴 팬들은 다카기 당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며 찬사를 보냈지만, 다른 지역 팬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보스턴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
[좋은 팀에서 뛰었기에 우승할 기회도 있었던 거 아니겠어?]
몇몇 팬들은 질투 어린 시선을 보냈다.
다카기가 그저 그런 팀에 있었다면 팀이 우승을 할 수 있었겠나. 기껏해야 포스트 시즌 진출이나 했겠지,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는 개인적인 의견을 밝혔다.
‘그럼 내 가치를 증명하면 되겠네.’
WBC를 두고 고민하던 다카기는 드디어 마음을 정했다.
우승권이 확실한 팀에서 뛰면 그것도 팀 덕분이라고 할 것 아닌가. 이 자리에서 결판을 냈다.
“미국은 제가 없으면 WBC 우승을 못하는 나라입니까? 아니죠. 저 말고도 뛰어난 선수들이 넘쳐날 정도로 많습니다. 미국 대표 팀으로 뛰면 제 가치를 드러낼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일본 대표 팀으로 뛰겠다는 뜻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일본은 WBC에서 최소 4강 이내의 좋은 성적을 거뒀죠. 우승도 2번이나 했습니다.”
“아니 … 그럼 어느 나라에서 뛰시겠다는 겁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밝히겠습니다. 제가 없으면 왜 우승을 할 수 없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나라에서 뛰겠습니다.”
다카기는 미국 - 일본 - 한국 삼국에게 왜 내가 대표 팀에 필요한지 설명하라는 요구를 했다.
제대로 설명할 국가가 없다면 WBC는 참가하지 않겠다고 선언, 일이 이렇게 되자 미국 - 일본 양쪽에서 당혹스럽다는 반응이 튀어나왔다.
‘우리는 당신 없으면 우승을 못해요. 그러니까 제발 우리 국기 달고 뛰어주세요.’
그래도 나라 체면이 있지, 어떻게 일개 선수에게 이렇게 애원할 수가 있나.
하지만 한국은 좀 달랐다.
[우리는 다카기 선수의 도움이 간절하다. 한국 팀으로 뛰어준다면 영광이다.]
KBO 위원회는 다카기의 먼 친척 형, 김인호에게도 도움을 요청했다.
다카기가 한국 대표 팀으로 출전한다면 국내 반응은 폭발적이겠지, 계속되는 러브 콜에 다카기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우와앗?!! 말도 안 돼!!]
-> 이상하다. 오늘 4월 1일 아닌데?
-> 미국 시간으로 23일에 정식 기자회견 한다고 했다. 이제 와서 다른 말 하지 않겠지.
-> 흥, 일본은 다카기 없어도 우승할 수 있다. 마음대로 하라고 해
-> 너 한국말 할 줄 아는 일본인이지? 다카기가 한국 대표로 뛰는 거 마음에 안 들면 다리 붙잡고 애원이라도 하지 그랬냐?
누구도 예상 못했던 전개에 한국은 난리가 났다.
미국시민권을 딸 때까지만 해도 미국 대표 팀으로 뛸 줄 알았는데, 야구팬들은 KBO가 간만에 일을 했다며 칭찬을 퍼부었다.
“정말 한국 대표 팀으로 뛰시는 겁니까?”
“예, 저는 용병입니다. 저를 원하는 팀에서 뛰는 건 당연한 거죠. 일본과 미국, 어느 쪽에서도 연락이 안 왔습니다.”
정식 기자회견장에서 다카기는 한국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다.
보스턴에서 왕 대접을 받고 있지만, 냉정히 말하면 나는 돈 받고 뛰어주는 용병, 날 필요로 하는 국가라면 당연히 뛰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제가 정말 우승을 부르는 선수인지 이번 대회에서 확인하고 싶습니다. 보스턴은 강팀이라 그게 잘 안 됐지만, 한국이라면 가능하겠죠.”
한국 기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결국 한국이 약팀이라 선택했다는 것 아닌가. 기뻐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이래저래 마음이 복잡했다.
“일본에 계신 가족들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이 결정이 그분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까요?”
“제가 한국 대표 팀으로 뛴다고 가족이 보복을 받는다면 일본 사회의 시민 의식이 형편없다는 걸 증명하는 것뿐입니다. 신경 쓰지 않습니다.”
뼈를 때리는 인터뷰에 일본은 발끈했다.
화를 낸 대상은 다카기가 아니라 질문을 던진 기자,
다카기가 한국 대표 팀으로 뛰면 일본 시민들이 다카기 가족들을 공격할 거라고 생각한 건가. 일본의 시민 의식을 어떻게 봤기에 저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건지, 한국이나 잘 하라며 반격에 나섰다.
벌써부터 후끈 달아오르는 한일전 열기, 하지만 다카기를 보유하게 된 한국은 그까짓 일본 두렵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번 기회에 어떻게 안 되나.’
한편, 스기토모 그룹의 회장이자 다카기의 친아버지인 요시무네는 한국 기업과 사업계획을 논의했다.
한국과 일본은 오래 전부터 기 싸움을 벌이며 수출 품목을 제한하고 있다.
문제는 이게 양쪽에 모두 타격이 됐다는 것,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기술을 가졌지만, 필요한 부품을 주변 국가에서 수입하고 있다.
특히 일본의 의존도가 높은 편, 한국 여론은 전 품목의 국산화를 주장하고 있는데 그게 하루아침에 될 일인가.
분위기에 휩쓸린 국민들이 불매 운동을 벌이고 있지만, 일본 제품이 싸고 품질도 좋다는 건 현장관계자들이 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 시대가 어느 때인데 전 품목을 국산화 하나,
우리가 그 나라 물건을 사 주질 않는데, 그 나라에서 우리 물건을 사줄까? 무역이 끊기면 경제가 유지되질 않는 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 일본도 한국이라는 주요 고객을 잃으면서 기업이 많은 타격을 입었다.
서로 싸워서 좋을 게 없는 입장, 아들이 한국 대표 팀으로 뛴다면 한국의 일본 산 불매 운동도 어느 정도 가라앉겠지, 바로 교섭에 나섰다.
일단 양국 정부의 협조를 얻어야겠지만 기업 관계자들은 국교 회복에 뜻을 함께 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
물론 다카기는 가업과는 거리를 뒀다.
기업을 이끄는 아버지와 누나에게 도움을 주겠다고 시작한 일도 아니거니와, 나는 일개 용병일 뿐, 기업의 이익이 걸린 거창한 일에 끼어들 자격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야구에 집중, 교묘한 반측 투구까지 섞어가며 후반기에 페이스를 끌어올렸다.
덕분에 소속 팀 보스턴은 시즌 종료를 열흘 앞두고 97승에 안착, 뉴욕과 1위를 두고 순위경쟁을 벌이고 있지만 와일드카드는 확정지었다.
‘여기서 끝장을 내자.’
다니엘 감독은 뉴욕과의 홈 3연전에서 다카기를 선발로 내세웠다.
지난 넉 달 동안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어깨싸움을 한 보스턴과 뉴욕, 이제는 결판을 낼 때가 왔다.
[그는 언제나 승리한다]
미국 대표 팀 출전은 무산됐지만 보스턴 팬들은 변함없는 지지를 보냈다.
WBC가 미국에서 그렇게 인기가 있는 대회도 아니고, 월드시리즈 우승만 시켜주면 불만이 없는 입장, 보스턴은 여전히 다카기가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