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화. 다시 용병으로 - (12)
[다카기, 이번 WBC에도 불참하나?]
시즌 종료를 20여 일 앞두고 한 기사가 올라왔다.
기자가 아닌 팬의 입장으로 올린 기사, 다카기는 지금까지 WBC에 출전한 경험이 없다.
첫 WBC 등판 기회는 일본에서 자극을 한 사건 때문에 무산, 그다음은 장기 계약 논의를 하느라 출전하지 못했다.
은퇴까지 선언했는데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참여하지 않을까. 일부 여론은 미국 선수로 참가하는 시나리오를 권했다.
[다카기, 미국 시민권 획득 자격 충분하다.]
다카기는 올해로 미국 생활 10년 차, 영주권은 당연히 소지하고 있다.
앞으로도 미국에 거주할 의도가 있고, 주정부에 세금을 나부하고 있으며 나치당이나 공산당에 가입한 경력이 없다면 통과, 다카기는 모든 조건을 만족하고 있다.
그리고 이미 세 자식은 미국 시민이다.
미국에서 태어났으니 시민권은 자동으로 획득, 훗날 일본으로 돌아갈 수도 있지만 그건 아이들이 정할 일, 다카기 본인이 문제였다.
[한국 대표로 뛸 수 있나?]
그런데 이때 한국에서 눈길을 끄는 기사가 나왔다.
WBC는 광범위하게 국적을 허용하는 대회, 조상 중 이탈리아 사람이 있다면 이탈리아 사람으로 뛰어도 된다.
다카기의 조상은 한국인, 그럼 한국 대표로도 뛸 수 있는 건가. 하지만 그렇게 간단히 생각할 문제는 아니었다.
영주권이 있다면 국적이 일본인이 아니더라도 사업은 할 수 있는 게 일본의 법, 다카기의 조상도 덕분에 귀화 없이 사업을 펼칠 수 있었다.
그래도 한계라는 게 있는 법, 일본 정부는 다카기의 할아버지 고영길에게 일본으로 귀화하고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꿀 것을 권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다.”
하지만 고영길은 권유를 거부했다.
그렇다면 북한이나 한국을 택해야 하는데, 북한은 논할 가치도 없는 선택지, 그나마 나은 게 한국인데 이것도 별로 탐탁지 않았지만 차선책을 택했다.
결국 한국 국적으로 죽은 고영길, 그래도 자식들은 일본인으로 살아가라며 국적도 이름도 모두 일본식으로 바꿨다.
즉, 법적으로 다카기가 한국 대표 팀으로 뛰는 건 문제가 없다.
문제는 본인의 의지, 일본 국적에 일본 이름으로 살고 있는 선수에게 한국인으로 뛰라? 그건 한국 입장에서 멋대로 상상한 일,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다카기는 일본인이다. WBC에서 뛴다면 일본 대표로 뛰어야 한다.]
[그건 선수가 택할 일이다. 할아버지가 한국 국적으로 죽었으니 본인이 원한다면 한국 선수로 뛸 수 있는 거다.]
선수는 참가한다는 말도 안 했는데 왜 3자들이 난리를 치는 건가,
뭣보다 다카기는 내년에 WBC가 열린다는 것도 잠시 잊고 있었다.
[선배, 2년 전에 약속한 거 기억하세요?]
“무슨 약속?”
[저희랑 같이 WBC 나가기로 했잖아요.]
“어? … 아 … 그랬었구나.”
그런데 이때, 일본에서 연락이 왔다.
목소리의 주인은 타키야마 요이치, 타키야마는 다이이치 고교 동기들이 모인 저녁 식사 자리에서 학창시절이 좋았다는 말을 했다.
힘은 들었지만 그래도 즐거웠던 기억, 선배들과 함께 야구를 했던 그 시절이 그리웠다.
방법은 WBC에서 국가대표로 뛰는 것뿐, 다카기도 기회가 되면 그렇게 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남자가 이제 와서 두말하기도 뭣하겠지, 그러겠다고 답했다.
[정말이죠? 약속하신 거예요.]
“어, 그런데 내가 출전하면 좀 시끄러울 거다.”
[왜요?]
“미국 시민권 얻으려고 준비하고 있거든.”
[네?!!]
타키야마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펄쩍 뛰었다.
일본은 원칙적으로 이중국적을 허용하지 않는다.
10년 전, 국회의원 선거에 나왔던 일본인 배우가 대만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는 게 발각되면서 사과를 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후에도 현역 국회의원 중 이중국적 후보가 16명이나 있다는 게 밝혀지면서 일본은 큰 충격에 빠졌다.
오로지 일본인만이 고위관직을 차지할 수 있다는 원칙을 스스로 깨고 있었던 것, 고민하던 정부관계자들은 이중국적을 허용하되 이중국적자는 고위관직에 앉을 수 없다는 조항을 신설했다.
정치를 할 생각이 없다면 이중국적을 보유해도 상관없다는 뜻, 반면 미국은 이중국적을 허용하고 있다.
은퇴하면 나는 일본의 고위관직에 앉을 건가.
회사로 돌아가 가업을 잇고 회장님 소리를 들으며 떵떵거리며 살 건가? 어느 쪽도 다카기가 원하는 길은 아니었다.
“난 솔직히 어린 시절부터 정체성에 혼란이 있었어.”
[정체성이요?]
“그래, 할아버지는 한국인인데 나는 일본으로 살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할아버지와 대화 할 때는 한국어로 했거든, 내가 어디 사람인지 혼란스럽더라.”
중학교 시절까지는 철저히 비밀로 했던 혈통, 그런데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모든 게 밝혀졌다.
일본청소년 대표 팀으로 뛰었지만 그건 일본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세계의 넓이를 알기 위한 도전이었고, 그렇게 한국과 일본을 사이에 둔 저울질은 계속됐다.
“넌 이제 일본인이다. 일본인으로 살아가거라.”
“할아버지는요?”
“나는 안 될 것 같다. 내 몸과 마음이 거부를 하는구나.”
생전, 고영길은 끝까지 일본인이 되길 거부했다.
그렇다면 왜 손자에겐 일본인이 되라고 했던 걸까.
조선인에 대한 일본의 차별과 억압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었던 건 아닌지, 어쨌든 고영길은 손자가 자신의 한을 이어받길 원치 않았고, 그 마음을 손자에게 직접 털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다카기의 정체성 혼란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잊을 만하면 나오는 그놈의 한국 혈통, 메이저리그에서 활약을 할 때도 몇몇 일본 팬들은 저건 한국인이라며 저격을 했다.
무시하면 그만인데 발끈하는 이유가 뭔지, 나는 언제까지 내 정체성을 두고 방황해야 하는가.
한국에서 나는 반 일본인, 일본에서는 반 한국인, 그럼 내가 갈 길은 정해져 있지 않나.
미국인이 되면 싹 정리될 일, 어차피 내가 선택해야 할 인생 아닌가. 결심을 내리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드디어 결심이 섰다.
[선배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할 말이 없는데요 … ]
“나도 한 입으로 두 말 할 생각은 없다. 약속한 대로 일본 대표로 출전은 하겠지만, 미국 시민권은 딸 거야.”
얼마 후, 다카기가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이제는 한국 - 일본 - 미국이 뒤섞인 몸, 여론은 이 일을 두고 시끄럽게 떠들어 댔지만 다카기는 묵묵히 자기 길을 갔다.
“자, 다카기 하루요시가 시즌 28번째 선발 등판에 나섭니다. 올 시즌 27경기 등판, 10승 3패, 평균자책점 1.79, 186이닝 동안 볼넷 24개, 탈삼진은 241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후반기에 5승 무패, 평균자책점 1.53을 기록하고 있거든요. 여전히 승운은 별로 없지만 위력적인 투구는 그대로입니다.”
“그건 그렇고 다카기가 얼마 전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는데요. 사무국에서 뭔가 메시지를 던질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제는 방황을 끝낼 때가 왔죠.”
해설위원 피트 오어는 다카기가 성조기를 달고 WBC 마운드에 오르길 바랐다.
전 세계에서 야구 잘하는 선수가 모여드는 미국, 이중국적은 그렇게 흔한 일도 아니다.
하지만 다카기는 사정이 꽤 복잡한 선수, 이쯤에서 위대한 미국이 손을 내미는 게 좋지 않을까.
어떤 인종이든 미국인이 된다면 환영할 수 있는 나라, 이제는 방황을 끝내고 안착하길 바랐다.
‘내가 필요하니까 이러는 거지.’
다카기도 여론의 반응은 알고 있었다.
미국 사람들은 왜 내게 관심을 보이는 걸까.
미국인들에게 미국은 언제나 위대해야 한다. 그 위상을 더욱 빛내줄 사람이 귀화한다면 환영할 일, 다카기는 그 자격에 딱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가슴에 달 국기를 선택하는 건 내 몫,
WBC에 참가하겠다는 말만 했지 미국선수로 뛴다고 한 적은 없다.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하는 법, 외부의 잡음은 철저히 무시했다.
‘이게 빠른 볼이라고?’
초구를 지켜본 리처드 맥머레이(볼티모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메이저리그에 승격된 건 겨우 38일 전, 다카기와 맞붙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빠른 볼은 날아오면서 떨어지기 마련, 그런데 다카기의 빠른 볼은 그게 아니다.
로우 쓰리쿼터에 가까운 투구 폼이라 빠른 볼이 옆으로 휘게 되는데, 다카기는 이 움직임을 살려주기 위해 손가락이 공의 실밥과 세로로 겹치게 그립을 잡는다.
보통 패스트 볼 그립은 실밥에 손가락을 직각으로 걸치는데, 이렇게 해야 공에 백스핀이 걸리면서 제대로 된 무브먼트가 나온다.
그런데 다카기는 그 통념을 거스르는 존재, 물론 공의 옆구리를 채서 횡으로 휘는 무브먼트를 살려주는 선수들도 있지만, 그 어느 선수를 뒤져봐도 다카기 만한 무브먼트는 보여주질 못하고 있다.
실제로 보면 포심이 아니라 커터나 슬라이더처럼 흘러나가는 빠른 볼, 거기에 평속은 97마일이다.
타자뿐만 아니라 포수들도 애를 먹는 공, 투 스트라이크가 되자 개리 우드 포수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스윙!! 공이 뒤로 빠졌습니다!! 아 ~ 이렇게 출루가 되는군요.”
“그런데 지금 궤적을 보세요. 마지막에 옆으로 휘면서 떨어지기까지 했거든요. 이걸 어떻게 잡습니까?”
1루에 안착한 맥머레이는 놀란 눈으로 혀를 비쭉 내물었다.
나는 지금 무슨 공에 배트를 휘두른 건가.
97마일짜리 슬라이더? 슬라이더라고 하기엔 떨어지는 각이 너무 컸다.
말 그대로 정체불명의 공, 공을 수습한 개리 우드도 넋이 빠진 얼굴로 주심과 농담을 나눴다.
“이건 제가 잘못할 게 아니에요. 그렇죠?”
“알고 있네.”
주심은 개리 우드를 위로했다.
이런 공을 쳐야하는 타자 입장도 기가 막히겠지만 받아내야 하는 포수도 불쌍하긴 마찬가지, 개리 우드는 실책을 만회하기 위해 온몸을 내던졌다.
‘너는 인간 벽이다. 알아서 막아라.’
다카기는 이후에도 위력투를 이어갔다.
포수는 투수에게 맞춰야 하는 입장, 공 못 잡는다고 투수가 포수에 맞춰야 하나. 개리 우드가 흙 위를 구르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몸 쪽!! 들어왔다는 판정입니다!! 오늘 경기 7번째 삼진, 오늘도 달리기 시작합니다.”
“지금은 또 다른 공이에요. 도대체 몇 가지 공을 던지는 겁니까?”
다카기는 3회부터 몸 쪽을 적극 공략했다.
이번엔 정석대로 손가락과 실밥을 직각으로 걸친 빠른 볼, 휘는 움직임은 줄어들지만 스트라이크 존 구석을 찌를 때 유용하다.
실투가 됐을 때 맞는 빠른 볼은 대부분 이 구종, 그래도 타자 입장에선 여전히 살벌했다.
여기에 평소 잘 쓰지 않는 고속 체인지업까지 추가, 상하좌우를 가리지 않고 찔러대는 투구에 볼티모어 타자들은 정신을 못 차렸다.
덕분에 죽어나가는 개리 우드 포수, 그 꼴을 지켜보던 보스턴 다니엘 감독은 7회부터 포수를 교체했다.
투수가 지쳐서 교체를 하는 경우는 있지만, 포수가 지쳐서 교체를 하는 경험은 이번이 처음, 지옥 훈련에서 해방된 개리 우드는 벤치에서 격한 한숨을 내쉬었다.
“너 내일 뛸 수 있겠냐. 이렇게 지쳤는데?”
“괜찮아. 저 자식 공 보다 다른 투수 공 보면 귀여워 미칠 것 같아. 이렇게 품에 안아주고 싶다고”
개리 우드는 다카기의 공을 괴물처럼 취급했다.
저런 끔찍한 공을 수십 개씩 받아내다 다른 투수의 공을 보면 정말 사랑스럽게 보이는데, 동료들은 이걸 농담으로 받아들였지만 개리 우드는 진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