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화. 다시 용병으로 - (9)
‘한 이닝 더 던져 보실까.’
7회가 되자 다카기는 마운드로 향했다.
스코어는 여전히 0대 0, 그래도 불안하거나 조급해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초구는 94마일, 약간 빠졌다는 판정입니다.”
“지금은 슬라이더죠. 94마일 슬라이더입니다.”
“그런데 다카기가 최근 슬라이더로 카운트를 잡는 빈도가 높아지고 있죠?”
“그건 피트, 당신이 정확히 봤습니다. 5월까지만 해도 슬라이더 비율이 30% 정도였는데, 6월 들어 비율이 40% 정도로 높아졌어요.”
“그런데 슬라이더는 헛스윙을 끌어내는 구종 아닙니까? 왜 초구부터 슬라이더를 던지는 거죠?”
“그 원리는 제가 설명해 드리죠.”
캐스터의 질문에 피트 오어는 나름대로 설명을 이어갔다.
보통 선수들이 그립으로 궤적을 바꾼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공을 얼마나 깊게 잡느냐 얕게 잡느냐의 차이다.
예를 들어 손가락 사이에 공간을 주고 슬라이더를 던지면 패스트볼처럼 빠르게 날아가지만 덜 꺾이는 하드 슬라이더가 나온다.
반면 공을 꽉 쥘수록 구속이 느리지만 손과 공의 마찰이 커지면서 구속이 느려지고 그만큼 공은 떨어지게 돼 있다.
떨어지는 볼은 원 볼 투 스트라이크처럼 유리한 볼 카운트에서 던지는 공, 그런데 불리한 볼 카운트에서 꺾이는 각이 큰 공을 던지면 아무래도 타자 눈에 띌 위험이 크다.
다카기가 올 시즌 초반에 고전한 이유는 빠른 볼의 구위가 죽어서도 아니고, 슬라이더에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다.
다만 빠른 볼 다음에 종으로 크게 떨어지는 슬라이더가 타자 눈에 익었을 뿐, 결국 볼 배합의 문제였다.
‘그럼 예전으로 돌아가면 돼’
다카기는 예전처럼 강한 슬라이더를 던지기 시작했다.
덜 꺾이지만 패스트볼처럼 빠르게 날아가는 공, 이걸 초구부터 던지기 시작하자 빠른 볼을 노리고 있던 타자들은 감을 못 잡았다.
패스트볼을 예상했는데 마지막에 살짝 바깥쪽으로 도망쳐 버리니 배트가 안 나올 수가 있을까.
지금은 먹히지 않았지만 다카기는 슬라이더로 카운트를 잡는 게 의외로 효율적이라는 걸 알아냈다.
‘안 나와? 무기 바꿔야겠네.’
초구가 볼이 되자 다카기는 98마일 빠른 볼로 카운트를 잡았다.
경기 후반에도 이 정도 구위와 커맨드를 발휘할 선수가 있을까. 오클랜드 타자들은 기가 막힌다는 반응을 보였다.
“다시 빠른 볼!! 돌아 나옵니다. 카운트는 원 볼 투 스트라이크”
“지금 다카기의 폼을 보세요. 우완을 기준으로 슬라이더를 던지는 선수들은 한 시 방향으로 발을 내리는 경우가 많거든요. 슬라이더 움직임을 조금 더 살려주겠다는 뜻이죠. 하지만 이러면 몸만 뒤틀리면서 엉덩이 회전이 되질 않습니다. 그런데 이 선수는 아니죠. 슬라이더를 주무기로 던지고 있지만 빠른 볼 구위를 죽이지 않는 선을 지키고 있습니다.”
투 스트라이크를 잡은 다카기는 바깥쪽 빠른 볼로 헛스윙 삼진을 이끌어 냈다.
원 볼을 내 주고도 3연속 스트라이크,
타자 입장에선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슬라이더를 신경 써야 하니, 그보다 더 빠르게 날아오는 빠른 볼은 대응이 안 된다.
이제는 빠른 볼과 슬라이더만 던지는데도 공략이 불가능한 수준, 29살이 됐지만 다카기는 정교함보다는 구위를 앞세웠다.
‘이제 알았어. 내 빠른 볼은 못 친다는 걸’
다카기는 루키 시절부터 의도적으로 변화구를 많이 활용했다.
투심, 슬라이더, 커브, 체인지업, 여기서 파생된 변화구까지 합치면 대략 7개 정도 된다.
하지만 9년 동안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서면서 드디어 깨달았다. 내 빠른 공은 슬라이더의 도움만 받으면 문제 될 게 없다는 걸 말이다.
커브? 체인지업? 투심? 그런 건 내 빠른 볼의 참맛을 해치는 조미료일 뿐, 진짜 파워 피처가 뭔지 모두에게 보여줬다.
“다시 흘러 나가는 볼!! 삼진입니다!! 오늘 경기 10번째 탈삼진!! 오늘도 두 자릿수 탈삼진을 적립합니다!!”
“빠른 볼 그리고 슬라이더, 정말 단순한데 최상의 결과를 만들어 내고 있어요. 저렇게 던져대는데 멀쩡하다는 게 더 놀랍습니다.”
“은퇴 앞두고 있다고 이제 아낄 필요 없다는 건가요? 보는 제가 걱정이 되네요.”
다카기는 7회를 평균 97마일 빠른 볼과 고속 슬라이더로 돌파했다.
지금 투구는 커브 길에서도 브레이크 없이 달리는 폭주기관차라고 해야 될까.
저러다 부상이라도 당하는 거 아닌지, 걱정이 된 다니엘 감독은 교체를 권하고 싶었지만 0대 0의 스코어라 그러지도 못했다.
‘한 점만 따면 바꾼다. 한 점만’
그런데 그 한 점이 나오질 않는 상황, 보스턴은 7회 말 공격에서 점수를 짜내기 위해 보내기 번트까지 시도했다.
[딱 ~ ]
“번트 댔어요. 투수가 잡아서 2루에!! 아 ~ 아웃입니다 … 1사 주자 1루가 되는군요 … ”
“아니 도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지금 보스턴 선수들은 위대한 경기를 망치고 있습니다. 오늘도 다카기는 승리 없이 물러나야 되는 건가요?”
“원래 소중한 건 없어져야 그 가치를 아는 법이죠. 이런 식으로 경기를 한다면 다카기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습니다.”
답답한 공격력에 점점 높아지는 중계석의 분노, 그러건 말건 다카기는 8회에도 마운드에 올랐다.
‘이제 눈에 익었겠지?’
여기서부터 투구 패턴을 다시 바꿔줬다.
초구부터 슬라이더를 던지는 비율이 높다는 건 타자들도 눈치챘겠지.
슬라이더는 가운데로 던져선 안 되는 공이다. 카운트를 잡더라도 타자의 방망이를 끌어내는 데 주력해야 효과를 보는 구질, 하드 슬라이더를 스트라이크 존 외곽에 구겨 넣었다.
‘이젠 나도 헷갈린다.’
초구에 잠시 뜸을 들인 주심은 스트라이크를 선언했다.
워낙 빨라 보기도 힘든 공, 오클랜드 투수들의 볼을 보다 다카기의 볼을 마주하면 말 그대로 신세계가 열린다.
이걸 제대로 보고 치는 타자가 있을까. 적어도 오클랜드 타자들 중엔 없다고 확신했다.
‘젠장, 이게 눈뜬장님하고 뭐가 달라?’
초구 스트라이크 판정에 앤서니 랜든우드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공을 보고 치려고 해도 전혀 감히 안 잡히니, 다음 공은 헛스윙이 되더라도 크게 휘둘렀다.
딱 ~ !!
‘어?’
분명 눈을 살짝 감은 것 같은데 제대로 걸린 타구, 우익수가 우물쭈물 거리는 사이 랜든우드는 2루까지 진출했다.
8회에 나온 오클랜드의 3번째 안타, 장타는 이게 처음이다.
오늘 처음으로 맞이하는 득점권, 약간 들뜬 랜든우드는 2루수 제임스 올슨에게 농담을 건넸다.
“나 지금, 다카기를 공략하는 방법을 알아냈어.”
“그게 뭔데?”
“가르쳐 주면 우리가 손해지.”
제임스 올슨은 헛웃음을 지었다.
정말 공략법을 알아낸 건가 아니면 그냥 허풍일까,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다카기는 다음 타자를 상대로 2루 땅볼을 유도, 3루는 늦었다고 판단한 올슨은 1루에 던져 아웃카운트를 잡아냈다.
이젠 스퀴즈도 나올 수 있는 위험한 상황, 팬들은 불안한 눈으로 다음 투구를 지켜봤지만 다카기는 평소처럼 포수와 사인을 주고받았다.
‘슬라이더도 체인지업처럼’
다카기는 땅볼 유도를 위한 체인지업은 던지지 않았다.
슬라이더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체인지업이 될 수 있는 법, 철저히 외곽을 찌르며 타자와 신경전을 이어갔다.
볼 카운트는 이제 투 볼 투 스트라이크, 빠른 볼만 던지다 슬라이더를 구사했다.
‘여기서?!!’
헛스윙을 돌린 타자는 하늘을 향해 격한 한숨을 뿜어냈다.
오늘 처음으로 보여주는 느린 슬라이더, 떨어지는 폭은 조금 줄었지만 타이밍을 완벽하게 빼앗았다.
주자를 3루에 두고 이런 공을 던지다니, 한 방 먹은 오클랜드 벤치는 침묵을 지켰다.
“와아아 ~ !!”
다카기는 다음 타자를 삼진 처리하고 마운드를 내려왔다.
1사 3루에서도 흔들리지 않은 철벽의 에이스, 하지만 다니엘 감독은 9회 등판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늘도 나는 열심히 일했다.’
투구를 마친 다카기는 차갑게 식힌 수건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승리 투수 요건은 갖추지 못했지만 8이닝 무실점 투구를 하면서 평균 자책점을 2.04에서 1.88로 끌어내렸다.
이 정도면 연봉 값 한 거 아닌가.
팀이 승리해도 내 역할을 못한다면 그것도 찝찝한 일, 오늘은 기분 좋게 잘 수 있겠다며 미소까지 머금었다.
얄미운 보스턴 타선은 9회 말 공격에서 개리 우드가 끝내기 안타를 때려내며 승리, 결국 다카기는 전반기를 5승으로 마무리 했다.
2년 안에 은퇴한다고 했는데 이러다 200승도 못 채우는 건 아닌지, 팬들은 보스턴 선수들이 다카기의 은퇴를 늦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러는 게 아니냐는 주장을 내놨다.
[다카기도 200승 채우고 은퇴하고 싶은 마음은 있을 거다. 승리를 못 할수록 은퇴는 뒤로 밀리지 않을까?]
-> 말도 안 된다는 건 알겠는데, 부정할 수가 없다.
-> 그래도 200승은 채운다. 앞으로 21승 남았는데 2년 안에 못 채우겠어?
-> 다카기는 한 시즌 20승을 5번이나 기록한 선수다. 올해 조금 승운이 없지만 내년이면 다 채울 듯
본인이 은퇴한다니 300승은 무리겠지만 200승은 무조건 채운다는 게 팬들의 주장, 그 의견을 접수한 기자들은 다카기 앞에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만약 내년까지 200승을 못 채우신다면 은퇴가 1년 미뤄지는 겁니까?”
“음 … 글쎄요. 어쨌든 지금은 은퇴를 미룰 마음이 없습니다.”
“도대체 왜 은퇴를 하는 건가요? 당신은 이제 막 전성기에 접어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은퇴가 아쉽지 않나요?”
전문가들은 지금이 다카기의 전성기라고 평가했다.
작년부터 빠른 볼과 슬라이더만으로 타자들을 윽박지르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단조로운 구종으로 타자들을 격파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더 뛰고 싶어도 몸이 따라주지 않아 눈물을 쏟으며 은퇴하는 선수들도 있는데, 다카기는 그런 아쉬움이 전혀 없는 건가.
퇴위를 앞둔 왕은 담담히 소감을 밝혔다.
“팬들은 거드름을 피우는 왕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습니다. 왕이라면 누구보다 많이 일해야 하고 지위에 맞는 모범을 보여야 하죠. 저는 매 경기, 매 시즌을 최선을 다해 뛰었습니다. 하지만 저도 인간이라 때로는 지칩니다, 그리고 최고의 자리에 있는 건 생각보다 피곤한 일이죠. 그래서 내려오려는 것뿐입니다.”
말이 좋아 왕이지 팬의 즐거움과 팀 승리를 위해 구르는 신세다.
어차피 나는 돈을 받고 뛰어주는 용병일 뿐, 이젠 그 역할도 지겨워졌다.
그래도 혹시 미련이 남을지 몰라 남은 기간 동안 모든 것을 쏟아 붓는 중, 타인의 눈엔 이런 내가 전성기에 접어든 투구를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내 전성기는 이미 끝났다고 털어놨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지는 걸 용납하지 못하는 성격이었습니다. 그래서 화도 많이 내고 동료들을 윽박지르기도 했죠. 그때가 제 전성기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죠. 화내지 않고 동료들을 윽박지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팬 여러분들이 화를 내고 선수들을 윽박지르고 있죠. 그건 아주 피곤한 일입니다.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기사를 접한 팬들은 섭섭한 반응을 보였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지난 9년의 세월, 다카기는 이 시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이제는 한계점에 이른 상황, 저렇게 의지가 확실하다면 주위에서 뭐라고 한들 통할 리 없겠지.
팬들도 마음속으로 이별을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