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308화 (308/361)

308화. 다시 용병으로 - (8)

“아빠, 뭔가 하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뭐가 말이냐?”

“오빠 은퇴한다잖아요. 자리 하나 만들어 주셔야죠.”

이곳은 하마마츠에 있는 다카기의 친가,

코하루는 아침부터 아빠를 설득했다. 2년 안에 미국에서 일본으로 넘어올지도 모르는 오빠, 집 나간 왕자의 귀환을 위해 이쪽에서도 뭔가 해야 되는 거 아닌가.

다카기의 어머니도 혹시 하는 눈으로 남편을 바라봤다.

“너는 네 오빠를 아직도 모르냐?”

“네? 뭐가요?”

“걔는 누가 주는 감투 받을 사람이 아니야.”

요시무네는 아들이 감투나 쓰고 앉아 있을 성격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돌아가신 할아버지 지분을 전부 누나에게 넘겨줬겠는가.

가문의 힘을 쓸데없이 나눠선 안 된다며 누나에게 몰아준 녀석, 뭣보다 다카기는 집 나간 왕자를 자처했다.

내 뜻대로 살겠다고 집을 나갔는데 이제 와서 가업을 물려받겠나.

하지만 코하루의 생각은 달랐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죠. 오빠가 생각이 바뀌었을지도 모르잖아요.”

“으음 … 그래?”

“얘기나 해 봐요. 혹시 모르잖아요.”

여자들의 협공에 요시무네는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아들이 돌아온다면 반길 일이지만 가업이 그렇게 쉽게 생각할 일인가. 평생 야구만 한 아들이 무슨 사업을 한다는 건지, 일단 코하루를 앞세워 속마음을 알아보기로 했다.

“너 왜 지나간 얘기를 꺼내니?”

[그럼 오빠 은퇴하고 집에 안 들어올 거야?]

“여기 내 집 있어. 내가 왜 거길 들어가”

다카기는 동생에게 냉정한 답을 내놨다.

내가 사업에 대해 뭘 배운 게 있다고 친가 근처를 기웃거리나.

다 포기하고 미련 없이 나온 거리의 왕자, 스스로 왕국을 세우고 누릴 건 다 누렸으니 물러나야 할 때 아닌가.

적어도 친가로 돌아갈 생각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공부 열심히 해서 아빠, 누나 도와 드려. 오빠는 뒤에서 응원해 줄게”

[칫 ~ 너무 무책임한 거 아냐?]

“무책임한 게 아니라 나는 이미 가업과 손을 뗀 사람이야, 거기에 낄 이유가 없어.”

결국 무산된 다카기의 친정 복귀, 그런데 손을 잡자는 손길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2년 전, 다카기는 클라우드 쇼핑몰 행사장 사인회에 불려간 적이 있다.

정해진 계약시간이 지나서도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돌아간 다카기, 계약 시간 지났다며 가버리는 놈들도 있는데 고용주 입장에선 보기 좋은 광경 아닌가.

클라우드의 회장 브래드 페니는 다카기를 좋게 보고 있었다.

“쇼핑을 하고 갔다고?”

“네, 최근 취미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때 다카기가 쇼핑에 취미를 붙였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얼마 전 우리 쇼핑몰에서 가족들과 함께 3시간을 보냈다고 하는데, 그렇게 쇼핑이 좋다면 우리와 함께 사업을 논의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이미 전속계약을 맺어뒀지만 다시 한 번 권해보기로 했다.

‘기껏해야 얼굴 마담이겠지.’

다카기는 이것도 정중히 거절했다.

얼굴만 빌려주는 거라면 할 수 있지만, 지금 내가 얼굴을 팔아야 할 만큼 곤궁한 입장인가.

생각해보면 쉴 틈 없이 달려온 인생, 은퇴 후에는 당분간 평온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얘들아, 먹어라.”

“와아아 ~ ”

그러던 어느 날, 다카기는 앞마당의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가족만의 바비큐 파티를 열었다.

4천만 달러짜리 팔로 고기를 굽고 있다니, 세상에서 제일 비싼 바비큐 아닌가, 키리코는 고기를 굽고 있는 남편을 유심히 지켜봤다.

“어때? 맛있니?”

“네에 ~ ”

“그럼 아빠가 앞으로도 자주 해 줄게”

은퇴 후에는 아예 살림을 할 기세, 30살에 은퇴하고 집에서 저러고 있으면 메이저리그 팀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키리코는 카메라를 가져와 동영상을 찍었다.

“갑자기 카메라는 왜 가져와?”

“인터넷에 올리려고”

“왜?”

“자기 은퇴하면 집에서 이러고 있을 거잖아. 그때 이 영상 올리면 구단들은 침 질질 흘릴걸?”

물론 구단이 침을 흘릴 대상은 잘 구워진 고기가 아니라 남편 팔이다.

저 귀한 팔을 은퇴 후 고기 굽는 일에나 쓴다니, 얼마나 아까운 일인가. 다카기는 찍지 말라고 손을 저었지만 키리코는 막무가내였다.

[2년 후, 이 영상은 세상에서 제일 안타까운 장면이 될 지도 모릅니다]

2년 후에 올릴 계획이었지만 키리코는 미리 영상을 공개했다.

저 우람하고 귀한 팔이 2년 후면 살림을 하는 데 쓰이는 건가, 보스턴 팬들 입장에선 비명이 절로 나오는 장면, 이런 끔찍한 장면은 다시 보고 싶지 않다는 반응이 줄을 이었다.

남은 4년 계약기간만 채워주면 안 될까.

하지만 다카기는 외부의 잡음은 무시하고 묵묵히 자기 길을 갔다.

“자, 다카기 하루요시가 전반기 마지막 경기에 등판합니다. 올 시즌 14경기 등판, 5승 3패, 평균자책점 2.04, 97이닝 동안 볼넷 14개, 탈삼진은 129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승수가 너무 적어요. 평균자책점을 보면 아시겠지만, 이건 이 선수 책임이 아닙니다.”

경기를 앞두고 피트 오어는 보스턴 타자들을 질책했다.

지난 5월, 다카기는 애리조나 원정 경기에서 7이닝 2실점, 13K라는 호투를 펼쳤다. 하지만 9회 말, 브랜든 바이어가 블론 세이브를 기록하며 승리를 추가하지 못했다.

5월 24일, 토론토와의 원정 경기에서도 7이닝 9K, 1실점을 기록했지만 불펜이 방화하면서 또 승리 무산,

5월에 평균자책점 1.90을 기록했지만 단 1승도 추가하질 못했다.

그렇다면 6월은 달랐을까. 6월 3일 토론토와의 홈경기에서 7이닝 5피안타 2볼넷 12K 1실점 투구를 선보였지만 타선 지원이 1점에 그치며 또 노 디시전, 평균자책점을 낮춘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런데 그다음 날, 타선이 12점을 내면서 댈러스 레이븐에게 시즌 9승을 선물했다는 건 비밀 아닌 비밀이다.

[보스턴, 최근 6경기에서 다카기에게 6점 지원해 줬다]

[역사에 남을 불행, 언제까지 이어지나]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6월 9일, 뉴욕과의 원정 경기에서 다카기는 8이닝 5피안타, 1실점, 11K를 기록했지만 타선이 한 점도 못 내면서 오히려 패전투수가 됐다.

7경기 연속 퀄리티 스타트를 끊고도 0승 1패, 그런데도 다카기는 더그아웃에서 웃고 있었다.

해탈을 한 건지 아니면 정말 마운드에 미련이 없는 건지, 어쨌든 대역죄인이 된 보스턴 타자들은 다카기에게 승리를 선물하자는 각오를 다졌다.

“스트라이크!!”

미트를 관통하는 96마일 빠른 볼,

오늘따라 저 팔이 왜 이렇게 섹시해 보이는 걸까. 피트 오어는 안타까운 해설을 이어갔다.

“이봐요 존, 얼마 전 다카기의 와이프가 올린 영상 봤습니까?”

“예, 안타깝더군요. 은퇴 후 고기나 구울 팔이 아닌데 말이죠.”

“제 말이 그 말입니다. 다카기가 정말 은퇴한다면 모든 책임은 타자들에게 있습니다. 알아서 잘 하길 바랍니다.”

피트 오어가 협박을 이어가는 동안, 다카기는 1회를 삼자 범퇴로 처리하고 마운드를 내려갔다.

이어지는 보스턴의 공격, 선두 타자 주앙 고메즈는 방망이를 투수 쪽으로 뻗는 특유의 자세를 잡았다.

올 시즌 성적은 타율 0.267, 홈런 7개, 28타점, 타격은 여전히 그저 그런 수준이다.

그래도 수비에서 맹활약을 하면서 1억 달러 몸값은 하고 있는 중, 다만 지금은 방망이의 활약이 절실했다.

“도대체 왜?!!”

잘 때렸지만 3루수 정면, 도움이 되지 못한 주앙 고메즈는 더그아웃을 향해 힘없는 발걸음을 옮겼다.

‘어? 이게 아닌데?’

다음 타자 제임스 올슨도 내야 플라이를 때렸다.

올 시즌 타율 0.321, 홈런 14개를 때리고 있고 최근 성적은 0.366으로 더 좋은 편, 그런데 왜 이러는 걸까.

순식간에 투 아웃이 적립되자 사방에서 홈팬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협박한다고 되나.’

반면 다카기는 경기장 구석에 있는 간이 불펜에서 몸을 풀며 다음 이닝을 준비했다.

올 시즌 5승 밖에 못 거두고 있지만 보스턴은 다카기가 등판한 경기에서 10승 4패, 나름 괜찮은 성적을 거뒀다.

현 시대에서 투수는 승리로 평가를 받는 입장이 아니다. 잘 던지고도 승리를 추가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고평가를 받는 입장, 그런 드라마틱한 전개가 내 가치를 끌어올리지 않을까.

저 녀석들이 못해야 내가 더욱 빛나겠지, 이런 전개도 나쁘지 않았다.

경기는 어느덧 3회 초, 스코어는 0대 0, 홈 팬들은 마운드로 향하는 다카기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힘이 나질 않겠지만 조금만 더 힘 내달라는 응원의 목소리, 반면 불행의 당사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빡 ~ !!]

“배트!! 안 됩니다!!”

“오 ~ 지금은 잘 피했네요. 위험한 순간이었습니다.”

오클랜드의 선두 타자 피터 마일스가 바깥쪽 공을 때렸는데, 헤드가 부러지면서 투수 쪽으로 향했다.

타구와 배트가 동시에 날아온 아찔한 순간, 그래도 다카기는 옆으로 넘어지며 부상을 피했다.

깜짝 놀란 다니엘 감독은 구단 트레이너와 함께 마운드로 향했고, 그 사이 자리에서 일어난 다카기는 몸에 뭍은 흙을 툭툭 털어냈다.

“자네 어디 다치지 않았나?”

“부러진 건 제 뼈가 아니라 배트죠. 괜찮냐고 가서 물어 봐줄까요?”

이 와중에도 시답지 않은 농담을 하는 에이스, 아찔한 순간을 겪었는데도 얼굴엔 여유가 넘쳐 흘렀다.

어쨌든 경기 진행 요원들이 부러진 배트를 수습하면서 경기는 잠시 중단됐고, 이대로 내려가기엔 뭣 했는지 다니엘 감독은 농담을 이어갔다.

“나중에 은퇴하면 정말 집에서 살림할 건가?”

“왜요? 제가 굽는 고기 드시고 싶으신가요?”

“초대해 주면 안 갈 이유 없지. 선물 사가겠네.”

“알았어요. 그때 되면 초대할게요.”

농담으로 해 본 말인데 진짜 그렇게 할 생각이었나, 다니엘 감독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마운드를 내려갔다.

[딱 ~ !]

“다시 부러진 배트!! 2루수가 잡아서 2루에!! 다시 1루에서 ~ 아웃입니다!! 더블 플레이!! 다카기가 병살타로 위기를 넘어갑니다!!”

“지금도 바깥쪽이죠. 또 배트 끝에 걸렸는데, 이렇게 배트가 연속으로 부러지는 장면은 오랜만에 보네요.”

“그만큼 공이 위력적이라는 뜻이겠죠. 타자 입장에선 거리가 잘 잡히지 않을 겁니다.”

다카기는 팔 각도가 낮은 편, 거기다 팔도 길어 우타자 입장에선 3루에서 공이 날아오는 느낌을 받는다.

눈에서 멀어지는 공이라 치려고 해도 거리감이 잘 잡히지 않는 편, 밀어치려고 해도 구위가 워낙 좋아서 쉽지 않다.

결국 풀 히팅을 해야 되는데 집요하게 바깥쪽을 던진다는 게 문제, 배트 끝에 걸리거나 헛스윙을 하는 일이 반복됐다.

“와아아 ~ !!”

다카기는 이날 6회까지 2피안타만 내주고 삼진은 7개를 잡아냈다.

1.92까지 떨어트린 평균자책점, 그런데도 5승으로 전반기를 마무리해야 한다는 건가.

사방에서 쏟아지는 팬들의 원성, 하지만 다카기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애송이들이 날 돕겠다고? 웃기고 있네.’

자기 앞가림이나 하면 다행인 놈들이 내 승리를 위해 뛴다니, 우습지 않은가.

오늘 경기에서 이기든 지든 다카기는 왕으로서 할 도리는 다 했다.

팀이 패배만 안 하면 다행, 그런데도 날 돕겠다고 발악하는 동료들이 귀엽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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