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화. 다시 용병으로 - (7)
‘응, 팔이 아픈데?’
경기는 어느덧 5회 초, 52구를 던진 다카기는 팔을 하늘 위로 쭉 뻗으며 몸을 풀었다.
어느 한 곳이 아프다기보다는 통증이 신경을 타고 옮겨 다니는 느낌이라고 해야 되나, 일단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투구에 집중했다.
딱 ~ !
“파울입니다. 카운트는 원 볼 투 스트라이크”
“올 시즌 다카기 선수의 빠른 볼 평균 구속이 96.8마일인데요. 이런 구위를 부상 없이 10년 가까이 이어오고 있다는 건 기적이라고 할 수 있죠.”
“투구 스타일을 분석해 보면 빠른 볼이 49.5%, 슬라이더가 31%입니다. 하지만 이게 단순하다고 말을 할 수 없는 게, 슬라이더만 종류가 3가지거든요. 그리고 간간이 던지는 체인지업이 슬라이더와 정반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타자 입장에선 정말 혼란스럽습니다.”
요리 할 때 조미료를 많이 친다고 맛이 나는 건 아니다.
단순하지만 재료의 맛을 잘 살리는 게 중요, 다카기는 메이저리그 최강의 빠른 볼이라는 고급 재료를 가지고 있다.
빠른 볼 위주의 투구에 간간이 섞어주는 변화구가 투구의 맛을 더하는데, 팬들은 아직 배가 고프다며 다음 투구를 요구했다.
‘오늘 영업 종료합니다.’
하지만 특급 요리사는 5회를 마무리하고 목에 수건을 걸쳤다.
팔이 아프니 검사를 받아봐야겠다며 트레이너와 대화를 나눴고, 다니엘 감독이 허락하면서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다카기, 팔꿈치 통증으로 자진 강판]
잘 던졌고 투구 수도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갑자기 내려간 에이스, 기자들은 뒷조사를 통해 이상신호를 알아냈다.
그런 위력적인 공을 계속 던져댔으니 몸에 무리가 오는 건 당연하겠지, 오히려 지금까지 버틴 게 신기할 정도, 혹시 다카기는 자신의 몸에 일어난 이상징후를 느끼고 은퇴를 결심한 거 아닐까.
하지만 다카기가 아직 필요했던 보스턴 구단은 MRI 촬영 결과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특별히 구조적인 이상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예, 검사를 더 해 봐야겠지만 … 지금은 별 이상이 안 보입니다.”
의사의 소견에 수더랜드 단장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진짜 다쳤으면 다카기는 재활치료와 복귀에 전념했을까, 은퇴를 선언한 몸이니 그대로 유니폼을 벗었을 수도 있겠지, 일단 한숨을 돌렸다.
“지금 몸 상태는 어떠십니까?”
“그렇게 나쁘지는 않습니다.”
이틀 후, 정밀 검사를 마친 다카기는 클럽하우스에 복귀했다.
모두를 놀라게 했던 강판, 평소 부상이 잦은 선수였다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시즌 중 MRI 촬영을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데 아무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다니, 정말 아프긴 했던 걸까. 그날, 구체적으로 어디가 어떻게 아팠는지 질문이 쏟아졌다.
“통증이 팔 전체를 타고 다니는 느낌이었습니다. 의사는 괜찮다고 하던데, 저는 분명 통증을 느껴서 내려간 겁니다. 딱히 양치기 소년 놀이를 하겠다고 내려간 건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연봉 4천만 달러 선수가 팬들을 놀려주겠다고 자진 강판을 한다?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일, 하지만 다카기는 솔직한 속마음을 밝혔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정도 통증은 예전에도 몇 번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색을 하지 않았을 뿐이죠.”
“아, 그렇습니까?”
“예, 그런데 그날은 유독 엄살이 심했던 것 같습니다. 평소라면 꾹 참고 던졌을 텐데, 그날은 정말 못 참겠더군요. 아무래도 긴장이 많이 풀어진 것 같습니다.”
가벼운 통증은 그러려니 넘어가는 게 투수, 심지어 수술을 받을 부상을 당하고도 시즌을 이어가는 선수들이 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가.
개인적인 명예를 위해서일 수도 있지만, 팀 승리를 위해서라는 사명감이 통증마저 잊게 하는 걸지도 모른다.
다카기는 예전부터 늘 전투적인 자세로 투구에 임했다.
그런데 은퇴를 선언하면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천하태평 마인드가 됐다고 해야 하나,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가벼운 통증이 크게 느껴진 원인은 그거였다.
“지금 말씀이 맞는다면 지난 경기 강판은 꾀병이 되는 건가요?”
눈치 없이 진실을 말하는 기자, 다카기는 찌릿 눈치를 줬다.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저는 그때 정말 아팠습니다. 내가 아픈데 다른 사람이 그런 식으로 말하면 당신은 기분 좋습니까?”
“이거 실례합니다. 제가 무례를 범했군요.”
약간의 소란이 있었지만 그럭저럭 넘어간 경기, 잃어버린 투쟁심을 어디서 만회해야 할까.
그렇다고 은퇴를 번복할 수는 없는 일, 일단 팀 승리를 위해서라는 고전적인 마인드를 앞세웠다.
‘내가 없어도 잘 이기는데?’
하지만 보스턴은 다카기 없이도 승리를 잘 적립했다.
외부 수혈 없이 유망주 육성으로 승리를 찍어내는 게 수더랜드 단장의 스타일, 작년에는 잘 안 됐지만 올해는 성과를 내고 있다.
이 정도면 내가 없어도 보스턴은 괜찮겠지, 투쟁심을 회복하는 일은 그렇게 뒤로 미뤄졌다.
“이제는 등판시켜도 되지 않겠나?”
그리고 시간은 흘러 5월 27일, 수더랜드 단장은 다니엘 감독에게 다카기를 복귀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MRI에서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불펜 투구를 하면서 선수 몸 상태를 체크, 팀도 잘 나가고 있겠다 그동안 고생한 에이스를 무리시키진 않았다.
그리고 이제 때가 된 복귀전,
다카기는 애리조나 원정경기에 선발 등판했다.
애리조나는 한때 보스턴의 일원이었던 울반스키와 포데스와가 몸을 담고 있는 팀, 필요 없는 선수는 마감세일 하듯 팔아넘기는 수더랜드 단장의 스타일 때문에 두 선수는 아직도 보스턴에 감정을 품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복수할 기회가 오다니, 거기다 상대는 다카기 아닌가.
무너뜨린다면 기쁨은 배가 되겠지, 두 사람은 오늘 반드시 이기자며 의기투합했다.
‘집에 가기 전에 들러야겠다.’
반면 다카기의 머릿속은 투쟁과 거리가 멀었다.
애리조나에는 유명한 선물 가게가 있다. 돈 벌기도 바쁜 가장이 원정경기에서 가족들을 위한 선물을 챙길 여유가 어디에 있나.
하지만 아내에게 선물을 한 지 너무 오래되기도 했고, 경기가 끝나면 들러야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후딱 정리하고 선물 가게 가자.’
7일 만의 선발등판이라 몸 상태는 최고조, 다카기는 1회부터 96마일을 넘나드는 강속구를 뿌려냈다.
다카기를 분풀이 대상으로 점찍은 울반스키는 최선을 다했지만, 패스트볼처럼 날아오다 좌우로 갈라지는 슬라이더와 체인지업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자존심이 상했는지 땅에 배트를 내리치는 녀석, 평온의 경지에 오른 다카기는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봤다.
투쟁심을 버리면 이렇게 편한데 왜 다들 저렇게 죽자 살자 하는 건지, 덤덤한 표정으로 투구를 이어갔다.
따아악 ~ !!
“자, 이 타구는 멀리 가는데요?!! 좌중간 펜스를 그대로 넘어갑니다!! 데이브 윈스키의 솔로 홈런!! 다카기가 실점을 허용합니다!!”
“지금은 공이 몰렸거든요. 오랜만의 등판이라 아직 감이 덜 잡혔을 수도 있습니다.”
3회에 홈런을 맞았지만 그러려니 하는 얼굴,
저게 우리가 알던 그 철벽의 에이스인가. 보스턴 선수들은 1년 사이 몰라보게 바뀐 다카기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다른 건 몰라도 공에는 진심이 실려 있다.’
반면, 개리 우드 포수의 생각은 달랐다.
남들은 장난으로 투구를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받아내는 공 하나하나엔 진심이 실려 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 공, 다카기는 7회까지 6피안타를 맞았지만 실점을 최소화했고(2실점) 삼진은 무려 13개를 잡아냈다.
부상 의혹을 완전히 떨쳐낸 투구, 이 정도면 됐다고 판단한 다니엘 감독은 교체를 권했다.
“네, 그러세요.”
다카기는 교체를 받아들였다.
예전의 나라면 한 이닝 더 던지겠다고 감독과 기싸움을 벌였을 텐데, 지금은 가족 선물을 사러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했다.
“오 ~ 왜 유명한지 알겠는데, 우와 ~ ”
다음 날, 선물 가게에 들어선 다카기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나홀로 집에 영화를 보면 가족과 떨어진 꼬마 주인공이 장난감 가게에 들르는 장면이 나온다.
정말 저런 가게가 현실세계에 존재할까?
적어도 일본에서는 찾지 못한 가게, 그런데 30이 다 돼서야 드디어 찾았다. 지금만큼은 동심으로 돌아간 기분, 다카기는 열 살짜리 아이처럼 선물 가게를 휘젓고 다녔다.
‘잠깐, 이거 가족이 아니라 날 위한 쇼핑 같은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가득 찬 장바구니, 쓸데없는 것만 잔뜩 사왔다고 아내에게 잔소리 폭탄을 맞는 건 아닐까.
일단 전화를 걸어 허락을 구하기로 했다.
[네에 ~ 전화 받았습니다아 ~ ]
“엄마는 어디 가고 네가 받았니?”
[엄마 목욕하고 있어요오 ~ ]
기분이 좋으면 말을 길게 늘이는 버릇이 있는 둘째 아들, 다카기는 일단 아들을 포섭했다.
“아빠 지금 선물 가게에 왔거든, 뭐 사다 줄까?”
[거기서 안 파는 거 사주세요오 ~ ]
“장난하지 말고, 뭐가 가지고 싶은지 구체적으로 말을 해야지”
[그럼 집에 와서 저랑 놀아주세요오 ~ ]
나가요시는 선물보다 출장을 떠난 아빠가 집에 와서 놀아주길 바랐다.
오늘 안 오시면 내일은 오실까, 언제나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 아빠, 그렇게도 나랑 놀고 싶을까.
다카기는 아들과 함께 가지고 놀 수 있는 선물을 사기로 했다.
[자기야, 무슨 일이야? 전화했었다며?]
그렇게 얼마나 쇼핑에 집중했을까, 목욕을 마치고 나온 아내와 연락이 닿았다.
“지금 선물가게에 있는데 뭐 가지고 싶은 거 없어? 여기 기념품도 많고, 자기 좋아할 장신구도 많아.”
[어머 … 말도 안 돼 … ]
키리코는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딱히 바란 적도 없지만 남편이 원정경기에서 선물을 사가지고 온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다.
시즌이 시작되면 무서울 정도로 경기에만 집중하는 사람, 그런데 선물 가게에서 쇼핑을 하고 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남편이 정말 변했다는 걸 실감한 순간, 투쟁심을 불태웠던 그 시절로 되돌아갈 순 없는 걸까. 일단 사실확인에 나섰다.
[자기 지금 농담하는 거 아니지?]
“아니야, 보여줄까? 여기 엄청 좋아.”
영상통화로 인증까지 하는 남편, 동화 속 풍경에 둘러싸여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원래 저런 사람이었나.
결혼 9년 만에 마주하는 남편의 또 다른 모습, 솔직히 귀여웠다.
[난 자기가 사다 주는 거면 뭐든 좋아요 ~ ♡]
“그렇단 말이지? 나중에 다른 소리 하기 없기다?”
아내의 허락도 받았겠다, 다카기는 선물 가게를 털기 시작했다.
영화 속의 못난이 2인조는 불법으로 가게를 털었지만 나는 합법적인 도둑, 이런 손님은 처음이라 가게 주인도 당황했다.
“원래 쇼핑 좋아하시나요?”
“아니요. 혼자 쇼핑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물건을 사는 것뿐인데 이렇게 기분이 좋다니, 난 이 좋은 걸 왜 지금까지 몰랐던 걸까.
돈을 벌기만 했지 쓸 줄은 몰랐던 인생, 스포츠카나 비싼 물건을 산 건 아니지만 마음은 어느 때보다 뿌듯했다.
300달러로 만끽한 쇼핑의 즐거움, 이날부터 다카기는 원정 경기가 있을 때마다 그 지역의 유명한 쇼핑몰을 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