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화. 다시 용병으로 - (6)
“엄마, 아빠 정말 은퇴하신대요?”
이곳은 보스턴 외곽에 있는 저택, 다카기의 장남 타다요시는 진지한 얼굴로 엄마와 대화를 시도했다.
“왜, 아빠가 은퇴하는 게 싫어?”
“음 … 모르겠어요.”
타다요시의 마음은 복잡했다.
야구선수가 아닌 아버지라니, 생각해 본 적도 없다. 하지만 야구선수가 아니라도 아버지는 존경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 그래도 왠지 서운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아빠하고 대화를 해 봐, 들어주실 거야.”
“그래야겠네요.”
타다요시는 조만간 원정게임에서 돌아올 아버지와 결판을 내기로 했다.
나는 왜 아버지의 은퇴를 서운하게 생각하는 건가, 스스로 생각을 해 봤지만 답을 내리지 못했다. 아버지의 속마음을 이해하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그런 마음을 알 리 없는 다카기는 현관 앞에 진을 치고 있는 아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왜 집 밖에 있어?”
“아빠하고 담판을 지으려고요.”
별로 싸우자는 것도 아닌데 오늘따라 기합이 단단히 들어간 아들, 어쨌든 다카기는 아들을 데리고 집안에 들어섰다.
“은퇴는 아빠가 하는데 왜 네가 마음이 복잡하니?”
“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엄마가 아빠하고 대화를 해 보면 답이 나올 거라고 하셔서 계속 기다렸어요.”
보아하니 진지한 녀석, 다카기는 머리가 제법 자란 아들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아빠가 야구 선수가 아니더라도 너한테 부끄러운 아빠는 아니잖아.”
“그건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거면 충분한 거 아니니?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자신이 갈 길도 마음대로 정하지 못해, 하지만 아빠는 어느 길이든 선택할 수 있어.”
“선택이요?”
“그래, 사람은 내가 갈 길을 선택할 자격이 있어.”
인생이란 언제나 선택의 갈림길 앞에 놓여있다.
만약 다카기가 야구를 택하지 않고 대학 진학을 택했다면 지금 어떤 인생을 살고 있었을까. 학창시절 만난 아내와 결혼해 자식 3명을 뒀지만, 사실 이렇게 결혼을 빨리 할 생각도 없었다.
그때 내가 결혼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이 녀석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겠지, 타다요시 입장에선 꽤 무서운 선택이었다.
“아빠는 그때 엄마랑 결혼 안 할 생각도 있었어요?”
“그걸 이 자리에서 물으면 어떻게 하니, 아빠 곤란하게”
아내가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데 어떻게 아니라고 할 수 있나,
머리는 똑똑해도 눈치는 조금 없는 녀석, 이런 것까지 어린 시절의 날 닮을 줄이야. 어쨌든 다카기는 모든 상황을 차근차근 정리했다.
“넌 성공이 보장된 길 앞에서 다른 길을 택할 수 있니?”
“어 … 그건 … ”
“아빠 메이저리그 진출하기 전에 대학교에서 스카우트 받았어. 거긴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거물의 자식들이 입학하는 곳이었고 … 솔직히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는 것보다는 대학에 가는 게 성공할 확률이 높았지.”
다카기는 메이저리그 진출을 택했지만 성공 확률은 50대 50이었다.
실제로 첫 1년은 마이너리그에서 지냈고, 나는 타격 쪽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전문가나 팀 관계자들은 투수가 더 성공할 확률이 높다며 내 길을 멋대로 정해버렸다.
물론 그게 맞을 수도 있지만 보스턴은 다카기를 투수로 보고 계약했다.
처음부터 내 야수재능은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것, 분명 내가 선택한 길인데 어느 순간부터 남의 뜻에 끌려다니게 됐다.
‘원하지 않은 배역이지만 일단 메이저리거가 되는 게 낫겠지.’
배우가 배역을 바꾸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극단에 서지도 못하고 사라지는 조연들이 수두룩, 일단 투수로 커리어를 시작하고 야수는 그다음에 생각하자고 했는데, 좋은 야수들이 하나둘 머리를 들면서 다카기는 결국 투수로 남았다.
분명 성공한 인생인데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은 것, 나는 지금 투수로서 행복한가?
다카기는 이 의문점부터 출발했다.
솔직히 투수로서 이룰 건 다 이뤘다. 그런데 뭘 더 어떻게 하라는 건지,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다면 억지로 커리어를 끌고 갈 이유가 없다.
그리고 아직 출발선으로 돌아가도 늦지 않은 인생, 다카기는 아들에게 네가 가고 싶은 길을 가라고 충고했다.
“너 예전에 아빠한테 투수 하고 싶다고 했지?”
“네 … ”
“그것도 네가 선택할 일이야. 아빠는 그거 간섭할 생각 없어.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마라, 너한테 애정이 없는 게 아니라 네 의견을 존중해주고 싶을 뿐이니까. 그러니까 너도 아빠가 가는 길을 이해해 줘”
잠시 말이 없던 타다요시는 아빠 품에 뛰어들었다.
이해는 했는데 왜 이렇게 서운한 건지, 혹시 나는 그동안 위대한 아빠가 필요했던 게 아닐까.
하지만 아빠는 누구에게 위대한 존재가 될 이유가 없다.
다만 자신의 길을 묵묵히 나아갈 뿐, 그리고 내가 가는 길도 존중해준다고 하지 않으셨나.
이제는 위대한 아빠의 아들이 아니라 스스로 위대한 사람이 될 때, 어린 아들은 겨우 마음을 정리했다.
“그런데 아빠”
“왜?”
“이래놓고 나중에 은퇴 번복하면 정말 멋없는 거 아시죠?”
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키리코는 눈치 없이 킥킥거렸다.
이제 머리가 컸다고 아빠에게 역습도 날릴 줄 아는 아들, 한 방 먹은 다카기는 아들과 시선을 마주한 채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아빠가 알아서 정할 일이지.”
“어?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예요?”
“사람의 마음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거야”
“에이 ~ 아빠!!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잠시 어른이 됐던 타다요시는 바로 어리광쟁이로 돌아왔다.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는 변덕쟁이 아빠, 하지만 다카기는 젖먹이인 네가 감히 날 이해할 수 있겠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 * *
[다카기 은퇴? 아니면 헛소문?]
발이 달린 것도 아닌데 소문은 빠르게 번져나갔다.
정말 은퇴를 하는 걸까, 다들 반신반의 했지만 보스턴의 라이벌이자 다카기에게 원한이 많이 쌓은 뉴욕은 바로 반응을 보였다.
“다카기가 지금 은퇴하면 명예의 전당 입성 조건이 바뀔지도 모르겠군요.”
뉴욕의 간판 타자 모리슨은 기자들 앞에서 이런 인터뷰를 했다.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려면 최소 프로 10년을 채워야 한다. 그것뿐만 아니라 기자단 투표라는 까다로운 절차까지 거쳐야 하는데 다카기는 이미 통산 WAR 75를 돌파했다.
메이저리그에 입성한 선발투수 평균 WAR는(평균 72) 이미 넘어섰고, 거기다 만테냐 어워드 8년 연속 수상은 누구도 달성하지 못한 대기록이다.
여기에 월드시리즈 우승 6회, 리그 MVP 2회 수상, 골드 글러브 8회 수상, 이쯤 되면 투표자격을 다카기에게 맞추는 게 맞는 거 아닌가.
물론 농담으로 한 말이지만 모리슨은 은근슬쩍 다카기가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선수라는 걸 인정했다.
“그럼 이대로 다카기 선수가 은퇴하길 바라신다는 겁니까?”
“은퇴하기 전에 뉴욕에서 한 시즌 뛰어줬으면 좋겠네요.”
이 인터뷰는 뉴욕과 보스턴에서 모두 야유를 받았다.
한 시즌 뛰어줬으면 좋겠다니, 적장의 칼을 빌려서라도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고 싶다는 건가.
뉴욕 팬들은 자존심도 없냐고 날뛰었고, 보스턴 팬들 역시 어림없는 소리라며 반박했다.
[다카기는 영원한 보스턴의 에이스다]
[그 커리어에 오점을 남길 순 없다]
보스턴 팬들은 뉴욕의 다카기를 거부했다.
차라리 이대로 은퇴해 영원한 보스턴의 전설로 남는 게 낫지, 그 꼴은 절대 못 본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한 선수가 인생의 핸들을 살짝 꺾었을 뿐인데 난리가 난 메이저리그, 내가 그렇게 대단한 선수였나. 다카기는 지금 분위기를 은근 즐기기 시작했다.
‘아빠 이러고 은퇴 번복하면 정말 멋없는 거 아시죠?
아들의 충고가 떠올랐는지 다카기는 입가에 번진 미소를 지웠다.
무슨 양치기 소년도 아니고 은퇴를 하니 안 하니 하면 팬들도 질려 버린다. 실제로 그딴 식으로 행동하며 연봉협상에서 유리한 계약을 이끌어 낸 선수도 있는데, 팬들에게 좋은 평가는 못 받았다.
떠날 때는 깔끔하게 떠나야 하는 법, 다카기는 기자들 앞에서 2년 안에 은퇴할 생각이 있다고 털어놨다.
이유는 구구절절 언급했으니 더는 묻지 않겠지, 하지만 한 기자가 슬쩍 손을 들었다.
“나중에 은퇴 번복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러잖아도 아들과 상의를 해 봤습니다. 그 녀석이 제게 그러더군요. 나중에 말 바꾸면 사람이 정말 멋없어 보인다고 말이죠. 저는 마지막까지 멋있는 선수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솔직담백한 발언에 빵 터진 기자들, 정말 30도 안 된 이 선수를 떠나보내야 하는 건가.
부상을 입은 것도 아니고 기량이 하락한 건 더더욱 아니다.
양치기 소년이면 어떤가, 그런 거짓말은 언제든 환영할 일, 보스턴 팬들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it is sometimes OK to lie. So this is the point, stay with us]
= 가끔은 거짓말을 해도 괜찮아요. 그러니까 우리와 함께해요
몇몇 팬들은 다카기가 등판하는 날에 시위를 이어갔다.
이대로 보내기엔 아쉬운 선수, 차라리 거짓말이라고 해달라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다카기는 묵묵히 투구에 집중했다.
딱 ~ !
“파울입니다. 카운트는 원 볼 투 스트라이크”
“정말 은퇴할 생각이 있는 걸까요? 투구만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데 말이죠.”
“혹시 팬들의 본심을 확인하기 위해 연극을 한 게 아닐까요?”
“제가 아는 다카기 선수는 그렇게 생각이 깊지 않습니다.”
다카기의 열혈 팬 피트 오어는 농담으로 웃음을 유도했다.
딱히 저 선수가 머리가 나쁘거나 무모하다는 뜻으로 한 말은 아니다.
구위가 워낙 좋기 때문에 빠른 볼로 카운트를 잡고 변화구로 마무리 하는 패턴이 가능한 것, 생각이 필요 없는 구위라니, 얼마나 대단한 칭찬인가.
저 위대한 투구가 2년 안에 끝난다니, 재미없는 경기를 해설할 바엔, 이 선수가 걸어온 발자취를 재방송 하는 게 더 낫겠다는 말까지 했다.
“와아아아 ~ !!”
“이제 일할 시간이다 이 놈들아!!”
“얼른 점수 내라고!!”
해설위원이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는 사이, 다카기는 1회를 막아내고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오늘도 완벽한 피칭, 시즌 초반에 잠시 흔들렸지만 6월에 들어서자 팬들이 기대했던 장면이 실현됐다.
문제는 빌어먹을 타선,
작년 시즌 다카기는 1점대 평균자책점을 찍고도 16승에 그쳤다.
올 시즌도 8경기에서 평균자책점 2.23을 기록하고 있는데 타선이 지원을 못해주면서 3승에 그치고 있다.
다카기가 은퇴를 입에 담은 건 이런 배경도 한몫했겠지, 극성팬들은 얼른 일하라며 타자들을 다그쳤다.
‘그게 우리 뜻대로 되냐고’
‘서러워서 못 살겠네’
보스턴 선수단은 다소 섭섭한 반응을 보였다.
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다카기, 당연히 비난의 대상이 된 적은 거의 없다.
문제가 생겼을 때 욕받이가 되는 건 언제나 우리 몫, 하지만 다카기가 등판하는 날 유독 점수를 못내는 것도 사실이라 할 말은 없었다.
‘어디 한번 해보셔, 얼마나 잘 하나’
하지만 승패에 대한 미련을 초월한 다카기는 그러려니 하는 얼굴로 경기를 지켜봤다.
선발 투수의 승패는 운에 갈리는 것, 내가 할 일은 팀 승리를 위한 길을 닦아 놓는 것뿐이다.
그거면 충분, 다른 건 생각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