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화. 다시 용병으로 - (5)
‘저걸 어떻게 저렇게 던지지?’
한편, 뉴욕의 에이스 앤드류 브루스터는 더그아웃에서 다카기의 피칭을 지켜봤다.
체인지업은 그렇게 특별한 구종이 아니다. 특히 속도를 높이고 떨어지는 폭을 줄이는 체인지업은 스플리터 대용으로 많이 사용하는 구종,
다만 검지와 중지를 벌리고 잡느냐 중지와 약지를 벌려 잡느냐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다.
하지만 그게 눈에 띄는 차이가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중지와 약지는 검지와 중지에 비해 힘이 약하기 때문에 구속이 더 떨어진다는 게 일반적인 의견, 하지만 다카기는 90마일에 가까운 체인지업을 던진다.
말 그대로 케이스 바이 케이스, 그런데 체인지업이 저것만 있는 게 아니다.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역회전 체인지업도 있는데, 이건 같은 투수가 봐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공이다.
다카기는 우완, 저렇게 역회전이 걸리는 체인지업은 다른 손 타자에게 유용하다. 그럼 체인지업을 좌타자에게만 던지고 있느냐?
그게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자, 뉴욕의 7회 말 공격으로 이어집니다. 타석에는 커트 오스굿, 오늘은 아직 안타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빠른 볼을 전혀 건드리지 못하고 있거든요. 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겁니다.”
오스굿은 우타자,
다카기는 바깥쪽 빠른 볼 2개로 노 볼 투 스트라이크를 잡은 뒤, 바깥쪽 높은 빠른 볼을 던졌다(볼 판정).
그리고 바깥쪽 낮은 체인지업을 던져 헛스윙, 우타자 입장에선 체인지업이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체인지업을 슬라이더처럼 활용하고 있다는 것, 거기다 체인지업 특유의 낮게 떨어지는 궤적 때문에 타자 입장에선 스윙할 공간을 만들어 내기도 힘들다.
자신이 던지는 공이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던져야 타자의 시선을 교란할 수 있는지 알고 있다는 것, 아직 경험이 부족한 앤드류 브루스터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번에는 몸 쪽 입니다!! 삼진!! 다카기가 돌아왔습니다!!”
“체인지업을 의식하다 보니 시선이 바깥쪽으로 가 있었거든요. 이때 몸 쪽 빠른 볼 … 다른 설명은 필요 없습니다.”
오늘도 철저히 농락당하는 뉴욕 타선, 너의 시대는 끝났다는 뉴욕 팬들의 목소리는 일찌감치 사라졌다.
나의 시대를 끝내는 건 내 몫, 다카기는 보란 듯이 호투를 이어갔다.
‘이건 또 뭐냐?’
초구를 지켜본 댄 과리니는 혼란에 빠졌다.
다카기는 커브처럼 손날을 세워 떨어지는 슬라이더 궤적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지만 이건 빙산의 일각, 공을 더 깊숙이 잡고 실밥이 걸친 중지에 더 힘을 주는 너클 커브도 던질 수 있다.
구속은 대략 86마일, 82마일 초반에 형성되는 종으로 떨어지는 슬라이더보다 더 빠르고 날카롭게 떨어진다.
던질 줄 알지만 슬라이더보다 비효율적이라 던지지 않은 것뿐, 은퇴 계획도 세워뒀겠다 조금 더 야구를 즐기는 게 좋지 않을까.
장난으로 던진 공이지만 타자 입장에선 부담 백배, 비슷한 궤적으로 날아오는 빠른 볼에 헛스윙을 돌렸다.
그렇게 뉴욕은 다카기에게 통산 15번째 승리를 헌납, 상대 전적 15승 1패를 거둔 다카기는 기자들 앞에서 소감을 밝혔다.
“통산 172승 달성 축하드립니다.”
“예, 감사합니다.”
“그중 15승을 헌납한 뉴욕에게도 감사의 말씀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한 뉴욕 기자는 자학개그로 회견장의 웃음을 유도했다.
이렇게까지 뉴욕을 철저히 농락한 투수가 있었던가, 최근 다카기의 페이스가 좋지 않았기에 내심 붕괴를 기대했다.
하지만 이젠 반쯤 포기 상태, 이렇게 많은 승리를 헌납했는데 감사의 말 한마디 해도 되지 않을까. 다카기는 그 뜻대로 해줬다.
“뉴욕은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많은 월드시리즈 우승을 달성한 위대한 팀입니다. 그런 팀을 상대로 15승이나 거둔 저는 더욱 위대한 존재겠죠? 저를 더욱 빛내준 이 도시와 팬 그리고 선수들에게 감사를 표하겠습니다.”
마지막까지 철저히 농락당한 하루,
떠들썩한 분위기가 가라앉자 다른 기자가 마이크를 받아들었다.
“지난 26년 동안 300승을 달성한 투수는 아무도 없습니다. 300승은커녕 250승을 거둔 선수도 없죠. 하지만 팬들은 당신이라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다카기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올해 29살인데(만으로 28세) 172승, 1982년 이후를 기준으로 30살 이전에 150승을 달성한 선수는 단 3명뿐이다.
다카기도 그중 한 명, 지금까지 보여준 퍼포먼스는 분명 역대급이다.
하지만 올 시즌은 7경기에서 겨우 2승, 아무리 잘 던져도 승리가 따라온다는 보장은 없다.
다 운에 달린 것, 다카기는 덤덤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글쎄요. 제가 기량이 떨어질 때까지 공을 던진다고 해도 그 영역에 발을 들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저 오늘에 집중했을 뿐이죠, 기록을 위해 투구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물론 기록은 야구 선수에게 중요한 겁니다. 몇 승을 거뒀나 얼마나 홈런을 많이 쳤느냐에 따라 평가가 엇갈리기도 하죠.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어떤 모습으로 팬들의 기억에 남느냐는 겁니다.”
어떤 선수는 별 볼 일이 없는 커리어를 쌓고도, 중요한 경기에서 날린 한 방으로 팬들의 머릿속에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반면 500홈런을 때리고도 쓸쓸히 퇴장하는 선수도 있는 법, 팬들과 싸웠다가 홧김에 은퇴를 선언한 데이브 셰퍼드가 좋은 예다.
뒤늦게 후회하고 복귀를 선언했지만 받아주는 팀이 없어 그대로 사라진 스타, 어떻게 사라지고 어떤 모습으로 팬들에게 기억되느냐도 선수에겐 중요한 일이다.
300승을 거두겠다고 마지막까지 발악하는 게 팬들이 원하는 모습일까, 다카기는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저는 이미 메이저리그에서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뤘습니다. 남들은 한 번 하기도 힘든 월드시리즈 우승을 6번이나 했고, 만테냐 어워드 8번에 MVP도 2번이나 수상했죠. 아, 골드 글러브도 8번 수상했죠? 아마 제가 내셔널리그에서 뛰었다면 실버슬러거도 차지했을 겁니다. 그건 조금 욕심이 나네요. 은퇴하기 전까지 한 번은 수상하고 싶습니다.”
이 인터뷰는 보스턴 일대에 소소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실버슬러거가 욕심이 난다니, 이건 보스턴에 있는 한 절대 이룰 수 없는 꿈이다.
앞으로 보스턴과 4년 계약이 남아 있는 철벽의 에이스, 계약이 끝나면 내셔널리그로 가는 거 아닌가.
계약이 끝나도 33세밖에 안 되는 선수, 다른 팀으로 가도 이상하지 않다. 보스턴 팬들에게 다른 유니폼을 입은 다카기는 상상도 하기 싫었고, 이번 기회에 계약기간을 연장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처음부터 이걸 노린 작전이었나.’
수더랜드 단장은 근질거리는 입을 꽉 다물었다.
다카기는 2년 안에 은퇴할 생각이라고 이미 구단에 통보했다.
처음엔 진심인 줄 알았는데, 혹시 33세 이후에도 보스턴에서 뛸 수 있도록 계약 기간을 연장하기 위한 작전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게 현명하다.
33세에도 지금 기량을 유지한다는 법이 없지 않은가. 연장 계약을 맺는다면 지금 하는 게 선수에게 유리, 수더랜드 단장은 에이전트 제임스 콜튼과 접촉했다.
“자네, 혹시 처음부터 이런 전개를 노린 거 아닌가?”
“그런 말 하지 마십쇼. 저도 그날 깜짝 놀랐습니다.”
제임스 콜튼은 술수를 쓴 게 아니라며 손을 저었다.
누가 그런 재미없는 농담으로 구단을 뒤집어 놓나, 어쨌든 연장계약 논의는 그대로 진행됐다.
“37세까지 연 평균 4천만 달러 보장해 주겠네.”
“그게 정말이십니까?”
“나는 농담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야 그러니까 자네 고객에게 다시는 그런 농담 하지 말라고 전해두라고”
수더랜드 단장은 기존의 13년 3억 9천만 달러 계약에 4년 1억 6천만 달러를 덧붙여 줬다.
총합계는 무려 17년 5억 5천만 달러, 만약 다카기가 받아들인다면 총액으로 누구도 넘지 못하는 매머드 급 계약이 달성된다.
우리 귀하신 고객은 어떤 결정을 내릴지, 통화버튼을 누르는 제임스 콜튼의 얼굴엔 혹시나 하는 기대가 번졌다.
“은퇴한다는 사람한테 연장계약 논의라니, 그게 무슨 소리죠?”
[아니 … 그래도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 고려는 해 보시죠.]
“앞으로 남은 계약이나 완수하면 다행이죠. 저는 이제 마운드에 미련 없습니다. 돈도 벌 만큼 벌었고요.”
지금 당장 은퇴해도 임대 사업으로 들어오는 수입이 있다.
여기에 메이저리거로 43일 이상 등록한 선수는 평생 연금이 보장, 10년을 채우면 62세 이후부터 매년 25만 달러를 받는다.
그 정도면 충분, 돈 때문에 선수 생활을 연장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다카기 너는 충분히 위대해]
[실버슬러거는 없어도 된다고]
실버 슬러거 발언 파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지금 내셔널리그에서도 지명타자를 도입해야 한다는 논의가 힘을 얻고 있다. 그런데 아메리칸 리그에서 뛰는 투수가 실버 슬러거를 수상하고 싶다니, 대세를 거스르는 발언 아닌가.
특히 지명타자로 뛰고 있는 선수들이 대거 실업자가 될 수 있는 발언,
다카기는 메이저리그 여론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선수라 지명타자들은 바짝 긴장했다.
[난 마음속에 있는 말을 했을 뿐이야, 그리고 딱히 날 위해 지명타자 제도를 폐지해 달라고 한 말은 아니라고]
다카기는 SNS를 통해 입장을 밝혔다.
한 명을 위해 사회에 뿌리박힌 제도를 들어내야 하나, 다카기도 그렇게까지 실버슬러거를 원하지는 않았다.
다만 기회가 되면 도전해보고 싶을 뿐, 보스턴의 한 기념품 회사는 실버 슬러거는 우리가 만들어 줄 테니, 보스턴을 떠난다는 말은 하지 말라며 애원했다.
‘2년 후엔 다들 난리 나겠는데’
주변 분위기를 살핀 다카기는 고민에 잠겼다.
실버 슬러거 발언이 이런 파장을 불러오다니, 은퇴한다는 말을 하면 보스턴 팬들은 어떻게 반응을 할까.
아니 되옵니다 하면서 다들 길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건 아닌지, 그 정도로 끝나면 다행인데 지금 분위기는 그게 아니다.
올해를 포함해 남은 계약은 4년, 다 채우면 팬들은 내 은퇴를 납득할까. 일단 가까운 선수에게 속마음을 털어놨다.
“뭐라고? 지금 내가 잘 못 들은 거 아니지?”
“아니, 진심이야. 너한테만 미리 말해두는 거니까 나중에 놀라지 마”
알 디즌은 쩍 벌어진 입을 손으로 가렸다.
창창한 나이에 은퇴라니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다카기 없는 보스턴은 상상 불가, 절대 안 된다며 막아섰다.
“도대체 뭐가 불만인데? 우리가 그동안 너 많이 힘들게 했어?”
“힘들게 한 건 맞지. 양심이 있으면 가슴에 손을 얹어 봐.”
“아, 아니 … 그래, 그건 그렇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도 30살에 은퇴는 좀 아니지 않냐?”
“왕은 자기가 내려올 때를 아는 법이지. 난 이미 마운드에서 마음이 떠났어, 더 버티면 추해질 것 같아.”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은 디즌의 얼굴, 다카기는 그렇게 알아두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디즌이 입만 열면 사방으로 퍼져나갈 소문, 하지만 팬들도 이쯤에서 알아두는 게 좋겠지.
더는 미련 두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