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화. 다시 용병으로 - (4)
[다카기 이상 징후?]
[3경기 연속 승리 없어]
시즌은 어느덧 5월에 접어들었다.
다카기는 5경기에서 1승 2패 평균자책점 2.81를 기록, 평균자책점만 보면 여전히 정상급 성적이지만 역대 최고의 투수라는 평가를 받는 선수라 팬들에겐 너무 높게 느껴졌다.
그에 반해 작년 시즌 부진했던 댈러스 레이븐이 3승 1패, 평균자책점 2.22를 기록하며 팀을 이끌어가고 있는 상황, 이제 새로운 왕을 맞이해야 할 때인가.
여론의 설레발이 계속됐지만 다카기는 평온한 태도를 유지했다.
“당신 요즘 너무 못하고 있는 거 압니까?”
그러던 어느 날, 한 기자가 이런 질문을 했다.
평균자책점 2.81이 못한 거라니, 다소 무례한 질문이지만 다카기는 담담하게 현재 소감을 밝혔다.
“언제나 잘할 수는 없는 법이죠. 못한다고 욕한다면 별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질문을 던진 기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본인도 이 질문이 무례하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런데 반응이 이러면 내가 무안해지지 않는가. 기분이 나쁘지 않으냐고 되물었지만 돌아온 답은 평온했다.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헌법에 보장된 권리입니다. 딱히 제가 뭐라고 할 이유는 없습니다.”
기자는 그날 기사에 다카기를 ‘입헌군주’로 칭했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메이저리그 무대에서 성공한 선수는 대체적으로 자존심이 굉장히 강하고 오만하다.
거기다 무례한 기자에게는 아주 단호한 편, 실제로 다카기는 팀을 저격하는 기자를 출입금지 시켜달라고 구단에 요구한 적도 있다.
그런 사람이 헌법을 운운하다니, 뭔가 좀 서운하지 않나. 몇몇 팬들은 겸손한 다카기는 보고 싶지 않다는 불만을 쏟아냈다.
“우리 공주님 ~ 아빠 왔어요 ~ ”
그러건 말건 다카기는 생후 7개월에 접어든 딸과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사랑 싸움을 벌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힘들게 기어 다니더니 이제는 일어서서 걷는 녀석, 유리창에 찰싹 달라붙은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아아앙 ~ 아앙 ~ (얼른 이리 오지 못하겠느냐)!!”
아빠가 집에 들어오지 않고 집 밖을 맴돌자 화를 내는 공주님, 그제야 다카기는 집 안으로 들어가 딸의 노여움을 다독였다.
“우리 아가는 아빠가 집에 있는 게 좋지?”
“꺄아아 ~ ”
“그래, 아빠도 출근 안 하고 우리 아가랑 하루 종일 놀았으면 좋겠어.”
키리코는 딸과 놀아주는 남편을 유심히 지켜봤다.
정말 야구에 미련이 없는 건가, 고시엔 패배에 불같이 화를 내던 그 열혈야구 소년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건가.
10년 전 일이라고 해도 너무 갑자기 변해버린 남편, 투지를 다 써서 이제는 싸울 의지마저 잃어버린 건가. 솔직히 저렇게 약해진 남편은 보고 싶지 않았다.
“자기야, 나랑 말 좀 해”
“뭐가?”
“자기 요즘 기가 너무 빠진 거 같아. 사람이 물러졌다고 해야 되나.”
“그래? 으음 … 난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그러지 말고 투지 좀 내 봐, 기자한테 욕을 하던가, 아니면 빈볼 던지고 벤치 클리어링을 하던가.”
“어허 ~ 애기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네.”
다카기는 딸을 품에 안고 저 쪽으로 피신, 하지만 키리코는 집요한 추격에 나섰다.
“나는 솔직히 남자다운 당신이 더 멋있는 거 같아.”
“나는 지금도 충분히 멋있어.”
“아니 ~ 그게 아니라 ~ 제발 좀 진지하게 들어줘.”
키리코는 남편에게 은퇴를 하더라도 조금 더 투지를 끌어올리라고 부탁했다. 남편이 상냥한 건 좋은데 요즘 들어 팬들에게 이런 저런 잔소리를 듣고 있으니 아내 입장에선 심기가 매우 불편, 그렇다고 내가 팬들하고 싸우면 남편이 또 뭐라고 할 거 아닌가.
하지만 다카기는 장난 따윈 하지 않았다.
“당신은 내가 대충대충 던지는 것처럼 보여?”
“아니 … 별로 그런 뜻은 아닌데 … ”
“걱정하지 마. 나는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어.”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려면 10년 커리어를 채워야 한다.
다카기는 올해 9년 차에 접어든 입장, 지표만 보면 지금 당장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안 되니까 2년은 더 뛰겠다는 것, 그리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다만 성적이 안 나오는 것뿐, 다카기의 은퇴 계획을 알고 있는 건 가족과 에이전트 그리고 구단 관계자뿐이다.
아직 확정된 게 아니니 섣불리 여론에 발표하면 관심 끌기밖에 더 되겠나, 다카기는 은퇴를 생각하고 있을 뿐이지, 은퇴를 이유로 태업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다만 아내 입장에선 남편이 야구에서 마음이 완전히 떠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 다카기는 난 그렇게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라며 아내를 안심시켰다.
“아야!! 누가 아빠 꼬집으래?”
진지한 분위기를 깨는 딸의 장난, 히히거리던 아기는 아빠의 옷을 꽉 움켜쥐었다.
방심하면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는 아빠, 이번엔 도망 못 가게 단단히 붙들어 놨다.
“얘 손힘이 좋네. 날 닮아서 그런가? 나중에 운동 시켜야지”
다카기는 일찌감치 딸의 인생 계획표를 짜냈다.
솔직히 야구를 시작한 것도 도쿄 야구 협회 회장을 지낸 할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기업 후계자가 되라고 강요할 수도 있었는데 공부든 운동이든 네가 할 수 있는 건 다 하라고 응원을 해줬던 할아버지, 가끔은 그 밑에서 보살핌을 받던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자손들의 길을 열어줘야 하는 입장, 아이의 재능을 키워주는 게 부모의 역할 아닐까.
은퇴 후 자식농사에 집중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하고 싶은 일이 정해질 때까지는 야구에 집중하기로 했다.
* * *
“자, 다카기 하루요시가 시즌 6번째 등판에 나섭니다. 올 시즌 5경기에서 1승 2패, 평균자책점 2.81, 32이닝 동안 볼넷 10개, 탈삼진은 39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볼넷이 좀 눈에 띄죠. 작년 시즌 226이닝을 던지면서 볼넷을 32개밖에 내주지 않았는데, 작년에 비하면 볼넷 수치가 2배 이상 상승했습니다.”
“제구의 문제인지 포수의 능력 부족인지 모르겠지만, 다카기 선수라 아쉽다는 거죠. 다른 선수였다면 지금 성적도 별 불만이 없습니다.”
5월 13일, 다카기는 뉴욕 원정 경기에 등판했다.
뉴욕 현지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는 부진, 정말 시대가 바뀔 때가 된 건가. 팬들은 네 시대는 끝났다며 야유를 보냈지만 타석에 들어서는 모리슨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우리 정말 지겹게 싸웠다.’
모리슨은 다카기에게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한 때 내게 위협구를 던지며 시비를 걸었던 녀석, 개인적인 감정은 좋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상대가 강할수록 넘어서고 싶다는 각오를 품는 게 프로, 모리슨은 지난 9년 동안 다카기와 혈전을 주고받았다.
패배를 거듭했지만 그래서 더욱 노력해야 했던 지난 나날, 약해진 상대를 꺾는다고 기분이 좋아질까.
한창 좋은 시절의 라이벌을 무너뜨려야 의미가 있는 법, 약한 모습 따윈 바라지 않았다.
딱 ~ !
“몸 쪽, 파울입니다. 94마일 빠른 볼”
“역시 몸 쪽에 약점이 있다는 걸 알고 있죠. 모리슨은 같은 패턴에 계속 당해주고 있습니다.”
초구를 때려낸 모리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론에서 다들 호들갑을 떨기에 구위가 많이 떨어진 줄 알았는데 약간 떨어진 구속 외엔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도대체 어디가 약해졌다는 건지, 몸 쪽을 던졌으니 다음에는 바깥쪽으로 오겠지? 하도 많이 상대를 해서 패턴도 눈에 익었다.
‘넌 어떻게 변한 게 없냐.’
헛스윙을 끌어낸 다카기는 표정 없는 얼굴로 돌아섰다.
모리슨은 장타력을 갖춘 리드오프지만 타율에 비해 정교함이 약간 떨어지는 편, 그래서 몸 쪽으로 빠른 볼을 붙이고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으로 타이밍을 뺏어냈다.
그렇게 많이 당했으면 생각을 해야 되는데 저 녀석은 매번 똑같은 패턴에 당해주고 있으니, 적이라도 조금 답답했다.
“다시 낮게 떨어집니다!! 삼진!! 다카기가 첫 타자를 삼진으로 처리하며 기분 좋게 출발합니다!!”
“이렇게 되면 모리슨은 다카기에게 통산 26번째 삼진 헌납이네요. 전혀 공략이 안 되고 있어요.”
“이렇게까지 철저히 당할 수 있는 건가요? 물론 뉴욕이 다카기를 상대로 통산 1승 14패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책임을 모리슨에게 돌릴 순 없지만, 그래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습니다.”
마침 중계카메라는 벤치에 앉은 모리슨의 얼굴을 비췄다.
그렇게밖에 못하냐는 질책, 하지만 타자는 최선을 다 한 거다.
패턴을 알고 있는데도 칠 수가 없는 공, 다른 선수라면 다를까. 뉴욕이 지는 걸 바라진 않지만 쉽게 이길 경기가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봐, 나만 못 치는 거 아니라니까.’
2번 타자 제레미 브라운도 통산 18번째 삼진을 적에게 헌납했다.
모리슨이 워낙 많은 삼진을 당해서 묻힌 입장, 그나마 다카기에게 강했던 숀 스팸에게 기대를 걸었다.
‘도대체 어디가 부진하다는 거야?’
초구에 헛스윙을 휘두른 숀 스팸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몸 쪽으로 예리하게 꺾여 들어오는 공, 가끔 몰리는 경우가 있는데 스팸은 이걸 놓치지 않고 홈런 3개를 뺏어냈다.
숀 스팸은 다카기에게 홈런 3개 이상을 뺏어낸 18명 중 하나, 나름 강한 편이지만 쉽지 않은 상대라는 건 알고 있었다.
딱 ~ !
“밀립니다. 파울, 카운트는 노 볼 투 스트라이크가 됩니다.”
“오늘은 구위가 좋네요. 지난 경기에서는 볼이 약간씩 벗어나는 모습을 보였는데 제가 알고 있던 그 선수로 돌아왔습니다.”
“이제 슬라이더를 던질 텐데, 타자가 어떻게 대응하는지 지켜보시죠.”
존 올러우 위원의 예상과 달리 다카기는 몸 쪽 높은 공으로 헛스윙을 끌어냈다.
다 빠른 볼이지만 가운데 몸 쪽, 가운데 바깥 쪽, 다시 몸 쪽 높은 코스, 들어간 코스가 다 제각각이라 눈과 몸이 따라가질 못했다.
그 정도로 완벽한 오늘 제구, 뉴욕은 타자가 일순하는 동안 한 명도 1루를 밟지 못했다.
그리고 4회 말 뉴욕의 공격, 선두타자 모리슨은 이번에도 몸 쪽 빠른 볼을 노렸다.
“우우 ~ 우 ~ ”
“왜 같은 패턴에 당하는 거야?!! 생각을 하라고!!”
또 파울이 되자 홈 팬들은 모리슨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마음 같아선 네가 한 번 쳐보라고 하고 싶지만 프로가 일반인을 탓해서야 되겠나. 모리슨은 그러려니 하는 얼굴로 다음 타격을 준비했다.
‘이번엔 안 속네?’
2구는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변화구, 너무 뻔한 수작이었나.
포수가 던져준 공을 받아든 다카기는 진지하게 다음 사인을 교환했다.
‘내가 기가 빠졌다고?’
이때 아내의 잔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모리슨을 대하는 자세를 보니 확실히 예전에 비해 투쟁심이 많이 사라지긴 했다. 하지만 이건 내가 물러진 게 아니라 경험이 축적되다보니 마음속에 여유가 생긴 것뿐이다.
많이 상대해 본 만큼 타자의 약점을 알고 있는데 내가 왜 투쟁심을 불태워야 되나, 게임을 하듯 쥐고 있는 패를 하나씩 풀어내며 타자의 반응을 살폈다.
딱 ~ !
“다시 몸 쪽!! 파울입니다. 카운트는 원 볼 투 스트라이크”
“정말 안 되는 건가요? 모리슨도 본인의 약점을 알고 개선을 했기에 지금까지 메이저리그에서 버티고 있는 건데, 전혀 타이밍을 못 맞추고 있습니다.”
모리슨은 바깥쪽 낮은 공을 때렸지만 2루수 글러브로 들어갔다.
인정하긴 싫지만 여전히 짜증 나는 녀석,
더그아웃으로 향하는 모리슨의 머릿속엔 건재해서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다음엔 반드시 갚아주겠다는 투쟁심이 교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