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화. 다시 용병으로 - (3)
딱 ~
“파울입니다. 카운트는 원 볼 원 스트라이크”
“지금은 그냥 치라고 던진 공 아닌가요. 다카기가 이렇게 가운데로 밀어 넣는 모습은 오랜만입니다.”
“그런데 작년에도 위기 상황이 되면 이렇게 코너에 제구하는 걸 포기하고 구위를 믿고 던졌습니다. 워낙 구위가 뛰어나다 보니 그렇게 던져도 치질 못했던 거죠. 다만 걱정되는 건 슬라이더를 마음 놓고 던지질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해설위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깥쪽으로 빠르게 휘는 슬라이더가 들어갔다.
포수가 기량이 미숙해서 슬라이더를 못 던진다?
그건 핑계일 뿐, 투수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공을 던져야 한다는 게 다카기의 지론이다.
그리고 그걸 받아내는 게 포수의 역할, 못한다고 계속 피하면 언제 극복하겠나. 개리 우드 포수는 몸을 날렸지만 공이 미트를 맞고 옆으로 튀었다.
다행히 멀리 튀지 않은 공, 포수가 신속히 대처하면서 1루 주자는 움직이지 못했다.
‘난 내 갈 길 간다. 따라와라’
에이스가 포수 능력에 맞춰줄 필요는 없는 법, 내가 저 녀석의 능력에 맞춰줘야 하나, 내 능력은 100인데 저 녀석은 70, 저기에 맞춰주면 80의 능력도 발휘 못 한다.
내게 맞춰야 저 녀석도 잠재능력을 끌어내겠지, 실책이 나오든 안타를 맞든 신념은 굽히지 않았다.
‘시프트는 불필요하군.’
다니엘 보드킨 감독은 그런 에이스의 투구를 지켜보며 생각에 잠겼다.
주자가 1루에 있으니 시프트를 써서 병살을 유도하는 작전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다카기는 그런 게 없다.
벤치에서 작전 지시를 내려도 본인이 거부하는 편, 자신의 구위를 그만큼 믿는다는 건가. 오만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만한 성과를 냈으니 벤치 사인을 거부할 수 있는 거다.
“수비의 도움을 받을 정도라면 은퇴할 때가 됐다는 뜻이죠. 난 아직 은퇴할 마음이 없어요.”
다카기는 어느 날, 보드킨 감독 앞에서 대놓고 이런 말을 했다.
수비의 도움을 받는 것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지닌 선수, 당연히 실책이 나와도 화내는 법이 없다.
나 자신만을 믿기 때문에 가능한 일, 오만하지만 고고하고 냉정하며 강한, 말 그대로 완벽한 투수, 그게 다카기 하루요시였다.
“스윙!! 삼진입니다!! 빠른 볼!! 다카기가 오늘 첫 삼진을 잡아냅니다.”
“여기서 땅볼이 나오면 병살로 이닝을 마무리 할 수 있겠네요. 물론, 다카기의 자존심이 허락한다면 말이죠.”
피트 오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카기는 바깥쪽 빠른 볼로 파울을 유도했다.
컨택 자체를 거부하는 투구,
우리는 뭘 할 수 있을까. 유격수 주앙 고메즈와 2루수 제임스 올슨은 자신의 구역을 지킬 뿐, 움직이지 못했다.
[딱 ~ !!]
“아!! 여기서 2루수 옆을 빠져나가는군요. 1루 주자가 3루까지 진출하면서 2사 주자 1 - 3루가 됩니다.”
“글쎄요. 지금은 타자가 잘 치긴 했지만 이 정도는 올슨 선수가 처리해줘야 하지 않았을까요? 작년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도 멋진 수비로 다카기 선수의 퍼펙트 게임을 도왔는데, 지금은 조금 아쉽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올슨은 민망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2루수는 1루 베이스와 가깝기 때문에 급하게 포구할 이유가 없다. 가끔 병살을 의식해 조급하게 포구를 하는 선수가 있는데, 이러면 낮은 자세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낮게 깔리는 타구가 날아왔을 때 빠트리는 이유가 바로 이것, 하지만 다카기는 그러려니 하는 얼굴로 투구를 계속했다.
‘왜 이렇게 길게 느껴지지?’
다음 타자를 땅볼 처리한 다카기는 천천히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아직 1회고 투구 수가 그렇게 많았던 것도 아닌데, 갑자기 어깨가 무거워졌다고 해야 하나, 스프링 캠프에서 정밀 검사를 받았고 특별한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지금 내 어깨를 짓누르는 건 피로인가. 아니면 올해도 팀의 주축이 돼야 한다는 부담감인가, 늘 해왔던 일인데 오늘 따라 왜 이렇게 힘이 드는지, 하지만 입지가 입지라 힘든 기색도 내지 못했다.
딱 ~ !!
불길했던 예감은 적중했다.
다카기는 5회까지 5피안타 2실점을 내줬다. 그렇게 나쁜 투구는 아니지만 평소 활약과 비교하면 아쉬운 투구, 타선이 3점을 내주면서 승리투수 요건을 이어갔지만 더 던져봤자 의미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저 6회 도중에 내려올지도 모르니까 불펜 준비해 둬요.”
에이스의 선언에 더그아웃 분위기는 조용해졌다.
지금까지 다카기가 6회 이전에 내려온 적이 있었나, 적어도 최근 몇 년 동안 없었던 일, 다니엘 보드킨 감독은 농담이라고 생각했지만 다카기는 진심이었다.
6회 말 볼티모어의 공격, 다카기는 1사 주자 1루에서 더그아웃에 손짓을 줬다.
그만 던지겠다는 뜻, 설마 하는 생각에 불펜을 준비시켜놓긴 했지만 보드킨 감독은 마운드로 향했다.
“자네 혹시 어디 몸이 안 좋나?”
“오늘은 영 아닌 것 같네요. 일찍 빠져주는 게 낫겠어요.”
철벽의 에이스가 이런 약한 소리를 하다니, 마운드에 모여든 야수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결국 다카기는 6회도 채우지 못하고 마운드를 내려갔다.
매년 개막전에서 압도적인 투구를 했던 선수의 일탈, 경기가 끝난 후 기자들은 인터뷰를 요청했다.
몸에 뭔가 이상이라도 있는 걸까. 인터뷰고 뭐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다카기는 쓸데없는 논란을 피하기 위해 인터뷰에 응했다.
“오늘은 형편없는 투구를 했습니다. 그래서 일찍 빠져 준 것뿐입니다. 저는 오만하지만 남들에게 피해를 줄 성격도 아니죠, 충분한 답이 됐길 바랍니다.”
“개막전 연승 기록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기록 연장에 대한 욕심은 없었습니까?”
“시즌은 깁니다. 그런 사소한 기록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진 않습니다.”
개막전 9년 연속 등판은 메이저리그 역대 3위에 해당하는 기록,
개막전 8연승은 누구도 하지 못한 기록이다. 그런데 이게 사소한 기록이라니, 오만하지만 실적이 확실한 선수라 기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오늘 부진했지만 시즌이 끝나면 보란 듯이 엄청난 성적을 찍어내겠지, 논란을 정리한 다카기는 집으로 향하는 차에 올랐다.
“자기야, 오늘 힘들었지?”
“음 … 솔직히 조금 지쳤나?”
기자들 앞에선 강한 척했지만 아내 앞에서는 본심을 드러냈다.
딱히 아픈 곳도 없는데 유독 힘들었던 하루. 생각해보면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오로지 최고만 바라보고 달려왔다.
한 번쯤 쉬어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편할 텐데 몸은 그게 아니고, 내 본심은 뭘까.
한때 라이벌이었던 아내와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나 솔직히 자기하고 경쟁할 때 조금 피곤했어.”
“왜?”
“그전엔 누구하고 경쟁한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거든.”
키리코는 학창시절 내내 1등만 했다.
말도 별로 없고 조용한 성격이라 친구도 없었던 편, 그래서 은근 따돌림을 당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경쟁을 해야 할 사람은 나 자신뿐, 그런데 다카기를 만나면서 모든 게 변했다.
난 저 사람을 남자로서 좋아하는데 상대는 날 경쟁상대로 여기는 상황, 상대할 가치가 없어지면 저 아이가 날 외면하지 않을까.
그래서 기를 쓰고 더 공부에 열을 열렸다. 3년 동안 투닥 거리다보니 전우애라는 것이 생기면서 인연을 맺었지만, 그날의 조마조마했던 기억은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원래 남과 경쟁한다는 건 좀 피곤한 거잖아. 자기는 그동안 너무 열심히 싸웠어. 조금은 마음에 여유를 가지는 게 어때?”
“으음 ~ 그런가?”
다카기는 지나간 과거를 하나둘 되짚어갔다.
고시엔 우승 2회, 청소년 대표 팀 우승, 그리고 월드시리즈 우승 6회까지 참 많은 경쟁을 치러가며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 오른다는 건 누군가의 목표가 되고 도전을 받는다는 뜻,
그 과정을 치르다 보니 오만함과 자신감이라는 가면을 뒤집어쓴 거 아닐까. 가끔은 져도 웃을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할 텐데, 생각해보니 그런 기억이 별로 없다.
하지만 프로세계에서 패배는 곧 죽음을 뜻하는 법, 다카기는 야구선수로 활동하는 기간만큼은 오만한 왕이 돼야 했다.
“나 야구 선수 오래 못 할 것아.”
“왜?”
“권태기가 왔다고 해야 되나.”
다카기는 아내 앞에서 솔직한 마음을 털어놨다.
솔직히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했을 때만 해도 이렇게 빨리 최고의 자리에 오를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나보다 야구를 잘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라는 기대감과 설렘으로 시작한 커리어, 그런데 몇 년 동안 최고의 선수로 군림하다 보니 더는 이곳에 머물 느끼지 못했다.
‘아, 그거였구나.’
그제야 다카기는 자신의 본심을 알아챘다.
지금 나는 지친 게 아니라 달성할 목표가 없어서 힘이 나질 않는 거다.
애송이 시절에는 언제나 사람들의 불신과 여론의 시험을 받아야 했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지 않은가.
지난 8년 동안 화려한 커리어를 쌓았으니 팬들은 이제 다카기에게 거는 기대치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그리고 그걸 현실로 이뤄내는 선수, 하지만 다카기는 끊임없이 시험을 받고 여론의 의심을 받아야 힘이 나는 유형이다.
그런데 이제는 누구도 날 시험하지 않고 의심하지도 않는다, 이런 무대에서 내가 언제까지 의욕을 발휘할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2년 안에 정리해야겠다.”
“어? 그게 무슨 소리야?”
“은퇴한다고, 메이저리그는 정복했으니까 다른 길을 찾아봐야겠어.”
폭탄선언에 키리코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남편은 지금 농담을 하는 걸까, 하지만 다카기는 진심이라고 털어놨다.
“자기 2년 안에 은퇴해도 겨우 서른이야. 은퇴하고 뭐 할 건데?”
“젊으니까 할 것도 많지, 대학교에서 공부할까?”
메이저리그 진출과 학업을 두고 고민했던 학창시절, 실제로 일본의 명문 와세다 대학교의 스카우트도 받았다.
아직 젊은 나이, 그 시절의 출발선으로 돌아가는 것도 늦지 않았다.
아내와의 대화를 통해 겨우 깨달은 내 본심, 일단 에이전트 제임스 콜튼에게 2년 안에 은퇴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뭐라고요?!! 맙소사!!]
제임스 콜튼은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며 펄쩍 뛰었다.
보스턴과 맺은 13년 계약을 다 마쳐도 다카기는 겨우 33살이다.
계약이 완료 되도 4 ~ 5년 규모의 계약을 맺을 수 있는데, 은퇴라니, 이게 말이 되나. 거기다 기량이 떨어진 것도 아니라 이건 미친 짓이라며 말렸다.
[이 … 일단 진정하고 제 말 좀 들어보세요.]
“훗 ~ 진정해야 되는 건 당신 아닌가요?”
[아니, 이유가 뭡니까? 당신은 지금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위대한 선수라고요. 그만큼 상품성도 엄청나고요. 작년에 맺은 광고 계약이 몇 개인 줄 아십니까?]
“그래서 흥미를 잃었다는 겁니다. 더는 이룰 게 없어요.”
[아니 … 그럼 계약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직 보스턴과 4년 1억 6천만 달러 계약이 남아 있다고요.]
“당장 은퇴하는 건 아닙니다. 한 2년 정도만 더 뛰어 보고 … 그래도 아니다 싶으면 은퇴해야죠.”
일방 통보에 넋이 나간 제임스 콜튼은 이 소식을 수더랜드 단장에게 알렸다.
이제 개막전 한 경기 치렀을 뿐인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하지만 다카기는 보스턴의 입장을 나름 배려해 준 거다.
앞으로 2년 동안 에이스 노릇을 해 줄 테니, 그동안 내 대체자를 찾으면 될 거 아닌가. 부상이나 이런저런 이유로 갑자기 은퇴하는 선수들도 있는데 이 정도면 나름 상대를 배려해 준 거 아닌가.
당장 내년 시즌 은퇴한다는 것도 아니고, 그 사이 또 다른 경쟁자가 나타나거나 심경의 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일단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