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300화 (300/361)

300화. 정점에 선 남자 - (4)

“자!! 이제 경기는 9회 초에 접어듭니다!! 브라민 파크 역사 상 첫 퍼펙트게임!! 그 역사가 지금 눈앞에 있습니다!!”

“다카기는 긴장할 선수는 아닙니다. 그래도 좀 신중했으면 좋겠네요.”

“이런 때일수록 대담하게 나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평소처럼 던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분위기에 취해 페이스가 흔들리면 안 된다는 뜻으로 말씀드린 겁니다.”

대기록을 앞두고 보스턴 지역 중계석은 사소한 기 싸움이 오갔다.

퍼펙트게임을 앞둔 경기, 투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방에서 쏟아지는 박수갈채, 그 분위기를 타서 초구 스트라이크를 박아 넣어야 하나.

대기록의 희생양이 되는 건 모두가 사양하는 일, 웃기지만 토론토 입장에선 안타 하나만 쳐도 체면치레가 되는 상황이다.

이렇게 되면 부담이 되는 쪽은 오히려 다카기, 모두의 예상과 달리 초구부터 몸 쪽 빠른 볼이 들어갔다.

깜짝 놀란 타석의 윌리엄 머레이는 몸을 뒤로 젖히며 피했고, 보스턴 팬들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여기까지 이어온 대기록을 몸에 맞는 볼로 망치면 얼마나 허무한가, 반면 포르투나 포수는 차분하게 다음 사인을 냈다.

“몸 쪽은 던지지 말라고 내가 피하지 않았다면 기록은 깨졌을 거야.”

“피해달라는 말 안 했거든?”

머레이가 도발을 했지만 포르투나는 침착하게 맞받아쳤다.

깜짝 놀래서 피해놓고 이제 와서 이런 말 하면 멋있나. 몸 쪽 한 번 더 던져줄 테니 맞고 싶으면 맞으라며 맞받아쳤다.

“맞아 봐, 좀 따끔한 정도로 끝나진 않겠지만”

프로투나는 계속해서 머레이를 도발, 이러다 진짜 몸 쪽으로 오면 어쩌나, 머레이는 입을 다물고 다음 공에 집중했다.

“스트라이크!!”

2구도 예고대로 몸 쪽, 윌리엄 머레이는 생각을 정리했다.

설마 3구도 몸 쪽? 다카기는 좌우를 찌르는 제구로 타자의 타이밍을 뺏어내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렇다면 몸 쪽을 던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바깥쪽으로 가겠지, 평소 자주 하지 않는 밀어치기를 시도했다.

딱 ~ !

“밀린 타구!! 투수가 잡아 1루로 송구합니다!! 원 아웃!! 선두타자 머레이를 잡아냅니다!!”

“결국 마지막까지 몸 쪽 빠른 볼이었네요. 대담함이 보통이 아닙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초구가 볼 판정을 받을 때만 해도 모두가 다음 공은 바깥쪽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몸 쪽을 던질 수 있는 저 호쾌함, 같은 남자지만 정말 매력적입니다.”

다카기는 다음 타자도 유격수 땅볼로 처리했다.

7번 타자부터 시작된 이번 이닝, 하위 타순이라 그렇게 부담될 것도 없지만 퍼펙트게임이 걸린 상황 아닌가.

그런 것과 관계없이 자신만의 페이스를 유지한다는 건 실력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다는 거겠지, 그 뒷모습을 지켜보면 경건한 마음마저 들었다.

“와아아 ~ !!!!”

이제 남은 아웃카운트는 하나, 8회부터 자리에서 일어나 있던 보스턴 팬들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야구는 느긋하게 볼 수 있는 스포츠,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맥주 한 잔에 집중해도 그라운드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루즈함 때문에 야구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런 여유를 즐기는 것도 삶의 일부, 사람들은 전에 봤던 영화를 왜 또 보는가.

내용을 알고 있기에 한눈판 사이 콜라도 한 잔 마시고 잠깐 화장실 다녀오고 그런 거 아닌가. 내용을 모르는 영화를 보고 있다면 그런 여유는 부릴 수 없을 거다.

야구는 누구나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스포츠, 하지만 지금 팬들은 오로지 다카기의 대기록에 집중하고 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보러 온 게임인데 이런 반전이 숨어 있었다니, 정말 내 눈 앞에서 퍼펙트게임이 이뤄지는 건가.

다소곳이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는 팬이 중계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스윙!! 기선을 제압합니다!!”

“누가 제 손 좀 잡아주십쇼. 떨려서 못 보겠네요.”

“제 손도 흠뻑 젖었습니다. 이거라도 괜찮다면 잡아드리겠습니다.”

해설위원 피트 오어와 존 올러우는 손을 맞잡았다.

가끔 티격태격하는 경우도 있지만 지금만큼은 동맹관계, 2구도 헛스윙이 되자 서로의 손을 으스러질 정도로 움켜쥐었다.

이제 퍼펙트게임까지 필요한 카운트는 한 개뿐, 사방에서 MVP를 연호하는 환호성이 쏟아졌지만 다카기는 표정 없는 얼굴로 포수 사인에 고개를 끄덕였다.

“You made it done!!”

= 네가 해냈어!!

마지막 공을 잡아낸 포르투나는 바로 마운드로 달려 나갔다.

순식간에 보스턴 선수들로 둘러싸인 마운드,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몇몇 팬들도 그라운드 난입을 시도했다. 경비원이 곳곳에 있었지만 막을 수 없는 분위기, 수더랜드 단장도 특별석에서 경의의 뜻이 담긴 박수를 보냈다.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하고 자칫 흔들릴 수 있었던 팬심을 이렇게 다잡아 주다니, 고맙고도 미안한 마음이었다.

이렇게 다카기의 8년 차 메이저리그 시즌은 16승 3패, 평균자책점 1.95, 226이닝 소화, 볼넷 31개, 탈삼진 306개로 막을 내렸다.

다승은 리그 전체 5위에 그쳤지만 나머지 클래식 지표는 압도적인 1위, 세부 통계를 봐도 억 소리가 절로 나왔다.

fWAR 9.1에 bWAR는 9.4, 야수에게 들이대도 대단한 지표를 선발 투수가 찍어내다니, 오늘 경기로 통산 WAR도 72를 돌파했다.

2년 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LA 전설 울프 비더만의 통산 WAR가 72, 비더만은 39세까지 현역으로 뛴 선수다.

17년 동안 연평균 WAR 4가 넘는 활약을 펼친 대투수도 마지막 시즌에 WAR 70을 돌파했는데, 서른 살도 안 된 선수가 그 경계를 넘었으니, 이 정도면 다카기가 어떤 투수인지 짐작이 되지 않나.

말 그대로 압도적, 경기가 끝난 후 다카기는 기자들의 축하 인사에 둘러싸였다.

“통산 2번째 퍼펙트게임 달성 축하드립니다.”

“예, 감사합니다.”

“혹시 이 자리에서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면 퍼펙트게임 달성에 가장 큰 도움을 준 선수가 누구인지 말씀해 주시죠.”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죠. 저는 공을 던졌고, 포수는 그걸 받아냈고, 야수진은 타구를 막아낸 것뿐입니다.”

기자들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선 영광을 동료에게 돌리곤 하는데, 그런 게 전혀 없는 오만한 왕, 하지만 각자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말도 일리는 있었다.

“퍼펙트게임이 걸린 경기라고 특별히 더 집중해야 합니까? 야수라면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타구에 늘 긴장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팀 야수들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죠. 제가 칭찬을 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하 ~ 알겠습니다.”

끝내 칭찬은 하지 않은 왕, 이때 다른 기자가 화제를 돌렸다.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2번이나 퍼펙트게임을 달성한 선수는 당신뿐입니다. 누구도 오르지 못한 영역에 발을 들이셨는데, 지금 기분은 어떠십니까?”

“아무도 없는 영역에 발을 들였으니 그곳은 이제 땅이죠. 앞으로 누구도 침범하지 못할 겁니다.”

다카기는 저주 아닌 저주를 퍼부었다.

어떤 놈이 퍼펙트게임 2회 달성이라는 대기록을 수립하겠나. 적어도 나만큼 미친놈이어야 가능한 일, 누가 그 영역에 발을 들이는지 두고 보겠다며 큰소리를 쳤다.

왕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역시 폭군은 폭군, 다른 기자가 그 심기를 슬쩍 건드렸다.

“당신은 지난 8년 동안 메이저리그 최정상에 군림했습니다. 언제 그 자리에서 미끄러질 생각이십니까?”

“그런 치졸한 생각은 하지 마세요.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게 못마땅하다면 실력으로 끌어내리란 말입니다.”

“치졸하다고요?”

“절 실력으로 이길 자신이 없으니까 알아서 미끄러지길 바라는 거 아닙니까? 전 피하지도 도망치지도 않을 테니 불만이 있으면 언제든 덤비라 이겁니다. 물론 당신은 그럴 자격이 없지만 말이죠.”

메이저리거도 아닌 기자가 무슨 자격으로 내게 도전을 하겠나.

괜히 한소리 했다가 한 방 먹은 기자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왕에겐 재위 기간이라는 것이 있죠. 저도 그건 알고 있습니다.”

이때 다카기가 돌연 입장을 바꿨다.

왕위에서 내려오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반란을 일으킨 놈들의 손에 강제로 내려올 수도 있고, 그게 아니면 나이가 들어 스스로 은퇴할 수도 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는 법, 언젠가는 내려와야 하지 않겠나. 그래도 나이가 들어 은퇴하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마지막까지 절 이 자리에서 끌어내릴 선수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도 좀 섭섭한 일이네요. 저는 화려한 걸 좋아하는 편이라 심심한 퇴장은 싫습니다. 누가 절 밟고 올라갈지 모르겠지만 그것만큼 극적인 연출도 없겠죠. 저는 언제나 이 자리에서 도전을 받아들일 겁니다. 날 뛰어넘어 봐라, 햇병아리들아”

다카기는 마지막에 도전자들을 자극하는 멘트를 날렸다.

매년 20만 명이 넘는 야구 꿈나무가 쏟아지는 미국, 다카기는 이곳에서 8년을 보냈으니 내 목을 노릴 유망주는 수도 없이 태어났을 거다.

그 많은 선수들이 있는데 날 끌어내릴 괘씸한 반역자가 한 명도 없다는 건가. 올 시즌 뉴욕의 앤드류 브루스터가 살짝 까불어봤지만 결국 실력 차만 확인했다.

최강에 올라서면 더욱 강한 상대를 갈망할 뿐, 다카기는 내년을 기약하며 팬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이제는 휴식을 취할 시간, 그런데 일본에서 취재 요청이 날아들었다.

세상의 정점에 올라선 남자는 평소 어떤 일상을 보내고 있을까, 다카기는 이제 일본의 자랑거리, 팬들은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보였다.

“뭐 볼 게 있다고 취재를 하려고 하십니까?”

[그래도 좀 …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꿇으라면 꿇겠습니다.]

담당 PD는 왕 앞에서 절이라도 하겠다며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하지만 집은 나만의 시간이 보장된 공간, 그 성스러운 영역에 타인의 발자국을 허용하고 싶진 않았다.

“허락해줘.”

“왜?”

“자기 밟고 올라갈 사람이 아들일지 누가 알아?”

이때 키리코가 흠칫한 말을 했다.

남편은 자신의 목을 노릴 사람은 타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게 훗날 장성할 아들이 될지 누가 아는가.

실제로 장남 타다요시는 올해부터 정식으로 야구를 배우기 시작했다. 훗날 부자 맞대결이 성사될지 누가 아나.

아들 사랑이 각별한 키리코는 이번 기회에 아들의 존재감을 어필하고 싶었다.

내키진 않았지만 다카기는 손님들을 집으로 초대, 입이 떡 벌어지는 왕궁 앞에 손님들은 할 말을 잃었다.

“안녕하세요 ~ ”

“안녕하세요 ~ 반갑습니다 ~ ”

담당 PD는 마중을 나온 타다요시에게 넙죽 고개를 숙였다.

남의 아들이지만 어쩜 이렇게 잘생겼을까, 올해 8살밖에 안 됐는데 벌서 이렇게 이목구비가 뚜렷하다니, 카메라맨도 타다요시를 집중 조명했다.

“이봐, 너무 클로즈업 한 거 아냐?”

“저도 가끔은 잘생기고 예쁜 사람 찍고 싶다고요.”

솔직한 말에 웃음바다가 된 촬영현장, 리포터에게 붙잡힌 타다요시는 질문세례에 시달렸다.

“올해부터 야구 배운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네”

“그럼 조금 있다 보여줄 수 있나요?”

“아니요. 아직 실력이 형편없어서 보여드릴 수가 없어요.”

타다요시는 정중히 거절의사를 표했다.

사실 며칠 전 아빠에게 도전장을 던졌는데 무참하게 박살이 났다.

나는 전력을 다해 던졌는데 그걸 너무도 쉽게 받아쳐 버린 아빠, 야구부 내에서는 내가 제일 잘했는데 진짜 강적 앞에서 어정쩡한 실력은 통하지 않았다.

“아빠가 안 봐주나요?”

“절대로 안 봐줘요. 버릇 나빠지거든요.”

이때 다카기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귀엽다고 봐주는 게 아들을 위하는 길일까. 철저하게 밟아 놔야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더욱 노력하겠지, 본인도 그걸 알고 있는지 타다요시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래도 언젠가는 제가 이길 거예요.”

“까불지 마라.”

“아빠도 언젠가는 나이 드실 거 아니에요? 그때 제가 이기면 되죠.”

괘씸한 발언에 주위는 폭소 만발, 하지만 다카기는 그런 치졸한 생각은 버리라며 아들을 몰아세웠다.

“늙은 아빠 이겨서 좋겠다 이 녀석아, 아빠가 강할 때 이길 생각을 해야지.”

“알았어요. 조만간 그렇게 할게요.”

아빠의 구박을 받아친 타다요시는 다시 PD의 질문에 집중했다.

지금 나는 호랑이 새끼를 키우고 있는 건가. 다카기는 건방진 아들의 뒷모습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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