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화. 정점에 선 남자 - (3)
“깜빡한 거 없어?”
“아 … ”
시즌 마지막 등판을 앞둔 다카기는 현관문을 나서다 아내의 목소리에 발목이 잡혔다.
애들도 이제 어느 정도 컸지만 그럼 뭐 어떤가. 엄마 아빠가 사이가 좋은 걸 보여주면 애들에게도 좋겠지, 거침없이 애정을 표했다.
그리고 이제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녀석들, 둘째 나가요시는 입을 쭉 내밀며 눈웃음을 지었다.
“왜? 너도 해줘?”
“아니요.”
“이리 와 봐. 아빠가 정열적으로 한 번 해줄게”
엄마 뒤로 숨어버리는 녀석, 같은 남자라고 역시 그건 싫은 건가. 가족들과 아침 인사를 나눈 다카기는 주차장에 세워둔 차에 올랐다.
“엄마”
“으응 ~ 왜에?”
남편과 아침인사를 나눈 키리코는 목소리를 한 톤 높였다. 남편의 애정 표현은 하루를 살아가는 활력소, 아들에게 정곡을 찔렸다.
“아빠하고 그거 하면 좋아요?”
“그럼 ~ 좋아하는 사람하고 하는데 당연히 좋지.”
“그럼 그거 저하고 해도 기분 좋아져요?”
키리코는 아들을 향해 눈웃음을 지었다. 그건 당연한 일, 이 엄마가 한 번 해주길 바라는 건가. 하지만 그것보다는 아들이 먼저 다가와 주길 바랐다. 남자란 애교가 있어야 하는 법, 은근슬쩍 스킨십을 유도했다.
“엄마한테 하고 싶으면 해도 돼”
“으음 ~ 나중에 좋아하는 애 생기면 할래요.”
제대로 당한 키리코는 멀어지는 둘째를 향해 레이저 빔을 쐈다.
학창 시절, 몇 번을 찍어도 안 넘어가던 남편을 상대하는 기분, 역시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는 건가.
입을 내밀었는데 맞장구를 쳐줄 사람이 없어 조금 무안해졌다.
“아가 ~ 우리는 뭉쳐야 된다. 남자만 셋이라 우리가 불리해.”
“뀨웅 ~ ”
키리코는 아직 젖도 못 뗀 딸을 대신 품에 안았다. 사내자식들은 나중에 크면 다 무뚝뚝해지겠지, 그나마 믿을 수 있는 건 귀여운 막내딸, 무슨 일이 있어도 뭉치자며 동맹관계를 유지했다.
“왔냐?”
“응”
한편, 평화로운 가정을 뒤로한 다카기는 클럽하우스에 발을 들였다.
집에서나 애교를 부리지 여기서는 위엄 넘치는 에이스일 뿐, 동료들이 먼저 인사를 해도 무뚝뚝한 얼굴로 손만 들어줬다.
함부로 장난도 걸 수 없는 귀하신 몸, 다카기에게 장난을 걸었다가 동료들에게 난도질을 당한 제임스 올슨도 저 멀리서 다가오는 왕에게 길을 열어줬다.
“너 또 무슨 죄지었냐?”
“아니”
올슨은 절대 그런 일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도박 사건에 휘말려 악동 이미지에 미운털까지 단단히 박혔는데, 이 사람한테마저 찍히면 끝장이다.
올슨은 다른 선수들 눈치는 안 보지만 다카기는 무서워하는 편, 그 속마음을 알고 있는 다카기는 슬쩍 분위기를 풀어줬다.
“나 오늘 안타 많이 맞을 거니까, 열심히 움직여라.”
올슨은 그럴 리가 없다며 코웃음을 쳤다.
다카기는 올 시즌 9이닝 당 피안타가 5.8개에 불과하다. 이런 선수가 안타 많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해봤자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오늘 열심히 하라는 뜻이야 인마, 척하면 알아들어야 될 거 아냐.”
“난 머리가 안 좋아서 그런 거 잘 몰라.”
마음에도 없는 말이나 하는 녀석, 올슨의 어깨를 한 번 툭 건드린 다카기는 불펜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 다카기 하루요시가 시즌 32번째 선발등판을 치릅니다. 올 시즌 31경기 등판, 15승 3패 평균자책점 2.03, 217이닝 동안 볼넷 30개, 탈삼진은 293개를 기록했습니다.”
“제가 이 선수가 얼마나 위대한 투수인지 기록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1990년 이후 조정평균자책점 200을 넘긴 투수가 16명이 있는데요. 200이 넘는 시즌을 2번 치른 선수는 단 2명입니다.”
조정평균자책점 200을 2번 찍은 선수는 다카기와 애틀랜타의 전설 데일 맥앨리스터,
맥앨리스터는 1991년에 조정평균자책점 261, 1992년에 257을 찍으며 2년 연속 만테냐 어워드를 수상했다.
이것만 해도 대단한데, 다카기 선수는 지난 8년 동안 모두 조정평균자책점 200을 넘겼다. 차원이 다른 투구, 올 시즌도 평균조정자책점 286이라는 정신 나간 수치를 찍고 있다.
100만 찍어도 평균은 해주는 건데, 다카기는 2.8배 이상의 투구를 해주고 있다는 것, 연봉 4000만 달러가 아깝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 건 당연했다.
‘또 삼진당하면 꼴사나운데’
1회 초 토론토의 공격으로 시작되는 경기, 타석에 들어선 잭 울름버그는 다카기와 눈빛을 주고받았다.
울름버그는 2년 전 데뷔한 선수, 나이는 28살로 적지 않다.
늦게 시작한 커리어지만 올 시즌 타율 0.264, 홈런 27개를 때리며 메이저리그에 정착, 하지만 다카기를 상대로는 6타수 1안타 삼진 3개를 당하는 약세를 보였다.
빠른 볼은 어떻게든 따라가겠는데, 변화구는 답이 없는 수준, 일단 빠른 볼에 초점을 맞췄다.
‘방금 한 말 취소.’
초구를 지켜본 울름버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억을 되돌려 보면 빠른 볼은 어떻게든 따라간 것 같은데, 바깥쪽으로 꽉 차는 궤적에 얼어붙었다.
딱 ~ !
“이번에는 파울입니다. 카운트는 노 볼 투 스트라이크”
“울름버그가 올 시즌 삼진 128개를 당하는 동안 볼넷도 87개를 얻어냈거든요. 여기서 배터리가 어떻게 승부를 할 지 지켜보시죠.”
슬라이더를 던질 타이밍, 포르투나 포수의 사인을 확인한 다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 잘났다. 언빌리버블’
헛스윙을 돌린 울름버그는 다카기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빠른 공과 도무지 구분이 안 가는 슬라이더, 그렇다고 그냥 돌아서면 꼴사납지 않은가. 남자답게 패배를 시인하고 들어갔다.
‘왜 저래?’
물론 다카기는 콧방귀를 뀌었다.
삼진 당한 녀석이 엄지손가락 세우면 멋있다고 칭찬해주나? 저런 게 바로 허세, 눈길도 주지 않았다.
“야, 너희들은 꼴사납게 저러지 마라. 삼진을 당했으면 차라리 화를 내라고, 허세 부리지 말고”
이닝을 마치고 돌아온 다카기는 동료들 앞에서 속마음을 털어냈다.
별로 재미도 없는 농담인데 필요 이상으로 웃어주는 녀석들, 대기 타석으로 향하던 주앙 고메즈도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홈런 치고 허세부리는 건 괜찮지?”
“할 수 있으면 해보던가.”
어제 오랜만에 홈런 하나 쳤다고 기세등등한 녀석, 그런데 고메즈는 진짜 그 짓을 해버렸다.
[따아악 ~ !!]
“좌측으로 멀어지는 포물선!! 그대로 담장 위를 넘어갑니다!! 주앙 고메즈의 솔로 홈런!! 어제에 이어 오늘도 홈런을 추가합니다!! 시즌 11호!! 보스턴에 선취점을 안겨줍니다!!”
“지금은 몸쪽 낮은 빠른 볼이었는데, 몸이 홈 플레이트 쪽으로 기울어 질 정도로 밸런스가 무너졌거든요. 그런데도 홈런이 나왔습니다.”
근본도 없는 스윙으로 만든 홈런, 그만큼 운동 신경이 뛰어나다는 뜻 아니겠나.
인정하긴 싫었지만 다카기는 허세를 부리는 고메즈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나도 하나 때리고 와야지.’
다음 타자 제임스 올슨은 천천히 타석에 들어섰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느냐만, 다카기에게 인정받는 건 홈런 치는 것보다 더 어렵다.
아무리 좋은 플레이를 해도 메이저리거로서 그 정도는 당연히 해야 하는 거라며 튕겨버리는데, 고메즈가 받은 칭찬 나도 한 번 받아보자며 의욕을 불태웠다.
따아악 ~ !!
“우와아아 ~ !!”
2타자 연속 큼지막한 포물선, 홈런을 치고 들어온 올슨은 다카기 앞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너 지금 뭐 하냐?”
“왜 그래? 나도 홈런 때렸잖아. 왜 잘했다고 안 해줘?”
“그건 당연히 쳐야 하는 거야, 잘난 척할 일도 아니잖아?”
주앙 고메즈는 밸런스가 무너진 상태에서도 몸 쪽 낮은 공을 들어 올리는 묘기를 선보였다.
하지만 올슨이 때린 홈런은 명백한 실투, 당연히 쳐야할 공을 쳤는데 내가 왜 칭찬을 해줘야 되나, 저리 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럼 나한테 기대하는 거 없어?”
“아침에 말했잖아. 오늘 안타 많이 맞을 거니까 열심히 움직여”
올슨은 피식 웃으며 저쪽으로 멀어졌다.
정말 안타를 맞긴 맞는 건가. 일단 반만 믿고 그라운드로 향했다.
경기는 돌고 돌아 4회 초 토론토의 공격, 잭 올름버그가 타석에 들어섰다. 아직 한 명도 1루를 밟지 못한 토론토 타선, 앞선 타석에서 허세를 부린 올름버그는 이번에는 다를 거란 눈빛을 드러냈다.
따악 ~ !!
밀어 친 타구, 제임스 올슨은 옆으로 펄쩍 날아올라 타구를 낚아챘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반사 신경, 그제야 다카기는 수줍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3년 동안 함께하면서 처음으로 받은 칭찬, 올슨은 캡을 깊게 눌러쓰며 흰 이빨을 드러냈다.
“스윙!! 삼진입니다!! 오늘 경기 7번째 삼진!! 통산 4번째 300탈삼진 시즌을 만들어 냅니다!!”
“메이저리그 역대 23번째 기록이죠. 그 중 4번이 다카기 손을 거쳐 갑니다.”
“아직 30살도 되지 않은 선수인데, 본인 손으로 역사를 다시 쓰고 있어요. 오늘따라 마운드가 높아 보이는 건 제 착각입니까?”
“이 선수가 워낙 거대한 존재니까 그렇게 보이는 거죠. 마운드 높이는 일정합니다.”
계속되는 호투 행진, 토론토 타선은 5회까지 한 명도 1루를 밟지 못했다.
토론토는 올 시즌 뉴욕과 함께 아메리칸 리그 최강 타선을 구축한 팀, 홈런도 265개나 때렸다.
긴 암흑기를 끝내고 포스트 시즌을 확정 지었는데, 이 정도 전력을 갖춰도 다카기를 못 잡는 건가.
그나마 다행인 건 포스트 시즌에서 만날 일이 없다는 것, 솔직히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더그아웃으로 납치하고 싶었다.
포스트 시즌에서 무패 전설을 이어가고 있는 투수, 함께한다면 우승은 당연한 거 아닌가.
수더랜드 단장이 버려주면 좋겠는데 그랬다간 보스턴 일대가 폭동에 휩싸이겠지, 현실을 인정했다.
“아 ~ 진짜 너무 한 거 아냐?!!”
잭 올름버그는 3번째 타석에서도 강한 타구를 날렸지만 투수 정면으로 가 버렸다.
우리가 지금까지 헌납한 삼진이 9개인데 저 자식은 안타 하나 주기 싫다는 건가. 올름버그는 더그아웃으로 향하는 다카기에게 너무한 거 아니냐며 짖어댔다.
“좀 인간적으로 살라고!! 그러는 거 아니야!!”
다카기는 말없이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했다.
누가 삼진 당해달라고 했나? 삼진은 자기들이 당해놓고 내게 헌납한 것처럼 구는데, 분명히 말하지만 다카기는 삼진을 강탈한 거다.
앞으로도 더 강탈할 생각, 시즌 마지막 경기라 모든 힘을 쏟아냈다.
[따악 ~ !!]
“2루수가 일단 막고!! 1루에 송구합니다!! 제임스 올슨의 좋은 수비!! 안타 하나를 막아냅니다!!”
“오늘은 제발 달성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는데 마지막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판이 뒤집혔거든요. 오늘은 수비수들의 도움도 따라주고 있습니다.”
경기는 어느덧 8회 초, 다카기는 2사까지 안타 하나 내주지 않았다.
오늘은 운도 따르는 편, 통산 2번째 퍼펙트게임을 위해 직행했다.
‘나도 이 분위기에 올라타야지.’
주심을 보고 있는 잭 마일스는 주변 분위기를 살폈다.
튀겠다고 눈치 없이 소신을 지키는 심판들이 있는데, 원래 미국은 영웅 만들기를 좋아한다.
4만 8천 관중이 한목소리로 퍼펙트게임을 연호하고 있는데 내가 찬물을 끼얹으면 되겠나. 무대 위의 지휘자가 된 것처럼 격하게 루킹 삼진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