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298화 (298/361)

298화. 정점에 선 남자 - (2)

[올해는 피난을 가야 할 듯]

이제 막바지에 접어든 시즌, 보스턴 여론은 백기를 들어 올렸다.

다카기는 올해도 에이스로서 든든한 모습을 보여줬다.

시즌 성적은 31경기 등판 15승 3패 평균자책점 2.03, 217이닝 동안 볼넷 30개, 탈삼진 293개를 기록했다.

문제는 외로운 에이스였다는 것,

다카기 다음으로 많은 이닝을 소화한 댈러스 레이븐은 올 시즌 부상과 부진에 시달리며 130이닝밖에 던지지 못했다. 평균자책점은 무려 4.87, 2선발이 이 지경인데 다른 투수들은 어떻겠나.

작년 월드시리즈에서 부활한 로버트 클레이튼은 평균자책점 6.13이라는 처참한 성적을 찍고 선발에서 밀려났고, 나머지 선발 투수의 평균자책점 역시 평균 5.05에 그쳤다.

그렇다고 부진의 책임을 투수에게만 뒤집어씌울 순 없었다.

타선 역시 AL 15개 팀 중 타율 10위, 총 득점 8위에 그치며 투수진을 받쳐주질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런 형편없는 경기를 하고도 5할 승률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다는 것, 작년 월드시리즈 우승팀이 이렇게 무너질 수 있는 건가. 한 기자는 보스턴을 무너진 왕조에 빗대며 피난이라도 가야 하는 거 아니냐는 자조 섞인 기사를 내놨다.

“피난은 안 간다. 나라를 버리고 도망친 왕처럼 꼴사나운 것도 없다.”

이 와중에도 다카기는 내부단속에 나섰다.

보스턴은 올 시즌 형편없는 경기를 했지만 그렇다고 도망치진 않았다. 다만 결과가 좋지 않았을 뿐, 왕조가 무너졌으니 이제 내 살길 찾겠다고 도망치고 외면하면 그만인가?

매국노 같은 짓거리, 다카기는 올 시즌 마지막 시리즈를 앞두고 보스턴 일대에 계엄령을 내렸다.

“우리는 도망치지 않을 겁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싸울 테니, 팬 여러분들도 동요하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평소처럼 야구장에 나와 응원을 해달라는 뜻, 보통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하면 시즌 티켓 매출도 감소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오히려 평소보다 늘어난 매출,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수더랜드 단장은 그 공을 다카기에게 돌렸다.

왕이 괜히 왕이겠나, 잊을 만하면 흔들리는 팀을 잡아준 선수, 올 시즌은 브라이스 전 감독의 섹스 스캔들이 터지면서 시작부터 불안했다.

그래도 꿋꿋이 버텨준 에이스가 있었기에 팀 기강은 그럭저럭 잡힌 편, 여기에 동요하는 팬들도 붙잡아 줬으니 구단을 운영하는 입장에선 이보다 든든한 선수도 없었다.

[We must never run away]

= 우리는 도망치지 않는다.

시즌 최종전을 두고 보스턴 구단은 이런 슬로건을 내걸었다.

올해는 패배한 시즌이지만 그렇다고 도망치진 않겠다는 뜻, 이렇게 멋있는 말까지 했는데 최종전에서 패배하면 꼴이 좀 그렇지 않겠나.

포스트 시즌 진출에 좌절해 있던 선수단은 늘어진 긴장감을 바짝 끌어올렸다.

‘이번 시즌 끝나면 연봉협상 자격 얻는다. 정신 차리자.’

동기를 부여하는 방법도 가지각색, 주앙 고메즈는 올해 3년 차 시즌을 맞이했다.

연봉조정 신청 자격을 얻는 것, 올 시즌 고메즈는 타석에서 타율 0.248에 그치며 wRC+ 81를 기록했다.

리그 평균 공격력(wRC+ 100)도 내지 못했다는 뜻, 그래도 수비 부담이 많은 유격수에서 이 정도 수치를 찍은 건 훌륭한 거다.

고메즈의 진짜 가치는 수비, 마이너스 방망이를 수비로 채워가며 지금까지 bWAR 2.8을 기록하고 있다.

유격수라는 직책에 걸맞은 활약은 했다는 뜻, 잘 하면 연봉협상을 피해 장기계약도 맺을 수 있지 않을까? 고메즈는 마지막 벼락치기에 나섰다.

“자, 올 시즌 보스턴의 마지막 시리즈를 감상하시죠. 토론토의 선공으로 경기가 시작됩니다.”

“정말 올해는 포스트시즌을 보지 못하는 겁니까? 믿을 수가 없네요.”

지역 해설위원 피트 오어는 마이크에 풀이 죽은 목소리를 흘렸다.

보스턴이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하다니, 메인 요리를 뺀 식사를 하는 기분이랄까.

중계석에서 보스턴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9번이나 지켜본 입장에서 이런 전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런 넋두리는 최후의 결전에 임하는 선수들에게 실례가 되겠지, 마음을 다잡고 해설을 이어갔다.

‘놓치지 않는다.’

첫 타자부터 유격수 방면 깊숙한 타구, 고메즈는 베어핸드 캐치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대포알 송구를 선보였다.

일반적인 유격수는 베어핸드 캐치를 하면 송구까지 평균 0.73초가 걸리는데, 고메즈는 0.55초밖에 안 걸린다.

글러브에서 공을 빼는 기술이 그만큼 좋다는 것, 다만 송구가 약간 부정확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이제 많이 개선됐다.

‘역시 내가 등판 안 하는 날은 잘하네.’

다카기는 더그아웃에서 소소한 박수를 보냈다.

사람을 가리는 플레이라 조금 씁쓸하지만 어쨌든 선수들이 집중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건 좋은 신호, 고메즈의 호수비가 나오면서 보스턴은 실점 없이 1회를 넘겼다.

“자, 이제 보스턴의 1회 말 공격으로 이어집니다. 선두 타자는 주앙 고메즈, 올 시즌 타율 0.248, 홈런 10개, 43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올 시즌은 정확도가 너무 떨어졌어요. 삼진도 117개를 당했고 … 오프 시즌 동안 타격을 한 번 손봐야 할 것 같습니다.”

[따악 ~ !!]

“여기서 초구를 때려냅니다!! 좌측으로 낮게 날아가는 타구가!! 담장을 넘어가는군요!!!! 고메즈가 시즌 11호 홈런을 기록합니다!! 팀에 선취점을 안겨주는군요!!”

“그래도 칭찬은 하지 않겠습니다. 망친 요리에 설탕 뿌린다고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독설가답게 피트 오어는 고메즈를 냉정히 평가했다.

시즌은 길게 봐야 하는 법, 여기서 홈런 하나 쳤다고 2할 4푼짜리가 3할 타자되나. 기대가 컸기에 실망도 컸던 올 시즌 활약, 그러건 말건 애송이는 실실 웃으며 더그아웃을 휘젓고 다녔다.

“봤지?!! 나 홈런 쳤다고!!”

“그래, 참 좋겠다.”

“표정이 왜 그래?”

“아니야, 너 참 좋겠다고, 축하한다.”

다카기는 고메즈의 하이파이브의 요청에 영혼 없는 미소를 지었다.

포스트시즌은 물 건너갔고, 지금 보스턴은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는 투쟁을 하는 중이다.

그런데 홈런 하나 쳤다고 방방 뛰는 녀석, 풀이 죽은 것보다 낫지만 과도한 세리머니를 할 이유도 없었다.

‘Always one step behind’

= 뒷북만 치고 있군.

다음 타자 제임스 올슨도 안타를 때렸지만 표정은 좋지 않았다.

동료들에게 왕따를 당하는 건 그러려니 하는데, 성적이 받쳐주질 않는 건 용납하기 어려운 일,

올 시즌 올슨은 타율 0.269, 12홈런에 그치고 있다.

2루수가 이 정도면 훌륭한 성적이지만 2할 후반대 타율에 20홈런을 넘긴 작년 시즌과 비교하면 형편없는 성적, 고메즈와 마찬가지로 연봉 협상 자격을 앞둔 몸이라 막판 스퍼트가 필요하다.

안타 하나 쳤다고 구겨진 자존심이 회복되겠나,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올슨은 올 시즌 활약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반성합니다.”

다음 타자 알 디즌도 마음속으로 고해성사를 했다.

올 시즌 성적은 타율 0.273, 홈런 24개, 90타점, 이 정도면 준수한 성적이지만 시즌 막판에 페이스가 수직 낙하했다(타율 0.292 -> 0.273).

시즌 막판에 부진에 빠지는 이 못된 버릇은 언제쯤 고쳐질까.

월드시리즈 우승에 묻혔지만 알 디즌은 작년 포스트 시즌에서 이렇다 할 활약을 하지 못했다.

팀은 왜 내게 2억이 넘는 돈을 투자했을까. 눈에 보이는 스탯 놀이나 하라고 준 돈은 분명 아니다.

그래도 보스턴에서 다카기에 이은 넘버 2로 군림하고 있는데, 다른 선수들을 끌어주지는 못할망정 밥값도 못하고 있으니 이래저래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도 도망치면 안 된다.’

밀리고 밀려 여기까지 왔으니 최후의 농성전에 임할 뿐, 왕이 피난 대신 결사항전을 선언한 이상 도망칠 곳은 없었다.

따악 ~ !!

“이번에는 라인 안쪽에 떨어집니다!! 외야 깊숙한 곳으로 굴러가는 타구!! 1루 주자 올슨은 2루를 돌아 3루!! 3루를 지나 홈까지 내달립니다!! 추가 득점!! 보스턴이 2대 0으로 앞서나갑니다!! 3타자 연속 안타!! 오늘은 뭔가 분위기가 다르군요.”

“너무 늦었습니다. 평소 이렇게 해줬으면 … 더는 말 안 하겠습니다.”

초반부터 몰아치는 보스턴 타선, 정말 왕의 결사항쟁 의지가 선수들에게 전달된 건가.

어쨌든 보스턴은 시리즈 첫 경기에서 장단 16안타를 몰아치며 9대 1 대승을 거뒀다.

이기긴 했지만 조금 허무한 전개, 다니엘 보드킨 감독은 덤덤한 목소리로 인터뷰에 응했다.

“간만에 대승을 거두셨는데 지금 기분이 어떠십니까?”

“으음 … ”

보드킨 감독은 말을 잇지 못했다.

평소 얼마나 못 이겼으면 기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받을까, 전 감독이었던 짐 브라이스는 불명예스럽게 은퇴했지만 그래도 월드시리즈 9회 우승이라는 엄청난 업적을 세웠다.

하필이면 전임감독이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을 명장이라 더욱 비교당하는 입장, 자존심이 걸레가 됐으니 딱히 할 말도 없었다.

“그냥 좋다고 해요. 멋있는 말 생각하지 말고”

이때, 그 근처를 지나가던 다카기가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이겨서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는데 뭘 그렇게 생각하나, 정곡을 찔린 보드킨 감독은 기분 째진다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내일 예정대로 다카기 선수를 내보낼 생각입니까?”

“물론입니다. 제가 말릴 수 있는 입장도 아니니까요.”

다카기는 8년 연속 만테냐 어워드 수상을 확정 지은 입장이다.

기자들과의 관계도 좋고 뭣보다 가장 중요한 성적이 압도적, 앤드류 브루스터가 조금 까불거리긴 했지만 올 시즌 19승 8패, 평균자책점 2.89에 그쳤다.

이것도 훌륭한 성적이지만 1점대 진입을 눈앞에 둔 다카기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 그 외 세부 지표를 따져 봐도 다카기의 수상은 당연했다.

포스트 시즌도 물 건너갔는데 굳이 에이스의 팔을 소모시켜야겠나, 하지만 선수의 의지가 너무 강했다.

“다카기를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지금 팀에 아무도 없습니다. ”

“감독인 당신보다 훨씬 위에 있는 존재라는 겁니까?”

“당연하죠. 그는 보스턴 시민의 지지를 받는 왕이니까요. 감히 제가 어떻게 이견을 제시할 수 있겠습니까.”

그제야 조금 풀어진 분위기, 보드킨 감독은 마음에 담아 둔 말을 하나씩 풀어냈다.

“그런데 가끔은 다카기 선수가 부럽기도 합니다.”

“어떤 점에서 말입니까?”

“저는 프로와 코치를 겪으면서 수많은 스타플레이어와 함께 했습니다. 하지만 다카기처럼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선수는 없었죠.”

수많은 별들이 뜨고 지는 역사가 반복된 메이저리그, 그 중 최고의 선수를 콕 집어낼 수 있을까?

최강논쟁은 언제나 팬들의 관심을 끄는 논쟁, 걸핏하면 논의되는 화제지만 누가 최고인지 결론이 난 적은 없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8년 연속 만테냐 어워드 수상, 월드시리즈 6회 우승, 리그 MVP 2를 달성해 낸 다카기는 그 논쟁을 잠식시킬 존재로 급부상, 메이저리그 역사상 이만한 업적을 달성한 선수가 있나.

메이저리그, 아니 메이저리그 역사를 통틀어 정점에 선 선수, 저 꼭대기에 서면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

햄버거 하나 먹어도 팬들의 관심을 끌고, 말 한마디로 여론을 움직일 수 있는 존재, 신이 실존한다면 이런 느낌 아닐까.

하지만 정점에 설 수 있는 남자는 한 명뿐, 그 누구도 다카기가 될 수는 없다.

정점에 올라 세상을 내려다본다니, 이거야말로 남자의 로망 아니겠나. 그 정도 위치에 오르면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

오를 수 없는 자리지만 궁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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