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296화 (296/361)

296화. 암사자 - (10)

“우리는 예스맨이 아니다!!”

“백인들의 졸개도 아니다!!”

어느덧 8월에 접어든 시즌, 보스턴은 제법 큰 소란에 휩싸였다.

동양인의 권리 확대를 주장하는 시위가 벌어진 것, 시발점은 대학교의 쿼터제였다.

미국 대학교는 대놓고 동양인 학생의 입학을 제한하는 경우가 많다.

동양인의 학업 성취도가 높아서 쿼터제로 제한을 걸지 않으면 재학생이 모두 동양인이 된다는 이유 때문, 특히 의대 쪽은 동양계의 득세가 뚜렷하다.

이것 때문에 불이익을 당했다는 학생의 외침을 시작으로 확대된 동양인 권리 확대 시위, 그런데 이 불똥이 엉뚱하게도 다카기에게 튀었다.

[메이저리그 마운드도 동양인에게 점령됐다.]

[이대로 둔다면 미국은 훗날 동양인에게 점령될 거다.]

미국은 의외로 상식이 없는 사람이 많다.

세계에서 유명한 대학은 거의 다 미국에 몰려있지만 재학생은 거의 다 상류층이다. 상류층의 지식수준은 상당히 높지만 그 외 계층의 지식수준은 한숨이 나올 지경, 그나마 보스턴은 백인 부자들이 집중된 곳이라 상식과 교양을 갖춘 시민들이 많다.

“동양인? 나쁘지 않아.”

보스턴은 동양인에 대한 차별이 그리 심하지 않다.

오히려 백인 상류층과 비슷한 지식과 소득을 올리고 있는 동양인을 좋게 보는 편, 이런 배경 덕분에 다카기의 활약을 나쁘게 보는 시선은 거의 없다.

‘이렇게 고분고분한 종족이 다 있다니’

‘써먹기 좋은 놈들이야.’

하지만 그 이면엔 시키면 다하는 종족이라는 차별의식이 존재한다.

미국은 인종의 용광로라 불리는 나라, 그만큼 다양한 인종이 섞여 살다 보니 인종 간의 갈등으로 매년 홍수를 치르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가장 격렬하게 항의한 민족이 흑인, 흑인들은 교육 수준이나 소득은 낮아도 불이익을 당했다 싶으면 똘똘 뭉쳐 저항해왔다.

덕분에 미국 내에서 흑인은 건드리면 골치 아픈 종족이라는 인식이 있지만, 동양인은 그렇지 않다. 미국 사회의 질서에 잘 녹아들었고 차별을 당해도 조직적으로 저항한 역사가 거의 없다.

이러다 보니 미국 내에서 동양인은 머리 좋고 일 잘하고 써먹기 좋은 인종으로 평가받는 상황, 하지만 점차 세력을 확대해 온 동양인들도 이제는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내가 시키는 대로 다 하는 사람이었나?’

하지만 다카기는 침묵을 지켰다.

내가 구단이 하라면 하는 인간이었나? 지금까지 마운드에 오른 건 모두 내 의지였다.

그리고 연봉 4천만 달러를 받는 입장이니 대우에 걸맞은 책임감을 짊어진 것뿐, 딱히 구단이 시키는 대로 움직인 기억은 없다.

수더랜드 단장이 캡틴이 되라고 했을 때도 내 의지로 거절, 조직의 일원으로 팀에 문제가 될 일도 하지 않았다.

‘난 예스맨이 아니다. 그저 사회에 잘 적응할 뿐이지’

다들 미국에 인종차별이 존재한다고 하는데, 다카기는 그런 건 별로 느끼지 못했다.

어지간한 상류층보다 더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고 사회적 입지도 확실, 그런 날 두고 누가 인종차별을 하겠나. 물론 그런 인간도 있겠지만 그건 그 인간이 무식할 뿐, 인종차별을 미국 사회의 문제로 몰고 갈 이유는 없다.

배운 사람이 차별을 한다면 문제가 있지만, 진짜 못 배운 사람이 차별을 하는 건 불쌍한 일, 시위대가 하고 싶은 말은 이해했지만 귀를 열어둘 이유는 없었다.

[우리 남편 건드리면 참지 않을 거다.]

그런데 이때, 키리코가 또 여론전을 펼쳤다.

가만히 있는 남편을 왜 건드리는 건가.

메이저리그 마운드가 점령당한 게 동양인 때문인가. 백인들이 잘 던지면 마운드가 점령될 일도 없을 거 아닌가.

실력이 있는 자가 대우를 받는 게 건강한 사회, 사실 키리코도 이번 사태와 무관한 입장은 아니다.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넘어왔고, 의사교육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쿼터제라는 가혹한 관문에 치열한 경쟁까지 이겨내고 얻은 성과, 미국 본토인보다 훨씬 어려운 과정을 거쳤다.

정말 어렵게 따낸 의사자격증, 하지만 키리코는 성공한 커리어 우먼보다 가정에 충실한 쪽을 택했다.

“우리 남편은 내 인생을 걸만한 가치가 있어.”

키리코는 남편을 인생의 배우자 그 이상으로 여겼다.

사랑하는 남자? 아니 정확히 말하면 존경하는 사람, 그 남편이 이상한 논란에 휩싸였는데 욱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미국이 사고가 열려 있는 나라고 이 사회가 앞으로도 발전하길 바란다면, 능력 있는 사람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며 반격에 나섰다. 결국 피부 색깔로 사람을 평가하지 말라는 뜻, 이 주장은 많은 지지를 이끌어 냈지만 한편으론 너무 나대는 거 아니냐는 조롱을 받았다.

[남편이 잘난 거지 당신이 잘난 건 아니잖아?]

[남편 잘 잡아 성공한 케이스, 원래 여자는 결혼으로 성공하는 거지]

조롱을 퍼붓는 자들은 키리코가 의대를 졸업했다는 걸 몰랐다.

일부 네티즌이 키리코는 의대 졸업생이라고 알려줬지만, 처음부터 편견을 가진 자들이 그런 말에 귀를 기울일 리 없었다.

그렇다고 쳐도 인터넷에서 주고받는 말,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고 논란이 조금 잠잠해지자 키리코는 일상생활에 집중했다.

“엄마, 아이들 좀 봐주세요.”

“그래, 걱정하지 마라.”

그러던 어느 날, 키리코는 장을 보기 위해 집에서 10km 정도 떨어진 마트로 향했다.

손녀가 태어났다고 한걸음에 미국으로 날아와 준 친정엄마, 간만에 조용한 분위기에서 생필품을 쓸어 담았다.

“이게 누구야? 순종적인 동양인 여자 아냐?”

그런데 이때, 한눈에 봐도 못 배운 남자가 시비를 걸어왔다.

같은 보스턴 주민이라도 교육수준이나 소득은 차이가 있는 편, 키리코는 순간 욱했지만 일단 조용히 넘어갔다.

“일본은 왜 미국에 적대적이지? 당신처럼 순종적이면 좋을 텐데 말이야. 당신 고향으로 가서 잘 말해 두라고, 세계의 주인인 미국이라고 말이야.”

남자는 일본과 중국을 구별하지 못했다.

일본과 미국은 예전부터 동맹관계, 이런 멍청이를 상대로 무슨 대화를 할까, 키리코는 철저히 무시하고 계산대 앞에 섰다.

‘응?’

그런데 이때 엉덩이에 뭔가 불쾌한 감각을 느꼈다.

뒤를 돌아보니 그 자식, 내가 조용히 있다고 만만하게 본 건가. 실실 웃으며 저쪽으로 멀어지는 남자, 키리코는 카트 위에 담아뒀던 식용유 병으로 남자의 머리통을 냅다 후려갈겼다.

와장창 ~ !!

“꺄아악 ~ !!”

순식간에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 마트, 깜짝 놀란 여자 손님은 비명을 내질렀고, 그 사이 키리코는 쓰러진 남자를 마구 구타했다.

“누가 만지래?!!! 누가 만지라고 했어?!!!”

“부, 부인!! 제발 진정하세요!!”

“으아악 ~ !!!! 악!!”

화가 머리끝까지 난 키리코는 남자의 목덜미를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마트 직원들이 달려들고 나서야 겨우 종료된 상황, 볼티모어에 있던 다카기는 아내가 경찰서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경악했다.

“아니,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뭐 … 부인께서 잘못하신 건 아닌데 … 피의자의 부상이 생각보다 큽니다. 뇌진탕 증세가 있고 … 목에도 출혈이 심하다고 합니다.]

키리코는 체격은 작아도 남편의 영향을 받은 덕분에 오랫동안 운동으로 몸을 단련했다.

그런 여자가 전력으로 휘두른 유리병에 머리를 강타당하고 목까지 물어 뜯겼으니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 그런데 남자는 치료비를 지불할 능력이 없었다.

미국은 며칠만 입원해도 수백만 원이 깨지는 나라, 내가 아내를 희롱한 범죄자에게 호의를 베풀어야 하나? 일단 살려는 놔야 사과를 받든 하겠지. 다카기는 화를 억누르고 피의자의 치료비를 지불했다.

“야, 그냥 죽게 내버려두지 그랬어?”

“그런 자식은 죽는 게 사회를 위하는 길이라고”

동료들은 왜 치료비를 지불한 거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피의자라도 상태가 심각해지면 아내의 입장이 곤란해지지 않겠나. 못 들은 척 해버렸다.

“잠시 자리 좀 비우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구단의 양해를 구한 뒤 보스턴으로 직행, 경찰서에서 아내와 조우했다.

“어디 다친 데 없어?”

“히잉 ~ ”

남편과 마주한 키리코는 울음을 터뜨렸다.

화가 나서 일단 치고 봤는데, 이성을 차리고 보니 피범벅이 된 남자가 눈에 보였다. 죽어도 싼 놈이긴 한데 사람을 이렇게 두들겨 팬 건 처음이라 본인도 많이 놀랐다.

남편을 보고 나서야 겨우 안심이 되면서 터져 나온 눈물, 다카기는 당신은 잘못한 거 없다며 위로했다.

“괜찮아 그런 인간은 맞아도 싸, 당신은 잘못한 거 없어.”

아내를 안심시킨 다카기는 장모님과 함께 경찰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마트 내 CCTV를 확인해 봤는데 문제의 남자는 오랫동안 아내의 뒤를 따라다니며 시비를 걸었다. 거기다 계산대에서 발각된 성추행, 피의자가 죽지만 않는다면 법원으로 갈 일은 아니라고 못을 박았다.

“그럼 아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예, 그렇게 하시죠.”

다카기는 아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솔직히 피의자가 죽든 말든 그건 이 쪽이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치료비를 지불한 것도 아내의 입장을 위한 행동,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살려두지 않았을 거라며 아내를 위로했다.

“나 너무 속상해”

“또 뭐가?”

“다른 남자가 내 몸을 만졌다는 게 너무 끔찍해”

차 안에서도 분노 섞인 울음은 멈추지 않았다.

내 몸을 터치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남편의 권리, 다른 남자의 손이 닿은 게 그렇게도 속상할까.

장모님이 뒤에 있지만 다카기는 거침없는 애정을 표했다.

“자, 내가 터치했으니까 이제 그건 무효, 다 잊어버려”

“그래, 그렇게 두들겨 패놓고 아직도 화가 안 풀리니?”

“엄마!!!! 엄마는 도대체 누구 편이에요?!!!!”

키리코는 쓸데없는 말을 하는 친정엄마에게 불을 뿜었다.

얘가 왜 이렇게 성질을 내는 건지, 고등학교 때만 해도 말이 없고 얌전한 아이였는데, 사자랑 같이 산다고 사자처럼 변해버린 건가. 키리코의 어머니는 무서워서 말이나 하겠냐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다카기, 아내 성추행한 피의자 고소]

며칠 후, 다카기는 아내를 성추행한 범인을 심판대 위에 세웠다.

살려놨으니 이제는 법의 심판을 받을 차례, 피의자는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용서를 구했지만 다카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미국에서 성범죄는 사형 다음으로 형량이 높은 범죄, 단호한 대처에 팬들은 다양한 반응을 쏟아냈다.

[내가 저 입장이었다면 치료비 안 줬다.]

[품위가 있네. 그래, 일단 살려는 놓고 법의 심판을 받게 해야지.]

[역시 사자의 아내는 사자였다]

이번 사건으로 다카기는 물론 키리코도 여론의 관심을 받았다.

남편의 위세만 믿고 까부는 여자로 이해하는 팬들도 있었는데 성추행을 한 남자를 그런 식으로 응징할 줄이야.

몇몇 팬들은 다시 봤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동양인 여자는 순종적이고 자기감정도 제대로 표현 못 할 줄 알았는데, 이 사건으로 미국 내에서 동양인 여자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달라졌다.

‘내가 좀 심했나?’

키리코는 뒤늦게 이미지 개선에 나섰다.

기부도 하고, 봉사활동에 뛰어들었지만 다카기는 이제 와서 그래봤자 늦었다며 아내를 놀렸다.

“사자가 사자답게 굴어야지 이제 와서 조신한 척해 봤자 소용없어.”

“어휴 ~ 자기 진짜 못 됐어!!”

“어? 나도 때리려고? 도망가야지”

다카기는 아내의 솜방망이 펀치를 온몸으로 맞아줬다.

역시 남편이라고 세게 못 때리는 건가, 남들에겐 사자처럼 보이겠지만 다카기 눈엔 애교 많은 고양이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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